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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규렴(宋奎濂)

제월당문희공파

소개

제월당 (대전시 유형문화재 제9호)

대전 대덕구 읍내동

제월당(霽月堂) 문희공(文僖公) 송규렴(宋奎濂)
(1630/인조 8~1709/숙종 35)

1709(숙종 35)년 6월 4일 :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송규렴(宋奎濂)이 졸(卒)하였다.

송규렴은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과 같은 일가이고 한 고을에 같이 살면서 도야(陶冶)되는 바가 많았으므로 자못 당시의 중망(重望)을 지녔다. 사람됨이 태연하고 차분했으며, 물러나는 때가 많고 진출하는 때는 적었다. 기사년 이후로는 그대로 물러나 다시 나오지 않으므로, 한 때엔 그의 용감하게 물러나는 지조를 칭찬했다. 이 해에 나이 80이므로 숭정 대부(崇政大夫)의 직질(職秩)로 올렸고, 이어 졸했다.

1726(영조 2)년 : 시호를 문희(文喜)로 내렸다. 문(文)은 근학호문(勤學好文) 배움에 힘쓰고 시문에 능했으며, 희(僖)는 소심근신(小心謹愼) 마음을 조심스럽게 가지어 말이나 행동을 삼가고 조심했다. 즉 학문에 부지런하고 시문에 능했으며, 조심하고 경계함에 철저했다는 뜻이다.
[『영조실록』 영조 2년]

제월당 송규렴 종가

대전 대덕구 읍내동

1) 치제문(致祭文)을 지제교(知祭敎) 이교악(李喬岳)이 지어올리다.
생각건대 영령께서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세덕에 흠뻑 젖었고 자품은 온화하고 독실하였습니다.
일찍이 의귀할 선생을 얻어 힘껏 고전을 공부했고 젊은 나이에 벼슬 시작하여 예문관에서 검열로 있었습니다.
…중략…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이에 경의 반열 뛰어넘어 사헌부에서 기강을 세우고 승정원에서 왕명을 출납하셨습니다.

나는 늦었다 한탄했으나 경은 다시 겸손하여 다시 초야로 돌아가 함정과 그물을 멀리했습니다.
유유자적하며 만년의 절의지켜 속세의 허물 벗어나고 한 번 임천의 누운 뒤로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
인망이 높아 조정에서 으뜸이었고 덕도 높고 나이도 많아 세 조정을 지내며 우뚝 홀로 남았습니다.
…중략… 경은 진실로 얻음이 있었으니 완전한 명예와 고상한 절조를 세상 그 누가 짝할 수 있겠습니까. 호서의 산 우뚝 하고 호서의 물 깨끗하니 어쩔 수 없습니다.
그 풍도 아득하여 가까이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예관을 보내 대신 하찮은 예물 올리게 하니 영령이여 어둡지 않다면 흠향하시길(『제월당집』)

제월당 (대전시 유형문화재 제9호)

대전 대덕구 읍내동

제월당은 송규렴의 별호이며 당호이다.

제월이란 광풍제월(光風霽月)로 비갠 뒤의 맑은 날씨에 부는 바람을 광풍이라 한바 비갠 뒤의 화창한 바람과 밝은 달을 일컫는데 즉 마음결이 명쾌하고 집착함이 없으며 시원하고 깨끗한 인품을 형용하는 말이다.

그 어원은 북송의 문인이자 서예가인 황정견이 주염계(周廉溪)를 존경하여 일컬은 데서 더욱 유명해진 말이다. 그는 염계시서에서 “其人品甚高 胸懷洒落 如 光風霽月(용릉의 주무숙은 인품이 고명하고 마음결이 시원하고 깨끗함이 마치 맑은 날의 바람과 비갠 뒤의 밝은 달과 같다.”에서 뜻을 취하며, 아마도 송규렴의 염(廉)자가 주렴계의 염자를 취했다면 그의 8대 선조인 쌍청당 송유가 가슴속에 담고자 했던 광풍과 제월의 쌍청에서 제월(霽月)을 취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선조의 맑은 덕을 잇고자 함이 그 뜻이 있는 것이라 하겠다.

옥류각-대전시 유형문화재 제7호

대전 대덕구 비래동

취백정-대전시 문화재자료 제9호

대전 대덕구 미호동

제월당 송규렴 묘역

대전 유성구 외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