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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화(宋炳華)

사우당효정공파

소개

오적당(吾適堂)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난곡(蘭谷) 송병화(宋炳華) 묘역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송병화(宋炳華)는 자가 회경(晦卿)이고, 호는 난곡(蘭谷) 또는 약재(約齋)이다. 조식(肇植)의 자제로 1852년(철종 3) 12월 9일에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처음에 이름을 병준(炳俊)이라 하였고, 호는 영중(英仲)이라 하였으며, 호는 약재(約齋)라고 하였다가 뒤에 이름과 자와 호를 모두 고쳤다.

동로사(東魯祠)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봉강정사(鳳岡精舍)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1877년(고종 14)에 상경하여 당시에 실세인 김병학(金炳學)을 만나 국사를 논하다가 시대에 맞지 않으므로 사양하고 돌아왔다. 마을 남쪽 영귀대(詠歸臺)에 봉강정사(鳳岡精舍)를 짓고 종족(宗族), 문인(門人)들과 더불어 학문 탐구에 전념하였다.

난곡(蘭谷) 송병화(宋炳華) 묘비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도학(道學)과 덕행(德行)이 높게 인정되어 천거(薦擧)로 1905년(고종 42) 정릉 참봉(靖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고종이 6품으로 승진시키고 사관을 보내어 다시 간청하였으나 그가 상소를 올리고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1906년(고종 43) 그와 심암(心岩) 김지수(金志洙)에게 경연관(經筵官)에 의론이 있어 사조(四祖)5)를 올리라는 명이 있었는데 그가 거절했다. 1907년(순종 1) 판서(判書) 임선준(任善準)이 좨주(祭酒)로 그를 천거(薦擧)한다는 말을 듣고 시를 지어 나아가지 않을 뜻을 보였다.

1910년 한일합방의 소식을 듣고 통분을 참지 못하여 자명사(自銘辭)를 지어 망국한을 달래고 의로움을 끝까지 지켰다. 임천(林泉)에 숨어 살면서 후진교육에 힘쓰고 학문연구에 몰두하다가 1916년 8월 23일에 타계하였다.

처음에는 대전광역시 서구 도마동 사우당효정공(四友堂孝貞公) 묘소 뒤 해좌(亥坐)에 배위 의인(宜人) 경주김씨와 합폄하였다가 대전시의 도시 확장으로 다시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으로 이장하였다.

사후 그의 도학과 절의를 받들어 오적당(吾適堂)에 배향되었다. 저서에『난곡집(蘭谷集)』15책이 있다.

주석

  • 5) 사조(四祖) :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