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진송씨 상대세적

4-1. 덕을 숨기고 벼슬을 단념한 처사 쌍청당
221.158.221.★

덕을 숨기고 벼슬을 단념한 처사 쌍청당

6세는 은덕불사(隱德不仕)의 처사(處士) 쌍청당 유(雙淸堂 愉)이다.
쌍청당 유(愉)는 1389년(고려 창왕 1)에 개성에서 태어나 1392년 네 살 때 아버지 극기(克己)가 타계하니 어머니 고흥류씨의 등에 업혀 회덕으로 내려왔다. 어려서부터 자품이 높고 맑으며 효성이 지극하고 기도(氣度)가 호상(豪爽)하며 학행(學行)이 순비(純備)하였다. 12세인 1400년(태종 1)에 벼슬을 하여 호분위 부사정(虎賁衛 副司正)이 되었는데 13세 때 방원(芳遠)이 정도전(鄭道傳)과 이복동생 방석(方碩)과 방번(芳蕃)을 살해하고 집권한 이른바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면서 몇 해 전에 승하한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를 폐위시켰다.

쌍청당(雙淸堂)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

대전광역시 대덕구 중리동 71번지

이처럼 조정이 윤기가 없어지고 어지러워지자 청풍고절(淸風高節)의 선비 쌍청당은 그것을 보고 그대로 벼슬자리를 지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과감히 벼슬을 버리고 백달촌(白達村)에 은거하여 학문에 힘쓰면서 구차히 영달을 구하지 않았다.

이후 태종이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회덕 고을 계족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이 백달촌은 송촌(宋村)의 옛 이름으로 본래 수원백씨(水原白氏)들이 살던 집성촌(集成村)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쌍청당 모자가 토물에서 와서 정착한 뒤 그 자손이 번창하여 이 마을을 송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송정희(宋正熙) 편『덕은가승(德恩家乘)』에 보면 쌍청당 모자가 이곳에 터를 잡은 것에 대하여 두 가지 설을 들고 있다. 그 하나는“쌍청당께서 세 번째 자리를 옮겨 백달촌(白達村)에 정착하였다.”라고 하였고, 또 하나는“쌍청당께서 44세 되던 1432년(세종 14)에 이곳에 쌍청당을 짓고 화초를 가꾸며 담백한 생활을 하였다.”는 것이다.

쌍청당 묘역 안내석

대전광역시 동구 판암동 산소골

그 밖의 여러 문헌들을 상고해 보아도 토물(土井)에서 백달촌으로 이사를 하게 된 동기라든가 유조비와 쌍청당 중에 누가 주선하여 이사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쌍청당이 어머니를 모시고 이 마을에 은거한 뒤 정침(正寢)44)의 동쪽에 사당을 짓고 논 7마지기를 마련하여 제수를 마련하도록 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쌍청당이 44세 되던 해에 쌍청당(雙淸堂)을 하나 지었는데 매우 깨끗하고 조촐하였다. 또 거기에는 푸줏간과 욕실과 제기(祭器)를 보관하는 벽장을 부설하여 각각 단청(丹靑)을 하였다.뜰과 섬돌은 다 네모져 바르고 단단하여 좋았다. 그 규모와 제도는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는 않았다.

당의 주변에는 화초와 솔과 대나무를 섞어 심어 놓았다.
쌍청당은 틈만 있으면 심의대대(深衣大帶)45)차림으로 당에 올라 분향 하고 맑게 앉아 담담하고 고요한 사색에 잠겨 속되게 세상의 사물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이렇게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그때 사람들은 그를 선학(禪學)을 좋아하는 신선 같다고 하였다.

이 사실을 알고 당시 국악의 대가요 대제학(大提學 : 太學士)인 난계(蘭溪) 박연(朴堧)이 찾아와 당의 이름을 쌍청당(雙淸堂)이라 하였고, 쌍청이라는 액(額)을 걸었다. 쌍청은 두 가지 즉 바람과 달의 맑음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 뒤 사람들은 그를 쌍청당 처사(處士)라 부르게 되었다.

한때의 명사들이 찾아와 술잔을 나누면서 시를 짓고 화답하며 흥을도왔다. 뒤에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이 사언율시(四言律詩)를 지었는데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이를 좇아 화답하였다. 또한 취금헌과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이 이에 대한 기문(記文)을 썼는데 박팽년의 기문은『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실려 있다.

산소골 원경

대전광역시 동구 판암동

쌍청당(雙淸堂) 유(愉) 묘역

대전광역시 동구 판암동 산소골

어머니 류씨부인은 나이가 80세에 가까워도 건강하여 병환이 없었다. 쌍청당은 어머니의 뜻을 어기지 않고 충실하게 봉양하였으며 절사(節祀)46)나 기제사(忌祭祀)를 당하면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목욕재계하여 공경과 정성을 다하였다.

물품을 주고받는데 있어서도 엄격하였으며 의리가 아니면 털끝 하나도 구차한 행위를 하지 않았다. 또한 좋은 때나 명절에는 반드시 술자리를 마련하고 손님을 청하여 거문고와 바둑, 시부(詩賦)를 조용히 즐겨 신선같이 보였다. 1446년(세종 28)에 58세로 청아한 일생을 마치니 대전광역시 동구 판암동 판교산 임좌원(壬坐原)에 장사지냈다.

쌍청당의 행장은 7대손 준길(浚吉)이 지었다. 묘소 앞에는 조그마한 표기(表記)가 있었지만, 세월이 지남에 글자 획이 망가지고 떨어져 전문(全文)을 판독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7대손 동춘당이 1653년(효종 4)에 대자비를 쌍청당 묘소 정방(丁方) 수십 보 되는 곳에 세웠는데, 전면에는 청음 문정공(淸陰 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이 짓고 신독 문경공(愼獨 文敬公) 김집(金集)이 쓰고 7대손 준길(浚吉)이 두전(頭篆)을 쓴 묘표와, 뒷면에는 준길이 짓고 쓴 자손 520여명의 직함과 이름이 수록된 묘표자손기(墓表子孫記)가 있다. 이 비는 다른 비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정성이 깃들어 있다.

쌍청회관(雙淸會館)

대전광역시 동구 판암동


쌍청회관(雙淸會館) 오르는 길

대전광역시 동구 판암동

일설에는 8대손 시열(時烈)이 비록 쌍청당이 신도비를 세울 품격은 못되지만, 59세에 세운 선군(先君) 수옹(睡翁) 신도비 규모의 돌을 동춘당과 함께 구하여 세웠다고 한다. 이 비는 1687년(숙종 13) 8월에 길 오른 쪽 언덕 밑으로 옮겨 세웠다. 〈은진송씨대종중〉에서는 18대손 시영(始永)에게 부탁하여 지은 묘표추기(墓表追記)의 내용을 다른 돌에 새겨 세웠다고 하는데 현재 그 비는 보이지 않는다.
묘소 우측에는 1664(현종 5)년에 세운 8대손 시열이 짓고, 7대손 준길이 쓴 묘표가 있다.

쌍청당(雙淸堂) 유(愉)의 판교재실(板橋齋室)

대전광역시 동구 판암동

경청재 건축 사실기

 

묘소 좌측에는 1959년에 공사원 송시영이 세운 「處士 雙淸堂 宋公之墓/愼獨齋 金先生 遺筆」이라 쓰여진 큰 묘표비가 있다. 큰 묘표비 좌측에 청음 김상헌이 지은 쌍청부군 묘갈을 한글로 번역하여 세운 비가 있다. 이 비는 쌍청부군의 고매한 정신을 담은 묘갈이 한문으로 되어 판독이 어려워 대종중 공사원 일경 범섭의 뜻에 따라 동춘당 12대손 용대가 경비를 자담하여 한글 번역비를 쌍청회관 준공과 더불어 세웠다. 1998년 8월 23일 19대손 창준이 번역하고 18대손 준영이 썼다.

“옛적에 재실이 있었으나 자주 옮기므로 7대손 전 감찰(前 監察) 국사(國士)가 건의하여 건축을 경영하셨고, 8대손 시중(時中)·시태(時泰) 등이 마침 밭이 묘 아래에 있으므로 대지로 제공하여 오가(五架)의 집으로 3칸, 또 포주( 廚) 5칸을 세워 매년 세일제(歲一祭) 때에 모든 자손들이 같이 제향을 받들어 백세를 내려가더라도 변경하지 않도록 도모하였다.”고 우암 시열은 판교재실기(板橋齋室記)에 적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세일사에 참여하는 자손의 수가 늘어나고 많은 종원(宗員)들이 한자리에 모여 종사를 논의할 만한 장소가 없으므로 1960년대에 부득이 공사원(公司員) 정순(廷淳)의 발의로 재실 담벼락 옆에 별관을 지어 경모재(景慕齋 = 景淸齋)를 지었다. 당시는 종재(宗財)가 빈약하여 성금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1966년에 시작하여 1970년에야 준공하였다. 그 뒤〈쌍청회관(雙淸會館)〉신축으로 30년 만인 1996년에 헐리고 말았다.

景淸齋 建築事實記

  • 1. 撰者 : 宋廷淳(1909.2.2∼1970.2.13)
  • 2. 규격 : 36·5㎝×21·3㎝
  • 3. 년대 : 己酉(1969) 겨울 11월 상순
  • 4. 형식 : 筆本
  • 5. 수량 : 1면
  • 6. 재료 : 미농지(?)
  • 7. 소장 : 송성빈
  • 8. 번역 : 구본미

자료 해제
대전광역시 동구 판암동에 가면 은진송씨 중시조 되는 쌍청당 송유의 재실이 있고 戊寅(1998)년 낙성한 별관인 쌍청회관이 있다.
쌍청회관 이전에 景慕齋가 있었다. 경모재는 은진송씨 쌍청당 재실 담벼락 옆에 있었던 재실의 별관이었다. 술암 송재성이 지은 경모재사실기에 의하면 1960년대 접어들면서 쌍청당 산소 시제에 참제하는 자손수가 늘어나고, 많은 종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종사를 논의할 만한 장소가 없었으므로 경모재를 짓게 되었다. 이 별관의 구조는 벽은 벽돌로 쌓고 창을 내어 한 칸의 강당으로 건축하였으며 앞에는 단(壇)과 탁자를 놓아 회의하는 장소로 마련하였다.

경모재는 당시 은진송씨 대종중 공사원이었던 봉강 송정순(1909.2.2∼1970.2.13)씨가 발의하고 종원들이 호응을 얻어 건축하였다. 당시는 종재가 아주 빈약하였기 때문에 성금을 접수하여 완성을 보았는데 당시로서는 건축 상의 규모나 기술면에서 놀라울 정도의 기술이었다. 丙午(1966)년에 시작하여 庚戌(1970)에 준공하였다. 경모재는 꼭 30년 만인 1996년 헐리고 말았다. 판암동 산소골 쌍청당 송유묘역을 정화하면서 경모재 보다 규모가 더 큰 전통 한식 양식의 쌍청회관을 마련하였기 때문에 지금 현재는 볼 수 없다.

그런데 은진송씨 어느 문헌(『쌍청당실기』, 『은진송씨선적사』)에도 수록된바 없는 당시 공사원이던 송정순씨가 지은 경청재건축사실기가 발견되었다. 이 문건은 건축의 시말이 아주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기록되어있다. 내용은 계묘(癸卯:1963)년 겨울에 당시 공사원이던 송정순씨가 쌍청당 별관 추진회 회장을 맡아 다음해 甲辰(1964)년 여름 송석준 송병덕 송완빈 송정헌 송진도씨와 함께 별재를 건축하는 비용을 모금했으나 丙午(1966)년 봄에 부득이 중지하였다.

이 사실은 심농 송진도씨의 일기인 심농일기에도 나타나 있는데 “갑진(1964)년 쌍청당 별관 신축기금 성금 독려차 대덕군 각 면을 순방했다. 라는 기록과, 丙午(1966) 2월 18일 午時에 별관신축 상량문을 송완빈씨가 쓴 상량문으로 고유했다는 사실, 1970년 3월 11일 쌍청당 별관 신축 낙성식이 거행되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 기유(己酉:1969)년 가을에 송촌의 유조비 정려와 쌍청부군의 옛 당을 중수하고 남은 재물로써 별재를 완공한 것이 1969년 11월 상순이었다. 라는 내용이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볼 때 쌍청당 별관의 경모재의 전신이 경청재인데 경모재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는 자료로 경모재사실기에서 빠트린 건축과정 내용이 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는 자료다. 즉 경모재 기문에서는 1966년부터 별관 신축을 위한 추진회가 구성되어 추진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경청재기문」과 『심농일기』를 통해 확인해 볼 때 이미 별관 신축이 1963년부터 추진되었다는 점, 심농 송진도씨 이하 추진위원들이 1964년 4월 18일 대덕군 각 면에 성금을 모으러 다닌 사실과 1965년 5월 16일 유시(酉時)에 신축 개기고유(開基告由)하고, 1966년 2월 18일 상량식을 거행하고, 1970년 3월 11일 별관 신축 낙성식이 거행되었다는 기록이 일기에 잘 드러나 있다.

추론해보건대 경청재를 추진했던 공사원 송정순씨가 1969년부터 암으로 투병하다, 1970년 3월 11일 낙성식을 앞두고, 1개월 전에 낙성식을 보지 못하고 2월 13일 타계하였다. 병으로 투병하는 과정에서 공사원인 송정순씨가 송재성씨에게 기문을 부탁하지 않았나. 추론해본다.

그런데 송정순씨가 景淸齋(경청재)라고 별관이름을 짓고, 기록한 사실기가 송재성씨에게 전달되지 않았던 것 같다. 낙성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사실의 근거를 철저히 확인하지 않고, 경모재 기문이 작성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사실 景慕齋(경모재)보다는 景淸齋(경청재)가 더 이름이 좋다.

“경모재는 우러러 사모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경모는 누구나 부를 수 있는 일반적인 이름이지만, 경청재의 경청의 의미는 쌍청당을 우러러 앙모한다. 즉 사모한다는 말로, 고산앙지(高山仰止)의 뜻과 같다. 은진송씨는 모두 쌍청당의 후손이다. 후손으로써 직접 와 닿고 부르기도 좋고 색채가 있는 좋은 이름이었는데, 왜 경모재로 바뀌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추론해볼 뿐이다.

景淸齋建築事實記
雙淸府君齋舍世益遠而子姓益蕃 故前日之廣大者漸至狹小一祀時每
有苟且之端往在癸卯冬諸宗族行祀事始發議定推進會而以余忝在公員之任任其會長余雖無狀豈敢辭諸越明年甲辰夏與宗兄錫浚氏秉德氏族姪完彬宗姪廷憲鎭道鳩財募工築別齋於舊齋之傍役巨財綿丙午春不得已中止詩所謂靡不有初鮮克有終者非耶自是諸宗族咸憂懼若窮人之無所歸偶蒙天神助佑己酉秋以柳祖妣旌閭及府君舊堂及宗家重修餘財訖其未訖之役輪奐一新苟非諸宗族之苦心熱誠有以感動天神安能致此眞奇且幸哉雖然非錫浚氏秉德氏及完彬廷憲鎭道之終始董役不懈益勤亦未易訖此則諸宗族不可不知功也遂書以爲景淸齋建築事實記傳示來後云若其齋之名義將有記之者不提說焉 己酉之冬十一月上浣 府君十七代孫廷淳識

경청재 건축사실기
쌍청부군 재사는 세대가 멀고 자손이 더욱 번성하여 전에는 컸으나 점차 좁아졌습니다. 한번 제사를 드릴 때면 구차함의 폐단이 있었습니다.
지난 계묘년 겨울에 모든 종가 사람들이 제사를 거행할 때 비로소 추진회를 정하기를 발의하여 나도 공원의 임무에 참여하였는데, 그 회장을 내가 맡게 되었다. 내가 비록 무상하지만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다음해 갑진년 여름에 종형 석준씨와 병덕씨 종질 완빈 족질 정헌 진도와 함께 옛날 건물 옆에 있는 별재를 건축하는 비용을 모금하였다.
인력이 크고 재물도 계속 소요되어서 병오년 봄에 부득이 중지하였다. 시경에 말하기를 “처음은 누구나 노력하지만 끝까지 계속하는 사람은 적다.”고 하였으니 이로부터 모든 종족 사람들이 걱정하고 두려워하기를 곤궁한 사람이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같이 하였다.
우연히 천신의 도움을 입었다. 기유년 가을에 유조비 정려와 부군의 옛 당과 종가에 중수하고 남은 재물로써 그 마치지 못한 일을 마쳐서 집이 크고 넓어 새로워졌다. 진실로 모든 종족의 고심과 열성이 아니었다면 천신의 감동함과 평안함이 여기에 이르렀겠는가. 진실로 기이하고 다행한 일이다.
비록 석준씨 병덕씨 완빈 정헌 진도가 수행한 처음부터 끝까지 큰 공사를 감독하여 게으름 피지 않고 더욱 열심히 하지 않았다면 이것을 쉽게 마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즉 모든 종족은 그 공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드디어 글로써 경청재 건축사실을 기록하고 후예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만약 그 재의 명의가 장차 기록과 같으니 제설을 하지 않겠는가?

기유 겨울 11월 상완 부군 17대손 정순이 기록하다.
(以堂 成彬 記)


회덕판교리 은진송씨장

대전 동구 판암동

판암동 산소골 입구 대비 뒤편 산록에 옛 표석을 다듬어 동춘당께서 쓴 「회덕 판교리 은진송씨장(懷德 板橋里 恩津宋氏葬)」 비가 있다. 우리 조상님들은 비석의 남아있던 글자까지 새겨서 정리해두는 꼼꼼하고 정성어린 문헌사랑을 알 수 있다.

우암께서 지은 비문을 새겨 세우면서 전에 있던 빗돌을 다시 갈아서 재활용했는데, 이것이 「懷德 板橋里 恩津宋氏葬」비 10자이다. 또 묘소 왼쪽 건너편 언덕에는 1707년(숙종 33)에 세워진 애각(崖刻 : 地點石)이 있다.

거기에는 우암 문정공 시열(尤庵 文正公 時烈)이 글을 짓고 곡운(谷雲) 김공(金公) 수증(壽增)이 팔분체(八分體)로 쓴‘쌍청당 수옹 두 묘가 건방 2백 5십보에 있는데 백세의 청풍이요, 삼한의 정기(雙淸堂睡翁 二墓 在乾方二百五十步 百世淸風 三韓正氣)’라는 23자가 새겨져 있다. 본래 이 애각은 지금의 길 건너편 언덕에 세워졌던 것인데 그 동안 지형의 변경과 자손들의 관리 소흘로 두어 번이 옮겨진 끝에 최근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진 것이다.

지금 애각이 서 있는 자리는 우암 시열이 종신토록 부모님을 사모하여 자그마한 집 첨배재[瞻拜齋]를 짓고 기거(起居)하면서 매일 건너편 언덕에 모신 쌍청당과 부모님 산소를 향해 절을 했다는 곳이다. 그 뒤 이곳 첨배재에 오르는 고개 이름도 첨배티[瞻拜峙]로 붙여졌다고 한다.

1695년(숙종 21)에 참판(參判) 박공(朴公: 朴彭年), 송애(松厓) 김경여(金慶餘)와 함께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 지금의 남간정사(南澗精舍) 경내에 있던 정절사(靖節祠)에 배향하였다.

배위는 안동손씨(安東孫氏)인데 지중추(知中樞) 원유(元裕)의 따님이다. 부도(婦道)가 있어 시집을 와서 시댁 어른을 모시는 정성을 다했으나 불행히 37세로 타계하였다.

판암동 산소골 애각(崖刻 : 地點石) 「쌍청당암각」 대전시 문화재자료 제67호

대전광역시 동구 판암동

처음에 양성(陽城)에 장례를 지냈다가 1446년(세종 28)에 부군이 타계하자 부군의 묘소에 합폄(合窆)하였다.

두 아들을 낳았으니 계사(繼祀)는 벼슬이 상주판관(尙州判官)에 이르고 증직은 지평(持平)이다. 계중(繼中)은 벼슬이 사과(司果)이다. 1998년 8월 23일 전국 종원(宗員)들의 성금 20억 원으로 현재의〈쌍청회관(雙淸會館)〉과 지하 회의장 겸 식당, 및 고직사(庫直舍), 부속건물 등을 신축 낙성하였다.

아울러 그동안 신축과정에서 소흘하게 모셔진 쌍청당비(雙淸堂碑)와 수옹공(睡翁公)의 신도비(神道碑)를 회관 입구 노거수(老巨樹) 옆 공터에 상하단(上下壇)으로 묘역(墓域)을 조성하고 다시 세웠다. 이후 2005년 8월 우암 종손 영달(永達)이 지점석(地點石) 옆에다「판교사적비(板橋事蹟碑)」를 세운 바 글은 후손 백헌(百憲)이 지었다.

쌍청당기(1)

천지 사이에 바람과 달이 가장 맑은데 사람 마음이 신묘함도 또한 이와 다름이 없다.
다만 형체와 기질에 얽매이고 물욕에 더렵혀져 능히 그 본체를 온전히 보전하는 자가 드물다.
대개 연기와 구름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천지가 침침하게 가려졌다가도 맑은 바람이 이를 쓸어내고 밝은 달이 공중에 떠오르면 위와 아래가 통투(通透)하게 밝아져서 털끝만한 점철(點綴)47)도 없게 된다.

기상은 진실로 용이하게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니 오직 사람으로서 그 마음을 온전히 지켜 더럽힘이 없는 자라야 족히 이에 해당되어 스스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황노직(黃魯直)이 일찍이 이로써 용릉(舂陵)48)에 견주었으며 소강절(邵康節)49)도 또한 청야음(淸夜吟)50)이란 시를 지어 그 맛을 아는 자가 적다고 탄식하였다.

쌍청당 편액(松潭 筆)

대전광역시 대덕구 중리동
당 안에 있는 편액은 仙源 金尙容의 글씨다

지금 세상에 또한 이러한 즐거움을 아는 자가 있겠는가? 시진 송공은 본래 대대로 벼슬하던 구가(舊家)이었다. 그러나 공명을 좋아 하지 아니하여 촌야(村野)로 물러나와 산지가 이제 20여 년이 되는데 그 고을은 충청도 회덕이요, 마을은 백달촌이라 한다. 사당을 사는 집의 동쪽에 세워 선대의 제사를 받들고 전답을 두어 몇 이랑을 장만하여 제사의 수용에 쓰도록 하였다.

그리고 사당 동쪽에 따로 초당을 세운 것이 무릇 7간이다. 그 가운데를 온돌로 만들어 겨울철 사용에 맞도록 하였으니 바른편으로 3간이고 대청을 넓게 하여 여름에 쓰기에 적당하게 하였으니 왼편으로 3간이다. 주방(廚房 :庖廚)과 욕실, 그리고 제기(祭器)를 넣어두는 곳 등이 각각 정한 곳이 있으며, 단청하고 담을 두르니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았다. 매양 시사(時祀)나 기제사 날을 당하면 공이 반드시 심의(深衣)를 입고 별당에 들어가 재계하여 공경과 정성을 다하였다.

무릇 제사하는 법이 모두 예경(禮經)을 따랐으며 명절에는 반드시 술자리를 마련하고 손을 맞이하여 혹은 시를 읊고 혹은 노래하여 향당(鄕黨)과의 즐거움을 흡족히 하였다.
만년에 선학(禪學)을 좋아하여 그 마음을 담박(淡泊)하고 고요하게 지녀 사물에 얽매이지 않으니 그 천성이 높고 또 밝아 명리(名利 : 51))를 벗어난 사람이었다. 중추부사(中樞府事) 박공(朴公) 연(堧)이 그 별당에 쌍청(雙淸)이라 편액을 걸어주고 또 시를 읊었으며 안평대군(安平大君)이 또 좇아서 이에 화답하였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옷깃을 여미고 말하기를 참으로 쌍청이란 뜻이 이러하구나. 백이(伯夷)는 성인(聖人) 중에서도 청백한 분이었는데 공은 그 백이의 풍(風)을 듣고 일어난 자인가! 대개 바람이란 귀로 듣고 달은 눈에 보이는 것인데 모두 사람들이 두 가지 물건의 맑은 것은 알면서도 내 한 마음속에 저것을 부러워하지 않을 만한 것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런즉 그것을 아는 자가 알지 못하는 자와 견줄 수 없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제 공이 선조를 받드는 공경심과 손과 즐기는 흥취를 보건대 그 스스로 즐거워하는 자취를 가히 알 수 있다. 그러나 호량(濠梁)위에서 물고기가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濠上觀魚之樂]52) 장자(莊子)는 물고기가 무엇을 즐거워하는지를 알지 못하였으며, 혜자(惠子) 또한 장자가 무엇을 즐거워하는지 알지 못했다. 내 어찌 감히 조금인들 엿볼 수 있으리오.

공의 아들 주부 계사(繼祀)가 내가 그 말속(末屬)에 있다 하여 졸렬한 글을 비루하게 여기지 않고 시문을 쓰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대강을 쓰노라. 정통 10년(세종 27: 1445) 가을 9월 보름에 봉훈랑53) 집현전54) 부교리55) 지제교56) 세자 우사경57)(奉訓郞 集賢殿 副敎理 知製敎 世子 右司經) 평양(平陽) 박팽년(朴彭年)은 기하다.

雙淸堂記(1)

天地間風月最淸人心之妙亦與之無異焉拘於形氣累於物慾於是焉能全其體者鮮矣盖烟雲四合天地陰 而淸風掃之明月當空上下洞澈無纖毫點綴其氣象固未易形容惟人之能全其心而無累者足以當之而自樂之故黃魯直嘗以此擬諸舂陵而邵康節亦有淸夜之吟歎知味者之少也盖今世亦有知其此樂者乎市津宋公本簪履之舊而不喜功名退居村野今三十餘年矣其縣曰忠淸之懷德里曰白達構祠堂於居第之東以奉先世置田數頃以供祭祀之需乃於祠東別立堂凡七間突其中以宜冬而右闢之者三豁其軒以宜夏而左闢之者三庖廚庖浴藏祭器各有所丹碧垣 華而不侈每時祀與忌日公必衣深衣入其堂以齋克敬克誠凡所致享皆遵禮經且値佳節必置酒邀賓或詩或歌以洽鄕黨之歡晩好禪學淡泊其心不以事物攖之盖其性高明而外乎聲利者也 中樞朴公堧扁其堂曰雙淸而詩之仍請於安平大君受其和余聞而斂曰有是哉雙淸之說也伯夷 聖之淸者也公其聞伯夷之風而興起者乎蓋風而耳得之月而目寓之人皆知二物之淸也而不知於吾一心有不羨乎彼者存焉然則安知其知之者之不與不知者比也今觀公奉先之敬娛

賓之興其自樂之趣可知已然濠上觀魚之樂莊子不知莊子不知之樂惠子亦不知余何敢窺其涯浚哉公之令胤主簿繼祀以余在末屬不鄙辭拙傳記之聞其說而書其槪云正統十年秋九月望奉訓郞集賢殿副校理知製敎世子右司經 平陽 朴彭年記

쌍청당기(2)

시진(市津 : 恩津) 송씨는 사족(士族)58)이다. 공이 약관의 나이도 되지 않은 때 처음 벼슬하여 몇 년 동안 조정에 있었으나 관직이 별로 올라가지 못하였다. 조금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회천(懷川)59)전원의 집[別墅]60)으로 물러와서 가택을 크게 수리하고 산 지 30년이 넘는다. 회덕 땅은 산이 높고 물이 깊으며, 흙이 비옥하므로 오곡을 심기에 적당하다. 때맞추어 김을 매고 수확하니 관혼상제(冠婚喪祭)에 씌어짐이 넉넉할 것이다. 그 동쪽 언덕에 별도로 몇 칸의 집을 지었는데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에 각각 거처할 수 있게 하였다. 담과 벽[塗墍]61)을 선명하게 단장하니 웅장하고 화려하다. 앞에는 버들과 느티나무, 뒤에는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었다. 화초와 볼만한 식물을 섬돌과 돌 사이에 섞어 심어 놓으니, 녹음과 향무(香霧)62)가 공몽(空濛)63)하고 엄애(掩靄)64)하도다. 정통 8년 계해(세종 25: 1443) 가을에 추부상공(樞府相公) 박연(朴堧)이 유성에 목욕하고 바람 쏘인 뒤 돌아가는 길에 여기에 들려 당을〈쌍청〉이라 이름 짓고 사언율시(四言律詩)를 지었는데 안평대군(安平大君)이 또 좇아 화답하였다. 갑자년(甲子年) 봄에 내가 선군(先君)의 상을 당하여 풍천(楓川)에 왔는데 공이 편지를 보내어 “상공은 유림의 위간(偉幹)이며 조정의 모범으로 소맷자락을 걷어 올리고 집의 현판을 써 주시고 대군(大君)은 궁중의 왕족이며 왕가의 귀인으로 초택(草澤)의 이름으로 상달함을 얻었으니 어찌 옹용(雍容)하고 온자(蘊藉)하다 하리오? 갱영(賡詠) 두 편은 규장(圭璋)이 찬란하여 산곡에까지 빛이 나니 오직 우리 한 집안 자손만이 영세(永世)의 보배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 한 고을의 산천초목에까지 솟구쳐 볼만하다 하겠으니 그대는 의(誼)로 사양하지 마시고 글을 지어 주시면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풍월은 천지간에 하나의 장구한 물체이다. 이제 봉연(蓬然)65)이 일어나서 취연(驟然)66)히 흩어져 하늘[太虛]67)에 돌아다니[周旋]68)고 우주[六合]69)에 헤쳐 나부끼어[披拂]70) 불면 초목이 쓰러지고 부딪히면 금석을 울리는 것은 바람이다. 그 오는 것이 진실로 때가 없으나 그러나 바람의 좋은 것을 말할 적에 반드시 봄을 들 수 있으니 그것은 온화하기 때문이다. 빙륜(冰輪)71)이 허공에 깨끗하며 계수나무 그림자[桂影]72)가 흔들려[婆娑]73) 동산 위에 떠서 북두성과 견우성 사이에 배회하니 물과 육지가 휘황 명랑하며 물상(物像)이 산란[凌亂]74)한 것은 달이다. 그 비침은 사시가 같으나 그러나 달의 밝음을 말할 적에 반드시 가을을 들 수 있으니 그것은 맑기 때문이다. 귀로 그 소리를 듣고 눈으로 빛을 봄은 하나의 바람과 하나의 달이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인심의 변함과 그 처지가 같지 아니함을 따름인즉 풍월을 하는 자 또한 다를 것이 다. 공이 이 당을 지을 적에 그 창을 성글게 하였으므로 바람이 와서 맑게 되기 쉽고 그 처마를 비게 하였으므로 달이 떠서 비치기가 쉬운 것이다. 혹 학창의(鶴氅衣)75)를 입고 혹 화양건(華陽巾)76)을 쓰고 오피궤(烏皮几)77)에 의지하고 흰 머리[素髮]78)를 풀고 있을 새 바람이 서늘[冷然]79)하게 좌우로 불어와서 나의 옷을 파고들어 나의 자리를 시원하게 하며 더운 기운[煩歊]80)을 잠깐 잊는 사이[暫遇]81)에 스쳐버리고 상쾌[爽塏]82)한 흥취[逸興]83)를 생각한 즉 비록 도연명(陶淵明)처럼 고상하게 은거[高臥]84)한 자라도 이보다 낫지 않을 것이다. 혹 귀한 손이 와서 머무르고 과객이 말[驂]을 멈추며 거문고와 바둑이 베풀어지고 술자리가 마련되어 잔을 들어 서로 권하니 운치가 더욱 맑아 나를 듯이 세상을 등지고 홀로 초월하여 허공에 올라[御氣]85) 산만[汗漫]86)하게 노는듯하여 만사는 부운(浮雲)과 같고 신세를 아득히 잊었으니 우주에 가득 찬바람이 나의 당에 불어 더욱 맑게 하고 우주를 밝게 하는 것은 달이 나의 마음을 비추어 더욱 맑게 하니 이것이 공이 스스로 안락한 곳[樂地]87)으로 한 것이고 상공(相公)88)이 당 이름을 지은 뜻이다. 천지가 생기면서부터 이러한 풍월이 있는데 풍월의 낙을 즐기는 자 또한 그 몇몇인지 알지 못하겠으나 혹 바람은 알되 달은 모르고, 달을 알되 바람을 모르는 자도 있다. 송옥(宋玉)89)이 풍부(風賦)를 지을 적에 바람이 큼을 극히 웅장하게 말하였으나 보름[三五]달이 밝은 빛을 말하는 데에는 미치지 못하였은즉 바람에만 전적으로 하고 달에는 빠졌으며 위무(魏武)90)의 영가(詠歌)에는 남으로 나는[南飛]91) 슬픔을 형용하였으나 바람[巽二]92)의 만물을 울리는 성대한 것을 알지 못함인즉 달에만 편중하고 바람에는 간략한 것이다. 소공(蘇公)93)의 적벽강(赤壁江) 놀음은 거의 [바람과 달] 두 가지의 취미를 겸하였다고 할 수 있으나 뱃놀이의 위험함[舟楫之危]94)이 당의 안전한 것만 못하고 학을 꿈꾸는 괴이함[夢鶴之怪]95)이 벗과 술자리의 즐거움이 있는 것만 하겠는가?

공이 낙으로 삼는 것은 오직 당세(當世)에 구하더라도 짝이 드물 뿐만 아니라 옛 사람에게도 또한 비교가 적을 것이다. 어찌 공이 젊었을 적에 벼슬[簪笏]96)을 버리고 산림[泉石]에서 수양[膏肓]97)하여 처신하기를 주고받는 것에 도의가 아니면 털끝만치라도 구차하지 않고 이 마을이 만물 위에 뛰어나서 티끌만큼이라도 더럽히지 아니함인즉 이것은 마음속의「쌍청」인 것이다. 노모가 당에 계시어 연세가 팔순에 가까워도 창안백발에 건강하시고 무량하시니 공이 아침저녁으로 뜻을 순종하여 봉양하되 노래자[萊衣]98)의 아롱진 옷과 순임금의 사모지정[舜慕]99)은 날이 부족하다고 여김인 즉 이것은 모자지간의‘쌍청’인 것이다. 공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 계사(繼祀)는 청렴하므로 등용되어 중외(中外)에 빛내[揚歷]100)어 의젓하게 공명으로 자허하고 다음 계중(繼中)은 훌륭한 무예[武幹]101)로 왕실을 호위[黑衣]102)하여 왕의 시신(侍臣)이 되어 대중에 뛰어났으니 이것은 형제간의 ‘쌍청’인 것이다. 대개 공의 한 집 맑은 덕이 두루 흘러 통철(通徹)103)하여 사이가 없은[無間] 즉 그 강상(綱常)과 윤리(倫理)의 아름다움에 어찌 더 중하지 아니하겠는가? 그 몸을 깨끗이 하고 세속을 초월하여 산곡에 은거하여 아침저녁으로 세상을 조롱하여 남은 광풍을 좇아 끝 빛을 우러러보고 스스로 풍월의 낙을 얻었다고 하는 자로 더불어 가히 해를 같이 하여 말을 하지 못할[不可同年而語]104) 것이다. 내가 학식이 거칠어 진실로 족히 성대히 아름다움을 발양(發揚)하지 못하니 지금에 지은 자 구름으로 옷을 짓고 추수(秋水)를 갈기는 것과 같음이 바로 이런 것이다. 공이 다른 데 빌리지 않고 나에게 구하니 어찌 인척의 연고와 서로 잘 아는 사이가 깊은 것인가? 문득 내 글을 바탕으로 하여 당대의 성작(盛作)을 구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므로 사양하지 않는다. 창룡(蒼龍)105) 병인(세종 28. 1446) 봄 3월 영산 김수온(永山 金守溫)은 기하노라.

雙淸堂記(2)

市津宋氏 士族也 至公年未冠 始筮仕遊朝 行數年 官不甚達 旣而退歸于懷川之別墅 大治第宅 餘三十年 懷之地 山高水深 土肥衍宜五穀 鋤耨以時 歲常稔穫 冠婚喪祭之用 裕如也 卽其東皐 別爲構屋爲楹凡若干 夏炎冬冷 各有攸處 塗墍丹雘 有輪有奐前柳楡後松竹 凡花卉植物之可玩者 亦且雜藝於階除庭戺之間 綠陰香霧空 掩靄 正統九年癸亥秋 樞府相公朴堧浴沂儒城 道經于此 遂以雙淸 名其堂 仍賦四言 安平大君 又從而和 甲子春 余丁先君憂來于楓川則公 致書曰相公 儒林之偉幹 朝著之儀形 而乃屈 賜之堂額 大君 紫雲英胄 朱邸天人 豈以草澤之名 得以上達而雍容穩藉 詠兩篇 圭璋燦爛 輝暎山谷 不惟吾一家子孫 永世之寶 盖將闔吾一邑山川草木之聳覩也 玆幸矣 子其文之而義無辭 余惟風月 天地間一長物也 今夫蓬然而起 驟然而散 周旋乎太虛 披拂乎六合 吹之而草木 偃 觸之而金石 鳴者 風也 其來也 固無時 然言風之好 必曰春者 以其和也 氷輪皎潔 桂影婆娑 出於東山之上 徘徊斗牛之間 川陸 爲之輝朗 物像 爲之凌亂者 月也 其照也 同乎四時 然言月之明 必曰秋者 以其淸也 是其耳得而爲聲 目寓而爲色 同一風而一月也 然隨人心之變 與其處之不同 則所以爲風月者 亦異 蓋公之制此堂也 疎其 故 風來而易爲淸 虛其 故 月出而易爲明 或被鶴或戴華陽 隱烏皮 散素髮 有風冷然 左右而至 侵我衣裳 凉我枕席 滌煩 於暫遇 懷爽塏之逸興 則雖淵明高臥者 亦無以過此矣 其或佳賓萃止 過客停 琴碁旣張 酒亦爵有 擧杯相屬 襟韻益淸 飄飄如遺世而獨立 御氣而遊汗漫 等萬事於浮雲 忘身世於渺然 則盈宇宙者 此風也而吹吾堂者益淸 明宇宙者 此月也而照黨堂者益淸 此公之所以自樂地者 而相公命名之意也 自有天地便有此風月而娛風月之樂者 亦不知其幾何 然或得於此而遺於彼 宋玉 作賦 極雄風之大 然不及三五揚明之說則專於風而失於月也 魏武詠歌 狀南飛之袞 然不知巽二鼓物之盛則偏於月而略於風也 蘇公赤壁之遊 庶幾兼二者之趣 然舟楫之危 不若堂陛之安夢鶴之怪 何有冊樽之樂則公之爲樂 不惟求之當世而罕儷 槪之古人 亦鮮其比矣 不寧惟是公 少謝簪笏 膏肓泉石 居常辭受取與之間 苟非道義 雖一毫而不苟 此心 超乎萬物之上 而不累一塵則是心迹之雙淸也 老母在堂 年俯八旬 蒼顔白髮 康强無恙 公 晨昏色養 萊衣舜慕惟日不足則是母子之雙淸也 公有二子 長曰繼祀 廉能致用 揚歷中外 岸然而功名自許 弟曰 繼中 英英武幹 補于黑衣 爲王侍坐 以特百夫則是昆季之雙淸也 盖公一家淸德 周流通徹 無間則其於綱常倫理之懿 豈不增重矣乎而 其與潔身高踏 枯槁山谷 嘲弄晨夕 追餘 仰末光自以爲得風月之樂者 不可同年而語矣 顧余學識荒落 固不足發揚盛美 當今作者如雲補荷裾而剪秋水皆是也 公 不寅於彼而求於余 豈以姻戚之故 相知之深歟 抑階吾文 以求當代之盛作也 是不讓云 蒼龍丙春三月永山金守溫記

처사 쌍청당 송공묘표

우리 공정 대왕(恭定大王)106)께서 다스리던 시대에 호서(湖西) 회덕에 숨은 군자가 있었으니 송유(宋愉)가 바로 그 분이다. 공(公)이 소년 때에 무(武)를 좋아하여 서울에 나그네 노릇을 하였으나 품계만 있고 실직이 없는 벼슬을 가졌었다. 뜻에 맞지 않아 드디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서 아름다운 덕[含章]107)을 가지고 스스로 곧은 지조를 지켜 일생을 마쳤다.

고을 사람들이 그 품위[風誼]108)를 높여 이름을 부르지 않고 항상 쌍청당(雙淸堂)이라고 호를 불렀다. 58세가 되던 정통(正統) 병인년(丙寅 : 세종 28, 1446))에 본집에서 하세하였다. 장지는 현의 남쪽 판교리 임좌(壬坐)의 자리에 있다. 그 뒤 200여 년이 되어 그의 7세손인 지평(持平) 준길(浚吉)이 일가 노인들의 청으로 유행(遺行)109)을 기록하여 나에게 편지로 부탁하여 말하기를「선조 쌍청공 산소에 전에 표각(表刻)이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 되어 다 마멸되어서 다시 해 세우려 하니 명을 써 주시오. 선생도 또 송씨의 미생(彌甥)110)이 되니 삼가 부탁합니다.」라고 하였다. 상헌(尙憲)이 감히 사양할 수 없어서 가장에 의하여 서술한다.


쌍청당 묘비

대전광역시 동구 판암동

공의 선조는 은진에서 나왔다. 대원(大原)이라는 분이 고려 때 판사(判事:判院事)가 되었다. 3세(三世)를 내려와서 명의(明誼)에 이르러 사헌부 집단(司憲府 執端)이 되었다. 공정한 재판과 곧은 지조로 포은(圃隱) 등 여러 현인들의 추중하는 바가 되었다. 이 어른의 아드님 극기(克己)는 진사다. 곧 공의 아버지가 된다. 어머니 안인(安人) 류씨는 고흥백(高興伯)111) 준(濬)의 따님이다.

공이 출생하여 네 살 때 진사공이 하세하였다. 안인의 부모가 일찍부터 홀로 된 것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그 뜻을 빼앗아 재혼시키려 하였다. 안인이 그 뜻을 알아차리고 아이를 안고 수백 리 길을 걸어가서 시부모에게 의지하여 지냈다. 이에 여자로서의 절개가 동사(彤史)112)에 실려 드러나게 되었다. 공이 이미 자라매 풍도가 호방하고 상쾌하여 이름이 동년배 위에 있었다. 그리고 집안에서의 행실이 순수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류부인이 아주 늙은 나이가 되어서도 건강하였다.

공이 기쁜 얼굴로 받들어서 양지(養志)와 양체(養體)의 봉양을 고루 하였다. 제사 때에는 반드시 재계하고 목욕하였다. 의례는 모두 옛 제도를 사용하였다. 공은 성품이 취사(取捨)하는데 신중하여 추호라도 구차스럽게 하지 않았다.

일찍이 당(堂)을 하나 짓고 안식처(安息處)로 사용하였으니 즉 이른바 쌍청당(雙淸堂)이다. 심의(深衣)를 입고 복건(幅巾 또는 巾)113)을 쓰고 분향하여 조용히 앉아서 세속의 일로 마음을 흔들리지 않았다. 오직 솔과 대가 주위에 푸르게 심어 있을 따름이었다.

취금헌 (醉琴軒) 박팽년(朴彭年)이 기문을 써서 찬미하였다. 당시의 명사들이 대부분 이에 대하여 수창(酬唱)114)한 시를 읊었다. 매양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술을 마련하고 손을 청하여 필연(筆硯)115)과 기삭(棋槊)116) 등으로 각각 즐기는 바에 따라 천진하고 가식이 없는 취미를 다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찬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공의 배위(配位) 안인(安人) 손씨(孫氏)는 훌륭한 부덕을 지녔다. 두 자제가 있었으니 장자 계사(繼祀)는 벼슬이 판관이고 증직이 지평(持平)이다. 차자 계중(繼中)은 벼슬이 사과(司果)다. 그로부터 10대를 내려오면서 세대가 더욱 번창(繁昌)하여 안팎 자손이 거의 만여 명이나 된다. 어진 신하와 바른 선비가 보첩(譜牒)117)에 실려 줄지어 늘어서 있으니 그 얼마나 성대한 일인가? 공이 몸소 쌓았던 은덕(隱德)과 음공(陰功)이 후대에 발현되는 것을 여기서 잘 알 수가 있다. 여러 종인(宗人)들이 합의하여 묘전을 마련하고 매년 시월 상순에 세일사를 지낸다. 아! 공의 뜻과 행실이 지난날 이 세상에 씌어졌다면, 한때의 공명(功名)을 세우고 작록(爵祿)을 누린 자들에 비해서 뒤처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구원(丘園)118)에 숨어119) 지내기를 좋아하여 아름다운 이름을 간직한 채 세상을 떠나 맑은 복을 누린 것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런 즉 지난날에 헌면(軒冕)120)과 조불(組紱)121)로 살다가 몸이 죽자 이름도 따라서 사라져 간 자들에게 비교하여 볼 때 어떻다고 하겠는가. 이것이 사람이 하는 것이지 하늘이 시키는 것이 아니다. 후대의 군들은 여기에서 경계(警戒)될 것이다. 이것으로 명(銘)을 삼는다. 청음 김상헌(金尙憲) 지음

處士雙淸堂宋公墓表

蓋當我 恭定大王之世湖西之懷德縣有隱君子宋公諱愉始公少年喜武事游京都有官階已而 意不樂遂棄歸其鄕含章自貞以終其身鄕人高其風誼不稱其名而稱其號曰雙淸堂年五十八正統丙寅卒于家葬縣南板橋里負壬之原後二百餘祠七代孫持平浚吉以宗人耆老之請狀其遺行抵書屬尙憲曰先祖雙淸公墓舊有表刻歲久磨漶今將改竪宜有銘也子亦宋氏之彌甥謹以爲託尙憲不敢辭按狀曰公之先出恩津有諱大原高麗時爲判事三傳至明誼爲司憲執端淸裁直操爲圃隱諸賢所推重生諱克己進士是爲公之考母曰安人柳氏高興伯濬之女公生四歲而進士公見背安人父母憐其早寡欲奪志安人知其意身抱兒行數百里往依舅姑終以女節彤史公旣長器度豪爽名出等輩上內行純備柳夫人大秩强康公怡愉承奉備志物之養祭祀必致齋潔儀文悉用古制性愼取予一毫不苟嘗構一堂爲燕處之所卽所謂雙淸者也深衣幅巾焚香靜坐不以俗事經心惟松靑竹翠環之而已朴公彭年作記以美之一時名勝多酬唱之詠每遇良辰美景治酌命賓筆硯棋槊各隨所好以極眞率之趣鄕人莫不艶稱公配安人孫氏甚有婦德生二子曰繼祀判官 贈持平曰繼中司果傳至十代世益蕃衍內外子孫殆萬餘人賢臣正士譜牒相望何其盛歟公之隱德陰功蓄於躬而發於後者可見於此也諸宗姓合議置墓田十月上旬歲一祭之鳴呼以公之志之行嚮用於世比一時立功名享爵祿者未必居後也顧乃好遯丘園寬樂令終享有淸福傳誦至今其視嚮之

주석

  • 44) 정침(正寢) : 집의 본채.
  • 45) 심의대대(深衣大帶) : 심의는 선비의 예복이요, 대대는 큰 허리띠임.
  • 46) 절사(節祀) : 명절에 지내는 제사.
  • 47) 점철(點綴) : 점을 찍은 듯이 여기 저기 이어져 있는 것. 구름은 흩어지고 달은 밝은데 누가 여기저기 점찍는가?(雲散月明誰點綴)[蘇軾 六月 二十日 夜渡海詞]
  • 48) 용릉(舂陵) : 중국 강서성(江西省) 도주(道州)의 별명. 송나라 주렴계(周濂溪)가 살던 곳. 황정 견(黃廷堅)[자는 노직(魯直), 호는 산곡(山谷)]이「주무숙(周茂叔 : 렴계의 자)의 흉중(胸中)이 상쾌하여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다」고 하였다.
  • 49) 소강절(邵康節) : 중국 북송의 유학자 소옹(邵雍)의 시호.
  • 50) 청야음(淸夜吟) : 맑은 밤에 읊음. 달은 하늘 중심에 떠 있고, 바람은 물 위에 불어오네. 다 같이 맑은 뜻이건만 생각하니 사람들이 아는 이 적구나(月到天心處 風來水面時 一般淸意味 料得少人知[邵康節 淸夜吟].
  • 51) 성리(聲利) : 평판(評判)과 이익(利益). 곧 명리(名利). 명예와 이익을 밖으로 하고 빈천을 싫어하지 않는다.(外聲利而不厭乎貧賤也[韓愈 宋已冊序].
  • 52) 호상관어지락(濠上觀魚之樂) : 호수(濠水) 위에서 물고기가 즐거워 함. 장자가 혜자와 함께 호수(濠水)에 있는 다리 위에서 놀고 있었다. 이 때 장자가“피라미가 나와 조용히 노네. 이것이야말로 저 구기의 즐거움이네.”라고 하자 혜자가 “자네가 물고기도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하였다. 이에 장자는 다시“그렇다면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으로 아는가?”(莊子與惠子 遊於濠梁之上 莊子曰?魚出遊從容 是魚樂也 惠子曰 子非魚 安知魚之樂乎 莊子曰 子非我 安知我不知魚之樂乎)[莊子 秋水]
  • 53) 봉훈랑(奉訓郞) : 조선조 대 종5품의 품계. 초기에는 문관에게만 주었으나 후에 종친에게도 주었다.
  • 54) 집현전(集賢殿) : 조선조 초기에 경적(經籍)·전고(典考)·진강(進講)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1420년(세종 2)에 종래의 집현전·수문전(修文殿)·보문각(普文閣)을 통합하여 집현전만 남기고 기구를 확장하여 새로 관제(官制)를 정하고 많은 학사(學士)를 두었다. 1456년(세조 2)에 사육신 사건에 관련되어 폐하였다가 1470년(성종 1)에 홍문관(弘文館)으로 바꾸었다.
  • 55) 부교리(副敎理) : 1401년(태종 1)에 교서관(校書館)에 둔 종6품 벼슬. 또는 그 벼슬에 있던 사람.
  • 56) 지제교(知製敎) : 조선조 때 임금이 반포하던 교서(敎書)의 글을 짓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 집현전이나 홍문관 등의 관원이 겸하는 경우와 6품 이상의 관원을 뽑아서 겸임시키는 경우가 있었는데 전자를 ‘내지제교’, 후자를 ‘외지제교’라 하였다.
  • 57) 세자 우사경(世子 右司經) : 고려 조선조 때 동궁(東宮)의 6품 벼슬.
  • 58) 사족(士族) : 문벌(門閥)이 좋은 집안, 또는 그 자손.
  • 59) 회천(懷川) : 회덕의 다른 이름.
  • 60) 별서(別墅) : 별택(別宅). 별장(別莊). 별업(別業). 서(墅)는 밭 가운데의 집. 유도와 함께 바둑을 두며 별서에서 내가 놀이를 한다.(與幼度 圍棋賭別墅).[晉書 謝安傳].
  • 61) 도기(塗墍) : 진흙으로 벽을 바르는 것.
  • 62) 향무(香霧) : 향기를 먹음은 안개. 봄 화원에 얕은 안개가 낀 것을 상징함. 박산에 향무가 흩어짐이 비비하니 팔장 끼고 고요히 싸리문을 닫고 있음이 무엇이 해로울까?(博山香霧産 袖手何妨靜掩扉)[陸遊 獨坐詩].
  • 63) 공몽(空濛) : 보슬비가 오고 침침한 모양. 수광은 잔잔하니 개인 것이 문득 좋고 산색은 침침하니 비 또한 기이하다.(水光 晴偏好 山色空 雨亦奇)[蘇軾 飮湖上初晴夜雨詩].
  • 64) 엄애(掩靄) : 가리어 숨김. 하늘에 있는 해를 가린다.(掩靄天日)[東京夢萃錄].
  • 65) 봉연(蓬然) : 바람이 불어 일어남. 뱀이 바람에 말하기를 이제 자네는 휘휘하고 북해에서 일어나 휘휘하면서 남해로 들어가네(蛇謂風曰今蓬蓬然起於北海 蓬蓬然入於南海)[莊子 秋水].
  • 66) 취연(驟然) : 별안간. 자네는 굳은 고로 작으니 별안간에 자취를 떠난다(自堅故微 驟然發跡)[剪燈餘話 武帝靈錄].
  • 67) 태허(太虛) : 우주의 대원기(大元氣). 우주가 처음 생긴 것. 하늘 공중.
  • 68) 주선(周旋) : 돌아다님. 진퇴에는 법도가 있어야 하고 주선하는 데에도 법칙이 있어야 한다. 몸가짐이 타인의 눈길을 끌고(進退可道 周旋可則 容止可觀)[左氏 襄 31].
  • 69) 육합(六合) : 천지와 사방. 육합 밖은 성인이 인정은 하면서도 논하지는 않고, 육합 안은 성인이 논하면서도 토의하지 않는다(六合之外 聖人存而不論 六合之內 聖人論而不議)[莊子 齊物論].
  • 70) 피불(披拂) : 헤쳐 나부끼는 것. 바람으로 인하여 흩어지고 바람 따라 나부낀다.(因風披拂 隨豊飄飄)[王褒 靑 髥奴文]
  • 71) 빙륜(冰輪) : 달의 딴 이름. 빙경(氷鏡). 야반에 노승이 손을 불러 일어나게 하니 설봉 빈 곳에 달이 솟아오르네(夜半老僧呼客起 雪峰缺處湧氷輪)[소식 숙구선산시].
  • 72) 계영(桂影) : 달의 그림자.
  • 73) 파사(婆娑) : 그림자가 흔들리는 것. 대나무 그림자가 흔들린다.(竹影婆娑)[圖繪寶鑑].
  • 74) 능란(凌亂) : 순서와 차례가 어지러운 것. 내가 노래하니 달은 배회하고 내가 춤을 추니 그림자가 어지러지도다(我歌月徘徊 我舞影凌亂)[李白 月下獨酌詩].
  • 75) 학창의(鶴氅衣) : 빛이 희고 소매가 넓고 가를 흑색으로 꾸민 웃옷. 화양건을 쓰고 학창의를 입고 궤에 의지하여 사무를 결재한다(載華陽巾 衣鶴 據 決事)[五代史 盧程傳].
  • 76) 화양건(華陽巾) : 도사(道士)가 쓰는 두건(頭巾). 공무가 끝난 여가에 학창의를 떨치고 화양건을 쓰고 손에 주역 한 권을 잡고(公退之 披鶴衣 載華陽巾 手執周易一卷)[王禹 黃州竹樓記].
  • 77) 오피궤(烏皮几) : 흑피(黑皮)로 된 안석. 금성관 서쪽에 일 생기는 것이 적은데 오피궤가 있으니 돌아가기를 생각하네(錦官城西生事微 烏皮几 在還思歸)[杜甫 將赴成都草堂進中有作先寄劉鄭公詩].
  • 78) 소발(素髮) : 흰 머리, 백발(白髮). 이 고을에 군수로 부임하면서부터 두 귀밑에 흰 털이 났네.(從守玆郡 兩 生素髮).[韋應物 元日寄諸弟詩].
  • 79) 냉연(冷然) : 시원한 모양. 열자는 바람을 타고 돌아다니며 시원하게 잘 지낸다(列子御風而行冷然善也)[莊子 逍遙遊].
  • 80) 번효(煩歊) : 번거로운 열기(熱氣).
  • 81) 잠우(暫遇) : 잠깐. 도로에서 잠깐 만나는 사람. 천백 년만에 한 번 서로 만났다(千百歲 乃一相遇焉)[韓愈 與于襄陽書].
  • 82) 상개(爽塏) : 고대의 토지(土地). 상개는 높고 밝은 곳이다(爽塏 高明也)[騈雅 釋 ].
  • 83) 일흥(逸興 ) : 세속을 떠난 풍류스러운 흥취.
  • 84) 고와(高臥) : 그 마음을 고상하게 가지며 세속을 잊어버리고 은거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지 아니함. 숨어 사니 벽라 옷의 정이요, 마음을 고상하게 하니 기강이 있는 행실이네(幽居蘿薛情高臥紀綱行)[劉長卿 題元錄事所居詩].
  • 85) 어기(御氣) : 바람을 탄다는 말. 공중을 헤치고 바람을 타고 번개처럼 달아난다(排空御氣奔如電)[白居易 長恨歌].
  • 86) 한만(汗漫) : 방랑하여 치밀함이 없음. 규방이 치밀하지 못하여 유사에게 탄핵이 드러났다(閨簿汗漫 爲有司露劾)[唐書 陳叔達傳].
  • 87) 낙지(樂地) : 안락한 땅. 요공의 안락한 땅이다(堯孔之樂地)[何承天 重答顔永嘉書]
  • 88) 상공(相公) : 난계를 가리킴.
  • 89) 송옥(宋玉) : 전국(戰國) 초(楚)나라 언인(鄢人) 굴원(屈原)의 제자. 스승이 방축(放逐) 당함을 고민하여 구변(九辨)·풍부(風賦)·신녀부(神女賦) 등을 지었다.
  • 90) 위무(魏武) : 조조(曹操)를 가리킴.
  • 91) 남비(南飛) : 위나라 무제(武帝) 조조(曹操)의 단가행(短歌行)의 내용을 말함. 달은 밝고 별은 드문드문한데 오작은 남으로 나는도다(月明星稀 烏鵲南飛)[魏武帝 短歌行]
  • 92) 손이(巽二) : 바람을 맡은 귀신. 주역 설괘(說卦)의「巽爲風」에서 기인함. 만일 눈을 맡은 귀신 등육(滕六)으로 하여금 눈을 내리게 한다면 손이(巽二)가 바람을 일어나게 한다[幽怪錄].
  • 93) 소공(蘇公) : 소동파(蘇東坡) 식(軾).
  • 94) 주즙지위(舟楫之危) : 뱃놀이의 위험스러움. 배를 띄워 적벽강 아래에서 놀고(泛舟遊於赤壁之下)[蘇軾 前赤壁賦]
  • 95) 몽학지괴(夢鶴之怪) : 학을 꿈꾸는 괴상함. 사방을 돌아보아도 고요한데 마침 외로운 학이 강을 비끼어 동으로 와서 운운. 손은 가고 나 역시 자는데 꿈에 한 도사가 우의로 훨훨 떨치고 임고의 아래로 지나다가 나에게 읍하고 말하기를“적벽강 놀음이 즐거우냐?”고 하였다(四顧寂寥 適有孤鶴 橫以東來 云云 客去予亦睡 夢一道士 羽衣翩僊 過臨皐之下 楫予而言曰赤壁之遊樂乎)[蘇軾 後赤壁賦].
  • 96) 잠홀(簪笏) : 관에 꽂는 비녀와 손에 쥐는 홀을 가리키니 곧 예복을 입은 벼슬아치를 말함.
  • 97) 고황(膏肓) : 고(膏)는 가슴 아래쪽, 황(肓)은 흉부와 복부와의 사이에 있는 얇은 막으로 고와 황의 사이는 치료하기 어렵다. 즉 사물의 구하기 어려운 병폐를 말한다.
  • 98) 내위(萊衣) : 노래자(老萊子)의 옷. 노래자는 초나라 사람으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항상 오색(五色)의 아롱진 옷을 입고 어린아이처럼 희롱하여 그 어버이를 기쁘게 하였다[史記 老萊子傳].
  • 99) 순모(舜慕) : 순임금이 어버이를 사모하는 마음. 대효는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하나니 50에 부모를 사모하는 이는 내가 대순에게서 보았노라(大孝 終身慕父母 五十而慕者 予於大舜 見之矣)[孟子 萬章].
  • 100) 양력(揚歷) : 과거의 사적을 밝히는 것. 어진 이를 우대하여 사적을 밝혀 명성을 오래 가도록하다(優賢揚歷 垂聲千載)[魏志 管寧傳].
  • 101) 무간(武幹) : 무예에 능숙함. 환이가 무예에 능숙하다(伊有武幹)[晉書 桓伊傳].
  • 102) 흑의(黑衣) : 흑색 옷. 왕궁을 호위하는 군사(軍士)가 흑의를 입으므로 왕궁위사(王宮衛士)를 흑의라 함. 원컨대 흑의의 수를 보충토록 하여 왕궁을 호위하도록 하시오(願令補黑衣之數以衛王宮)[戰國 趙策].
  • 103) 통철(通徹) : 막힘이 없는 통함. 주야로 암송하여 15일 만에 하나같이 다 막힘이 없이 통하였다(晝夜誦之 旬有五日 一皆通徹)[魏書 景穆十二王傳].
  • 104) 불가동년이어(不可同年而語) : 같이 말이 되지 않음. 양자(兩者)가 서로 막혀 있음을 비유한 것임. 시험하여 산동의 나라가 진섭과 함께 긴 것을 헤아리고 큰 것을 묶으며 권세를 비교하고 힘을 헤아린다면 가히 해를 같이하여 말하지 못할 것이다(試使山東之國與陳涉 度長契?大比權量力則不可同年而語矣)[賈誼 過秦論].
  • 105) 창룡(蒼龍) : 태세(太歲).
  • 106) 공정대왕(恭定大王) : 조선 태종(太宗)의 시호.
  • 107) 함장(含章) : 안으로 아름다움을 지니고 덕을 품는 것. 빛나는 것을 가져 곧게 할 것이다(含章可貞)[易 坤].
  • 108) 풍의(風誼) : 풍교(風敎)의 모범이 되는 행실. 풍의(風義). 평생 풍의는 사우를 겸했으니 감히 그대와 같이 침문에 곡을 못한다(平生風義兼師友 不敢同君哭寢門)[李商隱 哭劉賁詩].
  • 109) 유행(遺行) : 후세에 끼친 행실.
  • 110) 미생(彌甥) : 외손의 외손.
  • 111) 고흥백(高興伯) : 고흥(高興)은 전라남도 고흥군의 지명이며 백(伯)은 봉작(封爵)의 칭호로 조선시대 군(君)에 해당함.
  • 112) 동사(彤史) : 궁중생활을 맡은 여관(女官)이나 또는 그 생활을 뜻하는 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