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암 송병조 주석은 1877년 12월 23일 평안도 용천도호부 양하면 신창동(현 평안북도 용천군 신암리)에서 송재홍(宋再弘)의 3남 3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청년 시절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서 평북 용천군을 중심으로 기독교를 포교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육영사업에 노력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이에 호응하여 각지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주동적인 역할을 하는 한편 군자금을 모금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21년 신변이 위험해지자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상해로 망명하였다.
신암 주석은 그곳에서 상해의 대한적십자사 감사, 국민대표회의, 신한청년단 대표 등을 역임하다가,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서 개조파와 창조파의 다수가 떠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자금난에 시달릴 때에도 김구와 함께 임시정부에 계속 남아서 활동하였다.
1926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과 의장에 선임되었으며 또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3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재무장 및 주석을 지냈고, 1934년에는 임시의정원 미주 대표의원 및 의장직을 수행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한국국민당의 간부로서 조선혁명당, 그리고 만주 등지에 산재한 여러 단체들의 간부들과 협의하여 한국광복전선을 조직하여 활약하였다.
1940년 광복회를 설립하고 중국 당국과의 조약체결 등에 활약하다가 중경으로 임시정부를 따라가서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임시정부 국무위원, 고문, 임시정부 회계감사원장으로 활약 중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42년 2월 25일 65세로 병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에 추서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