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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근수(宋近洙)

우암문정공파

소개

입재(立齋) 송근수(宋近洙) 묘역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석탄리

송근수(宋近洙)는 자가 근술(近述)이고, 입재(立齋)는 호인데 달리 남곡(南谷)이라고도 했다. 1818년(순조 18) 12월 1일에 우암 송시열의 7대손인 증이조참판공(贈吏曹參判公) 흠학(欽學)의 아들로 대전광역시 동구 성남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품질(稟質)이 뛰어나고 밝았으며, 어려서 아이들과 어울리매 뛰어나 주변에서 원대한 그릇이라고 칭찬하였다.

스승에게 나아가 배우매 문리(文理)의 진전이 빨랐고,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학업에 힘썼으며 큰형 수종재(守宗齋) 달수(達洙)에게 선비의 학문을 이어 배웠다. 8세에 우암의 7대 종손인 흠서(欽書)의 아우 의정공(議政公) 흠락(欽樂)에게 출계(出系)하였는데 양부모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을 평생의 통한으로 여겼다.

송근수의 형 송달수(宋達洙)와 함께 송치규(宋穉圭)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하여 이이(李珥)-송시열-한원진(韓元震)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송능상(宋能相)-송환기(宋煥箕)-송치규로 이어지는 송시열의 가학을 전수하였다.

1848년(헌종 14)에 처음으로 원릉참봉(元陵參奉)을 하였고, 5월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니, 임금이 특교(特敎)를 내려“문정가(文正家)에 이런 인재가 있으니 정말 기쁘다.”하고 홍문관 부수찬(弘文館 副修撰)을 제수하니 그가 사양하고 성학(聖學)에 힘쓸 것을 상소하였다. 뒤에 부교리(副校理)로 옮겼다.

입재(立齋) 송근수(宋近洙) 묘역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석탄리

그 뒤 수많은 직책을 거쳐 대사헌(大司憲), 공조판서(工曹判書), 병조판서(兵曹判書), 이조판서(吏曹判書), 좌찬성(左贊成), 우의정(右議政)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좌의정이 된 뒤 1882년(고종 19) 5월 정부의 조미수호통상조약체결교섭(朝美修好通商條約締結交涉)에 반대하여 사직소(辭職疏)를 올렸다. 이 상소에서 양교(洋敎) 즉 기독교의 폐해를 지적하고 일본 이외 외국과의 조약체결(條約締結)을 반대하는 한편 청나라에 파견된 영선사(領選使)의 철환(撤還)도 주장하였다.

1885년(고종 22) 이후에 다리에 병이 생겨 벼슬을 사양하였음에도 나라에서는 경모궁제조(敬慕宮提調)를 내려 또 사양하고 거듭 쉴 것을 청하였으며 1886년 다시 봉상제조(奉常提調)를 제수 받았다. 1887년 나이가 70이 되매 의자물식(衣資物食)을 하사받고 그가 주식(酒食)을 갖추어 종족과 친구와 함께 즐기며 말하기를“이것이 성주의 은혜요, 노신(老臣)을 기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1890년(고종 27)에 숙묘(肅廟)에 존호옥책문(尊號玉冊文)을 올리고 사마(賜馬)의 은전을 받았다. 8월 신정왕후(神貞王后)의 장례 중에 병이 재발하여 돌아왔다. 1892년(고종 29) 6월에 좌의정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였다. 그가 퇴직 후에 봉조하(奉朝賀)1)가 되었다. 1902년 가을에 각환(脚患)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지내다가 음력 12월 1일(양력으로 1903년) 감기로 병이 악화되어 옥천 지석리(沃川 支石里) 보만재(保晩齋)에서 타계하니 수가 85세였다. 묘소는 충북 옥천군 동이면 석탄리에 있다. 사후에 문헌(文獻)이라는 시호를 내려졌다.

1903(고종 40)년 1월 8일 : 봉조하 송근수가 졸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이 대신은 풍채가 의젓하고 품성이 점잖을 뿐만 아니라 학식도 깊고 가정의 교양도 많이 받았다.
품은 뜻이 원대하고 명성도 대단하기에 나라를 위한 묘책을 세워 직면한 난국을 널리 구제하리라 크게 기대하였는데, 아직 그 재능을 한껏 발휘하지도 못한 채 어느새 나이가 많아져 마침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 한가히 여생을 보냈다.

시골에서나 조정에서나, 벼슬에 나올 때나 들어갈 때나 원래 생각은 한결같았다.
짐(朕)이 의지하는 것은 그래도 노숙하고 명철한 이였는데 이제는 끝이로구려. 이 슬픔을 어이 누를 수 있겠는가? 세상을 떠난 봉조하(奉朝賀)의 상사(喪事)에 비서원 승(祕書院丞)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라. 장례 비용은 본도(本道)에서 넉넉히 보내 주도록 하고, 시호(諡號)을 내리는 은전(恩典)은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거행하라." 하였다. 1903(고종 40)년 10월 17일 : 고(故) 봉조하(奉朝賀) 송근수(宋近洙)에게 「문헌(文獻)」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문헌(文獻)의 시호의 의미는 문(文)은 부지런히 배우고 묻기를 좋아한 것의 근학호문(勤學好問)이고, 헌(獻)은 충성을 다하고 안으로 덕이 있는 것이 향충내덕(嚮忠內德)이다.
[『고종실록』 고종 40(1903)년 10월 17일]

저서에『송자대전수차(宋子大全隨箚)』와『입재집(立齋集)』이 있다.
슬하에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병서(秉瑞)는 문과를 급제하고 판서를 지냈으나 먼저 타계하여 종제(從弟) 병위(秉瑋)의 아들 창헌(昌憲)으로 뒤를 이었으나 그 역시 요사(夭死)하여 족자(族子) 재덕(在悳)으로 뒤를 이었다.

사제문(賜祭文)
1) 1903(고종 40)년 : 고종 황제께서 정월 28일 입재선생 상중에 비서원 승(祕書院丞)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고, 사제문(賜祭文)을 내리다.
2) 1903(고종 40)년 : 황태자(뒤에 순종황제)께서 같은 날 제문을 내리다.

주석

  • 1) 봉조하(奉朝賀) : 전직 관원을 대우하여 종2품 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에게 사임을 한 뒤 특별히 주는 녹봉
  • 1) 1903(고종 40)년 : 고종 황제께서 정월 28일 입재선생 상중에 비서원 승(祕書院丞)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고, 사제문(賜祭文)을 내리다.
  • 2) 1903(고종 40)년 : 황태자(뒤에 순종황제)께서 같은 날 제문을 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