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진송씨 상대세적

3. 은진송씨의 상대 세적
221.158.221.★

진사공(進士公)과 열부 안인 류조비

1)진사공(進士公) 극기(克己)

5세 극기(克己)는 류조비(柳祖妣)의 남편[夫君]으로 고려 말기에 진사(進士) 벼슬을 했 다. 『고흥류씨족보(高興柳氏族譜)』에 따르면 극기는 1392년(고려 공양왕 4)에 타계하였는데 묘소의 소재지를 잃었다고 하였다. 일설에는 은진성(恩津城)과 저압곡촌(底狎谷村)에 두 기(基)의 무덤이 있는바 송씨의 묘라고 전하며, 또 경기도 양지 목악촌(京畿道 陽智 木岳村)20)에 무덤이 하나 있는데 진사의 묘라고 하나 확실치 않다고 기록되어 있다.

회덕관동리 은진송씨장

대전 동구 마산동

자손들은 1688년(숙종 14) 무진(戊辰)에 류조비의 묘소 우편에 돌로 단을 세우고 류조비 세일사(음 3월 10일)에 함께 제사를 올린다. 그 뒤 여러 번 묘소를 확인하는 작업을 벌였지만, 끝내 묘소를 찾지 못하였다.

류조비 산소 들어가는 산소 모퉁이에 「회덕 관동리 은진송씨장(懷德 寬洞里 恩津 宋氏葬)」이라 표시된 금장 표석이 있다. 류조비 산소 오른쪽에 진사공 극기 신단비기 단을 세우게 된 동기는 매년 할머니만 제사지내고 할아버지는 제사지내지 못하였다.

할아버지가 엄연히 계신데 산소가 실전했다고 안 지내는 것은 자손으로서 죄송스러운 일이다. 우암께서 문곡 김수항과 서신교류를 하여 신위제단 문제를 상의하고, 또한 동춘선생과 상의하여 그 당시 대종중의 의결을 거쳐 할머니와 같이 세일사를 지내자. 할아버지에 대한 사적은 모른다는 내용이다.

고려진사송공신단비기(음기가 아님)

부군의 묘는 소재를 알지 못하니 매번 조비 제향 때에는 몹시 슬픈 마음이 떠오른다. 또한 조비의 신령이 계시다면 반드시 홀로 흠향하실 때 불안해하실 것이다. 예에 따르면 체천(遞遷)21)함이 마땅하나 단(壇)을 모으고 지방(紙榜)으로 표기하여 제사하지 말라는 법이 또한 예(禮)에는 없다. 이에 감히 문헌이 있는 일가들에게 품의하여 흠향하시는 위(位)를 오른쪽에 설단하여 제사 올리는 처소를 마련하였다. 그것이 예의에 벗어남이 없으면 다행이겠다. 부군의 휘는 극기이 니 표덕(表德)22)이 전하지 않는다.
숭정 61년 (숙종 14, 1688) 무진 중춘에 9대손
봉조하 시열이 적고 10대손 상증은 쓰다.

高麗進士宋公神壇碑記

府君墓不知所在每於薦享祖 時愴然興懷 又以爲祖 之靈必不安於獨享禮有去 爲 壇紙榜標記之文不可謂無於禮者玆敢稟議 于文獻宗公謹設右享之位以爲竝薦之所其 於禮義可幸無罪焉府君諱克己表德不傳云 崇禎 六十一年(肅宗14, 1688)戊辰 仲春日 九代孫 奉朝賀 時烈謹記 十代孫 相曾謹書


진사공(進士公) 극기(克己) 신단비

대전광역시 동구 마산동(관동)

2)열부 안인(烈婦 安人) 고흥류씨(高興柳氏)

배위는 청상고절(靑孀孤節)의 열부 안인23)(烈婦 安人) 고흥류씨(高興柳氏)인데 세칭 류조비(柳祖妣)라 칭한다. 증조할아버지는 영밀공 류청신(柳淸臣, 1257~1329)으로 1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충렬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첨의정승에 승진 고흥군에 봉해졌다. 태조 이성계가 즉위하자 영의정에 추증되어 천안의 충효정문과 부조묘, 그리고 고흥 운곡사에 제향 되었다.

그는 특히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호도를 가지고 와서 장손 류장을 통해 번식을 장려하여 오늘날 천안의 명물 호두과자가 되었다. 아버지는 고려 때 상서(尙書)24)로 고흥백(高興伯)에 봉해진 시호 호안공(胡安公) 류준(柳濬, 1321~1406)이다. 호안공은 문무를 겸한 장수로서 태종 이성계의 핵심측근인 명위장군과 도총 중외제군사에 승진 1392년 태조의 조선 건국을 도운 공으로 고흥백에 진봉되고 호부상서(判書)와 판삼사사(宰相)에 올랐다.(종보 제27호 류조비 친정인 고흥류씨 연원)

류조비는 호안공이 51세인 1371년에 개성에서 태어났다.
혼인할 나이가 되어 은진송씨 후손으로 성균관[太學]에 들어가 선비의 학업을 익히던 집단공 명의(明誼)의 아들인 진사(進士) 극기(克己)와 혼인하여 1389년에 아들 유(愉)를 낳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류조비가 22세였을 당시 장래가 촉망되던 부군[극기]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그때 어린 아기 유(愉, 뒤에 쌍청당)는 겨우 네 살이었다.

복(服)을 벗게 되자 부모가 젊은 나이에 홀로된 것을 불쌍하게 여겨 개가(改嫁)를 시키려 하였다. 당시의 풍속은 근친혼과 여자의 재혼이 상식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과부의 개가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류조비는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정절을 지켜 재가를 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부모는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하는 수 없이 개성에서 회덕에 있는 시가(媤家)로 내려가고자 몸종과 약속을 하였으나 몸종은 류조비 부모의 명이 아니라는 이유로 난색을 표했다. 이에 류조비는 밤에 혼자서 어린 아기를 업고 삼주(三週) 동안의 밤낮을 걸어서 시댁 땅인 회덕에 도착하였다.

시아버지 집단공이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않고 말하기를“네 어찌 이토록 고생을 했느냐? 여자로서 부모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것은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모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류조비는 울면서 대답하기를“이른바 저의 삼종지도라는 것은 등에 업힌 아이에게 있습니다.”하니 시부모님이 감동하여 마침내 받아주었다.
이로써 시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더욱 두터워져 변함이 없었으며, 등에 업고 온 아기는 자라서 쌍청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것이 은진송씨가 대전에 정착하여 크게 번성하게 된 연유이다. 그 뒤 류조비가 송촌에 마련한 집터에서 지금까지 종손이 살고 있으며 그때 류조비가 길삼을 해서 장만한 논 7마지기는 은진송씨대종가에서 최근까지 보존되어 오다가 택지로 용도가 변경되어 불하되었다.25) 류조비는 광산김씨의 허씨부인, 남원양씨의 이씨부인과 함께 고려 말의 세 열부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1452년(문종 2)에 82세로 타계하여 대전광역시 동구 마산동의 관동 간좌원(艮坐原)에 장례를 지냈다. 1653년(효종 4)에 시부모를 극진히 섬기고 아들의 성장을 잘 보살펴 훌륭히 키웠으므로 광산김씨 김문(金問)의 처 허씨부인(許氏夫人)의 예에 따라 열녀(烈女)로 정려(旌閭)하고 정문은 쌍청당 남쪽 지척에 세웠다.

류조비에 대한 사적으로는 8대손 준길(浚吉)이 지은 행장(行狀)과 9대손 시열(時烈)이 지은 묘표(墓表) 및 묘비(墓碑), 그리고 준길이 지은 정려비 음기(旌閭碑 陰記)가 있다.(1653. 5) 류조비 묘갈은 1657(효종 8)에 7월 9대손 시열이 짓고, 8대손 준길이 쓰고, 9대손 광식(光栻)이 전서(篆書)해서 세웠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조선 중기까지 근 200년 간 묘소를 잃어버린 일이 있었다.

다행히 류조비가 생전에 적덕(積德)을 많이 한 여경(餘慶)으로 천지신명이 크게 도와 묘소를 다시 찾게 되었지만, 그 묘소를 찾기까지 많은 자손들이 애를 쓴 흔적이 역력하다. 이 묘소를 다시 찾게 된 사정에 대하여 동춘당(同春堂) 준길(浚吉)은 류조비의 행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안인(安人)의 묘소가 중간에 매몰되어 찾지 못하였더니 근년에 한 일가 사람[宗人]이 사냥을 갔다가 우연히 관동(寬洞)의 산에 올라가서 한 묘석(墓石)을 찾았는데 곧 안인의 묘소였다. 8대손 목사(牧使) 석조(碩祚)가 여러 일가를 데리고 가서 제사를 지내고 묘전(墓田)을 마련하여 매년 3월 상순에 세일사를 행했다.

이 기록으로 보아 첫째 잃었던 류조비의 묘소를 되찾은 시기가 동춘당이 생존했던 현 종조(顯宗朝) 무렵이고, 둘째 묘소를 찾은 사람이 사냥을 좋아하는 한 일가이며, 셋째 류조비의 8대손인 추파공파(秋坡公派) 석조공(碩祚公)이 찾은 그 묘소에 일가를 데리고 가서 제사를 지냈고, 넷째 새로 위토(位土)를 마련하고 그때부터 세일사를 매년 3월 초순에 지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崇禎 丁丑(1637). 3. 10] 그러면 묘소를 발견한 일가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데 최근에 그 일가 되는 분이 주부공(主簿公) 6대손으로 부정(副正)의 벼슬을 지낸 익복(益福)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것은 1960년대 창산 성구용(昌山 成九鏞)이 지은「부정공익복묘표(副正公益福 墓表)」를 최근에〈은진송씨대종회〉에서 입수했기 때문이다.

그 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하루는 안인(安人)26)의 후손 병희(秉熺)가 그 선조 사복시 부정(司僕寺副正) 휘 익복(益福)의 묘비문을 나에게 부탁하면서 하는 말이“우리 집안이 쇠퇴하고 낙오되어 집안에 서책도 다 없어지고 문헌도 고증할 수가 없으나 오직 대대로 전하며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부정공(副正公)이 평소에 무예(武藝)를 익히고 사냥을 좋아하시더니 하루는 우연히 산에 올라가 한 조각 돌을 보니 이는 완연히 선조비 류씨의 묘표이었으므로 즉시 일가들에게 알리어 허물어진 봉분을 다시 수축하고 제사도 계속되어 온다.”고 하였다. 이는 어찌 공의 평일에 정성겨운 효행이 하늘을 감동시켜 그 묵묵한 가르침을 공에게 줌으로써 비로소 나타나게 함이 아니었으랴?

류조비 묘역

대전광역시 동구 마산동

관동묘려(寬洞墓慮)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7호
대전광역시 동구 마산동(관동)

류조비 묘소 아래인 대전광역시 동구 마산동 96번지에는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 37호로 지정된 재실 관동묘려(寬洞墓慮)가 있다. 그런데 그 재실은 너무 좁아 세일사 때 전국에서 모인 1,000여 명의 자손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다. 1984년 당시 공사원 헌창(憲昌)이 발의하여 전국 종원 2,000여 명의 헌금으로 1985년 10월 재실 뒤편 언덕에 넓은 강당을 신축하고〈관동병사(寬洞丙舍)〉라 명명하였다. 이후 2005년〈은진송씨대종회〉송완섭 회장의 발의로 이 병사에다 시조부터 집단공에 이르는 4대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을 마련하고〈관동병사〉라는 현판 대신〈추원사(追遠祠)〉라는 현판을 달고 매년 음력 3월 10일 류조비 세일사 직전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류조비에 관련된 설화가 몇 편 전한다. 그 중에서 첫째 류조비가 호랑이의 길 안내를 받으며 시댁에 내려온 이야기가 흥미롭다. 류씨부인은 일찍이 쌍청당을 낳고 이내 부군 진사공(克己)과 사별했다. 젊은 나이에 홀로 된 류씨부인은 친정살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조선 초기 풍속으로는 여자가 홀로 되어 다시 시집가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친정 부모는 홀로 된 젊은 딸의 장래를 걱정하여 개가하기를 거듭 강요했다. 그러나 어린 아기와 일생을 함께 할 뜻을 세운 류씨부인은 시댁이 있는 회덕 땅으로 가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 계획을 세웠다. 마침 이웃에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게 어린 아기를 낳고 홀로 된 허씨부인과 이씨부인이 있어 서로 상의하여 밤에 몰래 친정집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나약한 여자 몸으로 오백여리 험난하고 머나 먼 길을 걷는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으므로 낮에는 숲에서 숨고 밤에만 걸어 남으로 남으로 향했다. 이 때 느닷없이 앞이 환해지더니 두 개의 불빛이 번쩍이는 것이었다. 세 부인은 멈칫 서서 살펴본 즉 그것은 큰 호랑이었다. 그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류씨부인은 서서 호랑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도 아무리 산짐승이기로 짐승 중에서도, 영물이라면서 너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우리를 괴롭히느냐? 우리는 비록 너에게 해를 입을지라도 등에 엎인 애가 잠이 깰까봐 두려우니 어서 길을 비켜라.” 류씨부인이 이렇게 말하자, 호랑이는 자신들을 해치고자 여기에 나타난 것은 아니라 는 듯이 머리를 끄덕거리고 꼬리를 흔들더니 앞으로 가면서 환히 길을 밝혀주는 것이었다. 세 부인은 생각하기를‘이상한 일도 다 있다.’고 느끼면서 호랑이를 앞세우고 길을 재촉했다. 밤에만 길을 걷고 낮에는 남자들이 두려워 산에서 숨어서 쉬었다. 그래서 그 이튿날도 산에서 길을 걸어가려는데 그 호랑이가 또 나타났다. 호랑이는 나타나서 어제 밤처럼 길을 안내하는 것이었다. 안내를 받으니 산길을 가기가 한결 쉬워졌다. 호랑이는 새 길을 골라서 앞을 환하게 비춰줬다. 그 이튿날도 그 다음날도 여전히 자기들 앞에 나타나서 길 안내를 해주는 것이었다. 호랑이가 나타나면 아기들은 어머니 등에 업혀 잠만 자고 있었다. 경기도를 지나 충청도로 들어섰다. 길안내를 잘하는 호랑이는 이제 세 부인들에게 친숙해졌다는 표시인지 냇물을 건널 때에는 돌을 고루 놓으며 환하게 비처주기도 했다. 호랑이의 안내를 받으며 류씨부인은 그럭저럭 회덕까지 왔다. 하지만 시부모는 류씨부인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류씨부인은 밖에다 거적을 펴고 밤을 새우며 애원하였다. 밤이 이슥 하자 옆에 있던 호랑이가 갑자기 발로 방문을 향하여 흙을 뿌렸다. 이에 놀란 시부모는 문을 열고 호랑이를 보자 갑자기 며느리가 측은하게 생각되어 거두어 들였다.

그러자 호랑이는 다시 허씨부인을 시댁이 있는 연산 땅까지 안내하고 마지막으로 이씨부인을 남원 땅까지 안내했다. 그 허씨부인은 바로 광산김씨 가문의 추앙을 받는 열부 양천허씨이며, 이씨부인은 역시 남원양씨 가문에서 추앙을 받고 있다고 한다. 류씨부인은 아들(쌍청당)이 자랐을 때 호랑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들은 늘 고마운 호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먼 곳으로 나들이 갔다가 돌아오는데 자기 앞에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아들은 그 호랑이에게 빙그레 웃으며 말하기를 “네가 바로 개성 땅에서 회덕으로 내려올 때 우리 길잡이를 해준 고마운 호랑이냐?”하고 묻자, 그 호랑이는 입을 딱 벌리고 크게 웃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그날도 그 호랑이가 나타났던 지금의 대덕구 법동(그때는 옛날 호랑이가 나타났다가 없어졌다 하여‘범골’이라 불렀다)에 이 날도 와서는 꼬리를 몇 번 흔들더니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 뒤에도 아들은 몇 번 호랑이의 길 안내를 받아 흐뭇해했다고 한다. 류씨부인과 그 아들이 착해서 호랑이도 그들을 보호하였고, 류씨부인 곁에는 어딘가에 호랑이가 지키고 있었다 하여 열녀 류씨부인과 효자인 아들을 짐승도 그 미덕을 높이 샀다고 가문에 전한다. 둘째로는 류조비가 판교의 쌍청당 산소와 마산에 있는 자신의 묘를 정한 이야기다.

쌍청당은 어머니보다 7년이나 앞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예로부터 전해오는 말로는 쌍청당이 세상을 떠날 때 류조비가 친히 아들의 묘자리를 잡아 장사를 지내고, 그보다 앞서 관동에다 자신의 묘자리를 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풍수(豊水 : 地師)들은 모두 관동의 류조비 묘소는 시조가 될 만한 자리이고, 판교의 쌍청당 묘소는 다음이라 하였다. 그만큼 류조비는 풍수지리에도 남다른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문중에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류조비 묘소 자리는 본래 시댁 외할아버지, 그러니까 집 단공의 장인인 황판서[黃粹]가 묻힐 자리였다고 한다. 황판서가 세상을 떠나자 그 자손들은 이미 그 분의 묘 자리로 잡아놓은 이 자리에다 묘소를 쓰려고 장례 전날 미리 광중(壙中)을 파놓았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류씨부인은 천하 명당인 이 자리를 황판서에게 빼앗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밤새 몰래 물동이로 물을 길어다가 이 광중에다 들어부었다. 이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황판서 자손들은 이튿날 묘소를 쓰기 위해 그 자리에 와서 보니 밤사이에 물이 흥건히 고여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 가족들은 이곳에다 장례지내기를 포기하고 부랴부랴 다른 곳을 잡아 장례를 지냈다. 얼마가 지난 뒷날 류씨부인은 시외숙인 황판서 아들 자후(子厚)에게 청했다.

“아주버님! 저도 이미 나이가 들었으니. 장차 제가 묻힐 자리 하나를 주셨으면 고맙겠 습니다.” “그것은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나 어디 마땅한 자리가 있어야지?”라는 황씨의 대답에 류씨부인은 다시 “지난번 시외조부님을 모시려던 그 자리를 주시면 좋겠는데요.” 하였더니, 황씨는 “질부도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그 자리는 물이 나서 이미 산소를 쓰기에는 마땅치 않은 자리인데…” 하였다.

“저희 형편에 그 자리인들 어떻습니까. 제게는 너무나 과분한 자리인 걸요.” 이렇게 간곡히 말하니 황씨는 이내 승낙하여 그 자리에 류씨부인의 묘소를 쓰게 되었 다고 한다. 얼마 뒤 류씨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자손들은 이곳에다 류씨부인의 묘소를 씀으로써 은진송씨 자손들은 그 명당의 음덕으로 대대로 번창하여 오늘처럼 명문벌족 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날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뒷날 옥오재(玉吾齋) 송상기(宋相琦)가 대제학이 되었는데 황판서의 후손인 제곡(齊 谷) 황세정(黃世楨)이 첨추공(僉樞公) 상억(相億)에게 “옥여(玉汝)27)의 대제학(大提學)은 송씨의 대제학이 아니라 우리 집의 대제학일세.” 라고 하였다고 한다.28)

고흥유씨 정려각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5호
대전광역시 대덕구 중리동

삼강려 애각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

지금은 도시개발로 인하여 도심에 자리한 중리동 소재의 은진송씨 대종가에서 동남 쪽으로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류조비의 정려각이 서 있고, 그 정려각에서 남쪽으로 약 50여 미터 거리에 있는 대로변에는 류조비의 정절을 기리기 위하여 바위에 새겨진 삼강려가 있다. 본래 이 바위 돌은 30여 미터 정도 남쪽 작은 길가에 서 있어 전면이 반대방향인 북향을 하고 있었다. 1994년 송촌택지개발사업으로 약 5m정도 남쪽으로 옮기고 전면을 반대 방향인 남쪽, 큰길을 바라보도록 세웠다. 그 과정에서 돌이 너무 크고 무거워 밑쪽을 반 토막 잘라 옮긴 것이다.

고흥유씨 묘비

대전광역시 동구 마산동(관동

열부 안인 고흥류씨 묘갈

우리 선조비 안인 류씨(安人柳氏)의 묘소는 회덕 관동리(寬洞里) 간좌(艮坐)의 자리에 있다. 부군(府君)의 산소는 그 소재지를 실전하였다. 조비(祖妣)의 혈통은 고흥(高興)에서 나왔으니 그의 아버지 준(濬)은 고려의 상서(尙書)로서 고흥백(高興伯)을 봉했다. 조부 방(坊)은 판관(判官)을 지냈다.

조비가 홍무(洪武)29) 1371년(辛亥)에 출생하여 과년(瓜年)30)이 차서 우리 선조고(先祖考) 진사부군(進士府君)에게 출가하였다. 부군의 이름은 극기(克己)이고 성(姓)은 송씨니 은진의 명망 있는 씨족이다.

집단(執端)31) 명의(明誼)가 공정한 재판과 곧은 지조로 이름이 있어 정포은(鄭圃隱) 등 여러 현인들과 교유가 깊었다. 이 어른이 바로 부군의 아버지가 된다. 부군이 명문의 자제로서 묘년(妙年)32)에 선발되어 태학(太學)33)에 들어갔다.

품계는 낭장(郞將)34)이었는데 불행히도 단명하여 일찍 하세하였다. 그때 조비의 연세는 22세였다. 그의 부모가 뜻을 빼앗아 개가시키려 하였다. 조비는 죽음으로써 맹세하고 조금도 다른 뜻이 없었다. 몸소 네 살 되는 어린 아이를 업고 몸을 빠져나와 보행으로 시부모에게 왔다. 송도에서 회덕까지는 그 거리가 500여 리나 된다.

힘은 빠지고 기운은 다하였으며 발은 부르트고 창자는 타서 문밖에서 기었는데 시부모는 처음에 받아들이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이유인 즉“여자가 부모의 영을 듣지 않는것은 삼종지의(三從之義)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조비가 울면서 대답하였다.
“저의 삼종지도는 지금 등 위의 아이에게 있지 않겠습니까?”그리고서 3일을 떠나지 않았다. 시부모도 감동하여 받아들였다. 이로부터 시부모를 딱하게 생각하고 효도하는 것이 더욱 두터워서 시종 변함이 없었다. 업고 온 아이의 이름은 유(愉)니 배태(胚胎)35)해서부터 상서로움이 빛나더니 그윽하고 정절함이 뛰어났었다.

우리 태종조(太宗朝)를 당하여 숨어 살면서 덕을 길렀으니 세상에서 이른바 쌍청당(雙淸堂)이다. 조비가 극 노인이 되어서도 건강하여 양지(養志)와 양체(養體)36)의 효도를 고루 받았다. 한때의 명현들 중에서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같은 여러 사람들이 글과 시를 지어 찬양하였다.

1446년 정통(正統) 병인(丙寅)에 쌍청공(雙淸公)이 또 하세하였다. 조비는 운에 맡기고 달관(達觀)하여 거듭 당하는 슬픔으로 하늘이 내려 주는 화기(和氣)를 손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약한 손자 계사(繼祀)와 계중(繼中)과 더불어 계속된 좋은 평판이 커져서 더욱 그 가업을 열었다.

경태(景泰) 임신(壬申 : 1452)에 조비는 연세가 82세로 타계하였다. 그 뒤 200여 년이 지나 1653년 숭정(崇禎) 계사(癸巳)를 당하여 7세손(七世孫) 동지사(同知事) 희명(希命) 등이 쌍청공의 묘각(墓刻)37)을 세워 끼친 높은 풍도를 기렸다. 그리고 그 근본을 생각하여 말하였다. “아! 우리 송씨가 대대로 후덕을 쌓았으니 이치로 보아 마땅히 앞이 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보면 아름다운 행실과 높은 절개로 마땅히 이러한 아드님을 두어야 할 분은 우리 조비인가? 몇 천 몇 만의 많은 자손을 가슴에 안게 되었으니 어느 냇물 치고 물이 풍부한데 근원이 없는 것이 있겠는가? 정려하여 포창하는 은전이 지금껏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이대로 늦추어 가다가는 인멸하여 전해지지 않을까 크게 두렵다. 그러나 세대가 비록 멀기는 하나 아직도 일을 도모할 수 있다.착한 일을 하고서 보답이 없는 수는 없다. 다만 더디고 빠른 시간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이것이 이치의 상례이다.”여러 일가들이“참 그렇다.”고 하였다. 일이 조정에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처음은 오래되어서 징빙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드디어 고을 노인들의 장계와 묘석에 새긴 각(刻)을 올렸다. 이에 있어서 예조 판서 이후원(李厚源) 등이 장계를 올렸으니“신 등이 가만히 생각하니 성조의 초기에 있어서도 고려의 풍속이 가시지 않아 비록 명문대가라도 남편이 죽으면 재가하여도 염연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류씨는 약관의 청상과부로서 법률과 형세가 단속하여 막는 것도 아닌데 습관과 풍속이 변하는데 따르지 않고 정숙한 마음은 더욱 밝고 본래의 집념은 더욱 견고하였으니 옛날 위(衛)나라 공강(共姜)과 한(漢)나라 진효부(陳孝婦)에 비하여도 그 아름다움을 나란히 할 수 있습니다. 열성(列聖)38)이 절의를 포창하여 높이고 이륜(彛倫)39)을 붙들어 세우는데 있어서 천양되지 않은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류씨는 지금까지 묻혀 왔으니 진실로 은전에 흠이 되었습니다.

추후하여 문려(門閭)에 포창하여 일세의 견문을 새롭게 한다면 진실로 사의(事宜)에 합당하겠습니다.”고 하였다. 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경여(李敬輿)·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이경석(李景奭)·영의정(領議政) 정태화(鄭太和)·좌의정(左議政) 김육(金堉)·우의정(右議政) 이시백(李時白) 등이 합의가 되었으니“류씨의 절행은 고금을 통하여 제일 뛰어나서 민멸하지 않아 백세(百世)에 반드시 전해질 유적이 있어서 추호도 의심할 만한 단서가 없으니 마땅히 정려와 복호(復戶)40)를 내려서 의리와 정절에 보답하고 쇠퇴한 풍속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위에서 특히 그대로 시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해 6월에 관찰사(觀察使) 조형(趙珩)이 왕명을 받들어 본현(本縣)41)으로 하여금 공문서대로 거행하도록 하였다.

아! 성조(聖朝)42)에서 높여서 보답하는 것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자손들이 일찍이 묘전(墓田)을 두었었는데 조정의 명령으로 그 세금을 면제하여 매년 3월에 예에 준하여 세일사를 지내니 다 왕은(王恩)에 의하는 것이다. 제사를 게을리 않는 가운데에서 영혼에게 명백히 보답할 수 있는 것이다. 관동은 옛날 황씨의 장지였다. 지금 선조비 묘소 서쪽 수백 보 지점에 부군의 외조 군수 수(粹)의 묘소가 있다.

거기에서 두서너 사람이 서서 소리 질러 연락할 수 있는 지점에 송씨들 자손의 묘가 서로 맞바라보고 있다. 그 남쪽 10여 리 지점에 있는 판교산(板橋山)은 쌍청공의 산소다. 문정공(文正公) 상헌(尙憲)이 묘갈(墓碣)에 명(銘)을 써서 세세로 내려온 덕을 찬양하였고 비의 이면에 천여 명이나 되는 현저한 자손의 명단을 기록하였으나 십분의 일도 안 된다. 회옹(晦翁)43)의 이른바 젊을 때의 고생스러운 절개가 그 보답을 받는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그 징험인가. 오직 부군의 유택(幽宅)을 마침내 찾아서 표지할 수 없으니 하물며 그 행적을 어찌 상고할 수 있겠는가? 다만 그 다스린 바를 살펴보면 수신하고 제가한 실적만은 속일 수 없다.

아! 조비의 순수하게 아름다운 행실이 여러 해 동안을 침체하였다가 지금 비로소 은 혜를 입게 되었으니 영광을 나타내고 현저함을 표시하여 일세(一世)에 빛나니 이것이 하늘이 다 정하는 바가 있어서 선은 권장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러나 성상의 극치의 입장에서 백성을 이끄는 교화가 없다면 어찌하여 이에 이르겠는가? 무릇 우리 후손들은 반드시 아들로서는 효도하고 신하로서는 충성하고 아우로서는 공경하여 하늘이 부여한 충정을 다한 연후에야 성조의 뜻을 저버리지 않게 되는 것이니 그제야 조비의 산소에 와서 뵐 수 있을 것이다. 아! 두렵지 아니한가? 어찌 서로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숭정 정유 7월 일 9대손 통정대부 세자시강원찬선 시열(時烈) 짓고
8대손 통정대부 세자시강원 찬선 준길(浚吉) 쓰고
9대손 성균관 진사 광식(光栻) 전서(篆書)하다.

烈婦安人高興柳氏墓碣

我先祖 安人柳氏墓在懷德寬洞里負艮之原府君墓失其所在祖 系出高興縣父濬高麗尙書 封高興伯祖坊判官祖 生于洪武辛亥旣 歸于我先祖考進士府君諱克己姓宋氏恩津望族執 端明誼以淸裁直節與鄭圃隱諸賢相善是爲府君之考府君以名家子妙年選入太學階郞將不幸短命以歿祖 年二十二其父欲奪其志祖 矢死靡他自負四歲乳兒脫身徒行以就舅姑蓋自松京至懷德五百餘里力盡氣竭足繭腸焦匍匐門外舅姑不肯納曰何女子不聽父母是不識三從之義也祖 泣而對曰我之三從今不在於背上兒乎立三日不去舅姑感而受焉自是慈孝彌篤終始 無間而所負兒諱愉胚胎光英幽貞卓絶當我 太宗朝隱居養德世所謂雙淸堂者也祖妣大秩强 康備享志物之養一時名賢如朴醉琴軒彭年諸人有詩記以美之 正統丙寅雙淸公又逝祖 任 運達觀不以重哀損其天和仍與二弱孫繼祀繼中續聞成宗益啓其業 景泰壬申祖 年八十二 而終後二百餘年當崇禎癸巳七世孫同知事希命等旣揭雙淸公墓刻以顯遺烈思惟本原曰 嗚呼我宋世綿積厚理應紹開而其懿行高節宜有是子者其惟我祖妣乎其逢將承膺子孫千萬則孰川豊而不源乎而旌褒之典迄今未擧大懼因循煙沒於無聞世雖眇綿猶可及圖爲善無不報而遲速有時此理之常也宗盟咸應曰然事聞朝議始難以久遠無徵遂復以鄕人耆耉之狀與刻在墓石者上之於是禮曹判書李公厚源等啓曰臣等竊惟盛朝之初麗俗未變雖名門右族夫死再適恬不爲異柳氏以弱年孀婦非有法律形勢之防束而能不爲習俗所移貞心彌亮素執愈堅視古衛共姜陳孝婦可以竝美 列聖所以褒崇節義扶植彛倫之道靡有不擧則柳氏之至今埋沒誠爲缺典追表門閭以新一代之觀聽允合事宜領中樞府事李公敬輿領敦寧府事李公景奭領議政鄭公太和左議政金公堉右議政李公時白議曰柳氏節行卓冠古今久而未泯有百世必傳之迹無一毫可疑之端實宜旌閭復戶以酬義烈激勵頹俗 上特命施行是年六月觀察使趙公珩奉 聖旨令本縣擧行如章嗚呼 聖朝所以崇報之者蔑以加矣子孫曾置墓田乃以 朝命鷁其 租入每歲三月準禮一祭竝係 恩頒可以昭侑於罔倦矣寬洞古黃氏之葬也今其墓西累百步府君外祖知郡粹之藏也 其數三喚地宋氏子姓其丘相望而其南十數里板橋山則雙淸公墓也金文正公尙憲實銘其碣稱引世德而子孫之載於其陰者殆千餘人然不能什一也晦翁所謂盛年苦節以享其報者此其徵也 歟惟是府君幽堂終無以契 其事行寧可考尋第觀於所刑則其修齊之實有不可誣者矣嗚呼 祖妣純懿之行沉鬱幾年而始見於今顯榮表著燀爀一世此天之所以有定而善之可以爲勸也歟然倘不遇 聖上立極導民之化亦何以與此凡我後昆必能子而孝臣而忠弟而弟以盡帝畀之衷然後庶不負 聖朝之意而可以拜妣祖之墓矣嗚呼可不懼歟盖相與勉之哉

崇禎丁酉七月 日 九代孫 通政大夫 世子侍講院贊善 宋時烈 撰
八代孫 通政大夫 世子侍講院贊善 宋浚吉 書
九代孫 成均館 進士 宋光栻 篆

주석

  • 20) 양지 목악촌(陽智面 木岳村) : 지금의 경기도 안성 지역.
  • 21) 체천(遞遷) : 제사를 지낼 자손이 끊긴 조상의 신주를, 4대 이내의 자손가운데 항렬이 가장 높은 사람이 대신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자기 집으로 옮김
  • 22) 표덕(表德) : 덕을 표시하는 것.
  • 23) 안인(安人) : 조선시대 외명부 가운데 하나 문무관 정7품 처에게 내리는 작호.
  • 24) 상서(尙書) : 육부의 으뜸 벼슬 즉 판서.
  • 25)「600여 년 지녀온 옥답(沃畓)」, 『은진송씨선적사(恩津宋氏先蹟史)』, 은진송씨대종중, 1990. 5. p121.
  • 1981년 중리지구 택지개발로 주거지구로 변경되어 택지로 불하되었다.
  • 26) 안인(安人) : 류조비를 가리킴.
  • 27) 옥여(玉汝) : 옥오재 송상기의 자(字).
  • 28) 계담가승(桂潭家乘).
  • 29) 홍무(洪武) : 명나라 태조의 연호.
  • 30) 과년(瓜年) : 혼인할 나이.
  • 31) 집단(執端) : 사헌부 집단(司憲府 執端)을 가리킴. 조선의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로 종 3품 벼슬.
  • 32) 묘년(妙年) : 젊은 나이.
  • 33) 태학(太學) : 성균관, 지금의 대학, 사마시에 합격하여야만 입학할 수 있음.
  • 34) 낭장(郞將) : 중랑장(中郞將) 다음의 정 6품 무관 벼슬.
  • 35) 배태(胚胎) : 임신을 함.
  • 36) 양지양체(養志養體) : 어버이의 마음을 즐겁게 함.
  • 37) 묘각(墓刻) : 비문을 새긴 묘비.
  • 38) 열성(列聖) : 역대의 군왕.
  • 39) 이륜(彛倫) : 인륜과 도덕.
  • 40) 복호(復戶) : 충신·효자·열녀 등이 난 집에 대하여 세금을 면제한다.
  • 41) 본현(本縣) : 여기서는 회덕현을 가리킴.
  • 42) 성조(聖朝) : 조정을 높여서 하는 말.
  • 43) 회옹(晦翁) : 회암(晦庵) 즉, 주자(朱子)를 가리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