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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이창(宋爾昌)

소개

영천공(榮川公) 이창(爾昌) 묘역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생애 연보를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 명종 16(1561)년 : 한성 연화방에서 외조부 이윤경의 집에서 태어나다. 청음 선생이 찬술한 갈문(碣文)에 미목이 아름답고 좋으며 눈썹과 눈이 그림 같았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칭찬받는 집 아이임을 알 수 있다.

· 14살 때(1574) : 가정에서 배우고 송세협 송숙 전흠에게 학문을 익히었다.

· 17살 때(1577) : 백록 신응시 선생에게 한시를 수학하였다.

영천공(榮川公) 이창(爾昌) 묘비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 20살 때(1580) : 광산 김씨 첨추 김은휘의 따님과 혼인하다.

· 23살 때(1583) : 諸生과 더불어 율곡 이이 선생의 誣함을 풀어주도록 하였다.

· 29살 때(1589) : 사마초시에 급제하고 30세때 진사회시에 급제하였다.

· 37살 때(1597) : 7월에 법천에 작은 집을 지었다. 8월에 정유재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전 가족이 강릉으로 들어갔다.(이 때 부군의 누이 전실 자식 신경진이 강릉도호부사로 있었기 때문에 누님이 관사에 있었으므로 전 가족이 의탁하였다.) 이 때 옥산 이우(율곡 선생의 아우)도 역시 강릉에 피난하여 매양 詩酒로써 경포대 한송정에서 놀며 난리에 고통을 모르며 지냈는데 옥산의 모든 작품에 차운(次韻)이 보인다.

· 38살 때(1598) : 아버지 호군공을 받들고 회덕 송촌에 들어와 작은 집을 지어 청좌와 편액을 걸었다. 못을 파서 연을 심고 날마다 남으로 낙향한 인사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며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 40살 때(1600) : 연원도 찰방에 제수되었다. 경양도 찰방으로 이동되었다.

· 41살 때(1601) : 식년과 증광시에 나가서 2등에 뽑히었다.

· 46살 때(1606) :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다. 호군공이 연노로써 통정대부의 품계에 이르렀다. 아들 준길이 태어났다. 이 때 부인 영인과 더불어 나이가 다 쇠로하였으나 손을 두지 못하여 입후를 의논하며 이미 뜻을 두었다. 아들이 출생하여 호군공이 크게 기뻐하고 친지들도 서로 하례하였다.

· 53살 때(1613) : 國舅 김제남이 옥사에 얽혀 죽었다. 공의 庶妹壻 서양갑이 계축옥사에 얽혀 관직에서 파면되었다.

· 54살 때(1614) : 송담과 더불어 계룡산에서 놀다. 수옹공이 아들 시열을 가르쳐주기를 부탁하였다.

· 56살 때(1616) : 갑천에 읍호정 望辰居를 세웠다.(정자가 船巖川위에 있었고 초가집을 지어 망신거라 하였다.) 이 때 사계 또한 가화를 만나 연산에 있으면서 서로 왕래하며 즐겼고, 죽창 수옹과 더불어 詩酒로 서로 초청하며 즐겼다. 10월에 송담공이 쌍청당을 중창하고 모든 일가를 모이게 하고 제사를 올리고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숭현서원 원장을 하고 입교당을 세웠다. 사계선생과 더불어 강선대에서 놀다. 때로는 고양(羔羊)을 잡고 술을 장만하여 친한 벗들과 더불어 그 속에서 회포를 지워 보내고 세상을 마치려 한지가 10여년이 되었다.

· 58살 때(1618) : 2월에 아들 준길의 관례를 올리다.

· 62살 때(1622) : 사계선생과 더불어 냉천 강선대에서 놀다. 죽창 등 제공들이 같이 갔다.

· 63살 때(1623) : 아들 준길이 진주 정씨(우복 문장공 정경세)의 따님과 혼인하다.

· 64살 때(1624) : 이괄의 난이 일어나 임금께서 남으로 순수하시니 천안에서 공경히 맞아 모시고 호위하여 공주에 이르렀다.

· 66살 때(1626) : 정월에 영천군수에 제수되었다. 12월에 송담공 상에 곡하다.

· 67살 때(1627) : 정묘호란이 일어나다. 이 때 사계선생이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부군으로 소모 참모관을 삼았다. 이에 부군이 곧 향서당에 들어가서 모든 父老를 모여놓고 소모(召募)할 모든 일을 분부하매 대략 頭緖(일의 단서)가 있었다. 이 때 주상께서 강도(江都)로 향하시고 세자께서는 임시로 조정을 나누어 남하하시니 부군이 공주로 달려와 문안드리고 사계와 더불어 같이 임시로 있었는데 이 때 수옹이 오고 영상 이원익 우상 상촌 신흠을 방문하였다. 장차 강도에 가서 임금의 일을 도우려 했다. 종사 윤전 참모 유즙 등이 따라 이르렀다. 4월에 사계와 더불어 황산원에 모였다. 5월 23일 청사의 정침에서 마치었다. 임종에 미치어 모신 자를 명하여 자리를 바꾸어 동을 머리를 하게하고 부축하여 앉아서 의관을 바르게 하시고 편안하게 돌아가셨다. 원근이 다 슬프게 여기고 말하기를 착한 사람이 그만 가시었다. 하고 분주하게 와서 곡을 하였다.

· 1658년 4월에 아들 준길이 귀하게 됨으로써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1719년 推恩하여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송이창(1561~1627)은 임천군수 송응서의 아들로 태어났다. 연보를 보면 매부 백록 신응시에게 한시를 배우고 연보 곳곳에 친구들과 시주(詩酒)를 나눈다는 기사가 많이 산견되고 있다. 『청좌와유고』를 보면 시가 100여 편 이상 되는데 송담 송남수와 관련되는 시가 20여수에 이른다.1) 특히 재종숙 되는 송남수와 읍호정과 갑천 계룡산을 유람하며 서로 수창(酬唱)하며, 숭현서원 복설과 문중의 대소사 등 서로 상의하며 지냈다. 하세한지 350년 이후에 문집이 나와서 더 수집하여 완벽한 문집을 만들어 분석해보면 좋은 연구가 되지 않나? 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