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진송씨의 역사인물

대제학(大提學)에 오르신 분

1) 송상기(宋相琦)

조선시대에 홍문관(弘文館) 및 예문관(藝文館)에서 정2품의 으뜸 벼슬을 말한다. 이 대제학(大提學)은 관직(官職)의 급(級)은 그다지 높지 않으나 학문의 최고 직책이라는 점에서 학자들이 선망하는 자리로서 속담에 ‘하나의 대제학이 열의 판서와 바꾸지 않는다.’고 했다.

은진송씨 문중에서는 옥오재(玉吾齋) 문정공(文貞公) 송상기(宋相琦) 한 분이 계시다.

송상기(宋相琦)는 자가 옥여(玉汝)이고 호는 옥오재(玉吾齋)이다. 판서 문희공(文僖公) 규렴(奎濂)의 자제로 1657년(효종 8)에 태어났다. 우암 문정공의 문인으로 동춘당이 일찍이“이 아이의 명성이나 지위가 내 아래에 있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옥오재가 일찍이 과거에 응시했을 때 우암을 음해(陰害)하는 모의(謀議)가 있음이 나돌자 과거를 포기하고 돌아왔다. 이에 우암이 문중에 경사가 났다고 기뻐하였다.

이어 회덕에서 다시 서울로 올라가 사마시(司馬試)에 수차 장원하고 1684년(숙종 10)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어 홍문관 저작(弘文館 著作 : 정8품)을 제수 받고 박사(博士), 검열(檢閱), 수찬(修撰)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숙종 15)에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가 이 해에‘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왕비(王妃)인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가 폐위(廢位)되고, 장씨(張氏)를 왕비의 자리에 앉히면서 남인이 집권하자 우암과 외숙(外叔)인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이 화(禍)를 당했다. 이에 공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남인들이 제거되자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 1702(숙종 28)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이후 노론의 중신으로 대사성(大司成), 대사간(大司諫), 이조참의, 대제학, 대사헌, 예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어 이조판서에 올랐으나 1705년(숙종 44) 민희빈(昭顯世子妃)의 시호(諡號) 개정을 반대하다가 한때 파직되었다.

그러나 곧 예조판서에 기용되고 다시 이조판서와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내다가 경종(景宗)이 병이 있으니 세자(世子)에게 청정(聽政)을 시키자고 여러 대신들과 더불어 상소하였기 때문에 1722년(경종 2)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입어 전남 강진(康津)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인 1723년(경종 3)에 그 유배지에서 하세하였다.

1725년(영조 1)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문정(文貞)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학문이 뛰어나고 문장과 서체에 능했으며 저서에『옥오재집(玉吾齋集)』이 있다. 산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외삼동에 있는데 신도비는 이의현(李宜顯)이 짓고 김진상(金鎭尙)이 써서 1746년(영조 22)에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