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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환기(宋煥箕)

우암문정공파

소개

성담(性潭) 환기(煥箕) 묘역

충북 청주시 문의면 봉현리

성담 문경공(文敬公) 송환기(宋換箕) (1728/영조 4 ~ 1807/순조 7)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자동(子東), 호는 심재(心齋)·성담(性潭). 송시열(宋時烈)의 5대손이며, 송인상(宋寅相)의 아들이다.
1728년(영조 4) 9월 22일에 태어났다.
남달리 총명하여 어려서부터 종숙(從叔)인 운평공(雲坪公) 능상(能相)에게서『태극도설(太極圖說)』, 『역학계몽』·『가례』 등을 배웠다.

1766년(영조 42) 진사가 되고 1772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799년(정조 23) 사도시주부(司徒寺主簿)가 되고, 사헌부지평·시헌부장령·군자감정(軍資監正)을 거쳐 진산군수가 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1807년(순조 7) 형조참의·예조참판, 1808년 공조판서, 1811년 의정부우찬성에 올랐다.

성담(性潭) 환기(煥箕) 묘비

충북 청주시 문의면 봉현리

당시 심성(心性)의 변(辨)으로 성리학계에서 논쟁을 벌일 때 한원진(韓元震)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송환기는 학덕을 겸비하여 조야의 존경을 받았으며, 문하에 많은 선비가 모여들었다. 저서로는 『성담집(性潭集)』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1807(순조 7)년 8월 5일 : 감사 조덕윤(趙德潤)이 우찬성 송환기(宋煥箕)가 졸(卒)하였다고 아뢰니, 하교하기를,
"노인의 신절(愼節)088) 이 아무리 오래 끈다고는 하나 정력의 강건함이 젊은이와 다름이 없어서 약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이라 자담하며 회복되는 효험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는데, 의원이 돌아온 지 오래지 않아 뜻하지 않게도 흉음(凶音)이 갑자기 닥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고 찬성(贊成)은 곧 선정(先正)의 후손이고 소자(小子)의 스승이었다.

학문과 덕망을 조야(朝夜)에서 존숭하는 바였는데, 갑자기 졸서하였음을 들었으니, 어찌 그 슬픔을 견딜 수 있으랴? 은권(恩眷)이 두터웠음은 선조(先朝) 때부터 각별하였고, 경신년(1800)의 봄과 겨울에 몇 차례 조정에 나아왔는데, 유현(儒賢)의 예로써 대우함에는 더욱 사체가 평소에 무거움이 있었다.
졸한 우찬성 송환기에 대해 조제(弔祭)와 치부(致賻)를 해조(該曹)에서 거행하고, 장례 때 소용되는 바를 도백(道伯)은 넉넉히 보내어 저치미(儲置米)로써 회감(會減)하여, 모두 특별히 뜻을 기울여서 호상(護喪)토록 하라. 그리고 따로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하겠노라. 그 사손(嗣孫)은 복(服)이 끝나기를 기다려 조용(調用)토록 하라."하였다.
임금이 듣고 슬퍼하며 특별히 승지를 파견하여 제사지내고 지제교(知製敎) 안정선(安廷善)을 보내 사제문(賜祭文)을 내리다.

1811(순조 11)년 6월 19일 : 시장(諡狀)없이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시망(諡望)에 대한 비답을 내렸는데, 증 좌의정 임광(任絖)에게는 충간(忠簡)으로, 우의정 박종악(朴宗岳)에 충헌(忠憲)으로, 우찬성 송환기(宋煥箕)에게는 「문경(文敬)」으로, 증 이조 판서 이간(李柬)에게는 문정(文正)으로 시호를 내렸다.

문경(文敬)의 의미는 문(文)은 도덕이 있고 널리 들은 것이 많으니 도덕박문(道德博聞)이고, 경(敬)은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언행을 조심한다. 의 숙야주계(夙夜做戒)이다.[『순조실록』 순조 11(1811)년 6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