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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계간(宋啓榦)

동춘당문정공파

소개

추양 송계간이 쓴 효정공 조환 묘지명

대전역사박물관

송계간은 자가 직경(直卿)이고 호는 추양(秋陽) 송준길의 후손이다.
목사공(牧使公) 시연(時淵)의 자제로 1764년(영조 40) 10월 15일에 태어나 조부 늑천공 명흠(明欽)에게 수학하였다.

1796년(정조 20)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이 그의 학행(學行)을 천거하여 부사용(副司勇)에 제수되었고, 그 뒤 대사헌 이직보(李直輔),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이지연(李止淵), 영의정 남공철(南公轍) 등의 추천으로 형조참의, 성균관 좨주(祭酒),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 겸 경연관(經筵官), 세손찬선(世孫贊善) 등의 요직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41년(헌종 7) 정월 20일 그가 타계했을 때 조정에서는 예조좌랑 구종록(具鍾祿)을 보내어 치제(致祭)토록 하였고, 사제문(賜祭文)을 교리 홍영규가 지어 올리다.
1841(헌종 7)년 : 1월 25일 자헌 대부(資憲大夫) 한성 판윤 겸 성균관 좨주(漢城判尹兼成均館祭酒) 송계간(宋啓榦)이 졸(卒)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고(故) 좨주는 기구(耆耉)인 유현(儒賢)으로서 바른 지조가 매우 굳세므로, 내가 이 때문에 반드시 경석(經席)에 나오게 하려고 정경(正卿)에 발탁하고 이어서 돈소(敦召)하였는데, 서거 단자(逝去單子)가 갑자기 왔으니, 몹시 애통함을 어찌 말하겠는가? 조제(弔祭)하는 절차와 상장(喪葬)의 수용(需用)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규례에 비추어 거행하게 하고, 조묘군(造墓軍)·담지군(擔持軍)도 본도(本道)로 하여금 제급(題給)하게 하라."하였다. 송계간은 송준길(宋浚吉)의 후손이고, 송명흠(宋明欽)의 손자이다.
순조(純祖) 때에 유현 이직보(李直輔)가 그 경행(經行)을 아뢰었으므로 발탁하여 경연관(經筵官)을 제수하였으나, 송계간이 굳이 사양하였다. 늘 몸은 나가지 않고 나간다고 말하는 것을 경계 삼았으므로, 벼슬을 제수할 때마다 별유(別諭)나 자문을 받아도 감히 응대하지 않았다.
학문을 좋아하므로 손수 경전(經傳)의 요어(要語)를 베껴서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하며 절조를 지키고 재능을 숨기는 것이 매우 굳세었으나, 유일(儒逸)로 자처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깊은 이치를 탐구한 조예(造詣)와 그 언론의 풍지(風旨)는 세상에서 보고 들은 자가 없었다.

그가 죽자 조정에서는 예조좌랑을 보내어 치제토록 하였고, 3월에 이정복의 주청으로 인하여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않고, 문경(文敬)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문경(文敬)의 의미는 문(文)은 도덕이 있고 널리 들은 것이 많다. 의 도덕박문(道德博聞)이다. 경(敬)은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언행을 조심한다. 의 숙야주계(夙夜做戒)이다.[『헌종실록』 헌종 7(1841)년 11월 25일]

배위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 목사(牧使) 증좌찬성(左贊成) 제응(濟應)의 따님으로 충북 옥천군 옥천읍 평산리 계좌(癸坐)에 부군과 합폄하였다가 최근 충청북도 청원군 현도면 죽전1리 옥포초등학교 뒷산에 있는 부친 시연(時淵)의 묘소 자리에 선·후대가 모두 함께 봉안되어 있다.

가장(家狀)은 장남 태희(泰熙)가 짓고, 묘표는 삼종질 래희(來熙)가 지었다. 저서는『추양집(秋陽集)』이 있다.

호 추양(秋陽)의 어원은 『맹자 등문공장 상』에 있는 강한이 탁지하니 추양이 폭지라(江漢以濯之 秋陽以暴之라)에서 유래되었다. 공자님의 도는 강수나 한수의 맑은 물에서 빨아 가을볕에 말린듯하다. 라는 글귀에서 공은 공자님과 같이 티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인격을 이루고 싶다는 염원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사후 자하 자장 자유 등 제자들이 공자의 외모와 인품을 많이 닮은 유자(유약)를 공자에 준하는 스승으로 모시려하자 증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불가하다. 공자님의 도는 강수나 한수의 맑은 물에서 깨끗이 빨아 가을볕에 말린듯하다. 라 하였으니 어찌 유자를 공자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라 하였다. 공자님의 도는 티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한 인격체이므로 그 어느 누구도 공자님과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맹자 등문공장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