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개파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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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랑공 순년계

파조의 개요 – 정랑공 순년(順年) 각하 계통

안동공 여해(安東公 汝諧)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 여해(汝諧)는 1452년(문종 2) 12월 21일에 예조정랑(禮曹正郞) 순년(順年)과 안동김씨(安東金氏) 직제학(直提學) 맹헌(孟獻)의 따님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字)가 우경(虞卿)이고 시호(諡號)가 충숙(忠肅)인 그는 1472년(성종 3)에 사마시(司馬試)에 1등으로 합격하여 1477년(성종 8)에 음보(蔭補)로 참봉(參奉)이 되고 그 뒤 봉사(奉事), 직장(直長)을 거쳐 형조좌랑(刑曹佐郞) 및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역임하였다.

1494년(성종 2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합격하여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과 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을 역임하였고 예조참의(禮曹參議)가 되었으나, 직언(直言)으로 연산군(燕山君)의 미움을 사서 충청북도 옥천(忠淸北道 沃川)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다시 등용되어 제용감 정(濟用監 正)을 역임하였고, 안동부사(安東府使)가 되어 선정(善政)을 베풀다가 임기를 마치기 전인 1510년(중종 5) 5월 19일에 59세로 타계하여 대전광역시 동구 비룡동(大田廣域市 東區 飛龍洞)인 회덕현 동 비음(懷德縣 東 肥陰) 유좌(酉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묘소 중앙에 있는 묘갈(墓碣)은 정문익공(鄭文翼公) 광필(光弼)이 지었고 도헌(都憲) 김희수(金希壽)가 써서 세웠다.(1527년 이전으로 사료됨) 묘소 왼쪽에 비문이 낡아 1981년에 다른 돌에 새겨 세웠다. 손자 기수(麒壽)가 귀히 되어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배위 증정부인(贈貞夫人) 연안이씨(延安李氏)는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문강공(文康公) 석형(石亨)의 따님으로 1447년(세종 29)에 태어나 1525년(중종 20) 12월 18일에 79세로 한양에서 타계하여 이듬해 2월 29일에 같은 자리 다른 광에 안장하였다.
부덕과 정절을 겸한 규중군자로서 자녀교육을 의방(義方)으로 하였다. 묘지(墓誌)는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지었다. 슬하에는 가평군수(加平郡守) 세충(世忠)과 건원릉 참봉(健元陵 參奉) 세량(世良)의 2남과 별좌(別坐) 윤백령(尹百齡), 황세건(黃世健)에게 각각 출가한 2녀가 있다.

안동공(安東公) 여해(汝諧) 묘역

대전광역시 동구 비룡동

안동공여해묘갈명

후(侯)1)의 이름은 여해(汝諧)고 자는 우경(虞卿)이다. 고(考)는 순년(順年)이니 예조정랑(禮曹正郞)이고 조부는 계사(繼祀)니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이고 증조 유(愉)는 호분위 부사정(虎賁衛 副司正)1)이다. 비(妣)는 김씨니 직제학(直提學) 맹헌(孟獻)의 따님이다. 후가 성질이 민첩하고 글을 잘하여 20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정유에 음직으로 참봉에 임명되었다.

봉사(奉事)와 직장(直長)을 거쳐 한성부 참군(漢城府 參軍)으로 승진하였다. 전라도 어사로 나가서 사무를 감찰하는 것이 명백하고 진실하였다. 형조(刑曹)와 호조(戶曹)의 좌랑(佐郞)으로 옮겨서 부임하는 곳마다 치적이 올랐다. 동료들이 보기를 선배나 장자와 같이 여겨서 감히 친압하지 못했다. 후가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사무는 더욱 복잡해졌다.

안동공(安東公) 여해(汝諧) 묘비

대전광역시 동구 비룡동

그러나 힘써 공부하여 마침내 갑인별과(甲寅別科)에 제4등으로 뽑혀서 곧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을 제수 받았다가 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으로 전임되었다. 이로부터 정교(政敎)에 능(能)하다는 소문이 자자하여 무릇 조정에서 큰 일이 있으면 대신들이 다투어 끌어서 보좌관을 삼으려 하였다.

누차 예조 참의(禮曹 參議)로 승진하였다. 연산군(燕山君)이 바른 말 하는 것을 싫어하여 주륙(誅戮)하거나 파출(罷黜)하여 오래 되었건 얼마 안 되었건 상관하지 않았다. 후도 마침내 옥천으로 귀양 갔다.

금상(今上)3)이 즉위하자 예에 따라 벼슬을 내렸으나 직위가 오히려 떨어져서 통정대부의 계급이 회복되지 않았다. 여론이 자못 억울하다고 하였다. 마침 안동(安東)이 새로 폐조(廢朝)4)에 시달려서 정사는 피폐하고 백성은 고생하고 있기 때문에 후를 기용하여 부사에 임명하였으니 제용감 정(濟用監 正)에서 뽑힌 것이다. 후가 먼저 관대하게 하고 은혜를 베풀었으니 백성을 위하여 피해를 제거하여 미치지 않는 곳이 없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과연 공사(公私)가 다 안정되어 조상(凋傷)하고 폐퇴한 여독을 스스로 깨닫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만기는 아직 5년 남았는데 한 고을이 그 혜택을 입기를 바랐건만 천도가 도와주지 않아 대명(大命)5)이 갑자기 내렸다.

아! 원통한 노릇이다. 후의 성질이 평탄하고 단순하며 관대하고 조용하여 겉으로 나타내지를 않았다. 동기간에는 화목하게 하고 붕우에는 믿음으로써 대하고 친척이나 향당에서 간고하여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을 무휼하여 그래도 미흡하지 않나 생각하였다.

서거하자 일곡하는 사람들이 진실로 슬픔을 다하였다. 부인은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이석형(李石亨)의 따님이다. 2남 2녀를 두었으니 장자는 세충(世忠)이고 차자는 세량(世良)이다. 모두 진사이다.

세충이 종실(宗室) 주계군(朱溪君) 심원(深源)의 따님과 혼인하여 자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세량(世良)이 유승양(柳承陽)의 따님과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장자는 귀수(龜壽)이고, 차자는 인수(麟壽)이다. 따님은 어리다. 후의 장녀는 별제(別提) 윤백령(尹百齡)에게 출가하여 2남을 두었으니 장자는 계(溪)고 또 하나는 어리다.
후의 차녀는 황세건(黃世健)에게 출가하여 1녀를 두었는데 어리다. 후의 생년월일은 1452년(壬申) 10월 21일이고 서거한 연월일은 1510년(庚午) 5월 19일이다. 향년이 59세였다. 동년 12월 27일 회덕현 식장산(懷德縣 食藏山)의 자리에 장례 지냈다. 광필(光弼)이 겨우 이를 갈만한 나이를 조금 지나서 후의 댁에 장가들어 후의 가르침을 받고 또 그 덕을 사모하였다.

벼슬살이의 전말을 광필이 아니면 누가 또 서술할 사람이 있겠는가. 명에 가로되

덕은 두터웠는데
저 하늘이
지위 줌을 아끼고 수조차 안 주었네.
어이 하늘에 저버림 받았는가.
푸르고 푸른 저 하늘도
믿을 수 없음이 이와 같도다.
수부 정광필 지음



묘지(墓誌)란 죽은 사람의 이름, 벼슬, 행적, 자손들의 이름, 낳아서 죽고 장사지낸 날 등을 돌에 새기거나 사기에 구워서 관과 함께 땅속에 파묻는 글을 일컫는다. 따라서 묘지명(墓誌銘)이란 묘지에 기록한 명문(銘文)을 가리킨다. 무덤 앞에 세운 묘비에 기록한 명문을 묘비명(墓碑銘)이라 하는 데 반하여 땅속에 묻는 명문을 묘지명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부인의 경우 부군과 합폄이거나 쌍분인 경우 부군의 묘비에 사적이 간략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대신 묘지명으로 쓰고, 부군과 따로 묘소가 있을 경우는 묘비명을 써서 세운다.

연안이씨의 묘지명은 부군인 안동공이 타계한 19년 뒤에 한양에서 타계하여 이듬해 부군 묘소 옆으로 이장하였다. 그때 손자 중 하나인 규암(圭庵) 인수(麟壽)가 친구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에게 할머니의 묘지명을 부탁하여 쓴 것이다. 주세붕은 조선 전기에 이름난 학자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지금의〈소수서원(紹修書院)〉의 전신(前身)인〈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설한 분으로 유명하다.

안동공배증정부인연안이씨묘지명

숙인(淑人)의 성씨는 이씨이니 연안사람이다. 고조의 이름은 광(匡)이니 사복정(司僕正)으로서 하세하였는데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추증 받았고, 증조는 종무(宗茂)인데 가선대부(嘉善大夫) 임천부사로 타계하였는데 좌찬성(左贊成)6)을 추증 받았다. 조선조 태조의 원종공신이기도 하다. 조부의 이름은 회림(懷林)인데 충좌위(忠佐衛)7)의 대호군(大護軍)으로서 타계하였는데 좌의정을 추증 받았고, 태종의 원종공신이었다. 부친의 이름은 석형(石亨)인데 순성좌리공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8)로서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연성부원군이 고령박씨(高靈朴氏) 진언(眞言)의 따님과 혼인하여 숙인(淑人)을 낳았다.

진언(眞言)은 종묘서령(宗廟署令)9)을 지냈고, 그의 부친 만(蔓)은 자헌대부 영흥부윤을 지냈다. 조부 임종(林宗)은 삼중대광으로서 후덕부사(厚德府使)를 지냈다. 연성부원군이 숙인을 총애하여 좋은 신랑감[佳郞]을 선택하여 안동대도호 부사 은진 송후(宋侯) 여해(汝諧)에게 출가시켰다. 송후의 사람됨이 단아하고 글을 잘 하였으며 아울러 덕행도 있었는데 그 포부를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숙인보다 19년을 앞서서 하세하였다.

안동공(安東公) 여해(汝諧) 재실

대전광역시 동구 비룡동

숙인(淑人)은 천성이 정숙하고 고요하여 말을 많이 하거나 웃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또 어진 부모 밑에서 자라서 안팎일에 익어서 대가의 풍도가 있었다. 그래서 예절로써 스스로 조심하고 지켜 부부간에도 서로 손님을 대하듯 공경하고, 삼가고, 구분을 두며 결코 혼자 결정한 일이 없었다. 안동공이 내직의 헌납(獻納)10)으로 있을 때나 외직의 부사로 있을 때나 그가 직간(直諫)하는 말은 조정에서 이름이 있었으며, 백성을 사랑하는 실적은 백성들 사이에서 퍼져 있었다. 이는 실로 숙인이 내조한 공이 컸기 때문이다. 숙인이 장례 때에는 반드시 그 슬픔을 다하고 제사 때에는 그 정성을 다했다. 또 길쌈을 부지런히 했으며, 늙어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항상 말씀하기를“사람은 각각 자기가 해야 할 직분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라 하였다. 자녀들을 가르치는데 있어서는 말씀마다 연성부원군의 말씀을 하였다. 연성부원군의 친손과 외손들은 모두 유교를 공부하여 활을 잡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숙인의 가르침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숙인이 5남매를 두었으니 자제가 셋이고 따님이 둘이다. 맏자제 세충(世忠)은 문과에 급제하여 낭서(郞署)11)를 여럿 지내고 서윤(庶尹)12)을 거쳐 가평군수(加平郡守)를 지냈다. 모친인 숙인의 봉양을 위하여 자진해서 외직으로 나갔던 것이다. 둘째자제 세량(世良)은 건원릉(健元陵) 참봉을 지냈고, 셋째 자제는 일찍 타계했다. 큰따님은 별좌(別坐)13)윤백령(尹百齡)에게 출가하여 항(沆), 속(涑), 하(河) 등 3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유학에 힘쓰고 있는데 속(涑)이 먼저 연방(蓮榜)14)에 올랐다. 둘째 따님은 황세건(黃世健)에게 출가하여 따님 하나를 두었는데 일찍 잃었다. 가평공이 주계군朱溪君) 심원(深源)의 따님과 혼인하여 1남 2녀를 두었으니 자제 기수(麒壽)는 유교를 힘쓰고 있으며, 따님들은 각각 정기(鄭耆)와 정응두(鄭應斗)에게 출가하였다.

참봉공이 사직(司直) 류승양(柳承陽)의 따님과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었으니, 장자 귀수(龜壽)는 유학에 힘쓰고, 차자 인수(麟壽)는 도(道)도 있고, 글도 잘한다. 지금 홍문관 수찬(弘文館 修撰)으로 있다. 숙인이 가정(嘉靖) 4년(1525) 을유(乙酉) 12월 18일에 한성 유점동(鍮店洞)에서 타계하였으니 향년 79세였다. 이듬해 2월 29일에 회덕현 식장산 기슭으로 이장하였다. 안동공의 묘소에 따른 것이니 곧 그것이 예이다.

수찬(修撰)15)이 장차 회장하려 하매 울면서 나 세붕(世鵬)에게 말하기를“그대가 우리 조모 묘소의 묘지(墓誌)를 좀 써주오.”라 하였다. 아! 내가 숙인의 덕에 대하여 명을 쓸 능력이 있겠는가? 그러나 숙인이 효도로써 시부를 섬기고 의로써 남편을 섬기고 자손들을 가르치는 데는 선(善)에 목표를 두었으니 이 세 가지는 태사씨(太史氏)16)가 그의 저서에서 특히 대서(大書)한 것이니 그 민멸하지않게 하는 방법이 어찌 나의 명에 의할 것인가? 사양하였으나 듣지 않아 드디어 재배하고 묘지를 짓고 아울러 명을 하니 명에 가로되 연성부원군의 효녀이며 후덕부사의 외손녀로다. 가풍을 따르고 아름다운 덕이 높이 떨쳤네.

어울리는 배필을 찾아 덕이 있는 가문에 들어갔도다. 남편 살아 섬기기를 손님같이 하였으며 사후에 섬기기를 산 것처럼 하였도다. 예절에는 엄숙함이 깃들었고, 정절은 굳세었다. 자녀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 갔고, 길쌈에도 힘을 썼도다. 이러한 가르침은 가평공이 이어 받았다. 여러 자손들이 크게 빛나니 유학으로 이름이 났구나. 수찬은 빼어나고 훌륭하였으니 연성부원군에 이를만하네. 그 뿌리가 이에 와서 성하기도 하며 그 가지 또한 번영하도다. 크게 이어지는 경사 그 다함이 없을 것이네 아! 한 조각돌에다 천년토록 아름다움을 기록하도다.
신재 주세붕 지음




가평공 세충(加平公 世忠)

가평군수 세충(世忠)은 1468년(세조 14) 7월에 안동부사(安東府使) 여해(汝諧)와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이석형(李石亨)의 따님 연안이씨(延安李氏) 사이에 장남으로 대전광역시 동구 주산동에서 태어났다. 자가 서가(恕可)인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함에 굳센 뜻이 있었으며 자라서는 당시의 큰 선비였던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육경(六經)의 깊은 뜻을 듣고서는 부지런히 힘쓰며 게을리 하지 않아서 명망이 날로 퍼졌고, 학문(學問)을 강구(講究)함에 더욱 힘을 쏟았다. 1498년(연산군 4)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513년(중종 8)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가 박사(博士)에 이르렀으며 이어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이 되었고 다시 형조와 예조의 좌랑으로 전근되었다가 다시 승문원 교리(承文院 校理)로 임명되었다. 한성판관(漢城判官)을 지내다가 외직으로 나갔는데 당시의 벼슬이 경상도사(慶尙都事)였다.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서는 호조정랑이 되었으며 부모를 봉양하기 편리하도록 경기도사(京畿都事)가 되었다. 이어 호조와 병조의 정랑을 역임하였고 사재감 첨정 겸 장령(司宰監 僉正 兼 掌令)으로 어사(御使)가되어 충청도의 재해를 살펴보았으며 돌아와서는 한성부 서윤(漢城府 庶尹)이 되었다.

공(公)이 한성부에 근무하던 시절 어떤 세도가가 사사로운 송사로 그를 유혹하려 하였으나 공은 끝내 뜻을 굽히지 않자, 이에 앙심을 품고 공을 함안군수(咸安郡守)로 내쫓았으나,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광흥창수(廣興倉守)로 서울에 있게 되었다.

가평공(加平公) 세충(世忠) 묘역

대전광역시 동구 비룡동

이후 다시 외임(外任)에 제수 받아 가평군수(加平郡守)가 되었는데 여기서 재직하는 동안에 상(喪)을 당했다.

상례(喪禮)를 준비하다가 너무 지쳐서 건강을 잃고는 마침내 회복하지 못하고 60세로 1527년(중종 22) 정월 9일에 타계하였다. 달을 지나 2월 25일에 대전광역시 동구 비룡동 선영의 동쪽을 향한 언덕에 안장하였다. 묘갈은 1553(명종 8)년 퇴계 이황이 지었다.

가평공 묘에는 세 개의 비가 있다. 묘 앞에는 전면대자만 있는 작은 비(小碑)가 있고, 본비는 묘소 좌측에 있다. 오랜 세월을 두고 비바람에 씻겨 판독은 물론 글자형태 조차 분간키 어려워서 1975년에 다시 세웠다.
후손 재화(栽和)가 쓴 개수비(改竪碑)는 구비(舊碑) 앞에 있다. 공(公)은 천성(天性)이 평안하고 낙천적이어서 집안 식구들의 생활과 형편을 돌보지 않았으며 오직 경전(經典)과 역사의 공부에만 힘썼다.

사람을 사귐에 있어서는 한계와 구분을 두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친하게 여기고 흠모하였다. 손님이 찾아오면 반드시 술상을 준비하여 극진히 대접하였으며, 친족들과 화목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구휼하였는데 항상 정성을 다하지 못한 것처럼 민망하게 여겼다.

비록 노복(奴僕)이라도 질병(疾病)에 걸리면 반드시 힘껏 구제한 뒤에라야 그쳤으니 그 효성스럽고 우애 있는 성품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널리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배위는 주계군(朱溪君)의 장녀로서 현숙하고 부녀로서의 법도가 있었다. 슬하에는 추파 기수와 선공감역(繕工監役) 민인(閔仁), 아산현감(牙山縣監) 정기(鄭耆),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정응두(鄭應杜)에게 각각 출가한 세 따님이 있다.

추파가 참판(參判) 채침(蔡忱)의 따님과 혼인하여 응개(應漑), 응형(應泂), 응순(應洵)의 3형제와 한극창(韓克昌), 신승서(申承緖), 교리(校理) 김첨(金瞻), 안동도사(安東都事) 유대수(兪大修)에게 각각 출가한 따님이 있는데 이 중 신승서가 뒷날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신(功臣)이요, 사대문장가(四大文章家) 중 하나인 상촌(象村) 신흠(申欽)의 아버지이다. 신흠이 어려서 외가에서 자라면서 외조부 추파에게 글을 배웠다고 하는데 이 모든 것이 공이 이룩해 놓은 가학(家學)의 영향으로 보인다.

가평공(加平公) 세충(世忠) 묘비

대전광역시 동구 비룡동

가평공세충묘갈명

공의 이름은 세충(世忠)이고 자는 서가(恕可)니 공의 선조는 은진사람이다. 6대조 명의(明誼)는 여말을 당하여 벼슬이 사헌부 집단(司憲府 執端)에 이르렀는데 비로소 회덕에 살게 되었다. 공의 손자 유(愉)가 덕을 숨기고 벼슬을 하지 않았으니 박공(朴公) 팽년(彭年)이 기문을 쓴 쌍청당(雙淸堂)이 바로 공의 고조가 된다. 증조 계사(繼祀)는 벼슬이 상주판관(尙州判官)이고 조부 순년(順年)은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지냈다. 아버지 여해(汝諧)는 벼슬이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다. 어머니는 이씨(李氏)이니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석형(石亨)의 따님이다. 성화(成化) 무자(戊子 : 1468) 칠월(七月) 무진(戊辰)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힘써 학문을 하여 자라서 당시의 유종(儒宗)이었던 종실(宗室)주계군(朱溪君) 심원(深源)에게 사사(師事)하였다. 그 전부터 미리 육경(六經)17)의 깊은 뜻을 들어서 열심히 노력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으므로 이름이 날로 퍼졌는데 연구를 더욱 힘써서 무오(戊午)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정덕(正德)18)계유(癸酉 : 1513)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선발되어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가서 박사(博士)가 되었다.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에 승진하여 형조와 예조의 좌랑(佐郞)으로 전임되었다가 승문원 교리로 승진하였다. 한성판관(漢城判官)으로 있다가 외직으로 나가 경상도 도사(慶尙道 都事)가 되었다.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서 호조정랑(戶曹正郞)이 되었다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다시 경기도 도사가 되었다.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서 호조와 병조의 정랑을 거쳐서 사재감 첨정(司宰監 僉正)으로서 장령(掌令)을 겸했다. 재앙을 살피기 위하여 충청도 어사로 나갔다. 돌아와서 한성부 서윤(漢城府 庶尹)이 되었다.

당로(當路)19)에 사사 재판 문제로 공에게 청을 넣는 사람이 있었다. 공이 굽히지 않고 물리쳤다. 이로 인하여 외직으로 밀려나서 함안군수(咸安郡守)가 되었으나 어머니가 늙었다고 해서 그대로 서울에서 광흥창수(廣興倉守)20)로 있게 되었다. 또다시 외임으로 가평군수(加平郡守)에 임명되었다.

관에 있으면서 상을 당했다. 공의 당시 나이가 60이 되려 하였다. 집상(執喪)하는 것이 너무 지나쳐서 건강을 상하여 드디어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 아! 슬프다. 이 해가 가정(嘉靖)정해(丁亥) 정월 9일이다. 다음 달 2월 25일에 회덕현 청사 동쪽 식장산 선영(先塋) 유좌묘향(酉坐卯向)의 자리에 안장하였다. 공이 천성이 낙천적이고 단순하여 식구와 살림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경서(經書)와 역사만을 힘썼다. 남과의 교제는 거의 간격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친밀하게 하고 사모하였다.

손이 오면 반드시 술대접을 하고 즐겁게 해 주었다. 친족들에게 화목하게 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어 항상 미흡한것 같이 생각하였다. 비록 부리는 사람이라도 재앙을 당하거나 병이 나면 반드시 힘껏 도와주었다. 대개 그 효우(孝友)의 성질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이와 같이 뻗쳤다. 부인은 곧 주계군(朱溪君)의 장녀이니 현숙하고 여자의 범절이 있었다. 자제 기수(麒壽)는 갑오에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로서 위사훈(衛社勳)에 참여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승진하여 덕은군(德恩君)에 봉해졌다. 공과 공의 부인에게까지 추은(推恩)21)하여 증직이 내렸다.

따님은 각각 선공감 감역(繕工監 監役) 민인(閔仁), 아산현감(牙山縣監) 정기(鄭耆), 경상도 관찰사 정응두(丁應斗)에게 출가하였다. 덕은군이 참판 채침(蔡忱)의 따님과 혼인하여 응개(應漑), 응형(應炯), 응순(應洵)의 3형제를 두었고, 따님은 각각 한극창(韓克昌), 신승서(申承緖)에게 출가하였다. 나머지 따님은 어리다.

아산 현감이 사중(思重), 사익(思益), 사원(思元)의 3형제와 따님 형제를 두었으니 장녀는 박응현(朴應鉉)에게, 차녀는 신확(申確)에게 출가하였다. 관찰이 생원 윤희(胤禧), 윤조(胤祚), 윤우(胤祐), 윤복(胤福)의 4형제를 두었고, 따님은 각각 조서룡(趙瑞龍), 진사 윤인함(尹仁涵), 권붕(權鵬)에게 출가하였다. 나머지는 어리다. 아! 참판이 이미 준수한 자질과 깊은 학문으로 맑은 조정에 모범이 되었다.

안팎 자손들은 난조(鸞鳥)22)가 머물고 따오기가 우뚝 선 것과도 같고 난초와 옥이 서로 비쳐서 아름다운 것과도 같다. 하늘이 선인에게 보답하여 그 몸을 도와 주고 그러고도 부족하면 반드시 그 자손이라도 도와서 그 뜻에 보답한다. 생각건대 이렇게 되는 것이로구나! 명에 가로대 이미 그 몸에 쌓은 바 있으니 밖에 나타남이 마땅하도다. 심지 않고 거두려는 자어찌 거두기를 바랄 수 있나.
퇴계 이황 지음



참봉공 세량(參奉公 世良)

참봉(參奉) 세량(世良)의 자손 중에는 맏 자제 서부공 귀수(龜壽), 도사공(都事公) 응기(應期), 습정공(習靜公) 방조(邦祚), 충현공 시영(時榮)으로 이어지는 충현공파(忠顯公派)와 도사공 응기(應期), 습정공 방조(邦祚), 빙호공(氷壺公) 시염(時琰)으로 이어지는 빙호공파(氷壺公派)와 도사공 응기(應期), 습정공 방조(邦祚), 부훤당공(負暄堂公) 시담(時倓)으로 이어지는 부훤당공파(負暄堂公波)와 도사공 응기, 경헌공(景獻公) 갑조(甲祚), 진산공(珍山公) 시묵(時默)으로 지어지는 진산공파(珍山公派)와 도사공 응기, 경헌공 갑조(甲祚), 우암 문정공 시열(時烈)로 이어지는 우암 문정공파(尤庵文正公派)와 도사공 응기(應期), 경헌공 갑조(甲祚), 장성공(長城公) 시도(時燾)로 이어지는 장성공파(長城公派)와 도사공 응기, 경헌공 갑조, 무주공(茂州公) 시걸(時杰)로 이어지는 무주공파(茂州公派)의 7개 파가 있고, 응정(應禎), 직장공(直長公) 희조(熙祚), 통덕랑공(通德郞公) 시픽(時 ), 모은공(牟隱公) 기상(基想)으로 이어지는 모은공파(牟隱公派)와 우봉공(牛峰公) 응광(應光)을 파조로 하는 우봉공파(牛峰公派) 등 9개파가 있으며 작은 자제문충공(文忠公) 인수(麟壽)를 파조로 하는 문충공파(文忠公派)와 막내자제 삼기당(三杞堂) 용수(龍壽)를 파조로 하는 삼기당공파(三杞堂公波) 등 모두 11개파가 있다.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 세량(世良)은 1473년(성종 4)에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 여해(汝諧)와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이석형(李石亨)의 따님 연안이씨(延安李氏) 사이에 둘째아들로 대전광역시 동구 주산동(大田廣域市 東區 注山洞)에서 태어났다. 자가 정부(貞夫)요 흑암부군(黑岩府君)이라 칭해지는 그는 1498년(연산군 4) 그의 나이 25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많은 영준(英俊)들과 교유(交遊)하였고, 그 중에 김안국(金安國)과는 친분이 더욱 두터웠다.

일찍이 음천(蔭薦)으로 선릉참봉(宣陵參奉)이 되었는데 얼마 뒤에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으로 전보되었지만, 벼슬길은 그만두고 구원(丘園)에 파묻혀 학문에만 전념하여 대성(大成)하였기에 당시 거유(巨儒)인 김안국과 교유하게 되었다고 한다. 만년에 자손들에게 가훈(家訓)으로‘행기필근신(行己必謹愼)’이라고 내려 주었는데 이는 곧‘몸을 행동함에는 반드시 삼가고 삼가하여 뜻을 지키라.’고 당부한 글이었다. 이로써 그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알 수 있다.

참봉공(參奉公) 세량(世良) 묘역

대전광역시 동구 비룡동

1539년(중종 39) 5월 1일 타계하여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 화당리(忠淸北道 淸原郡 南一面 花塘里) 흑암(黑巖) 마을 지장골 묘좌(卯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사후에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묘비(墓碑)는 모재(慕齋) 김문경공(金文敬公) 안국(安國)이 짓고 동고(東皐) 김로(金魯)가 썼는데 그 뒤 그의 현손(玄孫)인 우암(尤庵) 시열(時烈)이 추기(追記)하여 1669(현종 6)년에 세웠다.

이 추기에는 그의 학덕이 높음을 칭찬하고 그가 타계한 뒤 그의 작은 자제 규암(圭庵) 인수(麟壽)가 화(禍)를 당하기 직전의 일화(逸話)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하루는 사당에서 무슨 소리가 나서 사당문(祠堂門)을 열고 보니 그의 신주가 감실(龕室)에서 나와 신주 머리로 벽을 치며‘각각’하는 소리를 냈다는 것이다.
얼마 안 가서 아들 규암이 화를 당하였다는 것을 우암 시열(時烈)이 그의 묘비문에 추록한 것이다.(참조, 묘비문)

배위 증정부인(贈貞夫人) 문화류씨(文化柳氏)는 사직(司直) 승양(承陽)의 따님인데 1475년(성종 6)에 태어나 1526년(중종 21) 6월 11일에 52세로 타계하여 같은 자리 다른 광에 안장하였다. 정순하고 효도하는 부도(婦道)의 길을 걸었다. 슬하에는 증이조판서 귀수(龜壽)와 증이조판서 문충공(文忠公) 인수(麟壽)의 2남과 현감(縣監) 성제원(成悌元)에게 출가한 따님이 있다. 또 배위 의성김씨(義城金氏)는 좌랑(佐郞) 선준(善浚)의 따님으로 1476년(성종 7) 정월 10일에 태어나 1540년(중종 35) 9월 11일에 타계하여 대전광역시 동구 주산동(大田廣域市 東區 注山洞) 무좌(戊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슬하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용수(龍壽)와 이춘경(李春卿), 김근공(金謹恭)에게 각각 출가한 2녀가 있다. 이들과 관련된 유적으로〈삼현려(三賢閭)〉가 있다. 〈삼현려(三賢閭)〉란 세 현인(賢人)의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비석을 가리키는데 참봉 세량의 묘소 100여 보 앞에 서 있다. 여기서‘삼현(三賢)’이란 서부공(西阜公) 귀수(龜壽), 규암문충공(圭菴文忠公) 인수(麟壽) 형제와 매부(妹夫)인 성동주(成東洲) 제원(悌元)을 가리킨다. 이들의 우애와 효심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이것은 우암(尤庵) 시열(時烈)이 수명(受命)하기 5일 전에 전라도 장성(長城) 땅에서 쓴 마지막 휘호(揮毫)다.

참봉공(參奉公) 세량(世良) 묘비

대전광역시 동구 비룡동

참봉공세량묘갈명

공의 이름은 세량(世良)이고 자는 정부(貞夫)다. 성은 송(宋)이니 은진사람이다. 증조부는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인 계사(繼祀)이고, 조부는 예조정랑(禮曹正郞)인 순년(順年)이며, 부친은 안동 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를 지낸 여해(汝諧)다. 모친은 이씨니 연성 부원군(延城府院君) 석형(石亨)의 따님이다. 집안이 친외가가 모두 문학이나 과거(科擧)로 유명하다. 공이 성화(成化) 계사(癸巳)에 태어나 일찍부터 가정의 교육을 이어 받아 학문에 뜻을 닦았다. 홍치(弘治) 무오(戊午)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국학(國學)54)에서 공부하게 되자, 사귀는 친구들이 영걸스럽고 준수하였다. 그래서 학문이 더욱 더 발전 진취하였다.

안국(安國)이 그때 또 이 어른 뒤를 따르게 되었는데 그 용모와 행지(行止)가 순수하고 단아하므로 길사(吉士)라는 것을 느끼고 그 심중을 살펴보았더니 과연 여느 사람과 다른 점이 있었다. 따라서 마음속으로 사모하고 존경하여 교분을 맺게 되었다. 미구에 서로 헤어져서 보지 못한 지가 삼기(三紀)55)나 되었다. 일찍이 들으니 공이 음천(蔭薦)으로 선릉참봉(宣陵參奉)56)에 임명되었다가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57)으로 전직되었다.

뒤에 관직을 사임하고 전원에 물러앉아 권력과 명예에 마음을 두지 않고 번거롭고 화려함을 물리고 담백하고 질박함을 즐기니 기쁘고 좋아 스스로 조심하여 지켰다.

향당(鄕黨)에 머무를 때에는 인자하고 부드러워 모두에게 환심을 얻었다. 무릇 공의 조예(造詣)가 더욱 높아져 이미 풍미를 얻어 고요하고 편안한 지경으로 나 김한국이 감히 바랄 바가 못 되었다. 그 후 공의 차자 형조참판공은 의지와 기개와 학문이 보통 사람을 넘어섰고 공의 사위 성제원(成悌元)은 예스러움을 좋아하여 온화함을 갖추었고 또 장자 귀수(龜壽)는 효와 우애가 하늘에 이르렀음을 들었으니 한 집안의 풍도와 의범은 연유하는 바가 있음을 더욱 생각할 수 있었고, 이미 공이 만년에 얻은 바가 범연(泛然)치 않았음을 더욱더 믿게 되었다. 한 집안의 풍도와 의범이 연유하는 바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이 가정(嘉靖) 기해(己亥) 5월 1일에 타계하였으니 향년이 67세였다. 임종에 이르러서 자식들에게 경계하기를“자기 자신의 행실은 반드시 삼가고 삼가야 한다.”는 한마디뿐이었다.

부인 류씨는 문화(文化)의 명망 있는 씨족이다. 고려 훈신(高麗勳臣) 류거달(柳車達)의 자손이다. 부친은 이름이 승양(承陽)이고 모친은 장사랑(將仕郞) 김혼(金渾)의 따님이다. 성화(成化) 을미에 부인이 출생하였다. 정순하여 여자의 할 도리에 어긋남이 없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하는 데 효도를 다했으며 제사를 받드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시부모를 섬기며 아들을 가르치는데 있어서 의로운 방법으로 하고 일가를 대하는 데는 화목하게 하고 비복을 부리는 데는 엄격하면서도 온정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공이 부인에 대하여 예의를 다하고 존중히 여겼다. 병술(丙戌) 7월 11일에 타계하였으니 향년이 52세였다. 청주 마암리(淸州 馬巖里) 묘좌유향(卯坐酉向)의 땅에 안장 하였다. 14년 뒤에 공이 서거하니 부인의 묘에 합장하였다. 둘째 자제가 참판(參判)의 귀한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공에게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戶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의 증직이 내렸다. 부인도 또 정부인(貞夫人)을 증직 받았다. 2남 1녀를 두었다.

장자 귀수(龜壽)는 종묘서 봉사(宗廟署 奉事)인데 공보다 먼저 하세했다. 차자는 참판이니 이름이 인수(麟壽)다. 따님은 성제원(成悌元)에게 출가하였다. 역시 공보다 먼저 하세했다. 봉사(奉事) 귀수가 마전 군수(麻田郡守) 이귀연(李龜淵)의 따님과 혼인하여 3남 1녀를 두었다. 따님은 관찰사(觀察使) 이언호(李彦浩)의 손자 표(滮)에게 출가했다. 자제는응기(應期), 응정(應禎)이고 제3자는 아직 어리다.

역시 공보다 먼저 하세했다. 봉사(奉事) 귀수가 마전 군수(麻田郡守) 이귀연(李龜淵)의 따님과 혼인하여 3남 1녀를 두었다. 따님은 관찰사(觀察使) 이언호(李彦浩)의 손자 표(滮)에게 출가했다. 자제는 응기(應期), 응정(應禎)이고 제3자는 아직 어리다. 참판 인수는 장단부사(長湍府使) 권박(權博)의 따님과 혼인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따님은 참판(參判) 권건(權健)의 증손 이(이)에게 출가하였다. 아들의 이름은 응경(應慶)이다. 성제원은 아들이 없다. 명하여 가로되, 살아있는 풀도 밟지 아니 하니 그 발꿈치가 또 어질구나 떨치고 떨치도다 자제들과 서랑이여! 아! 진실로 기린과 같도다 백세의 뒤라도이 사람 있은 줄을 알아주리라
모재 김안국 지음

추기

공의 사실은 비면(碑面)에 새겨서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오직 삼현려(三賢閭)라는 호명(號名)은 가장 똑똑히 나타내야 할 것이다. 공의 후인들이 그 풍도와 의범(儀範)을 가슴 깊이 이어 받았으니 그 도학과 행의는 세상에 흔히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대를 격한 후세라 할지라도 마땅히 감동하여 조석으로 보는 일과 같이 해야 할진대 하물며 한 집안에 모여서 덕이 다 같고 꽃다움이 크게 세상의 도리를 위하여 빛나는 데 있어서랴?

세상에서 그 거처하던 자리를 존모하는 것이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로구나. 다만 서부(西阜) 부군은 조세(早世)하여 대성하지 못하였고 규암선생(圭菴先生)은 화(禍)를 입은 것이 혹심하였고, 성동주는 자손이 끊어졌으니 하늘이 보답하는 것이 과연 어떻다고 해야 할 것인가? 액이 있은 뒤에 더욱 빛이 나고 비색(否塞)하였다가 더욱 형통하는 것이 하늘이 마침 내 정한 운명인가?

항차 증손 좌랑공(佐郞公) 방조(邦祚)는 맑은 이름과 곧은 도리로 일대의 영수(領袖)가 되고, 봉사공(奉事公) 갑조(甲祚)는 큰 지조가 탁연하여 성왕(聖王)이 포창하여 증직하였고, 현손 주부(主簿) 시영(時榮)은 난리에임하여 의리를취하였으므로 유림(儒林)에서 제향(祭享)을 지내주니 고인이 말한 “강물이 풍부하고 근원이 미약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고 한 말이 옳은 말이다.

참봉공(參奉公) 세량(世良) 재실

대전광역시 동구 비룡동

일찍이『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을 상고하여 보았더니“규암이 화를 당할 때 신주가 감실(龕室)58)에서 내려와서 머리를 벽에다 콕콕 찧는 소리가 나면서 괴로워하는 모양을 하더니 조금 있다가 후명(後命)이 내렸다.”고 하였다.

공의 정신이 뛰어나 어느 사람과는 대단히 다른 점이 있어서 같이 죽어서 함께 없어지지 못했기 때문인가?
부자는 하늘이 같이 성품을 주었는데 사생(死生)이 다르니 보는 사람이 어떠한 마음 이겠는가?
아울러 이 사실을 기록하여 후인이 추사(追思)하고 슬프게 여기고 사모하여 효도하고 자애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켜서 감히 훌훌히 잊지 못하게 하노라. 공의 또 다른 사위는 척암(惕菴) 김근공(金謹恭)인데 유학으로 일컫는다.
현손 시열 지음







서부공 귀수(西阜公 龜壽)

서부공 귀수(西阜公 龜壽)는 1497년(연산군 3)에 참봉 세량(世良)과 증 정부인 문화류씨(文化柳氏)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가 기수(耆叟)이고 호가 서부(西阜)인 그는 벼슬이 음직(蔭職)으로 처음에는 영경전 참봉(永慶殿 參奉)에 임명되었다가 종묘서 부봉사(宗廟署 副奉事)로 그쳤지만, 어려서부터 재질이 특이하고 효심과 우애가 남과 달랐다.

그 효심이 하늘에 닿아 상(喪)을 당했을 때는 흰 제비가 와서 깃들었고 아우 규암(圭菴) 인수(麟壽)와는 지극한 우애로 일생을 살더니 마침내 매부(妹夫)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 또한 이 우애에 보태어 한 집에 살면서 강학(講學)에 힘쓰니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삼현(三賢)’이라 일컬었고 그 집을 ‘삼현려(三賢閭)’라 칭했다.
아우 규암이 멀리 귀양을 가서 병에 걸렸다. 그는 이 말을 듣고 밤낮으로 길을 달려서 열심히 돌봤다.
공이 귀양에서 돌아오자 너무 기뻐서 피를 토했다고 한다.

서부공(西阜公) 귀수(龜壽) 묘역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문동리

1538년(중종33) 겨울에 병이 깊어져 10월 11일 42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하여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문동리(忠淸北道 淸原郡 南二面 文東里) 저자산(楮子山) 기슭 신좌을향(辛坐乙向)에 묘갈(墓碣)은 종제(從弟) 판서(判書) 기수(麒壽)가 지었고, 손자 현감(縣監) 승조(承祚)가 썼으며 성동주(成東洲)가〈효자모지묘(孝子某之墓)〉라 제(題)하였다. 그뒤 이조판서(吏曹判書)가 추증되었다. 배위 단인(端人) 고성이씨(固城李氏)는 군수 귀연(龜淵)의 따님으로 1499년(연산군 5) 5월 6일에 태어나 1575년(선조 8) 정월 8일에 71세로 타계하여 부군의 묘에 합폄하였다. 현철하고 규범이 있었다.

슬하에는 의빈부 도사(儀賓府 都事) 응기(應期)와 일찍 타계한 응정(應禎)과 우봉현령(牛峰縣令) 응광(應光)의 3남과 이표(李滮)에게 출가한 따님이 있다. 서부공 귀수 형제는 하늘이 알아주는 효자였다. 은진송씨 문중에는 효를 상징하는 ‘흰 제비’이야기가 몇 편 전해져 오고 있다.

삼현려(三賢閭)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 화당리

호군공의 큰아들 김연은 재주와 행실이 뛰어나더니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이조판서로 있을 때 그 이름을 사림(士林)으로부터 전해 듣고 천거하여 금오랑(金吾郞) 벼슬을 하더니 오래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집에 돌아와 죽으니 그녀는 어머니로서 슬픔이 극에 달했지만, 스스로 자제하면서 “제 명이 그 것 뿐인데 어찌하리오.”하였다. 금오랑이 죽고 두어 해째 되어 부인이 낮울음[晝哭]을 하는데 흰 제비가 날아와 여막에 깃들었다. 이에 그녀는 더욱 슬피 울면서 “우리 집 흰 제비가 어찌 이곳까지 날아왔느냐?”고 하니, 이것은 옛날 서부공 때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송씨가전』, 가문전래 설화

삼현려기

우리 흑암부군(黑巖府君) 묘문(墓文)은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지은 것으로 삼 현(三賢)60)의 사적을 칭도(稱道)61)함이 비록 간략하나 그 기상과 규모를 대개 짐작할 수 있으며, 그 글이 김안국의 문집(文集)에 실려 있어 온 세상 사람이 모두 알고 있다.
당시에 그 마을을 지나는 자는 반드시 몸가짐을 엄숙히 하고 공경하면서 여기는 세 분의 어진 이가 살던 곳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이름이 있게 되었는데, 그 자리는 실로 한양(漢陽)의 반송방(盤松坊) 유점동(鍮店洞)에 있다.
이제 이곳 청주(淸州)의 마암리(馬巖里)는 부군이 돌아와 노년을 보내던 곳이고, 무덤이 있는 곳이며, 규암(圭菴) 문충공(文忠公)이 목숨을 바친 곳이다.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의 부인의 무덤이 부군의 무덤 곁에 있고, 서부부군(西阜府君)의 무덤도 5리 가까이에 있어, 삼현의 유적이 여기에 많이 남아 있으므로 이 이름이 이곳에 일컬어진 지도 역시 오래다. 아! 삼현의 사적이 사람의 이목(耳目)에 빛남은 말할 것도 없고, 척암(惕庵) 김근공(金謹恭)도 부군의 측실(側室) 소생의 사위로서 유학(儒學)으로 야사(野史)에 매우 드러나게 칭도되었으니, 이 어찌 당시의 덕성(德星)이 편벽되게 부군의 집에만 비춘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가 삼현의 수(數)에 들지 못함은 연배(年輩)가 조금 뒤인 까닭이 아니겠는가. 이후에도 부군의 증손인 습정공(習靜公 : 宋邦祚)이 청명(淸名)과 직도(直道)로 세상 사람에게 존중되었고, 우리 선부군(先府君) 인 수옹공(睡翁公 : 宋甲祚)과 종씨(從氏)인 충현공(忠顯公 : 宋時榮)이 절의가 뛰어나서 포장(褒奬)하는 은전(恩典)이 빛났으므로, 그 후로 이 마을이 더욱 더 먼 후세에 드러나게 되었으니, 덕이 많은 자는 덕을 후세에 전한다는 말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문충공이 후명(後命)62)을 받을 때는 부군의 사판(祠版)63)에 극히 영이(靈異)한 일이 있어 이 일이『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에 실려 있고, 지난날 내가 처음 화를 받을 때에도 그러하였으니, 이른바“부자, 조손이 유명(幽明)의 길을 달리한다.”는 말은 진실로 천리 (天理)를 알지 못한 것이다. 흑암부군의 이름은 세량(世良)이고 자는 정부(貞夫)요, 서부부군의 이름은 귀수(龜壽) 이고 자는 기수(耆叟)이며, 문충공의 이름은 인수(麟壽)이고 자는 미수(眉叟)이며, 성동주의 이름은 제원(悌元)이고 자는 자경(子敬)인데, 서부 이하가 이른바 삼현으로, 흑암부군의 아들과 사위다.
숭정기원 후 62년 기사년(1689, 숙종 15) 6월 일에 서부공 증손 시열이 삼가 쓰다.



서부공(西阜公) 귀수(龜壽) 묘비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문동리

서부공귀수묘갈명

공의 이름은 귀수(龜壽)고 자는 기수(耆叟)다. 은진 세가(恩津世家)다. 5대조 유(愉)는 덕을 감추고 벼슬하지 않았다. 호는 쌍청당(雙淸堂)이다. 증조 순년(順年)은 예조 정랑(禮曹正郞)이고 조부 여해(汝諧)는 안동 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다.

건원릉 참봉(健元陵 參奉) 세량(世良)이 곧 공의 아버지이다. 문화류씨(文化柳氏) 거달(車達)의 후손인 승양(承陽)의 따님과 혼인하여 홍치(弘治)64) 정사(丁巳)에 공을 낳았다. 공이 어려서부터 재질이 특이하여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것이 천성에서 우러났다. 더욱이 효심과 우애가 두터워서 남이 그 사이에 언짢은 말을 할 수가없었다. 상을 당하여 여막에서 예를 다하고 있을 때 흰 제비가 와서 깃들었다.

남들이 모두 효감의 소치라고 하였다. 매씨(妹氏)는 곧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의 배위다. 수척할 대로 수척하여 상을 감내할 수가 없었고 후사조차 두지 못하였으므로 공이 이 일을대단히 통탄스럽게 생각하였다. 매양 기제사를 당하면 반드시 곡하였다. 계씨 규암(圭菴) 인수(麟壽)와 마음이 맞고 덕이 짝이 되었다. 그래서 우애가 지극하였다.

규암이 권세 있는 간사한 무리에게 거슬려서 제주 목사로 좌천되었다. 계수(季嫂) 혼자 서울에 있다가 전염병에 걸렸다. 공이몸소 탕약을 끓이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침내 병이 나았다.

사람들이 모두탄복하여 유곤(庾袞)65)에게 비하였다. 그 뒤에 또 규암이 멀리 귀양 가서 병에 걸렸다. 공이 이 말을 듣고 밤낮으로 길을 달려서 구완하여 매양 해와 달에 일찍 돌아오도록 해주기를 빌었다.

정유년 겨울에 규암이 용서를 받고 돌아왔다. 공이 너무 기뻐서 도를 지나쳐 피를 토하였다. 무술년 겨울에 일어나지를 못하게 되었다. 지구(知舊)들이 이 일로써 더욱 비통하게 생각하였다. 이듬해 4월에 청주 저자산(楮子山) 신좌을향(辛坐乙向)의 자리에 안장하였다. 음직(蔭職)으로 처음에 영경전 참봉(永慶殿 參奉)에 임명되었다가 종묘서 봉사(宗廟署奉事)66)에 전임되었다. 그것으로 벼슬을끝마쳤다.

서부공(西阜公) 귀수(龜壽)의 재실과 서부담(西阜潭)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문동리

배위는 고성이씨(固城李氏) 군수 귀연(龜淵)의 따님이다. 현철하고 규범이 있었다. 규암이 귀양살이 할 때 공이 집을 지어서 질녀(姪女)67)를 출가시키려 하여전심력(全心力)을 다하였다. 이씨가 공의 뜻을 이어서 기꺼이 당신의 재산을 내놓아 도왔다.

혼자 살기를 40년 동안 집을 다스리는 데 법도가 있어서 안팎 일가들에게 다 환심을 샀다. 향년이 77로 타계하여 공의 묘소 좌측에 합폄하였다.

3남 1녀를 두었으니 장자(長子) 응기(應期)는 사복시 판관(司僕寺 判官)68)이고 차자(次子) 응정(應禎)은 요사(夭死)하였고 삼자(三子) 응광(應光)은 맹산 현감(孟山縣監)이다. 1녀는 관찰사 이언호(李彦浩)의 손자 표(滮)에게 출가하였는데 아들을 두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떴다.
판관이 판서 이윤경(李潤慶)의 따님과 혼인하여 5남 2녀를 두었으니 장자는 흠조(欽祚), 차자는 승조(承祚), 3자는 천조(天祚), 4자는 방조(邦祚)이다. 나머지는어리다. 현감이 사평(司評)69) 김항(金沆)의 따님과 혼인하여 1남을 두었으니 순조(純祚)이고 현감 윤계종(尹繼宗)의 따님을 재취하여 2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정조(廷祚)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흠조(欽祚)가 아들을 낳고 순조(純祚)가 딸을 낳았으나 다 어리다.

명에 가로되
충신(忠信)의 바탕을 가졌도다.
효우의 법이로구나.
학문으로써 얻은 것이 아니고
천성이 그러함이로다.
아름답고 좋은 배필 있으니 또한 그 행실 정숙하구나.
명을 써서 후인에 일러두니
보는 사람은 공경심을 가져라.

종제 좌참찬 기수 지음




도사공 응기(都事公 應期)

응기(應期)는 1531년(중종 21) 정월 19일에 참봉 귀수(龜壽)와 고성이씨(固城李氏)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가 중우(仲遇)인 그는 태어나서 8세 되던 해에 아버지 상을당하였다. 지성으로 추모하였고, 선조들의 제사에는 예절을 다하고 어머니를 효성으로받들었다.

벼슬은 음직(蔭職)으로 두 번의 참봉(參奉)을 거쳐 예빈시 봉사(禮賓寺 奉事)와 목청전 봉사(穆淸殿 奉事)를 두 번 거치고 사온서 직장(司醞署 直長)과 광흥고 주부(廣興庫 主簿) 등을 두 번, 그리고 종부시(宗簿寺), 내자시(內資寺)를 두 번 거친 뒤 청산현감(靑山縣監)과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역임한 뒤 다시 내직으로 들어가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을 지내고 다시 승진하여 사복시 판관(司僕寺 判官)과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에 이르는 동안 직책을 완수하는 외에는 구차스러운 행동은 하지 않았다. 가정에돌아와서는 쌀독이 비는 일이 자주 있었으나 태연하였다. 다만 술을 즐겨서 친한 사람들과 만나면 취해야만 그만 두었다.

도사공(都事公) 응기(應期) 묘역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문동리

1584년(선조 17) 정월 9일에 54세로 타계하여 같은 해 4월에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문동리(忠淸北道 淸原郡 南二面 文東里) 아버지 묘소 아래에 안장하였다. 뒤에 손자 시열(時烈)이 귀히 되어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다. 묘갈은 동고(東皐) 간이(簡易) 최립(崔岦)이 지었고 아들 승조(承祚)가 썼다. 배위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광주이씨(廣州李氏)는 병조판서(兵曹判書) 정헌공(正獻公) 윤경(潤慶)의 따님으로 1534년(중종 29) 3월 12일 태어났다.

현덕한 가정에서 자라나 혼인한 뒤에는 남편의 뜻을 좇고 자녀를 가르치고 하인을 부리는 데도 방도가 있어서 안일하고 오만한 것은 몸에나 입에 나타내지를 않았다. 친척들이 모두 그 현숙함을 일컬었다. 어느 날 저녁에 앉아 있노라니 도깨비불이 먼 곳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온 집안사람들이 놀래어 당황해 할까봐 잠자코 가리켜 말함이 없이 스스로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부인의 집안 다스림이 이처럼 현숙하고 아름다웠다. 부군보다 6년 앞선 1578년(선조 11) 5월 17일에 타계하였다. 묘소는 부군과 합폄이다. 슬하에 흠조(欽祚), 승조(承祚), 천조(天祚), 방조(邦祚), 갑조(甲祚)의 5남과 군수(郡守) 박경조(朴慶祚)와 호군(護軍) 김호덕(金好德)에게 각각 출가한 2녀가 있다. 흠조는 자가 언수(彦綏)로 1555년(명종 10)에 태어나 1619년(광해군 11) 7월 6일에 타계하여 할아버지 묘소 좌측 언덕에 안장하였다. 배위는 충주지씨(忠州池氏) 운(芸)의 따님이고 재배(再配)는 언양김씨(彦陽金氏) 자건(自健)의 따님이다. 아들 시섭(時燮)이 있다.

승조는 규암(圭菴)의 자제인 종숙(從叔) 응경(應慶)에게 출계하였는데 임진왜란 때순절하였다. 천조는 자가 경숙(敬叔)으로 1564년(명종 19)에 태어나 1581년(선조 14)에타계하여 양근읍 내금(楊根邑 內今) 씨족(氏族) 산의 옆에 있다. 배위는 광산김씨(光山金氏) 원경(元慶)의 따님인데 자손이 없다. 호가 습정(習靜)인 방조는 선조 때 진사와 문과에 급제하여 평안도 병마평사를 지냈고, 갑조는 독배서궁(獨拜西宮)의 절의(節義)를 지킨 선비로 우암(尤庵)의 아버지이다. 『은진송씨 가전』에 따르면 ‘딸 하나는 버릴 수 있지만 신의(信義)만을 결코 버릴 수없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도사공 응기는 슬하에 지례공 승조(昇祚), 습정공 방조(邦祚), 수옹공 갑조(甲祚) 등 다섯 아들과 따님 둘이 있다. 그 두 따님 중 맏 따님은 성품이 지극히 어질고 용모가 뛰어났다.

이미 시집갈 나이가 되자 박경조(朴慶祚)와 혼인을 정하고 예를 치를 날을 며칠 남기지 않은 어느 날 다정한 벗 윤우진(尹又進)이 찾아와 도사 응기를 책망하며 이르기를 “혼인이란 인륜대사인데 어찌 친구로서 나에게 한 번도 의논하지 않고 경솔히 사위[東床]를 얻으려 하는가? ” 하고는 박씨가 사윗감으로서 크게 부족한 점을 낱낱이 알렸다. 그러자 도사는 “처음에 그대와 의논치 못한 것은 크게 책망을 받아 마땅하지만, 그러나 이미 혼인을 언약한 이상 뉘우친들 약속은 어길 수 없을 것이네.”하고 안으로 들어와 부인에게 이 친구의 이야기를 자세히 알렸다. 그 이야기를 듣고 부인은 “딸 하나는 가히 버릴 수 있지만, 그러나 신의만은 결코 잃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렇게 하여 예식은 예정대로 치렀지만, 그 뒤 신랑 박씨의 하는 행동을 본 즉 친구 윤씨가 일러준 바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하루는 박씨가 술에 만취하여 장안의 큰길에 벌렁 누워서는 부인이 와서 데려가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에 도사공은 부인과 여러 아들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의논을 하였는데 그 가운데 누군가는 “아내는 순종함으로써 의를 삼는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그가 오라는 곳으로 가야할 것입니다.”고 하였고, 또 누구는“순종함으로써 정다움을 지니는 것은 마땅히 순종함직한 일에 순종할 때 이루어지는것입니다.

만약 아내가 그곳에 나갔다가 차마 보지 못할 욕을 당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도사공은 아들 지례공 승조로 하여금 남녀의 종을 거느리고 현장에 가도록 결론을 내렸다. 아버지의 명을 받은 지례공은 비복을 데리고 그곳에 갔더니 박씨는 오히려 아내가 오지 않았다고 노발대발하면서 주먹으로 치려고 하였다. 괘씸하게 생각한 지례공은 박씨 를 그 자리에 버려둔 채 비복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할 수가 없었던지 박씨는 혼자 일어나서 지례공을 뒤따라 집에 와서는 지레공에게 “처남이 나를 버리고 돌아온 것은 백분 양해한다고 치더라도 어째서 비복들마저 나를 버리고 오도록 하는가?”하고 노하여 항의했다.

이에 지례공은“그대가 어째서 나를 치려고 했는가? 나를 치려고 하는 마음을 살피건대 비복은 반드시 그대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 분명하므로 내 그곳에 머물지 못하게 함이었다.” 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박씨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숙였다. 도사공이 말하기를“처음에 친구 윤 아무개의 말을 듣고서 신의를 가히 버릴 수 없다고 하였으니 오늘 비록 이처럼 민망스러운 일을 보더라도 또한 뉘우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송씨가전(宋氏家傳)』

도사공응기묘갈명

규암(圭菴) 송선생(宋先生)이 학문이 순정(純正)한 데다 이를 행동으로 실천하였다. 또 이름과 절조를 끝까지 지켰으며 우리 동방에서 몇 사람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선생의 백씨의 손자로서 선생의 뒤를 이은 사람이 승조(承祚)다.

일찍이 나에게 글을 배운 일이 있다. 나는 공이 그 가문에 걸맞는 자제라는 것을 마음속으로 인정한 터였다. 그런데 공이 지금 자기를 낳아준 부친인 도사공(都事公)의 묘소에 비를 세우려 하면서 나에게 글을 청하였다. 나도 또 그 선세의 사적을 밝혀 주고 싶으니 이런 글이야말로 군자라면 기꺼이 떠맡으려고 할 것인데,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이에 내가 공의 행적에 대해 물어보니, 공이 말하길 “공이 규암의 여러 자녀들 중에서 가장 일찍이 훈회(訓誨)를 받아서 스스로 잡아서 행하는 바가 모두 학문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대개 깊이 얻은 바가 있어서 그럴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도 그 사실을 잘은 모른다. 다만 집에 있을 때와 관에 있을 때에 두드러지게 드러난 한두 가지 일만을 거론할 수 있을 뿐이었다.”하였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공이 출생하여 8세 때에 부친을 여의였으니 지성으로 추모하였으며 이것이 선조에 까지 미쳐서 제사에는 예절을 다하고 모부인(母夫人)을 받들매 효도하고 순종하였다.

도사공(都事公) 응기(應期) 묘비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문동리

상(喪)에 임하여서는 여묘(廬墓)를떠나지 않고 3년을 다 마쳤다. 집에 사당(祠堂)이 있었는데 오래되어 도궤상태(倒壞狀態)에 이르렀다.

가난을 무릅쓰고 힘을 다하여 중수(重修)하였는데 칠이끝나기 전에 임종(臨終)하여 다른 말은하는 것이 없고 사당 얘기뿐이었다. 남과교유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평생을두고 아는 사이라도 명성과 지위가 높아지면 찾아가 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세속 사람들이 그러한 사람에게 열중하는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오직 술을 즐겨서 사람들과 마시면 반드시 취해야만 그만 두었다.

벼슬은 음직(蔭職)으로 들어갔으나 직책을 완수하는 외에는 더욱 구차스러운 짓은 하지 않았다. 사정(私情)으로 송사(訟事)를 좌우하지 않았으며 토산물 따위를 가지고 가서 찾는 일이 없었다. 직을 그만 두게 되었을 때 남들은 그 억울함을 말하였으나 스스로는 아는 바 없다는 듯이하였다. 가정에 돌아와서는 쌀독이 비는 일이 자주 있었으나 태연하였다.

또 말하기를“공의 부친 봉사공(奉事公)은 효성과 우애가 하늘에서 내려준 것이어서 거상(居喪)할때 흰 제비를 감동시켜 와서 깃들도록 하였다. 규암이 적소에 있을 때 거기에 마음을 쓰고 자기 집안일은 등한히 하였으니 남들은 하기 어려운 일이다. 공의 가정 내의 행실은비단 규암으로부터 얻은 바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숙인이씨(淑人李氏)한테서도 얻은것이다.”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씨가 또한 현덕(賢德)이 있는 가정에서 태어나서 출가하여 행적(行蹟)이 전하여져 있는 것은 남편의 뜻을 좇고 자녀를 가르치고 하인을 부리는데도 법도가 있어서 안일한 자세를 취하거나 오만한 말을 입 밖에 나타내지를 않았으니, 친척과 이웃 마을 사람들이 다 그 현숙함을 일컬었다.

한번은 저녁에 앉아 있노라니 도깨비 불이 먼 데서 접근하고 있었다. 집안사람들이 놀래어 당황할까 하여 잠자코 가리켜 말함이 없이 스스로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이러한 등속이 규방 부인이 능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공이 집을 다스리고 내조가 있어서 서로 아름다움을 이룬 것이 또 이와 같 다.” 하였다. 내가 몸을 일으켜 탄복하여 말하였다.

“이러한 경위가 있었구나! 공의 행실 이 나오는 근본이 있었고 또 이어가는 근본이 되겠구나. 장차 그 자제나 자제들의 형제 에 있어서 더욱 끊어지지 않으리라!”그리고 다시 그 가계(家系)의 시말(始末)을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송씨는 은진현에서 나왔다. 고려조부터 의관(衣冠)을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증조는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 여해(汝諧)고, 조부는 증직이 호조참판(戶曹參判)인세량(世良)이고, 부친은 곧 봉사공(奉事公) 귀수(龜壽)다. 종묘서(宗廟署)의 일을 맡았었다. 이씨(李氏) 마전 군수(麻田郡守) 귀연(龜淵)의 따님과 혼인하여 가정(嘉靖) 신묘(辛卯)에 공을 낳았다.

공의 이름은 응기(應期)고 자는 중우(仲遇)다. 참봉을 지낸 것이두 번이니 예빈시(禮賓寺)와 목청전(穆淸殿)이요, 봉사(奉事)를 지낸 것이 두 번이니 사온서(司醞署)와 광흥창(廣興倉)70)이요, 직장이 된 것은 풍저창(豊儲倉)71)이요, 주부(主簿)가 된 것이 두 번이니 종부시(宗簿寺)72)와 내자시(內資寺)73)요, 현감이 된 것이 두 번이니 청산(靑山)과 비안(比安)이요, 사헌부에는 두 번 들어가 모두 감찰(監察)이 되었다. 그리고 나서 조금 승진하여 사복시 판관(司僕寺 判官)74)과 의빈부 도사(儀賓府 都事)를 역임하고 타계하였다. 타계한 해는 만력(萬曆) 1584년이니 향년 54세였다. 이해 4월에 청주 저자산(楮子山) 선영에 안장하였다. 숙인이씨(淑人李氏)는 적(籍)이 광주(廣州)니 병조판서(兵曹判書) 윤경(潤慶)의 따님이다. 공보다 6년 앞에 타계하였다.

무릇 5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 흠조(欽祚)는 지운(池芸)의 따님과 혼인하여 1남을 두 었다. 아직 어리다. 재취는 김자건(金自健)의 따님이다. 차자는 곧 승조(承祚)니 선공감감역이다. 경상도 관찰사 이산보(李山甫)의 따님과 혼인하여 2남을 두었다. 아직 어리다. 제3자 천조(天祚)는 김원경(金元慶)의 따님과 혼인하였으나 조사(早死)하였다. 그다음은 방조(邦祚)와 갑조(甲祚)다. 아직 어리다.
큰 따님은 박경심(朴慶深)에게 출가하였다. 둘째 따님은 어리다. 규암선생은 인수(麟壽)가 그의 이름이다. 명에 가로되 집에서 한 일이나, 관에서 한 일이나, 비록 크지는 않으나 볼만한 것이 있도다. 간이 최립 지음



습정공 방조(習靜公 邦祚)

병마평사(兵馬評事) 방조(邦祚)는 1567년(명종 22) 8월 22일에 도사(都事) 응기(應期)와 숙인(淑人) 광주이씨(廣州李氏) 사이에 태어났다. 자가 영숙(永叔)이고 호가 습정(習靖)인 그는 6~7세 때 속문(屬文)75)할 줄을 알았고, 언어와 행동에 구차한 데가 없었다. 12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슬퍼하고 사모하였으며,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도 예를 따라서 어긋남이 없었다.

이로부터 학문에 분발하여 학문이 더욱 진취하였다. 1590년(선조23)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얼마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족을 이끌고 충북 영동으로 피난하여 현감(縣監) 한명윤(韓明胤)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그 막하에서 전략을 도왔다. 1606년(선조 3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갔고 이어 권지정자 겸 훈련도감 낭청(權知正字 兼 訓練都監 郞廳)76)에 승진한 뒤 다 시 박사(博士)에 승진하고 만기가 되자 전적(典籍)이 되어 영남지방의 향시(鄕試)를 관장하였다. 이후 함경도와 평안도로 통하는 대로를 관장하는 금교도 찰방(金郊道 察訪)에 임명되었다.

벼슬아치들의 행차가 빈번하여 우졸(郵卒)들이 일을 감내하기가 어려워 도망치는 자가 많았다. 그가 실정을 상세히 열거하여 장계를 올리고 마음을 다하여 거두고 돌봐 주었다. 왕명을 띠고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법에 따라 말을 공급하였다.

비록 명망과 지위가 높다 하더라도 가차 없이 하였다. 그 때 마침 어느 어사(御使)가 세력만믿고 금지사항을 어겼다. 이에 그가 장계(狀啓)를 올려 탄핵(彈劾)하였더니 오히려 사소한 법률로 사람을 사주하고 법을 적용하여 그를 구치하였다. 왕이 그 사정을 알고 내놓도록 명령하였다.

오랜 뒤에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제수 받았으나, 탄핵을 받아 그 자리를 떠났다. 곧 고산도 마승(古山道 馬丞)775) 등을 역임하고 얼마 뒤 명(明)나라가 후금(後金)을 치려고 우리나라에 호응을 요청하자, 평안도 병마평사(平安道 兵馬評事)로 임명되었다. 이때 명나라로 들어가는 보빙사(報聘使)의 짐을 검색하려고 용천관(龍川館)에 갔다가 갑자기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이때가 1618년(광해군 10) 5월 25일이었다.

습정공(習靜公) 방조(邦祚) 묘역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 화당리

향년 52세였다. 이해 11월에 영동군 심천면 기호리 기장산(耆藏山) 갑향(甲向)에 안장하였다 가 뒤에 청원군 남일면 화당리 무좌(戊坐)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사후에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행장은 조카 문정공 시열이 지었고, 묘의 좌측에 본비가 있는데 우암 문정공 시열이 찬서(撰書)해서 1664(효종 5)년에 세웠다. 300m 아래에 다른 비석이 있다. 묘갈은 김문정공(金文正公) 상헌(尙憲)이 지었으며, 이질(姨姪) 송문정공(宋文正公) 준길(浚吉)이 쓰고,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이 전(篆)하였다. 묘지명(墓誌銘)은 사대문장가중 하나인 계곡(谿谷)문충공(文忠公) 장유(張維)가 지었다. 초강서원(草江書院)에 배향되었었다. 유고(遺稿)가 전한다.

배위 숙부인(淑夫人) 진주정씨(晋州鄭氏)는 감정(監正) 곡(谷)의 따님으로 1570년(선조 3) 8월 11일에 태어나 1624년(인조 2) 7월 26일에 타계하여 부군과 합폄하였다. 묘지는 계곡(谿谷) 장유(張維)가 지었다. 슬하에는 시영(時榮), 시형(時瑩), 시염(時琰), 시담(時倓)의 4남이 있다. 시영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절사한 충신으로 야은충현공파(野隱忠顯公派)의 파조(派祖)이고,시형은 우봉공파(牛峰公派)의 파조(派祖)인 응광(應光)의 3남이자 종숙(從叔)이 되는 희조(熙祚) 앞으로 출계(出系)하였으며, 시염(時琰)은 빙호공파(氷壺公派)의 파조이고, 시담은 부훤당공파(負暄堂公派)의 파조이다. 하지만 이들 두 파는 이전까지 문도재파(聞道齋파)라 불러왔다.

그 뒤 1970년대 은진송씨대종중(恩津宋氏大宗中)에서는 습정공(習靜公) 방조(邦祚)의 자손 중 둘째자제와 셋째자제인 시염(時琰)과 시담(時倓)을 묶어서 습정공(習靜公)의 손자이자, 시염(時琰)의 자제인 문도재(聞道齋) 기후(基厚)의 호를 따서 문도재파(聞道齋派)라 하던 것을빙호공(氷壺公) 시염(時琰)의 자손들은 그의 호를 따서 빙호공파(氷壺公派)로, 부훤당(負暄堂) 시담(時倓)의 자손들은 그의 호를 따서 부훤당공파(負暄堂公派)로 각각 나눈것이다. 습정공 방조는 도량이 넓기로 소문이 나 있는데 그 넓은 도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송씨가전』에 전한다.

1. 습정공 방조가 평사(評事) 벼슬을 하여 관서지방에 부임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 때가 미침 여름철이라 더위가 심했다. 그래서 가죽 신발을 벗어서 역졸(驛卒)에게 맡기고 짚신으로 갈아 신고 가는데 도중에서 역졸이 그만 그 가죽신발을 잃고 말았다. 사색이 된 역졸은 습정공에게 다가가 “나리의 신발을 잃었으니 죽을죄를 졌습니다.

갑자기 새 신발을 사서 올리려 하여도 그와 같은 신발이 없으니 어쩌면 좋겠습니까?” 하고 백배 사죄하였다. 이 역졸의 말을 듣고 습정은 웃으면서 “잃은 것이 없으면 어찌 얻는 것이 있겠는가?” 하면서 다시는 그 신발에 대하여 묻지 않고 친구에게 빌려 신었다. 그 역졸은 감격하여 울면서“이 같이 너그러운 어른이 세상에 다시없다.”고 하였다.
『송씨가전』

2. 습정공과 수옹공은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한 때 습정은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정씨 댁에서, 수옹은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 곽씨댁에서 각각 처가살이를 하였는데 그 거리는 불과 10여 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형제는 우애가 남달라 4~5일에 한 번씩은 반드시만나서 형제간의 정을 돈독히 하였다. 그들이 만날 때에는 이따금 노비가 없이 말을 타고 다녔는데, 하루는 습정이 아침 일찍 구룡촌에 와서 저물어서야 돌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수옹은 종부(從扶)라는 이름을 가진 노비를 하나 불러서 습정을 모시고 가도록 하였는데 그 노비가 이미 늙고 병이 들었는지라, 강가에 이르러 습정은 늙은 노비에게“네가 이미 늙고 병마저 들었으니 내가 차마 찬 어름 물속에 너를 들어가도록 할 수는없구나.”

고 하며 자신이 직접 말을 몰아 물을 건넌 뒤 그 말을 도로 건너보내어 늙은 종으로 하여금 타고 건너게 하였다. 그 얼마 뒤 습정이 타계하자 그 노비가 울부짖으며“이처럼 어진 군자가 어찌 장수를 못하시고 일찍 세상을 뜨셨는고?”하였다. 『송씨가전』

3. 습정공이 오랫동안 처가 정씨 댁에 머물면서 네 아들과 두 딸을 기르니 장인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습정공의 가족을 보살폈으나, 오직 처갓집 큰조카가 성격이 편협하고 과격하여 항상 성우계, 이율곡 두 선현을 욕하곤 하였다. 이에 습정공은 힘주어 그렇지 않다고 다투니 나중에는 장인마저 사위에게 노여움을 품었다. 하루는 습정공이 친구 박정로(朴廷老)와 함께 영동군 양산에 있는 강선대(降仙臺)에가서 놀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노여움을 풀지 않은 장인은 습정공에게 말을빌려줄 생각이 없는지라, 습정공은 유연히 뜻을 넓게 가져 노복으로 하여금 마을의 소한 마리를 빌려 질마를 지워서 타고 떠나니 박정로가 희롱하면서“그대 무슨 일로 목동의 길을 걷는가?”

하니 습정공이 웃으면서“속담에 말이 가면 소도 또한 간다고 하니, 내 오히려 그대보다 앞서서 도착하리라.” 하였다. 그 때 영동, 옥천 사람이 강선대에 많이 모여 소를 탄 까닭을 물으니 습정공은“내 비록 소를 타고 왔지만, 말을 탄 사람과 동시에 왔으니 물어 무엇 하겠는가?” 하였다. 친구 박정로는 뒤에 습정공의 소를 탄 내력을 자세히 듣고“습정의 덕량이 크고 두터워 내 감히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라.”라고 하였다. 『송씨가전』

습정공(習靜公) 방조(邦祚) 묘비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 화당리

습정공이 장가를 들 때의 이야기습정공은 마음에 품은 뜻이 넓고 굳세며, 어질고 착했다. 또한 용모는 단정하며 행동은 착하고 엄숙하여 바라보기가 매우 두려운 위엄마저 갖추고 있었다. 습정공이 서울 반송방 유점동에 살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충청도 영동에 산다는 선비 하나가 유점동 집에 찾아와서 습정공에게 잠시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고 청했다. 이에 습정공은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기꺼이 맞아서 그선비와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선비는 진주정씨의 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에게는 마침 당년한 따님이 있어 사윗감을 수소문하다 보니 누가 습정공을 귀띔했기 때문에 그날 사윗감으로 합당한가 보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정선비는 습정공을 만나보자마자 우선 외양부터 마음에 흡족하게 들어 행여나 이 청년을 사위로 삼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 두려워 가까운 친구에게“내 근일에 송 아무개를 만나보았는데 그 사람의 인품이 내 마음에 만족히 들었는데 행여나 그 혼사가 어긋날까 두려워서 심화(心火)가 일어 발광할 지경일세.”

라고 하였더니 또 다른 친구의 집에 가서 습정공의 글씨를 얻어 보고는 영동으로 돌아가서 집안 식구들에게 말하기를“그 다른 일이란 말할 것도 없이 우선 글씨 하나만 보아도 가히 사위를 삼음직하다.”고 하였다. 그 뒤 습정공이 영동의 그 정씨 집안으로 장가를 들고 시골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입은 옷이 모두 시골티를 못 벗은지라 누님이 습정공에게“이 의복을 입고 서울에 올라가면 서울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 분명하니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이냐?”

하고 말하니 습정공은“누님! 그것이 무어 그리 대단한 일입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누님은“어찌 남의 비웃음을 받는 것이 괜찮단 말인가?” 하고는 습정공이 서울에 올라갈 때를 맞추어 고쳐 입혔더니, 그 뒤 습정공이 처가에 가면서 그 옷을 입고 갔다. 정씨 집안에서는 옷을 고친 것에 대하여 크게 노하여“그 어떤 처자이기에 이렇듯 범람한 짓을 했는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습정공의 부인 정씨는 말도 않고 어른들의 노한 소리를 조용히 듣고만 있더니뒤에 시누이에게 편지를 써서 옷을 고쳐준 데 대한 고마움을 간곡히 치하했다고 한다.
『송씨가전』, 가문전래구전

습정공방조묘지명

만력(萬曆) 무오(戊午) 5월 모(某)일에 평안평사(平安評事) 송공이 어사(御使)의 임무를 띠고 의주(義州)에 부임하다가 도중에 용천 전사(龍川 傳舍)78)에서 타계하였다는 부고(訃告)가 오자 무릇 공을 아는 사람은 모두 놀라고 당황하여 미친 듯 날뛰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아니, 이 사람이 어찌 갑자기 죽었단 말인가? 이 사람이 갑자기 죽다니 하늘의 일이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어서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잘 주재(主宰)하지 못한 것이로구나. 이 사람이 어찌 갑자기 죽었단 말인가?”그리고는 서로 통곡하고 또 말하였다.

“이 사람이 과연 죽었구나! 세상이 쇠하는 게로구나! 그러나 사람이 하늘을 이길 수있겠는가? 이 사람인들 어찌 죽음이 없을 수 있겠는가?”그러고는 그의 댁에 가서 조상하고 부의하였다. 행의를 기록하여 힘 빠진 모습으로 나를 찾아 와서 묘지명을 청하여 말하였다. “이미 봉분은 끝났습니다. 글을 비워 두었으니 그대의 글을 얻어 돌에 새겨서 묻을까 합니다.”

아! 내가 어찌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이미 죽은 사람도 알 것이니 반드시 이것 때문에 뒤에 죽는 사람에게 누가 될 것이니 내가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살펴보건대 공의 이름은 방조(邦祚)이고 자는 영숙(永叔)이다. 공의 시조는 은진 사람이니 고려 때부터 이미 의관을 배출하는 집안이 되었다. 증조 세량(世良)은 증직이 호조참판(戶曹參判)이고 조부 귀수(龜壽)는 종묘서 봉사(宗廟署 奉事)다. 그의 계씨가 규암문충공선생(圭菴文忠公先生) 인수(麟壽)이니 학문과 행실로써 세상에 이름이 있다.

공의 부친 응기(應期)는 의빈부 도사(儀賓府 都事)이고 모친 숙인이씨(淑人李氏)는 판서 윤경(潤慶)의 따님이다. 공이 낳아서부터 남다른 점이 있어 6~7세 때 속문(屬文)할 줄을 알았고 언어 와 행동이 구차한 데가 없었다. 이를 가는 나이를 지나서 조모가 타계하니 곧 음식을 먹지 않았다.

유모가 억지로 권하면“부모가 울고 통곡하시는데 음식이 어찌 넘어가겠는가?”라고 하였다. 12세에 모친상을 당하여서 소식(素食)79)할 줄을 알았으며 슬퍼하고 사모하였다. 듣는 사람이 모두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도사공의 상을 당하여서는 예법에따라서 어긋남이 없었다. 서모 권씨(權氏)를 섬김에 생모(生母)처럼 하였다.

이로부터 뜻을 분발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학문에 더욱 정진하였다. 그리하여 경인년(庚寅年)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양친에게 미치지 못하는 이유로 잔치를 베풀지 않았다. 임진란 때 왜구(倭寇)가 도성(都城)을 함락시켰으므로 가족을 이끌고 충청도로 피난하였다. 마침 들으니 영동현감(永同縣監) 한명윤(韓明胤)이 의병을 모집한다고 하므로 거기에 따르려 하였다. 친족들이 다“열 식구를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하고 말렸다.

그러나 공이 분발하여“임금이 몽진(蒙塵)80)하는데 지금이 어느 때라고 사사를 돌볼 겨를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한공(韓公)의 막하(幕下)에 들어가 전략(戰略)을도와서 공로가 대단하였다. 상소문, 격문, 궁중 서신 등이 모두 공의 손에서 나왔다. 사람들이 그 재주를 칭찬하였다. 오랜 뒤에 전쟁이 끝났다. 그리하여 고향에 돌아갔다. 병오년(丙午年)에 통경(通經)81)으로 대과(大科)에 급제하였다. 드디어 선발되어 괴원(槐院)82)에 들어갔다. 그 때 동종(同宗)83)으로 요로에 있는 사람이 있어서 안부인사로 찾아 오고 가까이 하였다. 공이 자기들 파에 끼어 넣으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공은 한마디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어 정자 겸 훈련도감 낭청(正字 兼 訓練都監 郞廳)으로 승진되어 군무를 다스리니 군 행정이 엄격하여 사졸들이 그 위엄과 은혜에 심복하였다. 박사(博士)84)에 승진하였는데 그 때 마침 신진을 선발하는 데 급제한 사람들 중에 시험관의 친척들이 많았다. 뒷공론이 시끄러웠다. 공이 맨 먼저 이 말을 꺼내어“선발하는 법에 맞지 않아서 대개 권세 있고 존귀한 사람들의 자제가 많다.”고 하였다. 다른 동료들은 우물우물하고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는데 공은 의연히 이 말을 고집하니 모든 동료들도 책할 수도 없었다. 이때부터 공을 미워하는 사람이 많아져서 기회만 있으면 물어뜯고 늘어졌다.

임기를 끝내고 규정에 의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으로 승진하였다. 이어 경상좌도(慶尙左道)의 향시(鄕試)의 시험관을 임명 받았다. 공이 시험장의 방금(防禁)85)을 엄격히 하여 실력 있고 충실한 사람을 선발하였다. 영남의 인사들이 흡연히 열복하였다. 얼마 뒤 금교도 찰방(金郊道察訪)에 임명되었다. 금교도는 서관(西關)86)으로 통하는 대로(大路)이다.

습정공(習靜公) 방조(邦祚) 비갈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 화당리

벼슬아치의 행차가 연락부절하였으므로 우졸(郵卒)87)들이 명을 받들어 동분서주하기에 감내하지 못하여 도망쳐서 없어지곤 하였다. 공이 실정을 상세히 들어서 장계(狀啓)를 올리고 마음을 다하여 거두어주고 돌봐 주었다. 또 각 병참(兵站)에 있는 곡류(穀類)를 갖다가 마직(馬直)88)에게 충당하였다. 왕명을 띠고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법에 의하여 말을 공급하였다.

비록 명망과 지위가 높다 하더라도 조금도 가차 없이 하였다.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쇠잔한 것을 회복하고 폐단을 보충하여 넉넉히 효과를 거두었다. 마침 수의사자(繡衣使者)89)가 세력만 믿고 금지사항을 범법하였다. 공이 장계를 올려 탄핵하였다.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참 장하다고 일컬었다. 그러나 중상(中傷)을 받지 않을까걱정하였다. 과연 미묘한 법문(法文)으로 사람을 사주하고 법을 적용하여 공을 구치하였다.

왕이 그 사정을 알고 내놓도록 명령하였다. 오랜 뒤에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제수받았다. 탄핵을 받아 그 자리를 떠났다. 곧 고산도 찰방(高山道 察訪)에 임명되었다. 역이 철령(鐵嶺) 너머 있어서 사람들이 부임하기를 꺼리는 곳이다. 그러나 공은 기쁜 빛으로 부임하여 치적(治績)이 금교역에 있을때와 같았다. 역의 관속들이 그 치적을 비에 새겨서 덕을 칭송하였다.

감사(監司) 최공(崔公) 관(瓘)이 사실대로 들어서 칭찬하여 위에다 아뢰었다. 그리고 늘사람을 대하면 칭찬하여“큰 그릇이다. 큰 그릇이다.”하면서 감히 하급 관리로대우하지 않았다. 만기가 되어 집에 돌아가서 가식(家食)90)하기를 수년 동안 하였다.

그때 마침 국가의 재정상 급히 수요를 댈 일이 생겨 조도사(調度使)를 두었는데 사자(使者) 윤공(尹公) 수겸(守謙)이 본래부터 공을 존중하였다. 그래서 종사관이 되어 주기를 청하였다. 공이 처음에는 한사코 사양하였으나 윤공의 끈질긴 권유로 마지못하여 응하였다. 윤공이공에게 해서일로(海西一路)91)를 맡겼다.

공이 물자의 유무를 감안하여 수송해서 백성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동시에 도전체로 이익이 되도록 하고 백성에게 손해를 주지 않고 국가로서는 더욱 이익이 되도록 하였다.
공이 스스로 단속하여 청렴하고 검약하며요점을 파악하여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였기 때문에 교역량이 특히 많았는데 탁지(度支)92)에서 포계(褒啓)를 올리기까지 하였다. 그 때 명나라에서는 오랑캐 국가인 청을 치려고 하여 서쪽 요새에 군대를 집결시켜 우리나라와 협공하려고 하였다. 마침 관서(關西)에 좌곤(佐閫)93)이 비어 있었다. 조정에서는 인선문제가 곤란하였다.

또 사람들이 거기가기를 꺼렸다. 그래서 공을 평안평사에 임명하였다. 그때 또 사신의 행차가 있었다. 그리하여 공에게 바로 어사의 직책을 띠게 하여 금지된 물품의 밀수입을 단속하게 하였다. 공이 마침 병이 있어서 그 직을 제수 받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대간(臺諫)94)들이 강요하므로 본의 아니게 억지로 취임하여 길을 떠났다. 행정구역 안에 들어서자 기다리고있던 사람들이 정계(旌棨)95)를 들고 나와서 맞이하였다.

공이 그것을 모두 물리쳤다. 무더위에 빨리 달리면서 일산(日傘)도 사용하지 않았다. 역관들이 와서 뵙기를 요청해도물러가도록 명령하였다. 용천군(龍川郡)의 양책관(良策館)에 도착하여 저녁 식사를 했다. 그 때까지도 아무 일이 없었다. 얼마 뒤 변소에 갔다 돌아와서 현기증이 나고 눈이잘 안 보이는 것 같았다. 밤이 오래 되어 곁의 사람이 비로소 깨달았다. 이미 어떻게 할수가 없게 되었다.

닭이 울 무렵에 운명하였다. 수행원들 중에서 공보다 뒤에 간 사람들이 부음을 듣고 급히 달려가서 그곳 수령과 함께 영(殮)을 하는 일을 돌보았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상(上)이 명하여 연도에서 반구(返柩)에 편의를 제공하도록 하였다. 공의 자제 모 등이 분곡(奔哭)을 마치고 난 뒤에 공의 계씨 갑조(甲祚)와 상여를 받들고 돌아가니 지나는 곳마다 아전과 백성들이 길을 메우고 눈물을 드리우며“착한 분이 돌아가셨구나!”라고 하였다. 이미 돌아가서 안장할 무렵에 회장한 사람이 여러 군에서 몰려들었다. 이 해 11월 모(某) 일에 영동(永同) 서기장산(西耆藏山) 갑향(甲向)의 자리에 안장하였다.

공의 사람됨이 침착하고 후중(厚重)하여 큰 도량(度量)이 있었다. 굳세고 바르고 곧아서 악하고 강한 자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집안에 있어서의 행실이 더욱 두터웠다. 아이때 어머니[大夫人]가 일찍이 희롱삼아 말했다. “네가 색을 좋아할까 내가 걱정이 된다.”공이 바로 대답하였다. “감히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자라서 일찍이 어머니에게 약속한 것을 생각하고 만일 이것을 진실하게 이행하지 않으면 사람의 아들 노릇을 못한다 고 하여 일평생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한번은 동사생(同舍生) 민욱(閔昱)과 밤에 늦게까지 앉아서 각각 뜻을 말하는데 공이“단지 충효와 결백으로 가성(家聲)96)을 떨어뜨리지 않기를 원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그뒤에 민공이 공의 조행(操行)을 주시하였는데 과연 그 말과 어긋남이 없었다. 공이 타계한 뒤에 민공이 울면서 칭찬하였다.

출세에 담박(淡泊)하였으며 집에 있을 때는 항상 침묵하면서도 화기(和氣)가 돌았다. 술을 많이 마실 줄 알았으나 어지러울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다. 그러나 악을 싫어하는 것이지나쳐 일에 임할 때에는 이해관계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낭패를 당하곤 하였다. 옥사에서 풀려나오자 친척들이 위로하고 조금 모를 깎으면 스스로 안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권유하였다. 공이 웃고서 “내가 감히 고집불통이어서가 아니다.

다만 스스로 신하의 직분을 다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기성랑(騎省郞)97) 때에 아는 친구 하나가 권세 있고 존귀한 사람에게 붙어서 좋은 자리를 얻었었다. 공이 일찍이같이 입직(入直)하는 자리에서 만나자 면전에서 수죄(數罪)98)하며 말하기를“자네가 무리를 지어 끝없이 악행을 저지르니 장차 화가 미치게 될 것이다. 친구 사이에 용납 못할 큰 사연이 있으면 끊는 것이 마땅하니 자네는 앞으로 나에게 바라지 마라”하니 그 사람이 부끄럽게 생각하고 감히 대답은 못하였지만, 뼛속 깊이 앙심을 품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공을 중상하고 말았다. 공이 병조에 있은 지 13일밖에 안 되었다.

향년 52세로 타계하였다. 정씨 가에 장가를 들어 네 아들을 두었으니 장자는 시영(時榮)이고, 차자는 시형(時瑩)이며, 그 다음 또 모모가 있다. 따님도 몇 있다. 내가 공보다 20세 연하이다. 내가 공을 처음으로 같은 관아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공이 나를 보조가 맞는 사람이라고 하여 아우처럼 아껴 주었다. 아마도 공을 잘 아는 정도나공에게 심복하는 깊이가 나와 같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돌아가신 공의 묘지명을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명에 가로되 순순(肫肫)했던 그 마음 도타우며 드넓었고성실한 듯한 그 인품 돌처럼 강직했지 어찌 꼿꼿하기만 하여 되풀이하여 헛디뎌서하늘이 마련해 준 긴 수명 막았는가. 사내장부 네 아들 공의 유지 받들텐데 하늘로 돌아간 고결했던 공의 심혼 나의 글 같이 있어 유택을 비추리라
계곡 장유 지음



경헌공 갑조(景獻公 甲祚)

경헌공 갑조(甲祚)는 1574년(선조 7) 윤12월 10일에 의빈부 도사(儀賓府 都事) 응기(應期)와 숙인(淑人) 광주이씨 판서 윤경(潤慶)의 따님 사이에 넷째로 서울 서대문구 반송방 유점동에서 태어났다. 자가 원유(元裕)이고 호가 수옹(睡翁)148)이며 시호가 경헌(景獻)인 그는 최립(崔笠)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고, 1617년(광해군 9)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그 뒤 광해군이 모후(母后)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인 경운궁(慶運宮)에 유폐(幽閉)하자,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으로서 인목대비(仁穆大妃)의유폐를 반대하다 유적(儒籍)에서 삭제되기도 하였다.

이후 회덕에 돌아와 후학양성에 힘쓰고 있던 중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서인(西人)이 집권하게 되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천거로 강릉 참봉(康陵 參奉)이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는 공주(公州)로 왕을 호종(扈從)하여 난이평정된 뒤 경기전 참봉(慶基殿 參奉)이 되었다. 그 뒤 1627년(인조 5)에 사옹원 봉사(司饔院 奉事)에 승진되었으나, 상경하는 도중 정묘호란(丁卯胡亂)으로 남하하는 세자 일행을 만나 완산(完山)으로 따라갔으나, 화의(和議)가 성립(成立)되자, 그길로 귀가 하였다가 병을 얻어 이듬해인 1628년(인조 6) 4월 1일에 타계하였다.

처음에는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 적등강(沃川郡 伊院面 九龍村 赤登江) 근처에 안장하였는데 그 수토(水土)가 천박(淺薄)하고 오환(五患)149)이 범함으로서1643년(인조 21) 2월 1일에 옥천군 남쪽 이산현 금당골(利山縣 金堂谷) 오향(午向)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가 1657년(효종 8)에 다시 지금의 대전광역시 동구 판암동 산소골 쌍청당 묘소 앞 임좌(壬坐)에 배위 선산곽씨와 함께 이장하였다150). 신도비는 3남 우암 시열(時烈)이 짓고 동춘당(同春堂) 준길(浚吉)이 쓰고 대제학(大提學) 김수항(金壽恒)이 전(篆)을 해서 1665(현종 6)년 3월에 세웠으며, 묘소 좌측에 있는 묘갈명은 청음 김상헌이 짓고 신독재 김집이 써서 1647(인조 25)년 8월에 세웠다. 우측에 있는 묘표음기는 동춘께서 짓고 쓴 비가 1653(효종 4)년에 세워졌다.(이질 姨妷 송준길 병서 이질이라는 표현이 나옴)

좌측에 있는 추기 신도비는 도곡(陶谷) 이의현(李宜顯)이 짓고 썼는데, 1726(영조 2)년 경헌이란 시호를 받은 사유를 기록하여 1747(영조 23)년에 세웠다. 경헌이란 시호를 내린 것은 수옹공 자신이 큰 절개가 있고 현철(賢哲)한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2021년 7월 19일 「수옹송갑조신도비 및 후기비」는 대전시 문화재자료 제66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행장(行狀)은 역시 3남 시열(時烈)이 지었다. 시장(諡狀)은 포암(圃庵) 윤봉조(尹鳳朝)가 지었다. 효종때 집의(執義)가 증직되고 현종 때 또 아들 시열(時烈)이 귀히 됨에 영의정(領議政)에, 영조 때 경헌공(景獻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뒤에 쌍청당, 박팽년(朴彭年)과 함께 회덕 정절사(靖節祠)에 배향되었다.

경헌공(景獻公) 갑조(甲祚) 묘역

대전광역시 동구 판암동 산소골

배위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선산곽씨(善山郭氏)는 충신(忠臣) 봉사(奉事) 자방(自防)의 따님으로 1578년(선조 11) 2월 14일에 태어났고 1655년(효종 6) 3월 9일에 타계하여 부군과 합폄하였다. 슬하에는 5남 2녀가 있는데 장남 시희(時熹)는 병자호란 때에 화를 입어 일찍 타계하여 자손이 없고, 차남은 진산군수(珍山郡守)를 지낸 진산공파의 파조 시묵(時默)이며, 3남은 동방의 큰 유학자로 이름을 떨친 우암 문정공파(尤庵 文正公派)의 파조인 시열(時烈)이다.

4남은 장성부사(長城府使)를 지낸 장성공파의 파조 시도(時燾)이고, 5남은 무주도호부사(茂朱都護府使)를 지낸 무주공파의 파조인 시걸(時杰)이다. 큰따님은 군수윤섬무(尹爓武)에게, 작은따님은 죽창(竹窓) 이시직(李時稷)의 아들 찰방(察訪) 이경(李憬)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저서로는『수옹일기(睡翁日記)』가 있다.
관련 유적으로는 자신의 출생지인 구룡촌에 유허비가 있고, 역시 그 마을 남쪽에 구택(舊宅)이 있으며 옥천군 이원면 원동리(院洞里)에는 그의 유모를 위하여 아들 시열이 세운〈유모헌비묘비(乳母憲菲墓碑)〉가 있다. 수옹에 관련된 몇 편의 이야기와 부인 곽씨의 덕행에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수옹이 장가든 이야기]
가난한 수옹이 장가를 들게 되었다.
어느 날 형님 습정공 방조가 갑자기 아우 수옹을 불렀다.
평소에 유달리 형님을 따르던 수옹은 형님에게 다가가서 급히 부른 이유를 물었다.
습정공은 아우를 앞에 앉혀놓고 조용히 말했다.

“우리 어머니 광주이씨가 본디 병약하여 너를 낳으시고는 병환이 더하시어 네 나이 4살 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너는 태어나자마자 병환 중인 어머니의 젖을 먹을 수가 없어유모 헌비(憲菲)와 출가한 박씨댁 누이(수옹의 큰누님)의 젖을 먹으면서 고생을 하고 자라더니 이제 장가를 들 나이에 이르렀구나. 마침 근자에 합당한 집안에서 통혼이 들어와서 지금 너와 더불어 상의코자 한다.” 이에 수옹은“형님! 그 규수의 집안은 어디에 사는 집안입니까?”하고 물었다.

“규수의 집안은 바로 옥천의 구룡촌에 사는 선산곽씨(善山郭氏) 댁이니라.”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수옹은“그 곽씨댁의 내력을 알고 싶으니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요”하였다. 습정공은 그 댁 내력을 다음과 같이 소상히 설명했다.

“규수의 아버지의 휘(諱)는 봉사(奉事) 자방(自防)이신데 효행이 깊더니 임진왜란이일어나자 조중봉(趙重峰)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치므로 그분의 휘하에 들어가니중봉이 크게 기뻐하여 참모로 삼으셨다. 그 때 감사(監司) 윤선각(尹先覺)151)이 중봉 선생을 밉게 보아 열읍(列邑)으로 하여금의병들의 부모 형제를 감옥에 가두니, 이 와중에 봉사공의 부친이 또한 옥천에 갇혔다.

이 소식을 듣고 봉사공이 즉시 옥천에 와서 뵈온 즉 그 부친은 꾸짖어 이르기를“이 어느 때이기에 네가 감히 사사로운 정을 돌아보느냐?”하였다.
“봉사공이 드디어 하직하고 중봉 선생과 더불어 금산 전투에서 장렬히 순절하셨느니라.”
그리고는 다시 수옹에게“우리 집이 유리전패(流離顚沛)152)하고 곽씨댁은 대대로 충효의 집이라 네 가히 그 댁의 사위가 됨이 마땅하니라.”라고 하였다.
“제 어찌 형님의 뜻을 거역하겠습니까?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수옹(睡翁) 유모(乳母) 헌비(憲菲) 묘역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원동리

수옹이 이렇게 대답하자, 곽씨댁과는 바로 혼인이 언약되었다. 그런데 막상 혼인날이 다가오자 걱정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워낙 가난한 처지라서예를 차릴 길이 없어 잔치를 크게 벌린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내거니와, 우선 혼인 당일에 초례청에서 쓸 나무 기러기[木雁]를 빌릴 방도가 없었고, 더구나 당일 신랑이 입을 옷이 없어서 낭패였다.

가족들이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우선 나무 기러기는 솜씨가 좋은 큰형님인 지례공 승조(承祚)가 만들기로 하고, 당일 입을 옷은 평소에 수옹이 친하게 지내며 신세를 가끔 지는 송첨지(宋僉知)153)에게 빌려 입기로 하였다. 그래서 혼인 전날에 송첨지에게서 먼저 옷을 빌리고 나무 기러기는 지례공이 하룻밤사이에 손수 만듦으로써 수옹은 드디어 곽씨댁에 장가를 들 수 있었다. 『송씨가전』

수옹의 유모비가 세워진 내력

충북 옥천군 이원면 소재지에서 경부 국도를 따라 영동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왼쪽으로 우암이 태어난 구룡촌의 입구가 나오고 여기서 500여 미터를 더 가면 원동리라는 마을에 이른다. 이곳에서 나지막하게 왼쪽으로 꼬부라진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고개 마루에 이른다. 이 고개 마루에서 왼쪽 낮은 산등성이를 올려다보면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묘와 함께 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이 묘가 바로 수옹 갑조에게 젖을 먹여준 유모헌비(憲菲)의 유택[묘]이며, 그 유택 앞에 서 있는 표석(表石)은 1688년(숙종 14)에 우암이 그의 나이 82세가 되던 해에 세운 비석이다.

우암의 아버지는 수옹이고, 수옹의 아버지는 도사(都事) 응기(應期)이다. 도사공은 광주이씨(廣州李氏) 병조판서 이윤경(李潤慶)의 따님과 혼인하였다. 이씨부인은 슬하에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수옹은 그 중 막내로 이씨부인의 나이 41세가 되던 해인 1574년(선조 7)에 태어났다. 이처럼 이씨부인이 많은 나이에 출산을 한 탓으로 몸이 쇠약해서 부득이 몸종인 헌비(憲菲)에게 젖을 먹이도록 부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수옹의 어머니는 수옹이 겨우 4살 때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니 수옹은 이 유모 헌비를 어머니처럼 따르며 그의 품에서 자랐다.

이 헌비는 본래 이씨부인의 친정댁 몸종이었는데, 이씨부인이 시집을 올 때 교전비(轎前婢)154)로 데리고 와서 길러 평생을 같이 살았다. 그 헌비는 자라서 강씨(姜氏) 성을 가진 사람과 혼인을 하였는데 그녀에게는 마침 수옹과 비슷한 또래의 수문(叟文)이라는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수옹이 이 헌비의 젖을 먹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이 수문과는 비록 신분상의 차이는 있으나 친형제처럼 다정하게 자랐다고 한다.

수옹과 유모와의 사이에 이러한 정이 있었기 때문에 수옹이 뒤에 구룡촌 곽씨댁으로 장가를 들고 처가살이를 할 때도 헌비는 이곳까지 따라와 함께 살게 되었고,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결국 수옹이 살던 집이 바라다 보이는 이 언덕에 묻히게 된 것이다.

그 유모비에는 증영의정 송공 수옹(贈領議政 宋公 睡翁)유모헌비지묘(乳母憲菲之墓)자강수문묘 재좌(子姜叟文墓 在左)숭정 육십일년 계 이월 일 입(崇禎 六十一年 季 二月 日立)이라는 내용이 세로 넉 줄로 새겨져 있다. 우암의 아버지에 대한 효성은 남달리 지극했다. 노년에 접어들면서 드디어 아버지가어릴 때 아버지에게 고맙게 젖을 먹여 키워준 유모에게까지 추모의 정을 쏟아 이처럼 자신이 직접 친필로 써서 비를 세운 것이다. 이 유모비는 당시의 엄격한 계급사회에서 노비가 정당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던 양반사회에서 우암 가문이 베풀던 인도주의적인 처사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의미를 가진다. <가문전래 설화 >

정경부인 선산곽씨의 덕행

곽씨부인은 수옹 갑조의 아내이자, 우암 시열의 어머니이다. 부인은 타고난 성품이 넉넉하고 활달하며 어질고 착해서 비록 집안은 몹시 가난했지만, 항상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였다. 정사년에 남편 수옹이 광해군에 의해 폐모가 되어 서궁(西宮)에 유폐된 영창대군의어머니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몰래 혼자 배알한 일이 있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수옹은 소인배들로부터 미움을 사서 큰 사건으로 점차 와전 확대되면서 머지않아 조정으로부터 엄명이 내려질 것이라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처럼 위급한 상황에 이르자, 곽씨부인은 자제들을 앞에 불러놓고“너희 부친이 다행히 나라로부터 가장 가벼운 죄가 내려져 유배를 가게 된다면 따라갈 노비가 없으니, 너희들이 바가지를 들고 밥을 구걸하여 마땅히 효양(孝養)하여야 할것이다.”하였다.

구룡촌의 같은 마을에 사는 박응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이 사람은 당질인 정길(鼎吉)에게 붙어서 인목대비를 폐모하자는 상소에 동참하고는 돌아와 “내 장차 찰방(察訪) 벼슬 하나는 따 놓은 당상이다.”하면서 자랑을 하고 돌아다녔다. 이 때 부인은“어미를 폐하고 이익을 얻고서도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고 오히려 자랑하고 다니니,정말 한심한 소인배로구나.” 하고 탄식하더니 그 뒤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성공하여 수옹이 즉시 벼슬을 받자, 부인은 오히려 기뻐하지 않고“사람들이 혹시 우리를 가리켜 좋은 시절을 만나 갑자기 득세하는 집안이 되었다고이를 것인 즉 부끄러움이 심하도다.”고 하였다. 한때 가뭄이 심하여 많은 사람들이 굶기를 밥 먹듯이 하였다. 어느 날 집안의 노비 하나가 새 저울대를 가지고 들어와 고하기를배고파 허기진 저울대 장수 하나가 이 저울대를 주면서 밥 한 사발과 바꾸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이 말을 듣고 부인은“만일 좋은 때를 만나서 서로가 이로움만을 요구하는 처지에 이른다면 이처럼 가슴아픈 일이 없을 텐데, 이렇듯이 모두가 가난함이 한스럽구나!”하면서 아침 죽을 덜어 주고는 그 저울대는 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고 한다. <가문전래 구전설화>

경헌공(景獻公) 갑조(甲祚) 묘비

대전광역시 동구 판암동 산소골

수옹경헌공묘갈명

고(故) 기성랑(騎省郞)155)송군(宋君) 영숙(永叔)은 내가 아주 존경하는 벗이다. 그를통하여 계씨 원유(元裕)가 있다는 말을 들었고 칭찬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였다. 그래서그의 행실을 물어 보았더니 뜻을 세워 바꾸지 않고 굳고 곧아서 스스로 개사(介士)156)를이루었다고 한다. 또 그 선세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모두 한결같니 똑같은 말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나의 향념(向念)157)은 더욱 더하여 항상 한 번 만나 보았으면 마음이 시원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군과 영숙이 다 불행하게도 만나 보지도 못한 채 고인이 되어 드디어 천추의 한을 맺게 하였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후일에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사적을 갖추어서 군을 위하여『속독행전(續獨行傳)158)을 저술하려고 하였으나 지금까지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군이 몰하였을 때에 여러 자제들이 다 어려서 그들의 선인 행적을 다 들을 수가 없었다.

그 뒤 19년이 경과하여 군의 셋째 아들인 시어(侍御)159) 시열(時烈)이 비로소 군의 유행(遺行)160) 수천 언(言)과 의리를 여러 사람들이 기록한 것을 다시 직접 정리하여 나를 찾아 와서 명을 부탁하여 “원컨대 한마디 해 주시어 지하에 게신 선친을 빛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하였다. 아! 내가 비록 늙고 병들어서 붓과 벼루를 멀리했다고 하나, 돌아보건대 군에 대하여는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삼가 살피니 군의 이름은 갑조(甲祚)고자는 원유(元裕)다. 스스로 수옹(睡翁)이라고 호하였다. 은진 사람이다. 시조는대원(大原)이니 고려 판사(判事)를 지냈다. 그 뒤에 사헌부 집단(司憲府 執端)을지낸 명의(明誼)가 있었고 조선조에 들어 와서 호를 쌍청당이라고 한 유(愉)가 숨은 군자의 행실이 있었다.

고조 여해(汝諧)는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를 지냈으며 조부 세량(世良)은 건원릉(健元陵) 참봉을 지냈는데 증직이 호조 참판이다. 조부 귀수(龜壽)는 종묘서 봉사(宗廟署 奉事)를 지냈다. 효도로 이름이 있었다. 거상할 때 흰 제비가 와서 여막에 깃들었다. 그의 계씨 인수(麟壽)는 세상에서 규암 선생(圭庵 先生)이라고 부른다. 송씨가 본래부터이름 있는 씨족이나 이에 이르러 더욱 성대하게 되었다.
부친 응기(應期)는 의빈부 도사(儀賓府 都事)다. 배위 이숙인(李淑人)은 판서 윤경(潤慶)의 따님으로 부덕을 아주 잘 갖추고 있었다. 만력(萬曆) 갑술(甲戌) 윤 12월에 군을 낳았다. 형제가 다섯인데 군이 막내이다.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맑고 준수하여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이숙인과 도사공이 잇달아 타계하였다. 탈상하고 스스로 독서를 힘쓰고 간이(簡易) 최립(崔笠)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최공이 그 총명하고 민첩한 것을 자주 칭찬하였다. 임진년(1592, 선조 25) 왜구(倭寇)를 피하여 호서(湖西)로 갔다. 학업을 팽개치고 스스로 안일을 취하는 사람이 많았었는데 군의 형제는 서로 경계하여 선대의 교훈을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고 하여 강(講)하고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정사년(丁巳, 1617 광해군 9년)에 사마 양시(司馬 兩試)161)에 급제하였다. 그때 간신들이 아첨하여 모후(母后)162)를 서궁(西宮:慶運宮)에 유폐시키고 조정의 의례조차 베풀지 않았다.

방수(榜首)인 이영구(李榮久) 등이 간사한 의론에 영합하여 상소하여 서궁에는 숙배하지 말도록 청하면서 제생에게 위협을 주어 거기에 연명하도록 하였으니 여러 사람들이 감히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으며, 혹 담을 넘어 피해 가는 자도 있었다. 그때 군이 분연히 떨쳐 일어나“일을 당하여 구차하게 면하는 것은 치욕이다.”고 하여 먼저 이 상소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물었다.

산소골 비석군(쌍청당과 수옹)
「쌍청당송유묘표」가 대전시 문화재자료 제65호로
「수옹송갑조신도비 및 후기비」가 대전시 문화재자료 제66호

대전광역시 동구 판암동 산소골

그 무리가 노기를 띠고 이름은 밝혀내려 하면서 겁을 주었다. 공이 서서히 말하였다. “나의 성명을알고 싶거든 붓을 가지고 오너라.”하고 큼직하게 성명을 써서 주고 곧바로 서궁에 가서혼자 사은숙배(謝恩肅拜)163)함을 평상시와 같이 하였다.

그 무리들이 성이 났으나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서 그 이름을 더럽히려는 계략으로 군의 성명을 상소문에 연명하였다. 간당들이 듣고서 함정에 집어넣으려 하였으나 마침 구원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유적(儒籍)164)에서 제적(除籍)만 하는 데에 그쳤다.

공이 곧 집으로 돌아가서 문을 닫고 책만 읽으니 쌀 두지가 종종 비었으나 공은 태평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그 의리를 듣고 사모하여 서당을 차려 놓고 공을 맞이해 들이니문전에는 항상 신발이 가득 차 있었다. 학규(學規:교칙)를 엄하게 하고 고훈(古訓)과격언을 걸어 지도하였다. 얼마 안 가서 성대하게 문풍(文風)이 일어 볼만하였다.
금상(今上) 초에 천거를 받아서 강릉(康陵)165) 참봉에 임명되었다.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능의 하인들을 선발하여 행오(行伍)에 참가하여 역적을 치고자 하였으나상사가 허락하지 않았다. 상께서 공주에 행행하였을 때 도보로 행재소(行在所)에 갔었다. 환가(還駕)하자, 경기전(慶基殿)166) 참봉으로 전임되었다.

정묘년(1627, 인조 5)에사옹원 봉사(司饔院 奉事)로 승진되어 서울로 올라갔다. 그때 마침 청나라의 침범으로다급하게 되었다. 상께서 강화도로 행행하여 미처 임명도 받기 전에 벼슬이 바뀌었다. 길에서 세자가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만나 따라서 전주로 갔다.

조정에서 항복하고 강화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군이 강개하여“비록 어쩔 수 없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나 존왕(尊王)하는 의리가 없어졌으니 먼저 오랑캐에게 항복한두 도적의 머리를 벤 다음에 강화를 해도 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미친 듯이 날뛰는 걸(桀)167) 같은 자의 콧날을 꺾고, 삼군의 사기를 조금은 진작할 수 있다.”하였다. 좀 뒤에 강화가 이미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견딜 수 없어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세상을 버리고 은거하려는 계획이 이미 결정되었다. 그런데 마침 장자 상을 당하여 이루지 못하였다. 이듬해 4월 초하루에 병으로 본집에서 몰하였으니 향년이 55세였다. 군의 천성은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있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슬퍼하고 사모하는마음이 쇠하지 않아 제사에는 반드시 정성껏 하고 슬퍼하였다. 중씨가 몰하여서는 적의 창끝을 무릅쓰고 시체를 찾아서 반구하여 안장하였다.

숙씨가 역병에 걸렸다는 소식을듣고는 지체 없이 분상하여 구하였다. 서모에 대하여도 역시 그렇게 하여서 마침내 집안이 다 무사하였다. 숙씨(叔氏)168)가 평안도 역사(驛舍)에서 몰하였을 때도 6월 더위에천리를 왕복하여 슬픈 기색이 길가는 데도 나타나서 보는 사람들이 혹 자백(子伯)169)이나 아닌가 의심하였다. 백형의 성질이 엄격하였으나 극진히 받들어서 마침내 그의 환심을 샀다.

이숙인(李淑人)의 남긴 교훈을 받들어서 평생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요란스럽고 번화한 음악과 기녀의 자리에서도 적료한 태도가 고목과 같았다. 평생 굳세고 절의를 좋아하여 고인의 자기 몸을 희생하여 인을 이룬 대목을 보면 격앙하고 흠선하였다. 일이 옳지 못하면 의리를 얼굴에 나타내어 백 번 꺾어도 굴하지 않았다.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추향(趨向)170)이 심히 바르므로 항상 정암(靜庵), 율곡(栗谷) 두 선생을 미루어서 스승으로 삼았다.

손수 기묘 사적(己卯 事蹟)171)과 격몽요결(擊蒙要訣)172)을 초하여 써서 여러 자제들에게 가르쳐 행실을 권장하였다. 뒤에 전주에서 근무할 때 서신을 보내어“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한 것은 성인의 이 이상 더 없는 교훈이다. 이 말을 지니고 행하여라. 세상이 어지럽다고 하여 학문을 게을리 하는 일이 없으면 마침내는 성취하는 바가 있을 터이니 내가 죽어도 유감이 없겠다.”고 하였다.

가정에서 사랑하는 자제들에게도 훈계하고 권면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군이 선비의행실에는 힘썼으나 평상시에 남을 접할 때는 안색과 웃음소리가 친근함을 주었다. 그러나 취할 것인가 버릴 것인가 혹은 경계선을 둘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에 이르러서는명백하였다.

경헌공(景獻公) 갑조(甲祚) 재실

대전광역시 동구 판암동 산소골

그리고 아름다운 행실을 보면 상대가 비록 미천하고 어린 아이라도 대접하기를 존귀한 사람처럼 하고 착하지 못한 것을 보면 안색이나 언사에 있어서 조금도 가차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꺼리는 사람이 많았다. 시속 사람들과 교유하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서로 내왕하는 사람은 두서너 일가와 친구에 지나지 않았다.

이 사람들과는 서로 지기가 통하여 환연히 산수간(山水間)을 거닐며 놀아 스스로 즐겼다. 처음에 이영구(李榮久) 등을 공격할 때 보는 사람이 서로 놀라서 전해지는 말을일러 주었으나 절대로 늦추지 않았다. 뒤에 서신으로 자기 자신을 변명하는 사람이 나타나서 이로 인하여 군의 사적이 크게 드러났다.

사람들이 더욱 더 어질게 생각하였다. 군의 가정에 있어서의 행실이 심히 구비하였으므로 그것을 다 기록할 수가 없고 대강 이와 같이 적는다.
군이 선산곽씨와 혼인하여 5남 2녀를 두었다. 장자 시희(時熹)는 군보다 먼저 죽었고,차자 시묵(時默)은 향천(鄕薦)으로 참봉이고, 제3자 시열(時烈)은 사마에 장원급제하였다. 유학으로 나라에서 불러서 지평을 제수하였다. 제4자와 제5자 다 유학을 업으로 삼고 있다. 따님은 각각 군수 윤섬무(尹爓武), 감역 이경(李憬)에게 출가하였다.

시묵이 3남 1녀를 두었으니 1녀는 사인(士人) 권오복(權五福)에게 출가하고 3남은 다 어리다. 시열이 2녀를 두었으니 각각 사인 권유(權惟), 사인 윤박(尹搏)에게 출가하였다. 군이 처음 몰하여서 옥천군 동쪽 적등강(赤登江) 상류에 안장하였으나 자리가 마땅하지 않으므로 계미 2월에 군 동남 이산현(利山縣) 금당곡(金堂谷) 오향(午向)의 자리에 이장하였다.

아! 하늘이 이미 정직하고 강대한 기운을 군에게 주었으니 세상에서 마땅히 담당할만한 일이 있을 터인데 마침내 침체하여 몰하도록 하니 조물주가 이 무슨 뜻인가. 그러나 그 세운 바 자취를 찾아보면 어찌 광류(狂流)가 부딪혀도 동하지 않는 지주(砥柱)173)가 아니겠는가.

아, 원유여!
뜻이 굳고 굳구나.
행실이 높고 높구나.
명성은 또 빛나고 빛나는구나.
누르려 들면 더욱 오르고
덮으려 하면 더욱 빛나네.
이 사람이여!
스스로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 바른 것을 잃지 않아 자제들의 여경을 두텁혔음을.
오직 하늘의 정함이여!
천백 세 내려가리.
이 비를 보는 사람이여!
지날 때 반드시 경의를 표하라
청음 김상헌 지음



학생공 응정(學生公 應禎)

모은공파(牟隱公派)의 파조 기상(基想)은 학생공(學生公) 응정(應禎)의 증손자이다.
학생공(學生公) 응정(應禎)은 1534년(중종 29) 3월 2일에 증 이조판서 서부공(西阜公)귀수(龜壽)와 증 정부인(贈 貞夫人) 고성이씨(固城李氏) 사이에 3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자가 사흥(士興)인 공께서는 1565년(명종 20) 9월 12일에 타계하였다.

『은진송씨보(恩津宋氏譜)』 즉 『정해대보(丁亥大譜)』에 보면 응정(應禎)은 슬하에 아들이 없다고 되어있어 자세한 내용은 징빙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근년에『덕은세첩(德殷世帖)』과 송재성(宋在晟)이 지은『학생공응정묘표(學生公應禎墓表)』에 따르면, 전하는 이야기에 따랐다는 전제 아래 공께서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여생(餘生)을 회덕에서 떨어져 남쪽으로 내려가 우연히 고부 소성방 중광리(古阜 所聲坊 中光里)에서 살다가 타계하였다고 한다.

학생공(學生公) 응정(應禎)과 이조(頤祚)의 묘역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

뒤에 공의 손자 통선랑(通善郞) 시픽(時煏)이 계담공(桂潭公) 국사(國士)가 마침 고창군수(高敞郡守)로 있을 당시 계담공을 따라가 고창 땅에서 살게 되었기 때문에 묘소도 또한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高敞郡 高敞邑 道山里)의 사좌(巳坐)의 자리에 이장하였다고 한다. 묘비는 12대손 정헌(正憲)이 짓고 재립(在立)이 써서 1950년에 세웠다.

배위는 순천김씨 광연(光淵)의 따님으로 1539년(중종34) 4월 16일에 태어나 1566년(명종 21) 8월 11일에 겨우 28세에 타계하여 부군과 합장하였다. 1남을 두었는데 직장(直長) 이조(頤祚)인데 젊은 나이에 타계하였고 손자 통선랑(通善郞) 시픽(時煏)도 조졸(早卒)하였다. 증손자 군수 기상(基想)은 병자호란 때 의리를 창도하여 이름을 냈다.

학생공(學生公) 응정(應禎) 묘비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

오랫동안 그의 자손들은 알려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응정(應禎)에서 이조(頤祚)—시픽(時煏)—기상(基想)으로 이어지는 그의 자손들이 전라북도 모양 지방(全羅北道 牟陽地方)인 고창(高敞)에서 숨어 살아왔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이 사실이 알려져 1963년 은진송씨대종중에서 발간한 『은진송씨선세문헌록』에 근거하여 기상(基想)을 파조로 하는 모은공파(牟隱公派)를 은진송씨의 한 파로 인정하였다. 1966년 병오(丙午)에 간행한『은진송씨대동보(恩津宋氏大同譜)』에 모은(牟隱) 기상(基想)의 호를 따서 모은공파(牟隱公派)로 실리게 되었다.

학생공응정묘표

학생공의 이름은 응정(應禎)이고 자는 사흥(士興)이다. 본관은 은진에서 나왔으니 고려 판원사(判院事) 대원(大原)이 시조다. 5대를 내려와 쌍청당(雙淸堂) 유(愉)가 이조에들어와서 덕을 숨기고 벼슬을 하지 않았으니, 그 높은 풍도와 높은 지조가 세상에 일컬어 사모하는 바가 되었다.

이 어른의 손자 순년(順年)은 호가 소요당(逍遙堂)이고 벼슬이 예조정랑(禮曹正郞)이니 바로공의 고조가 된다. 조부 여해(汝諧)는 예조참의(禮曹參議)로서 연산조(燕山朝)를당하여 청렴하고 정직하여 당국에 거슬려 옥천(沃川)으로 귀양을 갔다. 벼슬은안동부사(安東府使)다. 조부 세량(世良)은 참봉으로서 호조참판을 증직 받았다.

고(考) 귀수(龜壽)는 호가 서부(西阜)이고, 봉사(奉事)로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추증 받았다. 효성이 출천(出天)하여거상(居喪)할 때 흰 제비가 와서 깃들이는 기이한 일이 있었다. 비(妣)는 고성이씨(固城李氏) 귀연(龜淵)의 따님이다.

공이 중종(中宗) 갑오(甲午 : 1534) 3월 2일에출생하여 명종(明宗) 을축(乙丑 : 1565) 9월 12일에 타계하였다. 조졸(早卒)하여 구보(舊譜)219)에 아들이 없다[無子]라고 되어 있어 징빙할 바가 없고 약간의 전설이 있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거기에 따르면 그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회덕에서 유리(遊離)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우연히 고창 소성방 중광리(高敞 所聲坊 中光里)에 우거(寓居)하다가 세상을 떴다.

통선랑(通善郞) 시픽(時煏) 묘역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

그의 손자 통선랑공(通善郞公)이 일가 어른 계담공(桂潭公) 국사(國士)가 고창군수(高敞郡守)로 있을 때 따라가서 거기에서 살게 되었고, 묘소도 또한 고창 고을 서쪽 도산 후록(道山 後麓)의 사좌(巳坐)의 자리에 이장하였다. 배위는 순천김씨 광연(光淵)의 따님이다.

중종(中宗) 기해(己亥) 4월 6일에 태어나 명종(明宗) 병인(丙寅) 8월 11일에 타계하였으니 향년이 28세였다. 묘는 노례(魯禮)에 의하여 합장하였다. 1남을 두었으니 이름이 이조(頣祚)이고 관(官)은 직장(直長)인데 조졸(早卒)하였다.

손자 시픽(時煏)도 통선랑(通善郞)인데 또한 조졸(早卒)하였다. 증손 기상(基想)은 벼슬이 군수인데 병자호란에 의리를 창도하여 이름이 있다.
현손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아! 세대가 이미 멀고 문헌(文獻)이 미비(未備)하여 공의 사적을 상세하게 알 수가 없다.

구보(舊譜)를 상고하여 보면 자손들이 누락되어 있으니 혹 하향(遐鄕)에 유리(遊離)하다가 종적이 상세하지 못하여 그런 것인가? 지금 후손들이 번성한 것을 보니 주역의 이른바 비운(否運)은 가고 태운(泰運)이 오는 이치인가? 정자(程子)가 일찍이 문헌이 부족함으로써 100년의 집이 없는 것을 한탄하였으니, 송나라와 같은 문명을 가지고도 오히려 이와 같았으니 황차 우리나라와 같은 작은 나라에 있어서랴? 아! 아깝다. 12대손 정헌(正憲)이 장차 비(碑)를 세우기로 도모하여 13대손 재립(在立)이 묘문(墓文)을 요청하니 대강 위와 같이 적는다.
일가 후예 재성 지음



주석

  • 1) 후(侯) : 원 또는 관찰사를 의미한다.
  • 2) 호분위 사정(虎賁衛 司正) :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호분위 사정(虎賁衛 司正)이니 정7품 벼슬.
  • 3) 금상(今上) : 지금의 임금, 즉 중종(中宗)을 말함.
  • 4) 폐조(廢朝) : 연산군을 말함.
  • 5) 대명(大命) : 하늘의 인간 사회를 떠나라는 명령.
  • 6) 좌찬성(左贊成) : 의정부의 종1품 벼슬.
  • 7) 충좌위(충좌위) : 병전(兵典)에 속해 있는 오위(五衛) 중에서 전위를 맡아보던 군인.
  • 8)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 문무관의 정1품 품계.
  • 9) 종묘서령(宗廟署令) : 침묘(寢廟)의 수위를 맡아보던 관아의 정3품 벼슬.
  • 10) 헌납(獻納) : 사간원의 정5품 벼슬.
  • 11) 낭서(郞署) : 중요하지 않은 공무에 종사하는 관리. 12) 서윤(庶尹) : 한성부와 평양부에 두었던 정4품 벼슬.
  • 13) 별좌(別坐) : 교서관(校書館), 상의원(尙衣院), 군기시(軍器寺) 등에 두었던 정5품 벼슬.
  • 14) 연방(蓮榜) : 소과(小科) 즉 사마시(司馬試)를 말함.
  • 15) 수찬(修撰) : 규암의 벼슬.
  • 16) 태사씨(太史氏) : 중궁의 저명한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을 말함.
  • 17) 육경(六經) :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춘추(春秋), 예경(禮經), 악경(樂經).
  • 18) 정덕(正德) : 명(明)나라 무종(武宗)의 연호.
  • 19) 당로(當路) : 요직(要職)에 있음.
  • 20) 광흥창수(廣興倉守) : 관리의 녹봉을 맡아보던 관아의 정4품 벼슬.
  • 21) 추은(推恩) : 공로에 대한 은공을 선대에까지 확충하다.
  • 22) 난조(鸞鳥) :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새.
  • 55) 삼기(三紀) : 1기는 12년이니 3기는 36년임.
  • 56) 선릉(宣陵) : 성종(成宗)의 능.
  • 57) 건원릉(健元陵) : 태조(太祖)의 능.
  • 58) 감실(龕室) : 신주를 안치하는 쏙 들어간 장소.
  • 59) 우봉공(牛峰公) : 응광(應光).
  • 60) 삼현(三賢) : 서부공(西阜公) 송귀수(宋龜壽), 규암 문충공(圭庵 文忠公) 송인수(宋麟壽), 동주공(東洲公) 성제원(成悌元).
  • 61) 칭도(稱道) : 늘 칭찬하여 말함.
  • 62) 후명(後命) : 귀양을 간 사람이 사사(賜死)의 명을 받는 것.
  • 63) 사판(祠版) : 위패(位牌)를 말함.
  • 64) 홍치(弘治) : 명나라 효종(孝宗)의 연호.
  • 65) 유곤(庾袞) : 중국 진(晋)나라 사람. 명목왕후의 큰아버지로 근검하고 효성과 우애가 뛰어나서 이름이 났다.
  • 66) 종묘서 봉사(宗廟署 奉事) : 종묘의 수위를 맡아보는 관아의 종8품 벼슬.
  • 67) 질녀(姪女) : 규암의 따님.
  • 68) 사복시 판관(司僕寺 判官) : 가마와 말을 맡아보던 관아의 종5품 벼슬.
  • 69) 사평(司評) : 장예원(掌隷院)의 정4품 벼슬.
  • 70) 광흥고(廣興庫) : 백관의 봉록을 맡아보던 관아.
  • 71) 풍저창(豊儲倉) : 쌀, 콩, 자리, 장판 등을 맡아보던 관아.
  • 72) 종부시(宗簿寺) : 왕실의 족보, 종실의 비위 사실 등을 맡아보던 관아.
  • 73) 내자시(內資寺) : 궁중에서 필요한 쌀, 국수, 장, 기름, 꿀, 채소, 과실, 직조물 등을 맡아보던 관아.
  • 74) 사복시 판관(司僕寺 判官) : 관아와 말을 맡아보던 종5품 벼슬.
  • 76)에 승진한 뒤 다시 박사(博士)에 승진하고 만기가 되자 전적(典籍)이 되어 영남지방의 향시(鄕試)를 관장하였다. 이후 함경도와 평안도로 통하는 대로를 관장하는 금교도 찰방(金郊道 察訪)548 恩津宋氏世蹟史 은진송씨세적사
  • 75) 속문(屬文) : 보통 하는 말을 한문으로 옮겨 쓰는 것.
  • 76) 훈련도감 낭청(訓練都監 郞廳) : 훈련도감은 임진왜란 후에 새로 설치한 무(武)의 관아(官衙). 낭청은 낭관(郞官)이라고도 하며 각 관아의 당하관(堂下官)의 총칭. 에 임명되었다.
  • 77) 고산도 마승(古山道 馬丞) : 함경도에 있는 남산(南山), 철령(鐵嶺), 주천(酒泉), 덕산(德山) 등 13개소의 역을 관할하던 우두머리.
  • 78) 전사(傳舍) : 찰방(察訪)이 다스리는 각 도로(道路)의 역사.
  • 79) 소식(素食) : 채소만 먹고 육식을 하지 않음. 80) 몽진(蒙塵) : 임금의 피난,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뜻이다.
  • 81) 통경(通經) : 경서를 강의하는 것.
  • 82) 괴원(槐院) : 승문원(承文院)의 다른 이름. 외교문서를 맡아보는 관아.
  • 83) 동종(同宗) : 동성동본(同姓同本)의 비교적 먼 일가.
  • 84) 박사(博士) : 성균관의 정7품 벼슬.
  • 85) 방금(防禁) : 막다. 즉 타인의 출입을 못하도록 하는 울타리 등을 말함.
  • 86) 서관(西關) : 함경도와 평안도.
  • 87) 우졸(郵卒) : 역에 근무하는 하인.
  • 88) 마직(馬直) : 역에서 말을 지키는 사람.
  • 89) 수의사자(繡衣使者) : 수의사(繡衣使)라고도 함. 어사를 영화롭게 일컫는 말.
  • 90) 가식(家食) : 벼슬을 물러나서 집에 있음.
  • 91) 해서일로(海西一路) : 황해도 일부.
  • 92) 탁지(度支) : 호조(戶曹)를 일컬음.
  • 93) 좌곤(佐閫) : 병마절도사를 돕는 우수(虞候), 평사(評事) 등을 말함.
  • 94) 대간(臺諫) : 사헌부의 지평(持平) 이상의 벼슬을 말함.
  • 95) 정계(旌棨) : 깃발의 종류. 귀인을 맞이할 때 사용함.
  • 96) 가성(家聲) : 집의 명예.
  • 97) 기성랑(騎省郞) : 기성(騎省)은 병조(兵曹). 랑(郞)은 랑관(郞官) 즉 당하관(堂下官).
  • 98) 수죄(數罪) : 죄목을 대다.
  • 148) 수옹(睡翁) : 만년에 스스로 지은 호인데 이것은 세인들이 녹이나 바라는 길(利祿之道)에 분주한 것을 보고 나는 졸리어 꿈을 꾸는 가운데 그런 것을 보지 않음과 같다고 스스로 비유한 까닭이다.
  • 149) 오환(五患) : 묘자리를 잡을 때 피해야할 다섯 가지 즉, ①후일에 길이 날 자리 ②성곽이 들어설 자리 ③개울이 생길 자리 ④세력이 있는 사람이 탐을 낼 자리 ⑤농경지가 될 자리 등.
  • 150) 이장을 주선한 이는 우암 시열(時烈)이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 151) 윤선각(尹先覺) : 뒤에 이름을 국형(國馨)으로 바꾸었다.
  • 152) 유리전패(流離顚沛) : 집도 없이 이리저리 휩쓸리고 엎어지며 자빠진다.
  • 153) 송첨지(宋僉知) : 청풍군수 송세경(宋世勁)의 아들 황생(黃生)을 가리킴.
  • 154) 교전비(轎前婢) : 시집 갈 때, 새색시가 데리고 가던 계집 종.
  • 155) 기성랑(騎省郞) : 병조(兵曹)의 낭관(郞官). 낭관은 당하관(堂下官)을 말한다.
  • 156) 개사(介士) : 뜻이 굳고 곧은 선비.
  • 157) 향념(向念) : 쏠리는 마음.
  • 158) 속독행전(續獨行傳) : 절의(節義)가 높아서 영원히 불멸하는 사람의 전기를 모은 책이 중국에 있으니 이것을『독행전』이라 한다. 『속독행전』은 말하자면 독행전의 속편이라는 뜻이다.
  • 159) 시어(侍御) : 세자 사부로 있음을 말함.
  • 160) 유행(遺行) : 후세에 전해지는 행실.
  • 161) 사마양시(司馬兩試) : 사마는 소과(小科)의 별칭. 소과에 생원시와 진사시 두 가지 시험을 합쳐서 양시라고 한다.
  • 162) 모후(母后) :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말함. 광해군에게는 어머니가 되기 때문에 모후라고 함.
  • 163) 사은숙배(謝恩肅拜) :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왕이나 왕비, 대비 등에게 인사하는 예.
  • 164) 유적(儒籍) : 유생(儒生)의 명단(名單). 소과에 합격하면 성균관 유적에 성명이 오른다. 학적부와 같다.
  • 165) 강릉(康陵) : 명종의 능.
  • 166) 경기전(慶基殿) : 조선조 태조의 영정을 모신 곳. 전주에 있음.
  • 167) 걸(桀) : 우(虞)의 폭군.
  • 168) 숙씨(叔氏) : 셋째형, 형제가 여럿일 때는 셋째 이하 넷째, 다섯째 등 모두 숙씨라고 하나, 특히 명백히 할 때는 숙씨, 둘째숙씨, 셋째숙씨 등으로 말한다. 여기서 둘째숙씨니 습정(習靜)을 말한다.
  • 169) 자백(子伯) : 전진(前秦) 사람 고진(高秦)의,아들. 효성과 우애가 대단하였다.
  • 170 ) 추향(趨向) : 가는 방향. 학문적 방향을 말함.
  • 171) 기묘 사적(己卯 事蹟) : 기묘사화의 사적.
  • 172) 격몽요결(擊蒙要訣) : 율곡 선생이 소년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지은 책.
  • 173) 지주(砥柱) : 산 이름. 수중에 우뚝 서서 격류가 치고 흘러도 조금도 동하지 않는다. 난세에 절의를 지켜서 변하지 않는 사람에게 비유한다.
  • 219) 구보(舊譜) : 옛날의 족보. 여기서는 1887년 정해(丁亥)에 좌상(左相) 송근수(宋近洙), 나주공 풍야(豊埜) 송정희(宋正熙)가 주관하여 만든『은진송씨보(정해대보)』를 가리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