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및 본관유래

은진송씨의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은진송씨는 여산송씨의 시조인 유익의 아우인 천익의 후손임을 알 수 있다. 흔히들“여산송씨는 큰집이요, 은진송씨는 여산송씨에서 갈라져 나온 작은 집으로 같은 할아버지의 자손”이라고들 말하는데 이유는 앞의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사실 여산송씨는 고려 때 진사벼슬을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여산군(礪山君)에 봉해진 유익(惟翊)을 시조로 하여, 2세는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른 숙문(淑文)이고, 3세는 삼재(三宰)에 오른 충렬공(忠烈公) 희식(希植)이며, 4세는 고려 원종 때 문하시중의 벼슬로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오른 정렬공(貞烈公) 송례(松禮)이며, 5세는 낭산부원군(郎山府院君)에 봉해진 문숙공(文肅公) 염(琰)이다. 여산 송씨들은 이분들의 혈통을 면면히 이어받아 여산(礪山)을 본관으로 하여, 가문을 현창하였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은진송씨는 불행히도 천익 이후에 판원사 대원(判院事 大原)까지 세계(世系)가 전해지지 않아 소목계통(昭穆系統)을 살필 수 없게 되었다. 판원사 대원을 은진송씨의 시조로 삼는데 근거로 삼았던 사정을 살필 수 있는 “『德恩家乘(덕은가승)』 송정희 편 송창준역”의 기록이 있다.

‘동춘당 준길이 말하기를 “우리집 문헌에서 가히 증거 할 수 없는 것으로 선대의 비지(碑誌)에는 이미 다 판사(判事) 大原으로 시조로 삼았는데, 나의 뜻은 『여산송씨족보』가 헛말은 아니나 천익(天翊)으로부터 판사에 이르기까지 또 몇 대인지 자상하게 알지 못하니 지금 문견(聞見)에 미치는 바와, 문적에 실려 있는 판사를 놓아두고 멀리 대수마저 알지 못하는 천익을 시조로 하는 것일까요?”라고 우암 시열과 상의하는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우암께서는 이에 근거하여 『恩津宋氏族譜 二券譜』에 분명히 밝힌바, 고려 때 판원사를 지내고 은진군에 봉해진 대원(大原)을 시조로 하고 본관(本貫)을 은진(恩津)으로 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에 근거하여 우리는 시조를 천익으로 소급할 수 없는 이유와 판원사 대원 선조를 1세로 정해진 내력, 그분이 은진군에 봉해진 은진 땅을 본관(本貫)으로 정해진 사연을 알 수 있다.

또한 판원사 부군이 은진군에 봉해진 사연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은진고을이 큰 댁이 살고 있는 여산 고을과 불과 20여리 밖에 되지 않는 지척의 거리에 위치해 있기에 나라로부터 은진군으로 봉해진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뿐이다.

우암께서는 『恩津宋氏族譜 二券譜』에 시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시조의 휘는 대원인데 벼슬은 판원사를 지냈다. 혹자는 처음 이름은 견(堅)이고, 자(子)는 천지(川至)인데, 은진군에 봉해졌다고 전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