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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필영

충순위공파

소개

3・1의숙(三一義塾)과 송필영 선생

선생의 휘는 필영이고 자는 은설(殷說)이며, 호는 상암(嘗庵)이다. 충순위공 세적의 14대손이며 부친은 호석과 모친 인천이씨 사이에서 1892년 10월 11일 합천군 대병면 유전리에서 출생하였다. 5세에 종숙 송호언 밑에서 수학하고, 16세에 7서(七書)를 통달하였다.

1908년 17세에 큰 뜻을 품고 상경하여 서울의 보성전문(고려대학 전신) 3년을 수료하고, 1911년 20세의 나이로 일본 유학길에 올라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였다.

재학중 학우로 김성수 부통령, 안재홍 국민당 당수, 장덕수 선생, 신익희 국회의장과 더불어 와세다대학 내에 한국민족 5인 학우회 및 평의회를 조직하여 월간지인 『學之光(학지광)』을 발간하였다. 일본 내 유학생들과 더불어 학생운동을 하면서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는 비참한 현실을 보고, 1915년 노령(露領) 해산위로 달려가서 항일독립단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중에, 고국에서 조부님이 손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허위로 조부별세부고(祖父別世訃告)를 띄워 귀국케 하였다.

대한제국 삼가의병단 기념비

경남 합천군 대병면

귀향 후 1919년 기미년 3월 구국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고향 대병면에서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민중들을 동원하여 3월 19일 대병면 고현(古顯)장날을 기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장터를 돌며 독립만세를 부르며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다.
시위군중들이 대병주재소로 향하자 일본경찰들이 총을 난사하여 군중을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선생은 주모자로 체포된 5명의 동지들을 위해 변론을 하여 형을 모면하게 하고, 전원 석방시켰다.

그 후 일제강점기 치하에서 가족과 친지들이 관계진출을 수차례 종용하였으나 끝내 거절하고, 교육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구국정신으로 친지 동지들의 뜻을 모아 사재(私財)를 털어 1921년 3월 1일 「삼일의숙(三一義塾)」이라는 학교를 설립하였다.

3·1독립정신을 담아 의숙의 이름을 「삼일의숙(三一義塾)」이라 현판을 걸고 선생께서 직접 의숙장에 취임하였다. 학교가 날로 번창하자 일제는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탄압과 방해를 하여 1927년 강제 폐교 당하였다.

선생께서는 희망을 잃고 좌절과 실의에 빠져 고향 대병을 떠나 진주로 이사했다. 그 후 대구로 다시 이사하여 전전하다가, 5년 후 1931년 「삼일의숙」건물과 학교의 모든 재정을 이건하여 현재 유전초등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모든 것을 유전초등학교에 기증하고 대구에 게시면서 신병치료하다 병이 위중해져 고향 대병으로 귀향하셨다. 병석에서도 선생은 항상 나라 걱정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조국해방의 기쁨을 맞이하였으나 광복의 기쁨을 맞보지 못하고, 이듬해 1946년 5월 9일 숙환으로 하세하니 향년 55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