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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순(宋秉珣)

우암문정공파

소개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 묘역

충남 금산군 남일면 청학동

송병순(宋秉珣)은 자는 동옥(東玉)이며 호는 심석(心石)이다.

1839년(헌종 5)에 증 이조참판 (贈吏曹參判) 면수(勉洙)의 작은 자제로 태어났으니 경연관(經筵官),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낸 수종재(守宗齋) 달수(達洙)와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입재(立齋) 근수(近洙)는 각각 큰아버지와 막내아버지가 되시고,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순절한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은 바로 형이 되신다. 형 연재와 함께 큰아버지인 수종재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으며, 수종재의 사후에도 입재과 외할아버지의 지도를 받았다.

1888년(고종 25)묘당의 천거로 의금부 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1903년(광무 7) 학행(學行)이 뛰어나고 중망(衆望)을 지니고 있음을 듣고 고종이 홍문관(弘文館) 서연관(書筵官)에 임명하였으나, 친일파(親日派)들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뒤 충북 영동군 학산면에 강당을 세우고 많은 문인들을 지도, 계발(啓發)해서 천리(天理)를 밝히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정력을 기울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연재가 이것의 파기를 위하여 활동하다가 순국하였음을 듣고 구국활동을 더욱 다지게 되었다. 그 해 11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전국 유림에게 선포하여 민족정기(民族正氣)의 앙양(昻揚)과 국권회복(國權回復)을 호소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여 “나라를 위하는 충성과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순국하는 길 밖에 없다.”하고 그 해 9월 5일 강당 뒤 서산의 높은 봉우리에 올라 투신 자결하고자 할 때 문인 김용호(金龍浩)가 뒤에서 껴안아 미수에 그치자, 그 뒤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래었다. 이때 영동군 양산의 일본 헌병대가 은사금(恩賜金)을 가져오자, 이를 질책(叱責)하여 거절하였다.

1912년 일제가 회유책으로 경학원(經學院) 강사에 임명하자 이를 거절하고 대의를 지켜 순국할 것을 결심,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1968년 대통령 표창,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15권의 문집과『학문삼요(學問三要)』, 『사례축식(四禮祝式)』, 『용학보의(庸學補疑)』등이 있다.

1914년 연재공의 사당이 있던 충북 영동의 문충사(文忠祠)에 배향되었었는데 그 뒤 사당이 대전광역시 동구 용운동으로 옮겨지고 사당의 이름도 용동서원으로 바뀌었다가 현재 연재와 함께 그곳에 배향되었다.

1973년 영동역 앞 광장에 동상이 세워졌다. 묘소는 충남 금산군 남일면 청학동(忠南 錦山郡 南一面 靑鶴洞) 신좌(辛坐)에 있다.

독립유공자 송병순(宋秉珣)의 비

충남 금산군 남일면 청학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