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7대 신위

상4대 신위 사적(上四代神位事蹟)

1) 시조 대원(始祖 大原)

시조의 휘는 대원인데 벼슬은 판원사를 지냈다. 혹자는 처음 이름은 견(堅)이고, 자(子)는 천지(川至)인데 은진군에 봉해졌다고 하나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二券譜』)

2) 二世 군사부군 득주(郡事府君 得珠)

처음 이름은 득주라고 했고, 관(官)은 사인(舍人)이라고 했다. 지금의 군수에 해당하는 군사(郡事)벼슬을 했다.

(『二券譜』) 배위는 나주정씨 정송수의 딸이다.(『羅州鄭氏世譜上系』 2003년 대종중에서 밝혀짐) 배위 나주정씨를 찾게 된 경위를 보면 2003년 은진송씨 대종회에서 『羅州鄭氏世譜 上系』를 입수한 바에 의하면 “송득주(宋得珠)는 고려 고종때 은청광록대부추밀원부사상장군(銀靑光祿大夫樞密院副使上將軍) 및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으로 추봉(追封)된 정송수(鄭松壽)의 사위이자, 금자광록대부참지광정원사(金紫光祿大夫參知光政院使)의 벼슬을 지내고,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에 봉해진 정가신(鄭可臣)의 매부(妹夫)다. 벼슬은 지군사(知郡事)를 지냈고, 그 아들은 송춘경(宋春卿)으로 지주사(知州事)”라고 기록되어있다.(『은진송씨종보 제74호』, 2003. 4.25), 『은진송씨종보 제79호』, 2004. 3. 1 참고)

정구흥이 지은 만사(輓詞)가 있다.

시와 문장은 일찍이 성취하여 과거에 올랐으니
은진 명문 씨족인 두어 곳 큰집일세.
화초를 가득히 심어 조화(造化 : 천지자연의 이치)의 이치를 관찰하고
도서를 많이 쌓아 생애의 즐거움을 보내도다.
위태로운 때 일명(一命 : 처음으로 관직을 받음) 은혜 입었는데
느지막에 깊은 병이 드니 만사(萬事)가 다 슬프구나.
천지(川至 : 판원사 부군의 자(子))가 옛적에 돌아가서 혼이 다 나간 것 같았는데
다시 그대를 애도하며 남은 눈물을 연기와 노을에 뿌리었네.
(『四券譜』 제4권 90면 영남예천파, 『丁亥大譜』 제19권 25면 「嶺之醴泉派」)
만사를 지은 사람이 『四券譜』에는 鄭九興으로, 『丁亥大譜』 에는 鄭大興으로 기록되어있는데, 여기서는 『四券譜』에 따랐다.

3) 三世 보성군사부군 춘경(寶城郡事府君 春卿)

부군의 휘는 춘경이고, 벼슬은 보성군사이다.(『二券譜』)

4) 四世 평산공 사민(平山公 斯敏)

관(官) 평산도호부사(平山都護府使 : 정3품)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
부군의 휘는 사민이다. 조선왕조에 벼슬하여 통정대부 평산도호부사에 이르렀다.

송경(松京 : 개성)으로부터 한성 반송방 유점리(漢城盤松坊鍮店里)에 이사하였다.

아들이 없어 종현손 정랑공 순년(正郞公順年)을 위사(爲嗣 : 대를 잇는 자식)로 삼았다. 묘소는 양주 외서산 마산 이곡(楊州外西山馬山梨谷 : 현 양주군 장흥면 삼상리 산 59-2 배울)묘좌이다. 배위는 영인안씨(令人安氏)로 묘는 동원이강(同原異壙 : 두 묘에 나란히 모심 즉 쌍분)이다. 그러나 부군의 묘소가 타 지역 타인의 산중에 있어 세일사 봉행과 봉심하기도 어려워 2018년 5월 7일 대전광역시 동구 사성동 정랑공 묘소 후방(後方)의 진좌(辰坐)에 배위 영인안씨(令人安氏)와 합장으로 모셨다. 묘표는 문정공 시열이 찬하고 문정공 준길이 쓴 묘비까지 옮겨 있다. 세일사일(歲一祀日)은 음력 10월 5일이다.

5) 4세 집단부군 명의(執端府君 明誼)

부군의 휘는 명의이고 자는 의지(宜之)이며 호는 건재(乾齋)이다. 고려 공민왕 임인(1362)에 홍두적을 평정하고 청주 공북루[충북 청주시 남문로 2가 중앙공원 서북쪽에 있던 누각, 또한 청주시 남문로 1가에는 고려시대에 지은 누각 망선루(望仙樓)가 있는데 충북 문화재 제 110호로 지정되어있다. 공북루에서 시험을 치루고 망선루는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의 이름을 써붙이는 시험장소로 사용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 15권』, 「충청도 청주목 누정조」 『한국지명총람 3권』, 「공북루」조)에 이르러 선비들에게 과거를 실시하였다.]에서 실시하는 이 시험에 공께서 합격하였다. 정포은(鄭圃隱 : 정몽주)등 제현들과 서로 벗하며 현관(縣官)을 지냈고, 이름이 나, 기유(己酉 <공민왕 18> : 1369)년에 도관(都官) 정랑(正郞)으로서 경상도 안렴사가 되었다. 임지로 떠날 때, 포은, 도은(陶隱 : 이숭인)등 여러 명사들이 시를 짓고 목은(牧隱 : 이색)이 서(序 : 사적의 요지를 적은 글)를 지어 송별하였다. 벼슬은 사헌부 집단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회덕 토정리(土井里 : 토물)로 와서 살면서 망복(罔僕 :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의 의리를 지켰다. 유허(遺墟)가 있는데 헌종 을미(헌종 1 : 1835)에 작은 비석을 세웠다. 14대손 목사 기정(基鼎)이 비문을 세우고 아울러 썼다. 고종 乙亥(고종 10 : 1873)년에 글자 획이 만환(漫漶 : 분명치 못하여)되어 다른 돌로 갈아세우고, 음기(陰記) 및 앞면 큰 글자를 옮겨 세웠는데, 16대손 정희(正熙)가 추기하고 17대손 진사 면로(勉老)가 썼다. 배위는 회덕 황씨인데, 수안군사 증 판서 수(遂安軍事 贈判書 粹)의 따님이다. 세일사일은 음력 3월 10일이다.

은진송씨가 이 곳 회덕 땅에 살게 된 것이 이 때부터이며 집단공께서 사시던 곳의 유허비각(遺墟碑閣)이 1980년 대청댐으로 물에 잠김으로써 관동(寬洞 류조비(柳祖妣) 재실(齋室)옆 동북쪽으로 이건(移建)하였다.

6) 영천공 호(榮川公 昈)

『은진송씨보(恩津宋氏譜 : 丁亥大譜』와 금석문(金石文)에 보면 영남에 일가 한 파가 있다고 적혀있다. 우암(尤庵) 시열(時烈)이 지은 「先祖考持平府君墓表(선조고지평부군묘표)」에 그 기록이 처음 보인다. 거기에 보면

…… 상략 …… 嶺南有一派其所記原作源而字川至官恩津君珠作周而官舍人其是否未詳也(영남에 한 파가 있는데 그 기록에 ‘原’은 ‘源’으로 하였고, 자는 천지(川至)이며 벼슬은 은진군(恩津君)이라 하였다. 또 ‘珠’는 ‘周’로 하였고, 벼슬은 사인(舍人)이라 하였는데 옳고 그른 것은 자상하지 않다.) …… 하략 ……

라고 하였다. 그리고 『은진송씨보(恩津宋氏譜 : 丁亥大譜』의 19권 「은진송씨별보」에 보면

嶺之榮川有一派其所傳譜如左(영남의 영천에 한 파가 있는데 그 족보에 전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라고 하고

宋大原(恩津君) ⟶ 得珠(舍人) ⟶ 春卿 ⟶ 昈(字 景玉 元至丁未生 洪武甲申文科官奉化縣監 墓在榮川郡東沙長洞甲坐原 配順興安氏父郡守彦休) ⟶ 自溫(字弘甫官慶尙道事配安東金氏父瓚) …… 하략 ……

라 기록되어있다. 이 기록으로 보면 시조부터 3세까지는 벼슬은 다소 틀리지만 휘(諱)는 모두 같다. 4세가 호(昈)로 되어있으니 그가 평산공과 집단공의 형제가 된다.

호(昈)를 파조로 하여 자온(自溫), 신보(信輔), 하정(夏正), 철산(鐵山), 광영(光榮) 등으로 현재까지 대대로 세계(世系)가 이어져 왔다. 그 자손들이 최근에 꾸준히 은진송씨 판원사의 자손임을 주장하여 2005년 10월에 은진송씨대종회의 결의에 따라 그 파를 영천공파라 하여 대종회의 한 파로 인정하였다.

지금까지는 은진송씨라고 하면 모두 쌍청당의 자손으로 알고 있어 왔음은 물론 모든 자손들은 류조비, 쌍청당의 세일사를 가장 큰 문중의 행사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영천공파가 문중의 한 파로 들어오면서 쌍청당 자손이 아닌 일가도 은진송씨에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7) 五世 진사공 극기(進士公 克己)

부군의 휘는 극기인데, 고려 진사로 생년(生年)은 미상(未詳)이고, 졸년은 태조 1년(1392)이다. [『고흥유씨 족보』에는 부군 난에 낭장(郎將 : 고려때 2군 6위의 정 6품 벼슬)이라고 기록되어있다.] 묘소가 있는 곳을 실전하였다.[은진성(恩津城) 아래 압곡촌(押谷村)에 두 무덤이 있는데 예부터 송씨의 묘라고 이야기가 전하고, 경기도 양지(陽智 : 양지현 경기도 용인군에 있던 지명) 목악촌(木岳村)에도 무덤 하나가 있는데 진사부군의 묘라 하나 다 확실한 근거가 없다.]

숙종 무진(戊辰<숙종 14 : 1688>)에 안인(安人)의 묘소 오른 편에 석단을 설치하고 안인 세일사때 함께 제향을 올린다. 조그마한 비를 세웠는데, 9대손 좌의정 시열이 찬하고 10대손 상증(相曾)이 썼다.

8) 은송의 어머니 안인 고흥류씨(安人 高興柳氏)

진사공 극기 배위는 안인(安人) 고흥류씨인데, 고흥백 호안공 준(高興伯 胡安公 濬 : 준은 이름이고, 고흥백은 봉호이며, 호안은 시호이다.)의 따님이다. 홍무 신해(辛亥<고려 공민왕 20 : 1371>)년에 출생하였다. 나이 스물둘에 홀로 되자 부모가 그의 뜻을 빼앗아 개가시키려 하였다. 그래서 어린 아이를 업고 시부모에게 돌아왔다. 경태(景泰 : 명나라 경제때의 치세 시호) 임신(壬申<문종 2 : 1452>)년에 하세하니 연세가 82세였다.

그해 11월 관동에 장례 지냈다. 관동은 회덕현 동 20리 되는 땅에 있다. 옛적 황씨의 묘지로 부군(진사공 극기)의 외조 증 판서 수(粹)의 묘 동쪽 여러 백보 쯤 되는 여기가 우리 조비의 산소로 회덕현 동 20리 일도면 관동(艮坐坤向 : 은골)이다. 작은 비석(墓表石)을 세워 약간의 사실을 기록했는데 짓고 쓴 사람은 알 수 없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이 22세에 남편을 여의고, 82살에 사망하였으니, 성품이 대장부의 뜻과 같아서 종신토록 수절하였다.”(동춘당집 권 20)

효종 계사(癸巳 : 1653)년에 정절로써 정려(旌閭 : 충신·효자·열녀들이 살던 동네에 문(門)을 세워 국가에서 표창하던 일)와 복호(復戶 : 조선조 때 충신·효자·열녀가 태어난 집안에 세금을 면제해주던 일)가 내려졌다. 묘소는 회덕현 동편 관동 간좌(艮坐)에 있다. 전에 작은 표석이 있었다.[누가 짓고 썼는지 알지 못한다.] 행장은 준길이 지었다. 묘갈(墓碣)은 1657년 5월, 시열이 짓고 준길이 쓰고 9대손 정랑 광식(光栻)이 두전(頭篆)을 썼다. 정려비 기(旌閭碑 記)는 1653년 7월, 8대손 준길이 짓고, 9대손 시열이 썼다.(『丁亥大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