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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남수(宋柟壽)

소개

가. 생애

송남수(중종 32, 1537∼인조4, 1626)의 자는 영노(靈老) 호는 송담(松潭) 본관은 은진이다. 쌍청당 송유의 5대 주손으로 안악군수 송세훈의 3남2녀 중 장남으로 대전광역시 대덕구 중리동(당시 宋村)에서 출생하였다.

16살 때 부친상을 당하자 그는 당시 목사공 요년 등 산소가 있었던 상사한리 인근의 하사한리에 안악공을 입장(入葬)하였다.

효자 선교랑(孝子 宣敎郞) 송경창(宋慶昌) 묘역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그 과정에서 단양 우씨 등 선주민의 반대가 있었지만 그들을 간곡하게 설득시켜 묘소를 쓸 수 있었다.

19살 때 전의 이씨와 혼인하였으나 자녀 없이 일찍이 상처하였고, 다시 2년 뒤 진주 유씨와 가약을 맺어 평생을 해로하였다. 공은 쌍청당의 풍모를 닮아 자연을 즐기며 삶의 여유를 가졌다.

28세 때 쌍청당과 절우당을 수축하였다. 절우당은 쌍청당 서쪽에 있다. 곧 공의 막내 삼촌 세협(자산공)이 지은 것인데, 공이 수축하고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를 심어 "절우(節友)"라 명명하고 정곤수 등 여러 사람에게 시와 기문을 청하였으며, 또 16영이 있어 한때의 명사들이 시를 짓고 화답한 것이 많다. 또 60세 때의 기록에는 “절우당에 시를 지어 걸었다.”고 되어있다.

42세 때 처음 벼슬하여 사포시 별제가 되었다. 이후 의영고 직장, 상의원 주부, 사헌부 감찰을 거쳤다.

51세 때 정산현감이 되어 외직으로 나갔다. 이 곳에서 그는 현의 청사 앞에 연못을 만들었는데 물은 뒷산에서 흐르는 물을 담장 안으로 끌어들여서 운치를 더하게 만들고 연못 가운데에다 조그만 정자를 지어 만향정(晩香亭)이라 붙이고 각각 10영과 8경을 짓게 하는 등 남이 짓거나 자신이 지은 건물에 경관시를 남겼다. 이때 이호민이 만향정 8경시를 남겼다. 이에 앞서 서울에 살 때도 남산 기슭 경치 좋은 곳에다 집을 짓고, 상심헌(賞心軒)이란 편액을 걸고 안에는 책으로, 밖에는 꽃과 나무로 주변을 꾸며놓고 어진 벗들과 마주앉아 시와 거문고를 즐기며 살았는데 이것이 공의 본심이며 진면목이었다.

56세 되던 선조25(1592)년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사헌부 감찰이 되었는데 이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57세 때 종부시 주부로 자리를 옮겼다가 이어 상의원 판관, 평시서령으로 승진하였다. 또 호조정량을 거쳐 다시 외직으로 나가 통천군수가 되었다. 통천은 강원도의 동북부에 있는 곳으로 바다와 금강산이 함께 어우러져 경치 좋기로 이름난 곳이다. 공은 이곳에서 고을살이하는 여가를 틈타 명승지를 두루 살피며 아름다운 자연 경치에 도취, 그 느낌을 시로 남겼다. 이때 통천군 흡곡현령이던 한석봉이 통천군수인 공에게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써 준 것도 이 때였다.1)
송남수의 문집에 보면 「송담부군의 명성이 한 때에 드러나서 사귄 사람들이 다 당대의 명현들이었다. 학문에 있어서는 율곡 이이, 문장과 덕망에 있어서는 월사 이정구 상촌 신흠 일송 심희수, 시에 있어서는 석주 권필, 동악 이안눌, 글씨에 있어서는 석봉 한호, 그림에 있어서는 석양정 이정과 함께 서로 교분이 좋았다. 여러 사람들이 쓴 간찰과 석봉이 쓴 귀거래사 및 석양정이 그린 대나무는 다 종가에 보관되고 있다.」고 하였다.2)

61세에 임천군수가 되었는데 이것이 공의 마지막 공직이었다.

63세(1599)에 은진송씨 족보를 편찬하였다. 그는 서문에서 이 족보가 화목하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 반드시 조그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족보는 임진왜란 중에 민몰되고 말았다.

69세(1604)때에는 송촌 뒤 송림 사이를 계단식으로 만들어 꽃과 대를 심은 다음 칠급대(七級臺)라 이름붙이고 여기를 거닐며 성정(性情)을 편안하게 하는 장소로 하였다.

73세 때는 숭현서원은 임진왜란 전에 대전시 용두록에 있었는데, 불타버린 것을 공이 장소를 옮겨 원촌동에 중수하였다. 이 서원에 배향된 인물은 수부 정광필,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세분이었으므로 삼현사(三賢祠)라 하였던 것을 공이 중수한 후, 1609년 3월 사액을 받아 숭현서원이라 하였다. 대원군 때 훼철된 것을 최근 대전광역시에서 복설하였다.3)

79세(1615)때에는 대전시 동구 이사동 하사한리 선영아래 피운암(披雲菴)이라는 조그만 암자를 짓고 그 앞에 연못을 만들어 송담(松潭)이라 이름붙이고, 아울러 본인의 호로 삼았다. 공의 호는 賞心軒 五道山人 松潭 등 여럿이 있으나 송담이 가장 애칭 되고 있다. 호 송담이라 지어진 연유는 가장(家狀), 우암선생이 지은 묘지(墓誌) 연보 75세(1615)에 잘 나타나 있다. 송담은 소나무(松)숲에 못담(潭)자이다. 소나무 숲으로 인해서 송담이다.

“ …또 선영아래에 조그만 암자를 하나 짓고 피운암이라고 명명하였다. 그 앞에는 조그만 시내가 하나 흘렀으니 못을 만들어 송담이라 명명하고 스스로 송담청일(松潭淸逸)이라고 호하였다. 또 오도산인이라고도 일컬었다. 매일 거기에서 거처하기를 사랑하여 선세에 대하여 존경하고 사모하는 뜻을 부쳤다.…”

「절우당(節友堂)이란 이름은 솔(松) 매화(梅花) 대나무(竹) 국화(菊花)를 당 주위에 심었는데 봄에는 매화, 여름에는 대나무, 가을에는 국화, 겨울에는 솔이 있어, 그 취향과 절의를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절자(節字)를 따고 우(友)는 위의 4가지를 벗 삼는 말의 의미를 붙인 당호이다. 절우란 지조 있는 벗을 의미한다.

80세(1616)에 가선대부가 되었다. 연세가 높으므로 추은(推恩)해 품계가 오른 것이다. 이 해에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쌍청당을 중창하였는데 생전에 두 번째였다. 공이 28세(1563)때 쌍청당을 재 중건하였다. 통천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병화를 우려하여 아들 희건을 시켜 현판의 글을 베껴 보관하였다가 쌍청당이 소실되자 80세에 삼 중건하면서 현판의 글들은 김현성에게 다시 쓰도록 하고, 글을 판각하여 걸었다. 또한 손수 당액(堂額)을 팔분체로 써서 쌍청당 추녀 밑에 걸었는데 지금껏 전하고 있다.

81세(1617)때에 당시 숭현서원 원장이던 송이창의 주도로 입교당(入敎堂)이 준공되자 전액(篆額)과 시를 써서 걸었다.

86세(1622)때 그가 평생을 두고 명승고적지를 찾아다니며 보고 느낀 경관들을 정리하여 「해동산천록」을 편찬하였다. 그는 발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내가 20시절부터 산수를 좋아하는 성벽이 있어서 아이를 하나 데리고 나귀 한 마리로 아무리 먼 곳이라도 찾아가 보지 않은 곳이 없다. 정양사에서는 사흘 밤을 잤고, 천마산은 네 번이나 찾았다. 29세(1565)부터 48세(1584)까지 20년 동안 몸은 비록 관직에 있었으나 봄꽃과 가을 달의 감상에는 거른 해 없이 모두 31회였다. 중년에 통천군수를 맡게 되었는데 영동 영서지방의 명승지를 다 찾아보았다. 세월은 빨라 어느덧 90세가 되었으니 바다와 산에서의 유람을 어찌 다시 즐길 수 있겠는가? 산림에서의 좋은 경치를 구경하던 때를 거슬러 생각하니 아득히 다른 세상의 일 같다. 이미 본 곳은 본대로 기록하고, 보지 못한 곳은 지지(地誌)에 따라 기록하여 산창(山窓)에서 펴보고 누워서 구경하는 자료로 삼는다.”

답사한 양과 열성 면에서 볼 때, 오늘날의 전문여행가들에 전혀 손색이 없는 수준이다. 더구나 자신의 체험과 지지를 이용하여 우리나라의 자연 경관에 대한 전문적인 책을 편찬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유산 답사기라 할 수 있다.

87세(1623)때 공은 인생을 마감하는 정리를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해에 「검신요결」과 「상례요람」을 편찬하였다. 「검신요결」은 공이 일생동안 글을 읽으면서 여러 현인들의 언행을 발췌하여 기록한 것인데 후손들에게 교훈을 삼게 하기위하여 만든 것이다.

90세(1626)에 이르러 가의대부로 승진하였는데 보통은 잘 없는 대우였다. 이해 12월 30일 정침에서 하세하여 하사한리 선영에 묻혔다. 공의 묘갈은 상촌 신흠이 짓고, 송규렴이 추기하고 송상기가 쓰고, 선원 김상용이 두전하였다.

이상에서 살펴 본대로 송남수는 은진송씨 가문에서 종손으로 출생하였다. 5대조 송유의 풍도를 가장 많이 닮은 인물로 벼슬보다는 자연을 즐기며 틈틈이 학문하는 선비였다. 공이 사귄 인물들은 각 분야별로 나라 안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었으니 학문으로는 이이, 문장으로는 최립 이호민 권필 이안눌, 글씨로는 한호 김현성 그림으로는 이정 등이 그들이다.

이런 교유관계로 본다면 송남수의 인품과 덕망, 그리고 그의 잠재능력을 헤아릴 수 있다. 지역사회에서는 숭현서원을 중건하고 기금을 출연하여 운영을 활성화시켰으며, 문중사업으로는 쌍청당의 중수와 절우당 수축 하사한리 묘역조성 가문의 수장으로서 「은진송씨족보」를 편찬하여 동족간의 유대를 강화하는데 기여하였다. 공은 자연주의자요 시인이요 당시 유교사회의 모범적인 한 가정의 어른이었다. 저서로는 한시집인 「송담집」과 「해동산천록」 「검신요결」 「상례요람」등이 있다.4)


나. 숭현서원 중수

숭현서원은 1583년경 정광필·김정․송인수 등 3현을 모시기 위하여 대전 용두록에 건립된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그러나 건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소실된 서원을 다시 복설한 것은 17년 후 1609년 송남수에 의해 이루어졌다.5) 이 중수를 위해 송남수와 같이 힘을 합쳤던 인물로는 청좌와 송이창이다. 송남수와 송이창은 재종질간으로 20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나지만 뜻을 함께 하여 향촌과 문중 대소사를 의논했다.

이시직은 1609년 3월 삼현을 모신 이 서원을 사액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려, 그해 6월 숭현(崇賢)이라는 사액을 받을 수 있었다. 이시직은 조부 이정현이 송준길의 증조부 송세영의 사위가 된 것을 인연으로 하여 회덕에 와 살고 있었다. 그는 뒤에 조정에 나가서 벼슬이 사복시 정(정3품)에 이르렀는데, 1636년 강화로 피신하였다가 회덕 출신의 송시영과 함께 자결한 절의의 인사였다.

숭현서원 낙성한 후에 송남수는 윤근수와 이호민 그리고 신흠에게 기물을 청하는 한편 서원 부근의 전답을 매입하여 서원에 배속시켰다.6) 송남수가 중심이 되어 서원이 건립되었을 때 서원 구내에는 묘우만 있었을 뿐 선비들의 학문 연마 공간인 강당은 아직 세워져있지 않았다. 숭현서원의 강당인 입교당(立敎堂)은 송이창이 여러 유생을 거느리고 건립했다.

그는 서매부 서양갑이 계축화옥에 연루된 일로 인하여 벼슬길에 물러난 뒤 1613년부터 회덕에 내려와 있었다.7) 건물이 완성되자 송남수는 입교당의 전액(篆額)과 시를 써서 설주에 달게 하였다.8) 입교당위의 전액을 썼다고 하는 것은 그의 숭현서원에 대한 강렬한 애정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다. 쌍청당·절우당 중수

1432년 쌍청당 송유에 의해 건립된 쌍청당은 회덕과 은진송씨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1차는 송남수의 조부 송여림에 의해 1524년에 중수되었다. 이때 눌재 박상이 기문을 지어주었다.9) 2차 중수는 1차 중수이후 40년 만인 1563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화로 쌍청당이 완전히 소실되어 그 터에는 가시덤불만 남게 되었다. 쌍청당이 재건된 것은 20년의 시간이 흐른 1616년이었다. 청좌와 연보에 보면, 이 해 10월에 여러 친족과 모여 쌍청선조에게 제사를 지냈다. 송담공이 쌍청당을 중창하고 모든 일가들을 모이게 하고 제사를 올리고 낙성하였다.10)

송남수는 고을 일가들의 후한 원조를 얻어서 당우를 복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상자 속에 보관해두었던 쌍청당 현판의 글들은 김현성이 다시 쓰고, 자신이 전액을 써서 당미(堂楣)에 걸었다. 쌍청당은 그 뒤 몇 번 더 중수되었지만 김현성의 글씨로 만든 현판들과 송남수의 쌍청당 전액은 지금도 그곳에 걸려있다.11)

그 뒤 그는 1564년 절우당을 수축하였다. 절우(節友)란 봄날의 매화, 여름철의 대나무, 가을의 국화, 겨울의 소나무를 말하는데 모두 절개를 지키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절개를 벗 삼는다는 뜻이다. 그 후 송남수는 여러 지인들에게 절우당 시를 부탁했는데 정곤수와 송찬, 이해수의 시가 남아있다.12)


라. 松潭集

송남수(1537~1626)는 유고집으로 『송담집』을 남겼다. 이 책은 그의 후손인 송국사 송규창 송규렴 송상기 등이 자료를 수집하여 1686년(숙종 22)에 펴낸 책이다. 서문은 우암 송시열이 쓰고, 발문은 농암 김창흡이 썼다. 그 후 1968년에 4권2책으로 중간하고, 1980년 1997년 2회에 걸쳐 번역본 『국역 송담집』을 발행한 바 있다.

『송담집』의 내용은 검신요결, 서(序), 기(記), 등과 부록으로 연보(年譜), 가장, 묘지, 묘갈명과 습유(拾遺)등이 있으나 대부분 시가 주를 이루고 있다. 시 가운데는 오언절구 32편, 칠언절구 171편, 오언율시99편, 칠언율시 134편, 오언배율 2편, 오언고시 2편 등 모두 441편이나 된다.
가장 알려진 시는 「松潭偶吟」으로 남용익의 ‘箕雅’에 소개되어있는 시다.

松潭偶吟
石嶺春猶早 沙村雪未消 鵑蹄溪上月 人斷柳邊橋
野老偏憂國 山戎久據遼 西征健兒盡 閭巷日숙條

송담에서 우연히 읊다
석령에 봄이 일찍 찾아왔건만 사라니엔 아직 눈이 녹지 않았네.
달밤에 개울에서 두견새 우는데 버들가 다리에는 인적이 끊겼구나.
시골 노인들은 오직 나라 걱정뿐인데 산간오랑캐는 요동 땅에 오래도 머무누나.
서쪽 변방 정벌로 건아들이 남지 않아 마을 거리는 날마다 쓸쓸해지네.

그의 한시 가운데 두 편을 소개한다.

手裁三樹近瞻端 苦節須從雪襄看 獨抱瑤琴淸坐久 月移疎影上彫欄
매화 세 그루를 손수 심었더니 자라서 처마 끝에 가까이 있네
고생을 무릎 쓴 그의 절개를 모름지기 눈 속에서 보아야 하니
나 홀로 요금(瑤琴)을 안고 맑은 마음으로 앉은 지 오래로다
성긴 달 그림자를 달빛이 옮겼다가 조각난 난간위에 얹어놓도다
(송담 송공 유적대관에서)

이 시는 송담이 절우당을 수리하고 주위에 송죽매란(松竹梅蘭)을 심고 지은 절우당 팔영 가운데 첫 번째 시 매화이다. 눈속에서 추위를 이겨내고 꽃을 피우고 향기를 발하는 사군자의 기품을 통하여 선비의 마음을 잘 드러낸 작품이라고 하겠다.

逸勢雄南紀 神功鎭海東 川聲走白石 秋色染丹楓
身落紅塵窟 魂遊碧霧中 上方何日夕 焚麝一樽同

우뚝한 형세는 남방에 제일이고 조물주의 공력은 해동을 진압했네
냇물소리는 흰 돌 위를 달리고 가을빛은 단풍을 물들었네
몸은 세속 굴에 떨어졌으나 혼은 푸른 안개 중에 노닐고 있네
저 높은데서 어느 날 저녁에 향을 사르며 술 두르미 같이 하나
대둔산 기행(국역 송담집에서)

송담은 아름다운 경치를 찾아서 여행을 하며 마음의 여유를 즐긴 시인이었던 같다. 그러므로 송담의 시 가운데는 여행 중에 쓴 기행시가 참으로 많다. 여행 중에 아름다운 풍광을 노치지 않고 시로 옮겼다. 앞의 시는 송담이 대둔산을 관광하고 이여인(李汝寅)등 여러 친구들에게 바친 글이다. 대둔산의 아름다운 경관과 대둔산에서 느낀 감회가 잘 표현되어있다.

송남수는 특히 재종질되는 송이창과 지정(至情)으로 교류를 많이 하였다. 그는 세 명의 아우가 먼저 사망한 연고로 그를 동생처럼 사랑했다. 송이창이 조정의 교지를 받고 한양으로 떠나는 날 그 행차를 송별하며 다가오는 추사(秋社)에는 누구와 술잔을 나누어야 하나 아쉬워했고, 읍호정을 세우자 자주 그곳을 방문하여 시를 짓고 노닐었으며, 계룡산과 형강(荊江)13), 갑천 등지의 산수를 소요하며 회포로 시를 읊고 화답하였다.

또한 종족들과 큰 야유회도 여는 등 문중일도 같이 협력하며 숭현서원 중수 등 향촌사회 질서유지에도 앞장섰다.14) 송이창과 교류내용 두 가지를 소개한다.

78세 때, 가을에 청좌와 송공으로 더불어 계룡산에서 놀았다.16) 청좌공이 섬기기를 부형과 같이 하여 서로 사랑함이 더욱 두터웠다. 매양 장구(杖屨 : 지팡이와 신발로 노니는 것의 간접적인 표현)가 지나는 곳에 따라 산수 간을 소요하며 회포를 시로 읊고 화답하였다.15)

81세(1617)때에 봄에 읍호정에서 놀았다. 청좌와공이 현의 서쪽 갑천의 상류 황수촌(皇穗村)에 읍호정(挹灝亭)을 지었다. 뒤에 공이 제시(題詩)하여 붙였다.17) 이에 이르러 만나기를 약속하고 그곳에서 유숙하고 돌아왔다. 숭현서원 입교당이 준공되었다. 당시 숭현서원 원장이던 송이창의 주도로 입교당(入敎堂)이 준공되자 전액(篆額)과 시를 써서 걸었다.18)

崇賢講堂 初成喜甚 錄呈院長賢契
松衫秘棟宇 丹碧炫朝暾 門對鷄山月 簷連甲水雲
紫宸新額下 白鹿舊規存 衛道誠心切 堂成會以文

숭현강당이 처음 낙성되자 매우 기뻐서 글을 지어 원장 현계19)에게 드리다.
소나무 삼나무가 서원 집을 가려서 단청의 그 빛이 찬란하네
문은 계족산 달을 대하고 처마는 갑천의 구름에 연했도다
대궐에서 새로운 액이 내리니 백록동의 옛 규모 남아 있구나
도를 호위하매 성심이 간절하니 당이 낙성하여 글로써 벗을 모으다

 

주석

  • 1) 송봉기 가에 소장되어있다고 한다.
  • 2) 송남수, 1997.12, 「續集附錄 拾遺條」, 『國譯松潭集』, 恩津宋氏松潭公宗中 향지문화사, p424
  • 3) 2001년 10월 31일 복설하였다.
  • 4) 송성빈, 2018. 7. 1, 「쌍청당을 잘 보전해준 송담공」, 『은진송씨종보 제165호』, 은진송씨대종회
  • 5) 송인협, 1997,「숭현서원에 대한 연구」, 『대전문화 제6호』, 대전광역시, p335~p385
  • 6) 송남수, 1997.12, 「續集附錄 年譜」, 『國譯松潭集』, 恩津宋氏松潭公宗中, 향지문화사, p383
  • 7) 송이창, 1994, 송준길 「家狀」, 『淸坐窩 遺稿』, 향지문화사, P193
  • 8)송남수, 1997,「續集附錄 年譜」 81세(丁巳), 『國譯松潭集』, 恩津宋氏松潭公宗中향지문화사, p390
  • 9) 앞의 책, 「雜著 : 雙淸堂記文」, 恩津宋氏松潭公宗中 향지문화사, p318~p319
  • 10) 송이창, 1994, 송준길 「年譜」 『淸坐窩 遺稿』 향지문화사, P174
  • 11) 송현강, 2013,「송담 송남수와 향촌사회」, 『대전문화』, 대전광역시, p214~p215
  • 12) 송남수, 1997,「續集附錄 송영노의 회천 절우당에 제하는 시 아울러 서문도 쓴다.」, 『國譯松潭集』, 恩津宋氏松潭公宗中 향지문화사,p4~443, p451
  • 13) 회덕 북쪽을 지나는 금강의 별칭
  • 14) 송현강, 2013,「송담 송남수와 향촌사회」, 『대전문화』, 대전광역시, p213~p219
  • 15) 송남수, 1997,「續集附錄 年譜」 78세(甲寅), 『國譯松潭集』, 恩津宋氏松潭公宗中 향지문화사 p388
  • 16) 읍호정에서 송이창과 만난 기록은 연보에 89세때인 1625년 5월에도 만난 기록이 보인다.
  • 17) 읍호정은 송이창이 오래전부터 있던 정자를 수리하고 일대의 밭과 산을 사서 조경한 정자이다. 읍호정이란 이름도 현감 조경란이 붙인 것이다. 송남수는 『해동산천록』에서 회덕의 명소로 읍호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읍호정은 회덕현 서쪽 1리에 있다. 현감 송이창이 지었는데 높은 언덕이 우뚝 솟았다가 끊어진 곳에 있다. 앞에는 큰 들판을 임하였고, 긴 내는 10여 리나 된다. 천 그루의 푸른 소나무는 처마를 끼고 서늘한 기운을 내며 동으로 학악(鶴岳)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계룡봉우리를 떠받드는데 아침저녁으로 흐렸다 개었다하여 기운을 내며 기상이 천태만상이다. 정자에 20영이 있다. 81세때 읍호정에서 유숙하면서 송이창에게 써주었다는 연보의 기록은 「송복여의 읍호정에 글을 지어 부치다(의제송복여읍호정)」 『海東山川錄』에 있는 두수가 아닌가 싶다. 읍호정 구허는 지금의 숭현서원 건너편 원촌교 다리지나 세종으로 가는 갑천 우안 도로 위 산이 된다.(필자가 고 송파 송용재 씨가 살아있을 때 답사) 읍호정에 대한 시는 읍호정, 읍호정 12경 등 문집 여러 곳에서 산견된다.
  • 18) 송남수, 1997, 「詩 : 七言絶句 171首」78세(甲寅), 『國譯松潭集』, 恩津宋氏松潭公宗中, 향지문화사, p164
  • 19) 자기보다 연하의 벗을 존경하여 일컫는 말, 당시 원장이던 청좌와 송이창을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