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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송씨의 참모습(학문정신) 문집으로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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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 2021-11-03

은진송씨는 조선시대 하나의 가문에서 우리나라 어느 문중보다도 문집이 많기로 유명하다.
다음 문집목록에서 보듯이 은진송씨 문중에서 발간된 문집이 400여종이 넘는다.
이것은 지금까지 밝혀진 문집의 수일뿐 아직까지 집계되지 않은 분의 문집을 합친다면 그 수는 더 많을 것이다.

조선왕조의 시대정신은 주자성리학이다. 이 주자성리학의 시대정신을 잘 이끌고 간 유반(儒班)의 가문이 우리 은진송씨이다.
주자성리학은 이론과 실천이 다를 수가 없다.
깊은 학문을 가지고서는 절대로 나쁜 짓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을 할 수가 없다.
바꾸어 말하면 학문에 몰두하다보니 권세나 물욕에 침잠할 수 없고 마음을 비우다보니 정도를 걷지 않을 수 없다.

이 정신은 은진송씨가 고려말을 시발로 하여 조선시대에서 현재까지 600여년을 면면히 이어온 씨족으로서 집단공 송명의의 은둔불사(隱遁不仕), 류씨부인의 적덕여음(積德餘蔭), 쌍청당 송유의 청덕절의(淸德節義)의 정신을 계승시켜 예의염치(禮義廉恥)와 청렴결백(淸廉潔白)과 비의불종(非義不從)의 숭고정신(崇高精神)의 발로라 볼 수 있다.
특히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 양 문정선생(兩 文正先生)의 도학 문장과 예학이 학계와 정계를 주도하면서 많은 학자들이 양 선정(兩 先正)문하에서 나왔고, 후손들이 양선정의 유풍과 궤범을 계승받아 학문에 탁마한 결과, 그 정신이 후손들이 저술한 문헌에 잘 표현되어 있다.
은진송씨 문중의 문헌목록을 보면 500여 년 동안 발간한 문집수가 하나의 가문에서 『송자대전』, 『동춘당집』, 『제월당집』, 『덕은가승』 등, 400여종에 이른다는 사실을 볼 때, 아직 어느 문중의 단일 씨족에서 은진송씨 같이 많은 저술을 남긴 집안이 있다는 사실을 듣지 못하고 있다.

지금처럼 하루에도 수백여 종이 쏟아져 나올 수 있는 컴퓨터 인쇄술이 발달한 시대도 아니며 아무것이나 끼적거려 자비 출판하던 시대도 아닌 그런 사회에서 이렇게 많은 『문집』을 남겼다는 것은, 우리 집안이 자손대대로 얼마나 학문에 몰두했는가를 알 수 있다.

기록정신을 알 수 있는 자료로, 은진송씨 동춘당 문중의 가승인 『德恩家乘(덕은가승)』이 있다. 그 가승(家乘)에 서구 원정동 바리고개에 있는 동춘선생 산소에 묘비가 두 개가 있는데, 비석이 두개인 사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꼼꼼히 기록해 놓고 있다.
동춘선생 산소에 도착하면 전면대자만 있는 비와 4면이 음기만 있는 비 둘이 상석의 좌우에 서 있다.
그리고 제절 멀찌 감치에 문인석 한 쌍이 있다. 상석 앞의 향로석은 조각이 아름다워 도굴꾼들이 훔쳐간 적이 있다. 이 산소는 지방문화재 자료 제15호로 1989년에 지정되었다.
동춘은 살았을 때 유언하기를 “내 무덤에 신도비를 세우지 말라. 다만 조그만 돌에다 누구의 묘라고만 표시하라”고 하였다. 그 유언에 따라 동춘 산소에는 신도비가 없다.

그리고 아예 동춘의 신도비문도 있지 않다. 동춘의 묘도문자는 우암이 지은 묘지(墓誌)만 있는데 선생 산소를 원정리로 이장한 다음 그 외손자 민진후가 묘지를 요약하여 비문을 만들고 동춘 증손인 요좌가 글씨를 써서 숙종 37년(1711)에 세운 것이 오른쪽에 있는 비이다.
이 비의 표제는 “『유명조선국 정헌대부 의정부좌참찬 겸 성균관 좨주 세자 찬선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시 문정공 동춘당 송선생 묘표음기(有明朝鮮國正憲大夫議政府左參贊兼成均館祭酒世子贊善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諡文正公同春堂宋先生墓表陰記)』”라 하였고 왼쪽에 있는 大字碑에는 “『동춘당 송선생 준길지묘, 증 정경부인 진주정씨부좌(同春堂宋先生浚吉之墓, 贈貞敬夫人晉州鄭氏祔左)』”라고 썼는데 역시 증손 요좌의 글씨이다.

다시 말하면 묘표는 처음부터 동춘당의 유언에 따라서 세워졌던 것이고, 또 다른 비의 묘표 음기는 후에 숙종 명에 의한 외손 민진후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덕은 가승』 「권지 4」에는 “수표석고문”이라는 고유문이 들어있는데 숙종 37년(1711) 묘비를 세울 때 넷째 손자 병익이 고유한 글이 있다.
…… 상략 ……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이 산에 옮겨 모신지 12년이 되옵니다. 묘전에 작은 표석을 아직까지 경영하여 세우지 못하여 마음으로 송구하옵고 한이 되옵니다.
전에 한산에 있을 때에 다행히 남포에서 새로 생산된 돌을 얻었는데 품질이 아름답고 견고하나 그 몸이 작은 것이 흠이 되어 음기 글자가 많아 다 새기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을 버리고 다른 것을 쓰자니 또한 아주 아깝습니다. 일찍이 강화에서 나는 것을 구하였으니 이미 부군께서 평일에 애호하신 바입니다.

또 생각하오니 다만 전면대자만 새기는 것도 이미 옛 법규가 있으므로 양쪽 돌을 좌우에 새기는 것도 또한 사산(沙山)에서 이미 시행한 것이므로 다만 대자만 남포 석에 새기고 감히 유훈(遺訓)에 의하여 관작을 쓰지 않았습니다.
금일 개토하고 먼저 양쪽 좌대석을 좌우에 배열하고 명일 한식에 장차 작은 표석을 왼편 계하에 세우고 외손 병조판서 민진후가 찬술하고 양편 돌에 대소 자(大小字)는 제2남 의성현령 요좌가 다 썼습니다.
오직 그 역사가 쉽게 이루어지지 못하므로 새김에 따라 세움을 면치 못하겠나이다. 감히 이에 사유를 갖추어 고하나이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은령(恩靈)께서 음으로 보호하여 주시기 원하옵고 삼가 고하옵니다.
…… 하략 …… (『德恩家乘 2』竪表石告文(표석세울 때 고하는 글) 辛卯 孫 炳翼 p292)

이 고유한 글을 통하여 동춘 선생 산소에 대자비는 남포오석으로 넷째손자 병익이 한산군수 때 구입했다는 사실 및 관작을 쓰지 않은 사유를, 오른쪽 흰색을 띤 음기 비는 동춘이 평소 좋아하던 강화도산이라고 밝히면서, 비석이 두개인 사유와 어떻게 비석이 세워졌는지가 잘 정리되어 있다.
이와 같이 동춘 가문에서는 어떠한 문헌도 소홀이 다루는 일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의 고유문만 하더라도 당초 고유문을 두 장 작성하여 하나는 보관하고 하나는 행사에 쓰는 식으로 문헌을 아주 소중하게 취급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보존된 문헌들을 동춘 7대손 나주목사 정희가 일목요연하게 『덕은가승(德恩家乘)』이란 이름으로 18권을 만들어 놓았다.
『덕은가승』은 시조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춘의 직계 선조와 이 책이 만들어질 때까지의 후손들을 범위로 하고 있다. 내용은 일화, 축문, 제문, 묘지, 묘표, 행장, 고유문 등 모든 문헌이 포함되어있다.

이와 같이 은진송씨 문중은 과거에서 현재까지 모든 사항을 기록하고 있는 좋은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以堂 成彬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