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청당과 대종가

쌍청당과 대종가

1) 쌍청당(雙淸堂)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 2호
대전광역시 대덕구 쌍청당로 17(중리동 71)
쌍청당은 조선 초에 부사정 벼슬을 지낸 송유(1389년 공양왕1~1446)가 지은 별당이다. 태종이 즉위하면서 새어머니 신덕왕후 강씨를 모시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백달촌으로 내려와 1432(세종 14)년에 지은 별당 건물이다. 당의 추녀 밑에 있는 현판은 송담 송남수의 글씨이며, 당 안에 걸려있는 편액은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글씨이다.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과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의 기문(記文)이 있다.

쌍청(雙淸)은 비가 그치고 해가 나온 뒤에 부는 상쾌하고 시원한 맑은 바람 ‘광풍(光風)’과 어두움을 환하게 비추는 비갠 뒤의 밝은 달 ‘제월(霽月)의 두 기상을 마음속에 새기고자 한 것이다. 송유(宋愉)는 이 쌍청당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이곳의 뜰에 소나무와 대나무를 푸르게 가꾸었음을 보면 두 나무의 지조를 닮고자 함이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로 앞면 3칸 중 오른쪽 2칸은 대청마루로, 왼쪽 1칸은 온돌방이다. 온돌방 뒷면에 반 칸의 달림채를 대어 윗부분은 반침(다락)으로, 아래는 불을 지피는 함실(아궁이)로 이용하고 있다. 대청과 온돌방 사이에는 들어열개 문이 달려있다. 이 문의 한쪽을 열어 밑을 들어 매달면 큰 행사가 있을 때 마루와 방을 터서 넓게 쓸 수가 있다. 대청마루 바닥은 땅에서 들어 올려 바람이 통하게 만들었으며,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쌍청당은 다른 주택 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단청이 되어있어 특이하다. 조선초기에는 단청이 아주 유행하여 나중에는 일반 민가에서도 돈만 있으면 너도 나도 단청 칠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단청 원료는 중국에서 수입해 쓰는 형편이었으므로 대단히 비싼 고급 장식재였다. 그래서 세종 때 민가의 단청을 금하였으며, 어기면 곤장 80대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지금의 단청은 다시 칠한 것이지만 민가에 이같이 단청이 되어있는 것은 대단히 희귀한 것이다.

또한 쌍청당은 주변에 남아있는 별당 중에서 가장 먼저 지은 것으로 그 후에 지어진 별당의 모범적인 형식이라는 점에서 건축사적 의미가 있다. 지금은 주변에 현대식 건물과 아파트들이 많이 들어서 아쉽게도 예전의 운치는 많이 사라졌다.

현재의 쌍청당은 7차례에 걸쳐 중수되어 오늘에 까지 내려와 우리 송씨 일문의 마음의 고향역할을 한다. 중수기록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① 갑신년(1524 : 중종 19) 양근공 여림이 개수 중수기문은 눌재 박상이 짓다.
② 계해년(1563 : 명종 18) 5대손 송담공 남수가 중수하다.
③ 병진년(1616 : 광해군 8) 정유재란(1597)때 전소한 당을 송담공 남수 중수하다.
④ 무자년(1708 : 숙종 34) 9대손 옥오재 상기 중수하다.
⑤ 무자년(1888 : 고종 25) 16대손 입재 근수(좌의정) 중수하다.
⑥ 정축년(1937 : 일제강점기) 16대손 미산공 종국(시강원 시종관) 중수하다.
⑦ 경술년(1970 : 대한민국) 18대손 원빈 씨가 중수해서 오늘날까지 내려온다.

2) 쌍청당 유묵(雙淸堂 遺墨)

가. 與 蘭溪 朴公 堧
여 난계 박공 연
□便回伏承下水覆不翅如親 伏奉警誨 稍慰阻慕之懷也 卽辰春姸台履靜養增相
□편회복승하수복불시여친 복봉경회 초위조모지회야 즉진춘연태리정양증상
令人不耐戀情區區 愉方在懷川 □日冀返駕黃溪 而未的其期心鬱 方建一舍 而最是
영인불내연정구구 유방재회천 □일기반가황계 이미적기기심울 방건일사 이최시
上樑一文 猥望揮下 以生千古之光 不識吾台監 其果牽愉忘辱否 如幸得下諾則
상량일문 외망휘하 이생천고지광 불식오태감 기과견유망욕부 여행득하낙즉
幸莫大矣 更忘憑遄便回敎□ 姑不宣 伏惟□鑑□ 月念八日 記下宋愉再拜
행막대의 경망빙천편회교□ 고불선 복유□감□ 월념팔일 기하송유재배

나. 난계 박연에게 보낸 편지
□편에 보내주신 글월을 엎드려 받고나니 친한 것 같을 뿐만 아닙니다.
일깨워주시고 가르쳐 주심을 받고 보니 조금은 막혔던 사모하는 회포가 위로가 됩니다.
때는 봄이 화사하온데 태이(台履 : 서간문에서 정승의 안부를 물을 때 이르던 말)가 고요히 수양하심이 더 도우시는지 사람으로 하여금 연정의 구구함을 견디지 못하겠나이다.
유(愉)는 지금 막 회천(懷川 : 회덕)에 있어 □날마다 황계(黃溪)로 돌아오시기를 바라오나 그 기약이 확실하지 못하여 아주 답답하고 답답합니다.
막 집을 하나 짓고 있는데 상량문이 있어야 하겠기로 외람되이 바라건대 지어주시어 천고에 빛이 나도록 해 주십시오.
아지 못하겠으나 태감께서는 유(愉)가 욕되게 함을 잊으시고 들어주시겠습니까?
혹 허락하여 주신다면 다행스러움이 이보다 더 함이 없을 것입니다.
다시 곧 회교(回敎)해 주시리라 믿고 □ 이만 줄입니다.
□월 28일 기하(記下 : 자기와 계급이나 신분의 차이가 있는 사람에 대하여 겸사하는 자칭 대명사) 송유(宋愉)는 재배합니다.

다. 난계는 누구이며 왜 편지를 보냈나
난계 박연(蘭溪 朴堧)선생은 우리나라 3대 악성(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 조선의 박연)의 한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박연(우왕 4<1378> ~ 세조 4<1458>, 쌍청당보다 11세 연상)은 문과에 급제한 후, 교리 · 지평 · 문학을 역임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을 지냈다. 쌍청당 부군께서는 44세 되던 세종 14(1432)년 백달촌(白達村 : 지금의 중리동)에 정사(精舍)를 지으면서 난계 박연 선생에게 상량문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위에 소개한 편지가 바로 그 것이다. 난계는 이미 이 정사를 쌍청당이라 이름 짓고 스스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찬미하였다.

쌍청당에 부쳐 지은 시
쌍청 작은 누각이 긴 길에 구부려 있으니,
아침저녁 한가로이 명리에 헤매는 것을 볼러라.
개인 달빛 뜰에 가득하니 빌린 것은 아니지만
맑은 바람 난간에 떨치니 어찌 불러 맞이하려나
냉기가 술잔에 스며드니 금물결이 가득차고
서늘함이 구름길을 쓸어내니 금 잎이 가볍구나.
이런 경지에 이런 저런 마음 또한 같은데,
다시 어디에서 내 몸의 사역이 되겠는가.

라. 이 편지를 입수하게 된 경위
이 간찰은 쌍청당 부군께서 쌍청당을 지으면서 상량문을 지어달라고 난계에게 부탁하는 글이다. 안타깝게도 편지 끈이 떨어져 나가 년(年)과 달(月)을 알 수 없으나 실제 정황으로 보아 쌍청당이 지어진 해, 즉 세종 14(1452)년으로 심증이 간다.

그 후 부군께서 쌍청당을 지은 지 293년이 지난 경종 4(1724)년에 후손 하조(夏祚)가 난계 후손을 만났다. 여러 이야기 끝에 쌍청당 부군의 친필이 자기네 집에 있다는 말을 듣고, 돈을 주고 사왔다.

하조(夏祚)공은 삼가공(桂壽)의 손자인 평창공(平昌公 : 國龜)의 손자인데 후손이 없다. 하조공이 이 간찰을 되찾아오자 진본(眞本)은 필첩으로 만들어 종가에서 보존토록 하고, 또 한 본을 모사하여 여러 사람이 보도록 하였다.

지금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던 진본은 없어졌고, 위에 소개하는 것은 모사본이다. (『은진송씨종보 제6호』, 1994. 12.15), 『은진송씨종보 제20호』, 1996. 2.15 참고)

3) 은진송씨대종가(恩津宋氏大宗家)

쌍청당 밑에 대종가가 있다. 대종가는 류조비께서 터를 마련하신 후, 지금까지 600여 년 동안 종손(宗孫)이 살고 있는 은진송씨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의 건물은 2001년 9월 26일 준공한 것으로, 신축과정은 다음과 같다. 1999년 4월 1일 종손보호재산관리위원회 결의에 의하여 개축키로 확정한 후 위원들이 전국 여러곳 우수한옥을 면밀히 답사한 후 건축설계를 하였다. 1999년 7월 1일 착공하여 2001년 6월 30일 완공하고 2001년 9월 26일 송인규 대종중공사원, 오희중 대덕구청장 및 200여명의 종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1990년대의 은진송씨 대종가 전경

현재의 대종가 회은당(안채)

대종가 원일당(사랑채)

원일당 현판

대종가는 쌍청당 부군께서 42세 되던 1430(세종 12)년 사당과 정침(正寢 : 본채)을 세우고, 44세 되던 1432(세종 14)년 별당인 쌍청당을 짓고, 지금의 중리동(백달촌)에 어머니 열부 고흥류씨를 모시고 사시던 건물로써, 그 역사는 600년 가까이 된다. 대종가는 정유재란(1598)때 소실된 것을 송담 남수께서 중건한 이래, 수차례 걸쳐 개·보수 하였다.

이후 개·보수 기록은 찾지 못하였으나 1912년의 원일당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바로 한 두 해 전인 1910년경에 불에 타서 1912년경에 다시 종가가 낙성되지 않았나 추정한다.

이후 1985년 다시 중창했으나, 퇴락됨에 따라 8억 9천 여 만원의 예산을 들여 새로운 모습으로 지금의 대종가 건물이 준공된 것이다.

이 곳 대종가는 대지 760평 위에 안채 회은당(懷恩堂) 43.75평, 바깥채 원일당 33.8평, 별채 28.54평, 창고 8.84평, 육각정인 봉무정(鳳舞亭) 3평, 대문인 수재문(修齋門) 6평 등 총 123.93평의 조선 전통양식 목조와즙 한옥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 회은당(懷恩堂)은 조상의 음덕을 품고 있다는 뜻이 담겨져 있는 당호(堂號)이며, 원일당(源一堂)은 은진송씨 여러 자손들이 한 결 같이 종가를 근원(根源)으로 하여 영원히 번창해야한다는 뜻으로 송달용 씨가 1912년에 지은 당호이다.

종가 후편에는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좌측에는 1432년에 쌍청당께서 명사들과 도학을 강론하던 『쌍청당(雙淸堂 : 지방문화재 2호)』이 있으며, 동편 500m 소공원에 유형문화재 제25호인 『고흥유씨정려(高興柳氏旌閭)』가 있다.

2001년 중창하기 이전의 대종가 이전의 건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1985년 중창한 대종가 건물은 ㄱ자형이었다.

중앙을 대청으로 하고 서쪽은 부엌과 방으로 하였으며, 동쪽에 또 방 하나가 있었고, 앞과 동쪽은 마루를 깔았었다.

쌍청당께서 1401(태종 1)년 이곳 회덕에 정착하여 1430(세종 12)년 정침(正寢)을 지은 후, 600여 년 동안 몇 번이나 중창하였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앞에 류씨할머니께서 마련했다는 논 7마지기를 비롯하여 산 임야 밭 터 등 상당량의 부동산이 전해왔었는데, 1990년 공영개발계획에 따라 600여년 이상 지켜온 논 7마지기는 물론, 앞에 있었던 전답(田畓), 뒤의 임야(林野)가 수용되어 지금은 종가(宗家)앞이 회색의 도심으로 바뀌어 옛 정취가 사라져 아쉬움이 남는다.

대종가 오른쪽 쌍청당 사이에 가묘(家廟 : 사당)가 있고, 또 원일당(源一堂)이 정침 앞마당을 가로질러 우뚝 솟아있어 사랑채 구실을 한다. 당명(堂名)은 송준영이 썼다.

원일당의 역사는 그다지 깊지 않으나 의미는 상당히 깊다.

우리 은진송씨의 뿌리는 하나다. 씨족의 근원은 하나란 뜻이다.

원일당 기문(記文)에 의하면 “지난 임자(壬子 : 1912)년에 17세 사손(嗣孫) 석구 치홍 씨가 또 중건하니 안팎 여러 자손들이 다 돈을 내어 기꺼이 따랐다. 前後(壬子<1432>년과 1912<壬子>)년이 마침 우연히 맞으니 또한 하나의 기이한 일이다. 얼마 후에 치홍이가 중수운(重修韻)의 시를 받아 낙성하였다. 정산(靖山)일가 호곤(鎬坤 : 호는 恒齋로 충순위공 13대손, 1919년 족형 貞窩 송호기와 함께 자주독립청원서<파리장서>에 서명 날인한 애국지사로, 2005년 3월 1일 건국포장 추서되었다. 문집 『정산집』이 있다.)씨가 그 당의 이름을 원일(源一)이라 하고, 나 달용(達用 : 감역공 8대손)에게 기문에다 원일의 뜻을 지으라고 부탁하였다. 사양하여도 되지 않아 공경히 절하고 회답하기를 공은 일찍이 저 물(水)을 보지 않았는가? 열 가닥 만 갈래가 한 근원이다. 유독 물만이 그러한가? 천도(天道)의 근원도 하나이며 인물의 근원도 하나인 것이다. 무릇 사람의 씨족도 비록 종파(宗派)와 지파(支派)의 구분과 멀고 가까운 것 같지 않음은 있을지라도 동시 근원은 하나이고 갈래는 만이나 된다. 그렇다면 원일(源一)의 뜻이 어찌 알기가 어렵다고 하겠는가? 다만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실행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근본은 삼친(三親 : 부자·부모·형제, 혹은 부계·모계·처계)에서 나왔으나 물질에 인색하여 일가 간에 서로 돕지 않고, 일가 간에 서로 화목하지 않고 다투므로 눈을 흘기어 골육(骨肉 : 골육지친)보기를 원수같이 하는 자 있으니, 다 이 뜻(源一)의 소치를 체험하지 않은 것이다.(『恩津宋氏先蹟史』, 「원일당기」, 226쪽)

즉 유조비 쌍청당의 후손된 모든 사람들은 지금은 촌수가 멀어졌고, 사는 곳이 다르긴 하지만 근원이 하나임을 깨달아 서로 화목하고 단결해서 문중의 발전을 이룩하자는 뜻에서 [원일당(源一堂)]이라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