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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희(송은노의 외손)

동춘당문정공파

소개

벽초 홍명희

 

괴산 장터 3·1만세운동의 주역 은송의 외손 벽초 홍명희
― 송은노(한정당 문흠의 현손)의 외손 ―


벽초 홍명희(1888~1968)는 한정당 현손인 금산군수 송은노의 외손이다. 송은노의 둘째 사위가 홍범식(1871~1910)이고, 홍범식의 아들이 홍명희다. 사위와 장인이 금산군수를 한 희귀한 사례다.

당시 조선의 3대천재로 상인의 춘원 이광수, 중인의 육당 최남선, 양반의 벽초 홍명희가 있었다. 이중 이광수와 최남선은 변절해 친일파의 길을 걷는다. 홍명희는 변절할 수 없었다.
아버지와의 약속 때문이다. 홍명희의 아버지 홍범식은 대한제국의 관리로써 금산군수로 부임했다.

경술국치일(1910.8.29.) 저녁 무렵 홍범식은 재판소 서기 김지섭을 불러 상자를 하나 주면서 집으로 보냈다.
그 상자에는 가족에게 보낼 유서가 들어있었다.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어떻게 하든지 조선 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찾아야 한다.
하늘보기 너무 부끄럽다. 어떻게 하늘을 보겠느냐? 조국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아버지의 목숨을 걸고 맹세해라.” 그리고 그날 객사 뒷산 소나무 밑에서 자결했다.

 

벽초 홍명희 생가

충북 괴산군 괴산읍-한국관광공사

아들 홍명희가 아버지의 유언을 실행에 옮긴 것은 9년 뒤였다.
홍명희는 괴산의 자택 사랑채에서 동향의 청년들과 머리를 맞댔다.
괴산 3·1운동의 시작이었다. 홍범식의 장남 홍명희가 만세운동과 인연을 맺게 된 데는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이 계기가 되었다.
고종의 국장에 참석하기위해 상경했던 그는 청주출신 의병장 한봉수를 만나고 함께 손병희를 방문한다.

이 자리에서 홍명희는 의암 손병희로부터 3·1운동에 대한 설명을 듣고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다.

당시 홍명희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겸 학예부장이자 역사소설 ‘임꺽정’의 작가로 활약하던 유명인사였다.
홍명희는 고향으로 돌아온 직후 1919년 3월 18일 자택에서 숙부 홍용식과 함께 만세운동을 도모했다.
그는 괴산군내 이재성 등 의혈 청년을 비롯한 홍씨 문중의 지식인들과 함께 논의하고, 인근 괴산공립보통학교와 청주농업고등학교 학생들에게도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그는 자택에서 작성한 선언서에서 “최후의 1인까지 조선의 독립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괴산 만세시위는 모두 15차례에 걸쳐 전개되었으며 이중 주재소 등 관공서를 공격한 사례는 모두 7차례나 됐다.”며 이 과정에서 경찰관의 발포로 7명이 순국했고, 8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2명은 재판과정에서 악형과 고문을 받아 후유증으로 사망했을 정도로 만세운동이 치열하고 격렬하게 전개됐다고 한다.

특히 통문을 통해 시위가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전개된 것은 전국 만세운동 중 드문 사례라고 한다.
그 중심에 은송의 사위 홍범식과 외손 벽초 홍명희가 있었다.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3·1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