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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명(宋希命)

취옹당공파

소개

취옹당공 희명 묘역

대전 동구 이사동

취옹당은 목사공 요년의 현손이며 청죽당 송화수의 둘째 아들인 송희명의 당호이며 별호이다. 그는 향천에 의하여 참봉이 되었으나 곧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문중과 서원과 향리를 위하여 일하였다.

이리하여 일가들은 종장이라 부르고 서원에서는 원장이라 부르며, 고을 사람들은 향장이라 불렀다. 특히 취옹당은 유조비의 정려가 내려질 당시, 문장(門長)으로 있으면서 동춘 우암선생과 함께 문중의 힘을 규합하여 정려가 내려지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우암선생이 지은 묘표를 보면 취옹이라 호한 뜻이 잘 나타나있다.

“…… 공의 사람됨이 자상하고 근신하여 남과 어긋남이 없었다. 부모를 잘 섬겨서 친한 벗과 지인에게 미쳤으니 모두들 존경하고 사모하였다. ……스스로 취옹이라는 뜻을 풀이하여 그 당에 명을 지어 걸었으니, ……어언간 내 나이 팔십이 가까우니/ 아내도 앞서서 가버렸구나/ 이 내 한 몸 어디에 둘까/ 만사를 생각 말고 취하는 게 제일이라/ 술동이를 항시 방안에 두어/ 하루 밤 자고나서 귀 기울이니/ 가는 빗소리가 가만 가만 들려오고/ 이틀 밤 자고나서 뚜껑을 열어보니/ 포도 빛이 역력히 떠오른다./ 한잔 두잔 기울이니 화기는 융융하고/ 깨었다가 또 취하니 즐거움이 도도하다.……”

우암선생은 공이 나이가 많은데도 치아와 모발이 쇠하지 않고 거름걸이가 굳센 것을, 후한의 마원이 교지(월남)정벌에 출정하여 공을 세운 고사를 인용하여 노익장을 말했으며, 자손이 귀하게 되고 증손까지 보아 많은 자손을 둔 것을, 당나라 장공예가 자손을 많이 두어 9세가 동거함으로써 황제가 친히 거동하여 비단을 하사한 고사를 인용하여 기렸다.

즉 그는 취옹이란 가까운 가족 친족과 이웃, 벗과의 사귐을 즐거움으로 표현하고 그들의 즐거움이 모든 사람들의 즐거움이다. 라는 사실을 술을 통해 나타내는 여민동락의 마음이 아닐까?

취옹당공 희명 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