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진송씨의 역사인물

은진송씨 선조들의 호(號)에 담긴 의미

호는 이름이나 자(字) 이외에 누구나 허물없이 부를 수 있는 칭호이기 때문에 연령과 성별, 지위와 관계없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별호다. 그런데 호를 지으려면 자기가 짓는 호에 어떤 뜻과 의미가 있는가? 그 호 속에 들어있는 작호자들의 뜻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호 속에서 그 분들 삶의 궤적과 인생의 지침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은송 선조 몇 분들의 호를 통해서 호에 담긴 사상과 뜻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쌍청당(雙淸堂) 송유
쌍청당은 송유의 별호이며, 한편 중년이후 생을 마칠 때까지 은거하던 정사의 당호이다. 그러므로 쌍청은 그의 생활환경과 인간 송유의 인격과 자품 나아가 삶의 철학을 함축하고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 쌍청이란 바람과 달의 맑음으로 광풍제월, 맑은 날의 화창한 바람과 비갠 뒤의 밝은 달로써 티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하여 시원스런 선비의 고고한 성품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쌍청정신은 충청도를 상징하는 청풍명월, 선비정신을 대변하는 말로 회자되고 있다.
취금헌 박팽년은 쌍청당기에서 “천지사이에 바람과 달이 가장 맑은데 사람 마음의 신묘함도 또한 이와 다름이 없다. 다만 형기에 구애되고 물욕에 더럽혀져 능히 그 본체를 온전히 보존하는 자가 드물다. 대개 연기와 구름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천지가 침침하게 가려졌다가도 맑은 바람이 이를 쓸어내고 밝은 달이 공중에 떠오르면 위와 아래가 투명하게 밝아지고 구름은 흩어지고 달은 밝은데 누가 여기에 점찍겠는가?”


2. 동춘당(同春堂) 송준길
동춘당은 송준길선생의 당호이며 별호이다. 포저 조익의 동춘당기에 “여물동춘(與物同春)” 즉 사물과 더불어 봄과 같이 하라. 만물과 더불어 봄과 함께 한다. 라는 뜻으로 봄의 훈훈함과 만물이 소생하는 생기로 삼고 봄기운을 얻어 그 따스함과 생기로 다시 소생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봄은 천지생물의 기운으로 봄이라 함은 곧 생의 뜻이다. 송준길 선생이 동춘당이라고 한 뜻은 인을 구하는데 있다. 인은 천지의 공됨이요 모든 착함의 근본인 것이다. 결국 동춘당이란 선생이 그 따스함과 생기를 세상에 널리 주고 싶어 하는 마음, 인을 널리 세상에 전하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포저 조익의 동춘당기에 “송군이 그 당의 이름을 「동춘」으로 한 것은 仁을 구하는데 있음을 알겠다. 무릇 仁은 천지의 공변됨이요. 모든 착함의 근본인 것이다.”


3. 우암(尤庵) 송시열
우암은 송시열선생의 호이다.
선생은 성격이 강직하고 본래 말이 적었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도 안부인사가 끝나면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학술적인 문제나 의리에 관한 얘기가 나오면 도도히 흘러서 그칠 줄을 몰랐다. 우암이라고 하는 호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그래서 한 번은 창주 김익희가 “그대가 이처럼 말이 너무 많으니 말에 허물이 적다(言寡尤)고 할 수 있다. 「尤」자를 넣어 호를 지어주니 허물을 고치라 했다.” 선생이 대답하기를 “그대가 좋은 말로써 나의 서재이름을 붙여준다면 감당할 수 없지만 지금 좋지 않은 말로써 이름을 지어주니 별호는 비록 신재선생께서 경계하신 바이나 내 어찌 이를 사양하겠는가?” 한일이 있었다. 즉 우란 허물이란 뜻이니 우암(尤庵)이란 허물이 많은 사람이란 뜻이다. 그 뒤로 창주는 선생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우암이라고 썼다.
참고로 우암이라고 쓰기 전에 선생에게는 다른 아호가 있었다. 천은이라는 호를 쓴 것은 창주 김익희 문집 『창주선생유고』에서 송시열선생이 창주 김익희의 원운에 붙여(附原韻泉隱) 답한 시에서 나타난다. 선생이 지은 시아래 천은, 우암선생의 구호(尤庵舊號)라 적혀있는데서 선생의 별호가 천은이었음이 확실히 드러난다. 유래는 병자호란 때 선생이 황간 냉천으로 은거하였는데 천은이라는 호는 아마도 그가 은둔하여 살던 냉천의 천(泉)자와 은거의 자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4. 제월당(霽月堂) 송규렴
제월당은 송규렴의 별호이며 당호이다.
제월이란 광풍제월(光風霽月)로 비갠 뒤의 맑은 날씨에 부는 바람을 광풍이라 한바 비갠 뒤의 화창한 바람과 밝은 달을 일컫는데 즉 마음결이 명쾌하고 집착함이 없으며 시원하고 깨끗한 인품을 형용하는 말이다. 그 어원은 북송의 문인이자 서예가인 황정견이 주염계(周廉溪)를 존경하여 일컬은 데서 더욱 유명해진 말이다. 그는 염계시서에서 “其人品甚高 胸懷洒落 如 光風霽月(용릉의 주무숙은 인품이 고명하고 마음결이 시원하고 깨끗함이 마치 맑은 날의 바람과 비갠 뒤의 밝은 달과 같다.”에서 뜻을 취하며, 아마도 송규렴의 염(廉)자가 주렴계의 염자를 취했다면 그의 8대 선조인 쌍청당 송유가 가슴속에 담고자 했던 광풍과 제월의 쌍청에서 제월(霽月)을 취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선조의 맑은 덕을 잇고자 함이 그 뜻이 있는 것이라 하겠다.


5. 옥오재(玉吾齋) 송상기
옥오재는 송상기의 별호이며 당호이다.
재명인 옥오(玉吾)는 그의 외숙인 곡운 김수증이 지어준 것으로 그 뜻은 재기에 잘 나타나 있다. 명나라 유학자 방정학의 ‘영위와전 무위옥훼(寧爲瓦全 無爲玉毁 : 차라리 기와로써 온전할지언정 깨어지는 옥은 되지 않겠다.)’라는 반론에서 출발하고 있다. ‘영위옥훼 불위와전(寧爲玉毁 不爲瓦全 : 차라리 옥처럼 깨어질지언정 온전한 기와가 되지 않겠다.)’가 원문이다. 차라리 깨끗이 죽지 구차하게 살지 않겠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충언직도(忠言直道)를 위해선 죽음을 불사하겠다는 뜻으로 공의 강명 정직한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즉 그는 스스로 쓴 옥오재 당기에서 “천하에 어찌 훼손되지 않는 기와가 있겠는가? 군자가 세상에 처함에 제때를 만나 뜻을 펴게 되면 영예스럽겠지만 그렇지 않고 뜻이 꺾이어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그런 때에도 그 뜻을 지키는 자야말로 지사(智士)와 완인(完人)이다.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려있으니 어찌 도를 버리면서 구차하게 온전하기를 바라겠는가? 그럴 바에야 차라리 깨지더라도 나는 옥을 취할 것이다.” 이는 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죽음을 불사하겠다는 의연한 기개가 담겨져 있다.
옥오재는 하대부로써 문형(文衡)을 잡은 사람은 국가창건이래 몇 사람 되지 않는다. 이조참의를 제수 받고 곧 대제학이 되었다. 은송에서 대제학의 반열에 오른 사람은 옥오재 송상기가 유일하다.


6. 소요당(逍遙堂) 송순년
소요당은 지평공 계사의 작은 자제인 정랑공 송순년의 별호이다. 소요당은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에서 나온 말로 마음가는대로 유유자적하며 산다는 뜻으로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넓고 큰 자유로움을 느끼며 진리를 사색하는 것이다. 즉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대자유의 정신을 가지고 생활한 정랑공의 삶의 철학을 함축하고 대변하는 정신이기도 하다.
『회덕읍지』에 보면 “공의 형제들이 청렴하고 삼가며 사양하여 벼슬은 심히 나타나지 않았으나, 덕행을 순수하게 갖추고 수학에도 정통하고, 천문 지리에도 묘경을 뚫어지게 보았다는 것이 향중에 전해오는 평으로써 숨길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전하기를 역학에 깊어서 그의 수(壽)와 장지와 후세의 발복 등을 스스로 점쳤는데 뒤에 그 점과 같이 모두 풀렸다.”고 했다.


7. 동파공(東坡公) 송여익
동파(東坡)는 소요당 송순년의 둘째 자제인 송여익의 별호이다.
동파공은 18살 때인 형님 여해와 함께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니 사람들이 쌍구슬이라고 부러워했다고 한다. 공은 형님이 아첨하는 무리들의 무함으로 옥천으로 유배당하는 사실을 목격하고 과거로 출세할 마음을 접고 동구 마산동 미륵원 인근 굴파원(堀坡院) 위에 주택을 크게 건축하여 동쪽으로 정사(精舍)를 두어 재를 짓고 화초를 가꾸며 그곳에 은거하여 영농에 힘쓰는 한편 학문에 열중하며 세월을 보냈다.
동파(東坡)란 송여익이 굴파원 동쪽에 정사를 지은 데서 호가 유래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동파공은 이곳에서 각종 사회봉사를 함으로써 “노블레스오브리주” 정신을 몸소 실천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은진송씨선적사』에 여러 일화가 전하는데 일부만 소개한다.
“……일찍이 주택을 굴파원상(掘坡院上)에다 크게 건축하였는데 동쪽으로 정사를 두어 재를 짓고 화초를 섞어 심으니 송죽이 푸르렀다. 날마다 친구들과 더불어 유유자적하였다. 서쪽으로 큰집 수십 칸을 지어 동네 소년들 중 재산이 없는 아이를 불러 모아 스승을 초대하여 가르쳐 성공시켰다. 그리고 병이 있고 의탁할 곳이 없는 사람들에게 의약을 주어 치료해주었다. 또한 매일 아침저녁으로 앞들 시냇물에서 쌀을 얻어 행랑 앞에 큰 솥 여러 개를 걸고 밥을 지어 손님들을 접대하였다. 그 뒤 큰 집을 세웠던 곳을 행랑 마루라 하고, 큰 솥을 걸었던 곳을 솥티실이라 하였으며, 쌀 씻던 곳을 다리 밑으로 쌀뜨물이 구름과 같이 흘러간다고 하여 구름다리라 하였다 하니 여기서도 가히 당시 부군이 풍의(風誼)한 증거로 볼 수 있다.……”


8. 송담(松潭) 송남수
송담(松潭)은 쌍청당 송유의 5대종손으로 안악군수 송세훈의 장남 송남수의 별호이다.
호를 송담이라 지어진 연유는 가장(家狀), 우암선생이 지은 묘지(墓誌) 「연보」 75세(1615)에 잘 나타나 있다. 송담은 소나무(松)숲에 못담(潭)자이다. 소나무 숲으로 인해서 송담이다.
“ …또 선영아래에 조그만 암자를 하나 짓고 피운암이라고 명명하였다. 그 앞에는 조그만 시내가 하나 흘렀으니 못을 만들어 송담이라 명명하고 스스로 송담청일(松潭淸逸)이라고 호하였다. 또 오도산인이라고도 일컬었다. 매일 거기에서 거처하기를 사랑하여 선세에 대하여 존경하고 사모하는 뜻을 부쳤다.…”
「절우당(節友堂)이란 이름은 솔(松) 매화(梅花) 대나무(竹) 국화(菊花)를 당 주위에 심었는데 봄에는 매화, 여름에는 대나무, 가을에는 국화, 겨울에는 솔이 있어, 그 취향과 절의를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절자(節字)를 따고 우(友)는 위의 4가지를 벗 삼는 말의 의미를 붙인 당호이다. 절우란 지조 있는 벗을 의미한다.


9. 방호처사 송세면(성종 18 : 1487 - 중종 34 : 1539)
공의 이름은 세면이고 자는 면지(勉之)다. 공의 품계는 종사랑(종9품)이었는데, 뒤에 사우당 국택이 귀하게 됨으로써 중직대부(종3품) 사헌부 집의를 추증 받았다. 공이 세상에 뜻을 이루고 살아갈 무렵 무오·갑자·기묘사화에 이르는 세상이 혼탁한 시기였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강구손 정광필 김정 등이 다 화를 면치 못하였는데 이들은 공과 가까이에 있는 분들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세상에 뜻을 잃고 회덕 방호동에 은거하면서 독서를 즐기고 영달을 구하지 않았다. 이렇듯 맑고 티 없는 삶을 영위하니 세상 사람들이 방호처사(芳湖處士)라 일컬었다. 둘째 자제 감역공 연의 후손은 송창공파를 이루고 넷째 자제인 승지공 영의 후손은 사우당 효정공파로 나뉘었다.
호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청송 성선생이 마침 선생을 방문하셨다가 술잔을 잡고 시를 논하며 수일동안 심히 정답고 친절하게 지내시었다. 이별에 임하여 시 일절(詩一節)을 지어주었으니 그 시에 이르기를
방호처사(芳湖處士)는 옥 같은 사람이로구나.
냇물마시고 노을 속에 깃드니 티끌이 물들지 아니하였네.
홀로 서산에서 고비나물을 캐는 사람이었네… (『은진송씨세적록』 p160 집의공 세면 묘표, 사우당집 상 p382)


10. 취옹당(醉翁堂) 송희명
취옹당은 목사공 요년의 현손이며 청죽당 송화수의 둘째 아들인 송희명의 당호이며 별호이다. 그는 향천에 의하여 참봉이 되었으나 곧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문중과 서원과 향리를 위하여 일하였다. 이리하여 일가들은 종장이라 부르고 서원에서는 원장이라 부르며, 고을 사람들은 향장이라 불렀다. 특히 취옹당은 유조비의 정려가 내려질 당시, 문장(門長)으로 있으면서 동춘 우암선생과 함께 문중의 힘을 규합하여 정려가 내려지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우암선생이 지은 묘표를 보면 취옹이라 호한 뜻이 잘 나타나있다.
“…… 공의 사람됨이 자상하고 근신하여 남과 어긋남이 없었다. 부모를 잘 섬겨서 친한 벗과 지인에게 미쳤으니 모두들 존경하고 사모하였다. ……스스로 취옹이라는 뜻을 풀이하여 그 당에 명을 지어 걸었으니,
……어언간 내 나이 팔십이 가까우니/ 아내도 앞서서 가버렸구나/ 이 내 한 몸 어디에 둘까/ 만사를 생각 말고 취하는 게 제일이라/ 술동이를 항시 방안에 두어/ 하루 밤 자고나서 귀 기울이니/ 가는 빗소리가 가만 가만 들려오고/ 이틀 밤 자고나서 뚜껑을 열어보니/ 포도 빛이 역력히 떠오른다./ 한잔 두잔 기울이니 화기는 융융하고/ 깨었다가 또 취하니 즐거움이 도도하다.……”
우암선생은 공이 나이가 많은데도 치아와 모발이 쇠하지 않고 거름걸이가 굳센 것을, 후한의 마원이 교지(월남)정벌에 출정하여 공을 세운 고사를 인용하여 노익장을 말했으며, 자손이 귀하게 되고 증손까지 보아 많은 자손을 둔 것을, 당나라 장공예가 자손을 많이 두어 9세가 동거함으로써 황제가 친히 거동하여 비단을 하사한 고사를 인용하여 기렸다.
즉 그는 취옹이란 가까운 가족 친족과 이웃, 벗과의 사귐을 즐거움으로 표현하고 그들의 즐거움이 모든 사람들의 즐거움이다. 라는 사실을 술을 통해 나타내는 여민동락의 마음이 아닐까?


11. 금암 송몽인
금암 송몽인(1582 : 선조 15 - 1612 : 광해군 4)은 자가 문병 호는 금암이다.
선천적인 재주가 남보다 슬기롭고 영리하여 7세부터 글을 지었으며, 성장하여서는 시의 격조가 높아졌다. 24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곧 대과에 급제할 것으로 믿었지만 병이 들어 31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은진송씨 3대시인의 한분으로 시집이 한 권 남아있다.
금암공은 송촌 동북쪽에 있는 마을인 양지뜰(양지말)에 살았다. 송촌동에서 비래동으로 가는 길옆에는 비래암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이 이 곳을 지나 동춘당 앞으로 해서 중리동으로 흐른다. 그런데 송촌과 양지말 사이의 냇물은 커다란 바위로 깔려있고 더러는 원두막 크기의 판판한 바위도 있어 거기에 앉아 시를 읊거나 거문고를 타기에는 아주 안성맞춤이다. 그리고 바위 군(群)위에는 돌덩이가 있는데 거기에는 「琴巖(금암)」이라 새겨져 있다. 이 돌은 1970년대 새마을 사업이 한창일 때 송촌에서 양지말로 가는 길의 제방용으로 사용되고 있던 것을 1988년 시냇물 돌 위에 얹혀 있다가 1995년 송촌 택지개발 사업 때 현 소대헌 고택 앞으로 옮겼다. 금암(琴巖)의 호는 이 돌에서 유래되었다. 그 사실은 우암선생이 지은 효정공 묘표에 있는데 “……마을 위에 금암(琴巖)이 있는데 냇물이 지대가 더욱 상쾌한 고로 증 참판 진사 휘 몽인이 여기에 거주하여 자호로 하였고, 『금암집』 1권이 세상에 간행되었다. 아들이 없어서 재종형 희명의 둘째 아들 국택으로 후계를 하였다.”
시집 『금암집』이 있는데 수집하여 편집한 분은 배위되는 민부인과 사우당이며, 그것을 교정하여 서문을 쓴 분은 민부인의 외숙인 지봉 이수광이며, 발문을 쓴 분은 동회 신익성이고, 그것을 손수 써서 목판에 새기게 하여 비래암에 보관한 분은 죽창 이시직과 비래암 스님 지숭이다. 광해군 8년(병진 : 1618) 봄에 초간본을 간행하였다.
금암의 10대손 난곡 송병화가 증보하여 고종 27년(경인 : 1890) 섣달 상순에 재 간본을 간행하였다.
1986년(병인) 12월 30일 윤충호가 譯文 발문을 써 국역한 것을 사우당파 문중(대표 : 송우준)에서 간행하였다.


12. 사우당 송국택(1597 : 선조 30 - 1659 : 효종 10)
공의 휘는 국택이고, 자는 택지 호는 사우당이다. 사계 김장생의 문인으로 인조 2년(1624)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에 등용되었고, 정묘호란 때 호소사 김장생의 막하로 있다가 천거 받아 검열이 되었다. 이어 정언 함길도 도사를 지냈다. 병자호란 때에는 함락된 강화도에서 원손을 탈출시켜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그후 병조참지를 거쳐 형조 공조참의를 승지 예조참의 전주부윤을 지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효정의 시호를 받았다. 저술로 사우당집이 있다.
그는 15일에 회현방 우사에서 하세하였다. 연세가 63세이다. 부음을 듣고 위에서 놀라고 슬퍼하여 중사(中使)에게 호상을 명령하였다. 마지막 길을 측은히 여기는 예전이 대단히 융숭하였다. 처음에 공주 유성 남쪽 소홀리에 장례(1660.3.1)하였다가 계축년(1673.12. )에 유성현의 조교리 해향의 자리에 합폄하였다. 임술년(1982.8.28.)에 부군의 택조(宅兆)가 시가에 편입되었으므로 충북 보은군 수한면 발산리 곤좌간향지원(坤坐艮向之原)에 개폄(改窆)하였다.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
「공경으로 속마음을 바르게 하고 의로움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바르게 한다.」
이글은 주역의 곤괘 62에 있는 말이다. 사우당 효정공(국택)께서 사계 김장생선생을 사사하였는데, 사우당께서 평생 실행하여야 할 요언(要言)을 선생에게 물은 적이 있다. "그대가 일찍이 주역을 읽었다고 들었는데, 주역에 있는 그 말은(표제어) 주자께서 학문하는 요점을 이 말 이외에 다른 말이 없다 ”고 했고, “또 만일 실제로 잡아 공부하는 데에 이 8자를 일생동안 사용하더라도 다하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옛사람이 불원복(不遠復 : 머지않아 회복됨) 8자부(字符)를 하여 생을 다하도록 복용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공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움으로 행실을 바르게 한다면 모든 사람들의 추앙을 받을 것이며, 또한 선조들의 추앙을 받을 것이며, 또한 선조들의 가언가행(嘉言嘉行)을 이어받았다고 할 것이다.

사우당 호의 유래
四友堂은 辛亥年(1971)에 중건
호의 유래(『국역 사우당집』 上 기해 10월 p196) 백헌 이상공 경석에게 드리는 답장
…… 또 아울러 당기문(堂記文)을 지어주신다는 쾌한 허락을 받았으니 매련국송(梅蓮菊松)이 그 꽃다움을 백세에 퍼뜨릴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四友가 더불어 벗으로 삼아 주는 사람이 어찌 영광과 행복이 있지 않겠습니까?……

사우당(四友堂)서문(『사우당집』 상 p356)
송촌 동쪽에 바위와 언덕과 냇물과 폭포의 아름다운 곳이 있으니 이름은 비래동이라고 한다. 일찍이 동춘 우암 모든 일가와 더불어 작은 암자를 구성하여 여러 사람이 거주하며 학문을 강론하는 곳으로 하였다. 암자에서 수마장 되는 곳에 고요하고 궁벽한 하나의 구역을 얻으니 곧 당(堂)이 있는 곳이다. ……암자에 늙은 중이 있어 하루는 찾아와 말하기를 「이 집이 비록 길고 고요한 운치는 있으나 한 모퉁이에 치우쳐있으므로 흠절이 있는 것은 벗이 없는 것입니다.」 하거늘 주인(사우당)이 응답하기를 「당에 매화가 있으니 봄날의 벗이요, 못에 연못이 있으니 여름날의 벗이며, 뜰에 국화가 있으니 가을날의 벗이요, 뜰에 소나무가 있으니 겨울날의 벗인지라, 나의 소견으로는 사방사시에 가는 곳마다 벗이 아님이 없거늘 어찌 벗이 없다고 말하는가?」하니 늙은 중이 문득 손을 끼고 두드리며 갔다. 인해 당의 이름을 「사우당」이라고 하였다.
동춘께서 행장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공과 더불어 친족으로서는 비록 면복이 되었으나 어릴 때부터 늙기에 이르기까지 집을 맞대고 살아서 항상 형으로 섬기고 아우로 길러 주시었다. 제문에 말씀하시기를 남천북맥(南仟北陌)이란 말이 나온다. 「우리 마을 전체 어디가 종중의 모임이 아니겠습니까? 만은 오로지 집을 맞대고 전원에 살면서 정의가 아우와 형같이 남쪽 전원과 북쪽 들판에 한가히 지팡이 나막신으로 서로 오가며 쫓아 놀았으며, 또 형이 사산에 새로 지으신 집은 또한 아우의 조그만 집과 서로 바라보이니 매양 말씀하시기를 모년(暮年 : 만년)에 조용히 서로 사는 것이 다행한 일이 아니겠느냐?」 고 하였습니다.
우암이 묘지를 찬술하여 말하기를 「내가 동종지친으로써 팔 구세부터 동춘공과 더불어 같은 마을에서 공을 쫓아 공부하였더니 흰머리가 되기에 이르기까지 친한 정의는 변하지 아니하였다.」 또 제문에 말하기를 「공이 나를 경저로 찾아오시어 당기를 부탁하면서 인해 당이 있는 곳에 초수(草樹)의 아름다움을 자랑하였다.」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먼저 돌아갈 것이니 군도 역시 따라오라. 동천북맥(東仟北陌)에 서로 쫓아다니며 넉넉히 놀면서 남은 세월을 마치면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는가?」하였다.
이전의 상길의 제문에 이르되 「병자 정축년에 의분이 북받쳐 슬퍼하고 한탄하며…… 청의 연호를 배척하며 벼슬을 버리고 종용(從容)이 의리에 나아가 명나라의 연력(年曆)을 안고 사산으로 돌아오시었도다. 나의 매화이고, 나의 연꽃이며, 나의 소나무고, 나의 국화로다. 오직 이것을 벗 인양 생각하시고……」
선생이 일찍이 당기를 우암 및 백헌 이상국에게 청하시었는데, 다 이루지 못하고 거연히 돌아가시었고 스스로 서술하신 것도 반이나 결손 되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사우선생이 일찍이 청에 굴욕 항복한 것을, 굴욕으로 이를 갈으시고 홀로 숭정의 연력(年曆)을 안고 청나라 오랑캐의 연호를 쓰지 아니하였다. 이로 인해 동래부로부터 파직되어 돌아오시어 모든 교제를 중지하고 「매연송국」에 정을 의탁하고 미가(薇歌 : 고비나물을 캐는 노래)와 菊史에 뜻을 부치시니, 일찍이 우옹이 또한 기문을 지으셨는데 원고가 반을 이루지 못하여 선생은 거연히 돌아가시고 유당(遺堂)만 홀로 서있어 지나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리키면서 슬픈 마음을 일어나게 한다.」


13. 덕성공 희진
덕성은 장령공 희진의 호이다. 공의 이름은 희진 이고 자는 퇴지(退之)인데 송담공의 자제이다. 선조 13(1580)년에 출생하여 사마시와 문과에 급제, 사간원 장령으로 있을 때에 대사마의 실책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화를 입고 경북 영일군 청하현감으로 좌천되었다. 현청의 소재지가 덕성리(德城里)에 있었으므로 「덕성(德城)」을 자호로 삼고 선정을 베풀었다.
덕성공의 4대는 그 자제 계담(桂潭 : 송국사) 손자(수촌 규림), 증손자(묵재 상렬 네 분을 말한다.)


14. 계담(桂潭) 송국사
계담(桂潭)은 송담 송남수의 손자며 덕성 송희진의 장자인 송국사의 호이다.
계담은 회덕에 있는 연못 이름인데 그 연못의 이름을 따서 자호하였다. 그는 계담 위에다 조그만 정자를 짓고, 한가로이 지내면서 일생을 마칠 계획을 하였다. 그가 건축한 이 정자를 우암선생은 ‘풍월(風月)’이라고 이름 지었다. 송국사는 이 풍월정에서 동춘·우암선생과 더불어 고상한 풍치를 칭찬하기도 하면서 음영(吟詠)의 즐거움을 누리기도 하였다. 우암선생은 풍월정기를 찬한바 있다. * 정복시는 회덕현 북 15리 이곳 한절구지에 거주함으로써 동래정씨 대전 입향조가 되었다. 정복시는 중종 때의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의 일가 항렬이 되나 직계는 아니다. 정복시의 손녀는 송남수(宋枏壽)의 3자부(송희진)의 처가 되었고 따라서 감찰을 지낸 宋國士와 宋國憲은 그의 외증손이 된다. 훗날 송국사는 외종조인 정복시의 桂潭이라는 호를 따라 자신의 호를 계담이라 하였으며 정복시가 지은 계담대 자리에 風月亭을 지어 그 유업을 잇고자 했다. 풍월정이 있던 자리는 신대동인데 현재 전하지 않는다. 정복시는 화담 서경덕 문인이다. 정복시의 5세손 정창좌는 효행이 탁월했다고 한다. 정복시의 신도비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撰하고 동춘당 송준길 선생이 書했다.


15. 세한재(歲寒齋) 송시도
장성공의 자는 성보, 호는 세한재(歲寒齋), 이름은 시도(時燾)인데 장성부사를 지냈다. 장성공이 벼슬에서 물러나 보은 금적산(보은군 삼승면과 옥천군 안남면 안내면 경계에 있는 산 : 높이 1652m)밑에 집을 지은 뒤 손수 솔과 잣을 심고 그 집 이름을 세한재라 하였다. 세한(歲寒)은 겨울 추위를 당하더라도 조금도 색이 변치 않는 송백(松柏)을 말한다. 따라서 절의를 지켜서 굽히지 않는 심사라는 뜻이다.


16. 청죽당(聽竹堂) 송화수(명종 1 : 1546 - 선조 38 : 1605)
공의 이름은 화수이고 자는 영로(榮老)이며 호는 청죽당이다. 7세에 부친상을 당하고 10년 뒤에는 모친상을 당하였다. 이에 형들과 여막을 짓고 예를 다하였다. 성품이 온순하고 단아하여 세속의 명리를 구하지 않았으며 공손하고 검소하게 자신을 다스렸다. 공의 큰 자제인 송월재 희득은 송월재공파의 파조가 되고 취옹당 희명은 취옹당공파의 파조로 나뉘어졌다. 공의 호 청죽당의 대나무 소리가 들리는 집의 유래는 대청의 이름을 청죽(聽竹)이라고 이름붙인데서 유래되었다.
…… 공이 일찍 천문서를 널리 연구하여 장차 변란이 있을 것을 알았다. 과연 1년이 지나 왜구가 침략하였으나 문을 걸어 잠그고 미리 피하였으므로 공의 집안은 화를 면하였다. 이로부터 성시(城市 : 서울)에 뜻을 끊고 원서(園墅 : 속세, 시골 농장)에 숨어살면서 대청의 이름을 청죽(聽竹)이라 하고 그곳에서 소영(嘯詠 : 시가를 읊다)하여 스스로 즐기었다. 공의 손자 국택 국준이 서로 문과에 올라 문행(文行)으로써 서로 숭상하지 않음이 없으니 아! 송촌의 송씨는 더욱 번성하겠구나.……(『사우당집 하』 p284 : 이도사 의길이 찬술한 「청죽공 묘표」에서 나왔음)


17. 송창공(松窓公) 유록(선조 12 : 1579-인조 17: 1639)
송창공파 파시조로 공의 이름은 유록(綏綠)이며, 자는 유지(綏之) 이고, 호는 송창(松窓)이다. 집의공 세면의 증손이며 통례공 흥문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심지가 곧고 기개가 넘쳤다.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서궁에 가두고 폐모시키려할 때, 적신 한찬남이 이이첨 부류에 아부하여 공을 협박하고 요직으로 달래었으나 대의로 끝까지 이를 거부하였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와 강화하였다는 말을 듣고, 다시는 서울에 올라가지 않았다.
호의 어원은 동춘선생께서 일찍이 공을 일컬어 말씀하시기를 “높이 소리 내어 청아하게 노래부르니 풍류에 뛰어났구나?”라 하였고, 이는 북창청풍(北窓淸風)에 도연명의 “줄 없는 거문고를 화창하게 노래 부른다.”라는 뜻과 소나무와 국화를 심어 가꾸고, 도연명의 글을 즐기며 맑은 풍조로 세상을 살아가니 이러한 지조 있는 생애를 지켜보며, 우암선생께서 공을 칭하여 항상 송창처사라 일컬었다. 동춘선생께서 만시(輓詩)에서 ……소리 높여 노래 부르니 풍류에 뛰어났도다. 단단한 기품은 무산산협(武山山峽)보다 높았고, 늠름한 말씀은 구추(九秋)의 개인날 같도다.……로 공이 일생지녔던 지조있게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전원 속에서 초연하게 살았던 기품을 애도했다.


18. 삼호재공(三好齋公) 송국정(선조 5 : 1605-효종 9 : 1658)
공의 이름은 국정(國鼎)이고 자는 취옹당 희명의 셋째아들로, 자산공파인 족부 주부공 희경(希慶)의 후예가 되었다. 십 육세 때 신독재 김 선생이 관을 씌우시고 자(字)를 이중(而重)이라 하였다. 호는 그가 거처하던 집의 이름이 삼호(三好)라 하였으니, 「…대개 고인이 산수를 좋아하고(好山水) 글을 좋아하고(好書) 사람을 좋아한다(好人)는 뜻을 인용한 것이다.」 동춘당 송찬선 준길이 이것을 취하여 그의 묘를 表하기를 「삼호재 송공이 묘인데 장차 석물을 세운다고 하니 이것으로 가히 천추에 썩지 않으리라.」고 하였다. …(『사우당집』 상 종제 이중 묘지명p476 송국택 찬) 또 동춘께서 묘에 쓰기를 삼호재 송공의 묘라 썼으며, 선생의 제문이 있고, 또 묘지명을 찬술하였다.(『사우당집』 下 p199)


19. 부훤당공 시담(선조 39 : 1606-현종 3 : 1662)
공의 이름은 시담인데, 아호가 부훤당이므로 그 후손들을 부훤당공파라 부른다. 자는 대이(大而) 습정공 방조의 넷째아들로 참봉공 세량의 현손이다. 형 야은 시영과 빙호공 시염에게 배웠다. 병자호란 때 형들이 화를 입자 벼슬에 뜻을 버리고 조용히 세상을 마쳤다. 공이 당호를 부훤(負暄 : 태양의 따스함을 등에 진다)이라고 한 것은, 청음 김선생에게 귀여움을 받았기 때문에 자중 자애한다는 의미일 것이다.(《은진송씨 세적록》 p311, 부훤당공 묘표 종제 시열찬)


20. 안소당(安素堂) 송국헌(광해 7 : 1615-숙종 15 : 1689)
안소당파의 파조로 자는 군식(君式) 호는 안소당이다. 장령공 희진의 아들 안악공 세훈의 증손이다. 공은 젊어서부터 재략이 뛰어났으며 기개(氣槪)를 숭상하고 담론을 잘하였으며 판단력이 날카로웠다. 68세에 자여도 찰방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특히 가정에서는 부모의 병환에 시탕함에 정성과 효도가 두터웠고, 또한 일찍이 백씨의 열병을 구완하기 위하여 곁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은 둘 다 무사하였다. 동춘선생이 말씀하시기를 “어찌 군식과 같은 아우가 있고 형이 죽는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의 효도하고 우애 있는 행실이 집안에서 믿음을 받아 종족과 향당에 미쳐 은혜와 친목이 다 이루어졌다.(《은진송씨세적록》 p252, 안소당공 묘갈명 옥오재찬)
우암선생이 당명을 찬술하였다. 종숙 송군식(宋君式)이 주거하는 집 한가운데 칸에 당을 만들고 이름을 ‘안소(安素)’라 하였으니, 이는 본분에 안착하여 그 밖의 것을 생각하지 않으려 함이다. 내가 듣고 아름답게 여기며 이 명을 지어 보낸다. 「빈천 이적(夷狄)과 환난 속에서도 본분에 안착한 이는 다만 주인뿐일세. 저 그렇지 못한 자는 그 밖의 것만을 원한다. 그것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남을 탓하고 하늘을 원망하는데 이는 다만 남에게 의혹만 받을 뿐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더욱이 본분이란 명칭은 소박(小樸)함을 말한 것으로 그림에 있어서는 흰 바탕과 같고 덕에 있어서는 충신과 같아……아 이 당(堂)의 주인을 어느 누가 알아주랴마는 이대로 오래 안착한다면 본래의 소박함 완성할 것이니 이 당에 오를 적마다 이 편액(扁額)만 보시구려.」(『국역 송자대전』 8 p205, 안소당명 우암 송시열)


21. 오죽당(梧竹堂) 송규명(인조 11 : 1633-숙종 38 : 1712)
사우당 송국택의 넷째자제이며 문정공 우암선생의 문인이다. 사우당은 규명의 자(字)를 회이(晦而)라고 지어주면서 그에 대한 해설을 붙여 주자를 배우라고 면려하였다. 호의 어원은 <고문진보> 후편 한유가 지은 「전중소감마군묘명(殿中少監馬君墓銘)」중 …退見少傅(퇴견소부 : 물러나와 태자소부를 뵈니) 翠竹碧梧(취죽벽오 : 푸른 대나무나 벽오동과도 같고) 鸞鵠停峙(난곡정치 : 난새나 고니가 산마루에 머물러 있는 것과도 같아서) 能守其業者也(능수기업자야 : 그의 가업을 잘 지키실 분 같았다.) …에서, 우암선생이 翠竹碧梧(취죽벽오)를 인용해, 당호를 오죽(梧竹)이라고 지어주면서 그 뜻은 늙은 봉황과 같이 맑은 풍도를 지키면서 가업에 힘쓰도록 권면하였다.


22. 위와공(韋窩公) 송상윤(현종 15 : 1674-영조 29 : 1753)
공의 이름은 상윤(相允)이고, 자는 신보(信甫)이며 호는 위와(韋窩)이다. 조부는 안소당 국헌이며, 부는 감찰 동중추인 영경당 규욱의 아들이다. 문중의 형인 옥오재 상기에게 배웠으며, 수암 권상하의 문인이다. 공은 견문을 넓히고자 장암 정호, 후재 김간, 삼연 김창흡, 지촌 이희조, 도암 이재 등과 교유하였다. 영조3년(1727) 옥오재공과 관동여행을 다녀오고, 그 해 부친인 감찰공의 연세가 수계(壽階)에 이르렀으므로 자제인 공에게도 부호군이 제수되었다. 문집에 『위와집』이 있다.
호의 유래는 …만약 책을 읽지 않으면 어찌 이치를 밝힐 수 있겠는가? 책을 읽고 이치를 밝히는 것은 군자의 직분이다. 고 하였다. 자제들이 혹 공의 성질이 곧고 책을 좋아하는 것이 중용을 버릇이 되었다고 생각하여 간하면 공이 웃으며 말씀하시기를 “불의한 일로 남에게 아첨하는 것은 내가 차마 억지로 할 수 없다. 또 내가 물욕이 없고 오직 베갯머리에 책이 있어서 마음이 기쁜 것 같다. 혹 잠들었다가 깨어서 어루만지는 것은 친한 마음에서 이다."… 공이 만년에 다시 위와(韋窩)라고 스스로 호하였으니 그 성품이 급하고 곧아서 중용을 넘어 해칠 우려가 있어서일 것이다. 그 스스로 다스리는 공부가 더욱 독실함이 이와 같았다. 아! 공은 하남노자(송나라 하남 사람)의 이른바 「더욱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인가?」 (『은진송씨금석록』위와공 상윤 묘지명 난곡 송병화 p671)


23. 쌍계당 송응상(雙溪堂 宋應祥 : 중종 19(1524 ~선조 19(1586))
공의 휘는 응상이고 자는 상원(祥元)이다. 중종19년(1524) 3월 3일에 승사랑 세영과 숙부인 곡산연씨 사이에 맏자제로 대전광역시 송촌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동생 임천공 응서와 함께 동주 성제원 선생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공은 용모와 체격이 수려하였으며 성품 또한 호방하였다. 유씨부인 정문 앞에는 두 실개울이 합쳐 하나가 되는 곳이 있었다. 이 두 개의 실개울 중 하나는 비래동 옥류각 흘러 양지 뜸을 지나 송촌 마을 앞으로 해서 이곳에 이른다. 또 하나의 개울 물은 송촌 마을 뒤 학당산 밑으로 해서 소리고개를 지나 이곳에서 합류되어 중리동 앞으로 흘러간다. 이 두 실개울을 쌍계(雙溪)라 한다. 쌍계가 합쳐지는 경치 좋은 곳에다 당을 짓고 쌍계당(雙溪堂)이란 현판을 걸고 아울러 호로 삼았다.(처사 송응상 가전 한정당 송문흠찬)
<쌍계당>은 사실상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쌍청당>이 그러하듯이 <쌍계당>의 뜻도 하나는 송응상이 지은 집 이름이고, 또 하나는 송응상의 호이다. 그런데 <쌍계당>이란 건물이 어디에 있었는지의 정확한 위치와 그 규모 따위는 전혀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쌍계(雙溪) 근처라는 것만 확실할 뿐이다. 쌍계는 동춘당 앞을 흐르는 냇물과, 학당산 아래 학댕이 골을 지나 소리고개 밑으로 흐르는 두 냇물을 말한다. 이 두 냇물이 유씨부인 정문 앞에서 합수(合水)하여 중리동을 지나 대전 천으로 들어간다. 기록에 보면 공께서는 쌍계 옆에 당을 짓고, 쌍계(雙溪)라는 당호를 붙였다고 한다.
앞서 말한 대로 <쌍계당>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전하는 말로는 유씨부인 정문 앞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상수도 정수장에서 송촌동으로 들어가는 입구 야산 기슭의 바위에 「상하 송촌리 삼강려(上下 宋村里 三綱閭)」라 새긴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서 유씨부인 정문 사이에 정원수로 씌었음직한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고 그 주변은 지금 밭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 <쌍계당>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발굴을 해보지 않아 그 정확한 위치와 구조는 확인하기 어렵다. 유허로 전해지고 있는 집터 옆에는 송촌 택지 개발 전까지 쌍계당 종중 소유의 밭이 있었다.(『송촌의 인물과 유적』 향지문화사 p117)


24. 늑천(櫟泉) 송명흠(숙종 31 : 1705-영조 44 : 1768)
공의 이름은 명흠이고, 자는 회가(晦可)이며 늑천(櫟泉)은 호이다. 동춘당의 현손이며 아버지는 묵옹공 요좌이다. 도암 이재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영조 때의 산림이다. 영조가 임오년에 사도세자를 죽이려 할 때 모든 신하들이 임금의 뜻에 따라 감히 직언하지 못하였다. 그때 오직 공만이 “걸·주 같은 포악한 임금도 자식을 죽인 악행이 없었는데 전하께서 어찌 차마 자식을 죽인단 말입니까?” 하는 「論父不可殺子」(아버지는 아들을 죽일 의리가 없고 임금은 신하를 희롱할 수 없음을 논하였다)라는 목숨을 건 상소를 올린 강직한 선비적 기상을 지닌 충신 학자였다.
선생의 호 늑천은 가래울의 동네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송명흠이 만년에 대청호 주변 추동(楸洞)은 원래 가래나무가 많아 가래울이었다. 『櫟泉集』 <부록>에, “戊辰先生四十四歲。春。作正寢于楸谷。楸谷改名櫟泉。後人因以爲先生號。”라는 기록이 나온다. 선생 마흔 네 살 때(1748년) 추곡에 정침을 지었는데, ‘楸谷’을 ‘櫟泉’으로 개명하였고, 뒤에 사람들이 선생의 호로 삼았다는 것이다.
‘늑(櫟)’은 상수리 떡갈나무인데 나무가 곧게 크지 않고 재목으로 쓸 만하지 못하다. 옛사람들이 자기를 겸손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호에 즐겨 썼다. 즉 선생은 재주는 없고 오래 살아가는 겸사의 표현으로 썼다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사례로 이제현이 호를 낙옹(櫟翁)이라한 이유를 『역옹패설(櫟翁稗說)』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대저 락(櫟 : 역, 늑, 낙)자에 딸린 락(櫟)은 음차(音借 : 한자의 음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일)이다. 그러나 재목이 못되기 때문에 피해에서 멀리 벗어날 수 있는 것이 나무에게는 즐거워할 만한 일이므로 이것이 락(櫟)자가 딸린 이유도 된다. 내 일찍부터 大夫의 반열에 끼어있으면서 스스로 화를 면하고 본성을 지킬 수 있었으므로 호를 낙옹(櫟翁)이라하였는데, 행여 재목감이 못되어 천수(天壽)를 누릴 수 있으리라고 여겨서 였다.”


25. 한정당(閒靜堂) 송문흠(숙종 36 : 1710-영조 28 : 1752)
공의 이름은 문흠이고 자는 사행(士行)이며 한정당(閒靜堂)은 호이다. 동춘당의 현손이며 아버지는 묵옹공 요좌이다. 도암 이재의 문인이다. 문장과 시에 능했고, 특히 필체가 뛰어났다. 이규상의 『유화록』에 보면 송문흠은 팔분서와 전서를 잘 썼는데 팔분서는 굳세고 아름다워 근세의 으뜸이 될 만하다. 시문이 어린나이에 성취되어 성균관에서 여러 차례 장원하였다고 한다.
호 한정당(閒靜堂)의 유래는 송문흠이 만년에 산 밑에 살면서 여기에 연못을 파 연꽃을 심어놓고 별당을 지어 당호를 짓고 스스로 자호로 삼았다. 한정당은 속세를 떠나서 한가하고 고요함을 사랑하며 자유로운 대자연의 경지에 이르러 행복하게 살겠다는 뜻이다. 그는 당기에서
“……힘써 속세를 떠나서 한가하고 고요함에 붙여 사랑할 따름이니 이로써 스스로 어질다고 하지 않고 스스로 높다고 하지 아니하며 생각하기를 적당하게 잡념을 비우고 모든 것이 구애받는 것이 없고 통달한다하니 책을 펴놓고 밥 먹음을 잊어버리고 나무그늘을 보며 새소리를 듣고 바람이 서늘함을 기뻐하며 즐기는데 이르러서 무릇 한가하고 고요함을 사랑하는 바는 여기에 벗어나지 않으니, 이것이 곧 증점의 즐거움인데 어른과 아이를 기다리지 않고 기우(沂雩)에 가지 않고도 방안에서 얻어 유식하고 기거하는 곳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이 자유자재로 대자연과 합치되는 경지를 말한다.
이규상의 유화록에 보면 송문흠이 거처할 조그만 집(한정당)을 지을 때, 대장장이와 목공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기가 직접 하였다. 그때 쇠를 쓰지 않고 문지도리는 대나무를 깎아 썼는데 그가 죽은 뒤 40년이 지났어도 아직 망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26. 율수재(聿修齋) 송후연(영조 30 : 1754-순조 2 : 1802)
공의 이름은 후연이고 자는 중고(仲高)이며 율수재는 호이다. 동춘선생의 5대손이며 아버지는 통덕랑공 숙흠이다. 그는 글자를 해독하기 시작하면서 열심히 독서하여 산림 지암 김양행과 늑천 송명흠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녹문 임성주와 과재 김정묵과 종유하였다. 공은 일찍이 이르기를 「과거의 경쟁은 그 뜻을 잃어버리기가 쉽다.」하고 또 녹봉이 봉양에 미치지 못하므로 나가 취할 뜻이 없고 오직 글을 읽고 몸을 수양함으로써 날마다 부지런히 힘썼다. 마침내 섬독(剡牘 : 공문으로 부름)에 올라 처음 벼슬을 하였는데 나가지 않고 또 천거로 계방관(桂坊官 : 세자익위사)에 제수되어 억지로 숙배하였다. 정조께서 크게 총애하시고 권장을 더하시어 매양 연달아 벼슬을 내리시고 선산도호부사 등 내 외직을 두루 겸임하였다.
지암은 율수재(聿修齋)라는 제목으로 호를 지어주고 학문에 힘쓸 것을 권면하였다. 이 당호는 아마도 《시경 대아 문왕편》의 율수궐덕(聿修厥德)이라는 시(詩)귀에서 지어준 것으로 짐작된다. 내용을 요약하면 오직 덕을 닦는 것이 후손에게 물려주는 제일의 재산이다. 재산을 물려준들 지키란 법이 없고, 책을 물려준들 배우란 법이 없으니 오직 진실로 덕을 닦는 것이 제일이다. 이때 특히 조부의 덕, 즉 조종의 덕성을 열심히 닦을 것을 권하고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으라는 것이니, 매양 학문적인 정통성을 조상을 숭배하는데 두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경 대아문왕편》 6장을 소개한다.
詩經大牙文王之什篇 券6(6장)
無念爾祖 聿修厥德(무염이조아 율수궐덕) 永言配命 自求多福( 영언배명 자구다복)
殷之未喪師 克配上帝(은지미상사 극배상제) 宜鑑于殷 駿命不易(의감우은 준명불이) 賦也(부야라)
네 조상을 생각지 아니하랴, 마침내 그 덕을 닦을지어다.
길이 명에 합함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니라.
은나라가 무리를 잃지 않았을 적엔 능히 상제를 짝하더니
마땅히 은나라를 거울삼을지어다. 큰 명은 쉽지 않느니라.


27. 삼기당 송용수(三杞堂 宋龍壽 : 중종12(1517)~미상, 82세에 첨지중추부사)
공의 휘는 용수이고 자는 운수(雲叟)이며 호는 삼기당이다.
서부공과 규암의 계씨로서 숙부인 의성김씨 소생이다. 안동공(여해)의 손자이며 참봉공(세량)의 셋째아들이다. 가정 기해(1539)에 참봉공 상을 당하고 임인(1542) 가을에 서울에서 공산원촌(왜란 전 용두동 삼현서원이 있던 곳)에 낙향하여 정자를 지어 정좌하여 외빈을 접하지 않고 벼슬도 구하지 않으며 초야에 묻혀 살았다. 같이 더불어 노는 사람은 매부인 동주 성제원 추파외손 상촌 신흠 이었다. 상촌이 그 집에다 편액을 써서 삼기당이라 하였다. 또 시를 지어서 기(杞)와 재(梓)의 이름 있는 대목에게 버림받은 것을 탄식하였다. 82세에 품계가 통정대부로써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가 묘비의 요약이다.
참봉공 세량이 3형제를 두셨으니 장남 구수는 호를 서부라 하였다. 건원릉 능참봉을 하였고 증직으로 호조참판을 받았다. 차남 인수는 호가 규암이고 시호는 문충이다. 삼남 용수는 품계가 통정이고 벼슬이 첨지중추부사이다. 어질고 후덕하며 공손하고 겸손하였다. 상촌이 그 집을 삼기당이라 하고 삼기당의 아름다움을 찬양하였다. 호의 의미는 삼기는 세 아들, 삼형제란 의미다. 즉 삼기당의 위 두 형은 주요 재목으로 국가로부터 등용되었다. 공은 출신을 기나무에 비유하여 좋은 재목이지만, 당시 한계가 있어 장인들로부터 외면 받았다. 즉 훌륭한 인재지만 국가로부터 등용되지 못하였다. 어릴 때 외가에 거주하던 상촌이 외종조(용수)를 뵙고, 공의 훌륭한 인품과 재주를 세상에 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삼기당이라는 편액을 걸어준 것 같다.
산소 앞에는 1983년 3월에 세운 묘비가 있다. 11대손 택수가 추기하고 연안공파 10대손 준영이 썼다. 1902년에 세웠던 병찬(우암 문정공 9대손 성균관 대사성)이 짓고, 규수(우암 문정공 8대손)가 쓰고 삼기당 10대손 흠철이 전서한 구비가 있었다. 새 비석을 세우는 과정에서 산소 옆에 묻었다고 한다. 다시 찾아 옆에 세웠으면 하는 필자의 바람이다. 종중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삼기당파 종중회장 형헌 씨와 추파공파 종종회장 계용 씨에 의하면 “삼기당공께서는 이복형인 서부공과 규암공은 약 20살 차이가 나서 어려웠고, 종형인 추파공과는 10살 차이가 나서 추파와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참봉공 상을 당하고 서울에서 내려왔을 때도 문화유씨 소생의 두 형님은 청주 남일면 화당리로, 의성김씨 소생의 삼기당이 공산(용두동)으로 세거를 정했다. 이렇게 정한 것은 ‘너는 내 옆으로 와라 내가 보살펴 주겠다.’라는 추파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평소에 추파께서 고향 선산을 지키고 있는 잠부공 자손과 삼기당을 아끼셨다는 얘기가 종중에 전해오고 있다. 추파외손인 상촌이 외가에 있을 때, 평소에 외조부가 삼기당과 가깝게 지냈기 때문에 외종조 댁의 집 편액을 삼기당이라 지어준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공의 산소가 있는 동구 주산동의 산판은 원래 추파 댁 산판이다. 추파께서 숙모 의성김씨가 돌아가시자 종제 삼기당에게 “산소를 여기다 써라.”라고 허락하셨다. 산소자리 인근 임야 3000평이 등기까지 나온 것으로 봐서 그때 당시 추파께서 자손에게 유언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 사실은 공의 산소위에 추파공의 큰며느리인 청송심씨 산소가 있고, 산소아래 경계 바로 밑에 삼기당과 모 숙부인 의성김씨 산소가 있다.)
삼기당 종중 회장 형헌 씨에 의하면 “삼기당공께서 자제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추파공 자손들과는 친형제같이 지내라.’라는 선조들의 말씀을 들었다며, 지금도 삼기당공파 종원들은 그 뜻을 잊지 않고 있다.”


28. 송오공(松塢公) 송수연(영조 21 : 1745-순조 22 : 1822)
공의 이름은 수연이고 자는 백인(伯仁)이며 송오(松塢)는 호이다. 조부는 평양서윤을 한 요보이며, 아버지는 정흠이다. 동춘당의 5대손으로 종숙부인 늑천공에게 수학하였다. 공이 관직에 있을 때에는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임금께서 자랑하였다. 공은 고을을 다스릴 때 온갖 성의를 다 바쳐 일했으므로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그 고을을 떠나지 않기를 바랬다. 이와 같은 공의 업적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것이 남원의 광한루 안에 있는 선정비(善政碑)이다. 호 송오(松塢)의 의미는 ‘늦게까지 푸르다.’ 라는 뜻을 취한 자호다(<종보 13호>송수연 묘표에서)


29. 추양(秋陽) 송계간(영조 40 : 1764-헌종 7 : 1841)
공의 이름은 계간이고 자는 직경(直卿)이며 추양(秋陽)은 호이다. 목사공 시연의 아들로 조부 늑천 송명흠에게 수학하였다. 순조·헌종 때 산림이다.
호 추양(秋陽)의 어원은 『맹자 등문공장 상』에 있는 강한이 탁지하니 추양이 폭지라(江漢以濯之 秋陽以暴之라)에서 유래되었다. 공자님의 도는 강수나 한수의 맑은 물에서 빨아 가을볕에 말린듯하다. 라는 글귀에서 공은 공자님과 같이 티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인격을 이루고 싶다는 염원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사후 자하 자장 자유 등 제자들이 공자의 외모와 인품을 많이 닮은 유자(유약)를 공자에 준하는 스승으로 모시려하자 증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불가하다. 공자님의 도는 강수나 한수의 맑은 물에서 깨끗이 빨아 가을볕에 말린듯하다. 라 하였으니 어찌 유자를 공자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라 하였다. 공자님의 도는 티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한 인격체이므로 그 어느 누구도 공자님과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맹자 등문공장 상』)


30. 미산공(薇山公) 송종국(고종 8 : 1871-정해 : 1947)
공의 이름은 종국이며 자는 용빈(用賓)이고 미산(薇山)은 호이다. 동춘선생의 9대손으로 아버지는 익위공 창노이다. 벼슬길이 빨라서 21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세자시강원 시종관 겸 장례원 상례에 제수되고 바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장차 승진이 끊이지 않을 텐데 불행히 적신이 나라를 팔고 국가가 망하여 영친왕이 국치를 당하여 일본으로 볼모로 가시게 될 때, 모시고 가서 영친왕을 돌보도록 하는 명을 받았다. 그러나 국운이 기울어지는 것을 통탄하고 배종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만일 그곳에 남았더라면 친일을 하고, 왜놈 밑에서 못된 쪽으로 부귀를 누리고, 자손까지도 부일을 해서 출세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렸을 것이다. 그러나 단호히 이를 거절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총독부에서 수많은 관직의 의혹이 있었으나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초야에 묻혀 학문에 열중하고 가도를 세우는데 전력하였다.
특히 고향에서 1918년 3월 1일 동명사립학교 설립인가를 받고, 1918년 4월 1일 동명사립학교 개교(대덕군 동면 신하리 485)를 하여 지역의 아이들에게 신교육의 혜택을 받게 하였다. 1923년 3월 1일 국가에 기부하여 동명공립보통학교로 인가를 받게 하였다. 초등학교가 부지 등 독지가의 희사로 초등학교가 개교한 것은 희귀한 예다.(김홍균, 송광헌 증언)
호 미산(薇山)은 서산 즉 수양산을 말한다. 서산의 고사리와 동해의 물로서 술을 올리니 경의 맑음을 표하는 것이다. 즉 다음과 같은 고사에서 유래한다. 주나라 무왕이 아버지 문왕이 죽은 뒤 즉시 은나라 주왕을 친 것을 불효라 하여 백이숙제의 의리는 주나라 곡식은 먹지 않고 수양산에 숨어 고사리를 캐어 먹었다. 그들은 수양산에 숨어살며 굶주려서 죽을 때에 이르러, 노래를 지어 이르기를 「저기 저 서산에 올라가서 그 아름다운 고비를 캐리라(登彼<西山>兮, 采其薇矣 : 사기 백이전) 그러나 백이와 숙제만은 주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결국은 굶어죽었다. (以堂 成彬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