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송촌리에 대하여

송촌이 상하(上下)로 불려지고 있다. 하촌(下村)은 옛 백달촌(白達村)인데, 쌍청당이 있는 곳이고, 상촌(上村)은 옛 만취(晩翠)란 마을인데 동춘당이 있는 곳이다.

전해오기를 정부군(遙年)께서 차남 선무공(宣務公 : 汝楫)을 위해 상촌을 점득하여 집을 짓고, 만년에 그 집에 많이 있었고 선무공 자손도 또한 대대로 지켜왔다고 한다.(『덕은가승』 상 p45)

위 송촌의 옛 이름은 만취(晩翠)이다. 목사부군이 만년에 별장을 두고 선무부군(宣務府君 : 汝楫)에게 전하여 승사부군(承仕府君 : 世英)에 이르러서 집을 서울 회현방(會賢坊)에 두고 분가할 때 서울 집은 장자 별좌공(別坐公 : 應祥)에게 전하고 송촌집을 다음 자제(林川公 應瑞)에게 전하여 준 것으로 인하여 우리집 선업(先業)이 되었다.[분재문서가 있다] 금상(今上 : 純祖) 을미년(헌종 1년 : 1835)에 종가 안채를 다시 옛터로 옮겨짓고, 옛 기둥에 「丙申 七月七日 上樑 : 병신 7월7일 상량」과 또 『경오분금(庚午分衿)』이라고 썼다. 거슬러 올라가서 상고해 보면 목사부군 때인 것 같다. [후 병신은 바로 임천부군(林川府君 : 應瑞)이 왜란을 만나 강릉으로 들어갈 때이다. 또 48년 계미에 문정부군(文正府君 : 浚吉)이 안채를 중건하였다. 이 집이 옛집으로 내려온 것은 분명하다.] (『덕은가승』 상 p55)

송촌이란 마을은 전에 만취동(晩翠洞)이었다. 조선 초 성종(成宗)때 목사공께서 작은 자제 선무랑공을 이 마을에 분가시켜 살게 한 후부터 그 후손들이 번창하여 송촌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송촌이란 이름은 지금의 중리동까지 포함되었는데 쌍청당이 있는 마을은 ‘하송촌’, 동춘당이 있는 마을은 ‘상송촌’이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지금과 같은 지명이 생겼다.(『덕은가승』 상 p150)

* 송촌은 상· 하송촌리로 되어있다. 상송촌리는 옛적에 만취촌이라 불리었고, 하송촌는 백달촌이다. 상· 하로 갈린 것은 목사공(요년)이후부터이다.

목사공이 쌍청당이 있는 하송촌리(중리동)는 큰아들 여림에게 분재해주고, 동춘당이 있는 상송촌리(송촌동)는 작은 아들 여집(동춘당의 고조고)에게 분재해주었다.

오늘날 송촌동이 동춘당의 자손이 살게 된 것은 여집의 큰 아들 세영이 큰집은 장자(응상 : 쌍계당파)에게 서울 회현방에 있는 집을 분재해주고, 작은아들(응서 : 동춘당의 조고)에게는 송촌에 있는 집을 분재한 데서 유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