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진송씨의 역사인물

조국 광복운동에 이바지 하신 분

1) 송도순(宋道淳)

애국지사(愛國志士) 송도순(宋道淳)은 1857년(철종 8)에 증도헌 겸 좨주(贈都憲兼 祭酒) 종렴(鐘濂)과 정부인(貞夫人) 여흥민씨(驪興閔氏) 사이에 2남 중 장남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생가이자 외가인 여주에서 출생하여 종숙(從叔)이자 동춘당의 9대 종손(宗孫)인 종호(鍾浩)에게 입양(入養)하였다.

자(字)가 윤명(允明)이고 호(號)가 풍남(豊南)인 그는 1873년에 음직(蔭職)으로 휘능참봉(徽陵參奉)을 제수(除授) 받고 이듬해에 증광병과(增廣丙科)에 합격하여 바로 가주서(假注書)가 되었는데 연소한 나이로 급제한 그에게 고종은 특별히 3년 동안 휴가를 주어 학문을 더욱 깊이 닦도록 배려하였다.

1877년 7월 승문원 부정자(承文院 副正字)를 제수받고 이어 시강원 설서(侍講院 設書)를 거쳐 1878년 봄에 통훈대부(通訓大夫)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에 발탁되었다. 여름에는 부수찬(副修撰)을 지내다가 선략장군 행용양위 부사과(宣略將軍 行龍 尉 副司果)를 제수 받았고, 얼마 뒤에 홍문관 부교리지제교 겸 경연 시독관 기주관(弘文館 副校理知製敎 兼 經筵 侍讀官 記注官)을 역임하였다.

1882년 4월에 부교리에 제수되고 다시 홍문관 수찬(弘文館 修撰)등을 역임하고 얼마 뒤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을 제수 받았는데 나아가지 않았다. 1883년 홍문관 응교(弘文館 應敎)에 제수되고 어모장군(禦侮將軍)이 되었는데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885년 (고종 22) 3월에 홍문관 응교를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86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올랐으며,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折衝將軍 行龍驤尉 副護軍)이 되고, 나가서는 영흥대도호부사(永興大都護府使)가 되었다. 1887년 청주목사 겸 진병마절도사 상당수성장(淸州牧使 兼 鎭兵馬節度使 上黨守城將)이 되었다.

다음해에 곡산도호부사 겸 황주진병 곡산병마 동첨제사 우영장토포사(谷山都護府使兼 黃州鎭兵 谷山兵馬 同僉制使 右營將討捕使)가 되었다. 9월에 영광군수(靈光郡守)를 지냈다. 1892년 정월에 부호군(副護軍)에 제수 받고 얼마 뒤 형조참의(刑曹參議)가 되고, 4월에는 이조참의에서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자리를 옮기고 좌부승지(左副承旨)에 겸임되었으며, 5월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용양위호군(龍驤尉護軍)에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하고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올랐다가, 6월에는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겸임하고, 7월에는 우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동지경영사(右承旨兼 經筵參贊官 春秋館 修撰官 同知經筵事)에, 8월에는 호군(護軍)으로서 특별히 시강원 보덕지제교(侍講院 輔德知製敎)를 네 번이나 역임하였다.

1893년 정월에 이조참판을 거쳐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역임하였다, 7월에는 좌승지 겸 시강원검교 보덕지제교(侍講院 檢校 輔德知製敎)를 역임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弑害)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大田廣域市 大德區 宋村洞)에 거주하면서 한말의 의병장 문석봉(文錫鳳)을 후원하여 유성장터에서 한말 최초로 의병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대전지역의 역사적 중요성을 인식시켰다.

1901년에는 태의원경(太醫院卿)에 임명되었으며, 칙임관(勅任官) 3등을 서훈 받았다. 그해 9월에는 장례원경(掌隷院卿)이 되었고, 궁내부 특진관(宮內府 特進官)을 겸하였다. 1907년에는 정3품으로 궁내부 특진관(宮內府 特進官)을 겸하였고 칙임관 2등을 서훈 받았지만, 계속 송촌에 머물면서 중국 등지에서 활동하는 독립군에게 거액의 군자금을 은밀히 송금하는 등 조국 광북운동에 이바지하였다.

1918년 9월 15일 송촌 자택에서 하세(下世)하였다. 처음에는 대전광역시 대덕구 홍도동(大田廣域市 大德區 弘道洞)에 안장(安葬)하였다가 뒤에 대전광역시 서구 원정동(大田廣域市 西區 元亭洞) 선영하(先塋下)로 이장(移葬)하였다.

1995년 8월 15일에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建國勳章 愛國章)이 추서되었다. 유고(遺稿)로는 『풍남유고(豊南遺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