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조비상 소개

류조비 묘역

대전광역시 동구 마산동

열부 안인(安人) 류씨(우리 은진송씨는 이 류씨 할머니를 류조비라고 칭한다)는 고려 때 상서(尙書)(육부의 으뜸벼슬)로 고흥백(高興伯)에 봉해진 시호 호안공(胡安公) 류준(柳濬)의 따님이시다. 남편 되시는 분은 집단공의 아드님인 송극기(宋克己)로 선비의 학업을 익히고 넓혀 젊은 나이에 성균관에 들어갔다. 장차 크게 될 인물로 기대되었으나 불행히도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때 류조비의 연세는 겨우 22세였으며, 네 살 된 어린 아이(뒤에 쌍청당)가 있었다. 복을 벗게 되자 부모가 젊은 나이에 홀로된 것을 불쌍하게 여겨 재혼을 시키려 하였다. 당시의 풍속은 근친혼과 여자의 재혼이 상식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과부의 재혼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류조비는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정절을 지켜 재가를 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부모는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하는 수 없이 개성에서 회덕에 있는 시가(媤家)로 내려가고자 몸종과 약속을 하였으나 몸종은 류조비 부모의 명이 아니라는 이유로 난색을 표했다. 이에 류조비는 밤에 혼자서 어린 아기를 업고 삼주 동안의 밤낮을 걸어서 시댁 땅인 회덕에 도착하였다.시아버지 집단공이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않고 말하기를 네 어찌 이토록 고생을 했느냐 여자로서 부모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것은 삼종지도를 모르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이에 류조비는 울면서 대답하기를 이른바 저의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것은 등에 업힌 아이에게 있습니다. 하니 시부모님이 감동하여 마침내 받아주었다.

이로써 시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더욱 두터워져 변함이 없었으며, 등에 업고 온 아기는 자라서 쌍청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 은진송씨가 대전에 정착하여 크게 번성하게 된 여유이며, 류조비가 마련한 집터에서 6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종손이 살고 있다. 이에 우리 류조비는 광산 김씨가의 허씨 부인과 남원 양씨가의 이씨 부인과 함께 고려 말의 세 열부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이에 우리 대종회에서는 이렇게 훌륭한 류조비의 뜻을 오래도록 후세에 기리고자 1994년부터 류조비상을 제정하고 전국 경향 각지의 은진송씨 가(家)의 여자(딸과 며느리) 중에서 효열부(孝烈婦)와 자식을 훌륭하게 키워낸 장한 어머니 등 은진송씨 가문을 빛낸 분을 추천받아 대종회 포상심사위원회의 엄정한 심사를 거쳐 선발하고 매년 음력 3월 10일 류조비 세일사날에 시상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