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진송씨 상대세적

5. 은진송씨의 분파
221.158.221.★

은진송씨의 분파(分派)

1)지평공(持平公) 계사(繼祀)


지평공(持平公) 계사(繼祀) 묘역 안내석

대전광역시 동구 주산동

7대 지평공(持平公) 계사(繼祀)는 1407년(태종 7)에 쌍청당 유(愉)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벼슬은 상주판관(尙州判官)에 그쳤으나 1455년(세조 1)에는 주부(主簿) 벼슬로서 정란원종공신(靖亂原從功臣)157) 3등에 책록 되었으므로 사헌부 지평에 증직되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평공이 받은 녹훈이 가문에 전하지 않았다. 『덕은가승(德恩家乘)』에 보면

…지평조고(持平祖考)와 정[遙年] 조고(祖考)가 정란원종 3등 공신에 참여되었으나(족보), 녹권은 병란에 분실되었으므로 경향 고가에 반드시 소장된 곳도 있을 것이다. 특히 고가만이 아니라 미천한 집에도 또한 녹권을 보존한 자가 있을 터이니 힘써 수소문하면 가히 얻어 볼 수 있을 것이다.158)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런 일련의 기록으로 보아 녹권이 전하지 않음도 알 수 있다.

지평 계사가 상주판관(尙州判官)을 지냈을 때 치적(治績)이 높았다. 김수온(金守溫)이 쌍청당 기문을 쓰면서 그분에 대하여 언급하기를“청렴하고 유능하여 안팎으로 날려 공명을 기약한다.”고 지평공의 앞날을 내다보았으며, 박팽년의 기문에도“…스스로 말류(末流)라 하였고…”그의 장남 요년(遙年)이 상주목사가 되었을 때 함허정(涵虛亭) 홍귀달(洪貴達)은 송별하면서“상주 통판(通判)으로 백성에게 끼친 사랑이 있었으니 군의 혜택을 입은 상주 사람들이 지금 기뻐서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다. 용재(傭齋) 성현(成俔)은 또한 그 묘비문에서 그가 상주에서 치적이 있었음을 덧붙이고 있다. 그런데 지평공 계사가 언제 타계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456년(세조 1)에 정란원종공신(靖亂原從功臣) 3등에 녹권된 것으로 보면 49세 이상은 생존했던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지평공(持平公) 계사(繼祀) 묘역

대전광역시 동구 주산동

묘소는 대전광역시 동구 주산동의 옛 지명 회덕현 동 주산(懷德縣 東 注山) 술좌(戌座)의 언덕에 있다. 옛 표석은 다만 앞면에 각자(刻字)만 있는데 누구의 글씨인지 알 수가 없다. 세월이 오래 되어 글자가 지워지고 없어져 다시 묘갈을 세웠다. 1668(현종 9)년 7대손 시열(時烈)이 짓고, 6대손 준길(浚吉)이 쓰고, 8대손 동중추(同中樞)159) 기태(基泰)가 두전(頭篆)을 썼다. 이 비는 뒤에 1873년(고종 10) 떨어진 곳이 많아 13대손 정희(正熙)가 12대손 계무(啓懋) 영수(永洙)와 함께 고쳐 세우는 일을 하였다.

배위(配位)는 공인(恭人) 순천김씨(順天金氏)로 1407년(태종 7)에 태어났다.
증조 태영(台泳)은 병조판서를 추증 받았고, 할아버지 수(陲)는 벼슬이 총제(摠制)이며 아버지는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종흥(宗興)이고 큰아버지는 절재 김종서(節齋 金宗瑞) 장군이다. 족보에“맑은 덕과 아름다운 행실이 있다.”고 하였고, 동춘당 준길이 말하기를 “김씨가 맑은 덕이 있고, 시부모 받들기를 오직 삼가고 남편을 예로써 섬겼다.”고 하였다160).

『은진송씨보(恩津宋氏譜)』나 여타 문헌에 산재한 내용을 종합해 볼 때,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이름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부인은 어려서부터 현숙한 덕행이 있었다. 당대에 날리던 훌륭한 절재(節齋) 김종서(金宗瑞) 가문이 회덕의 은진송씨와 혼인이 맺어진 것은 집단공 명의의 절의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대 명문세족(名門世族)인 선외가(先外家) 회덕황씨의 후광과 그 집으로부터 분재를 받은 재력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 한다. 동갑인 지평 계사와 혼인 한 뒤에는 한결같이「여칙(女則)」161)에 따라 행동하였고, 시조모와 시부모 받드는 일에도 항상 조심성 있게 하였다.

부군 계사가 타계하자 집상을 하는데 슬픔을 다하였다. 큰 집안을 다스리면서 혼인을 할 때 다만 문벌만 가리고 부귀는 논하지 않았다. 천성이 엄숙하면서도 인자하며 집을 다스리는 데에 법도를 지켜 악착스럽게[規規] 하지 않아도 수만금의 재산을 쌓았다162). 그러면서도 결코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또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느 날 불교를 믿는 사람이 찾아와 부인에게 믿음을 권한 일이 있었다. 이 때 부인은“나에게는 다른 할 일이 전혀 없다. 다만 조상을 정성껏 섬기면서 우리 일가 중에서 외롭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아 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거절하였다.

1981년 대청호 담수이전에 문중어른들이 파악하고 있던 재산으로는 1) 동구 주산동 지평공 묘소 주변 30-50 정보 2) 동구 판암동 주변의 수십 정보 3) 동구 이사동 목사공 묘소 주변의 200여 정보 4) 사직공 계중 묘소와 정랑공 순년 묘소가 있는 경수(鏡水)와 사산(沙山) 일대의 수십 정보, 5) 송촌과 중리동 일대의 수십 정보와 유성 등에 있는 많은 산판 6) 주산동에서 정랑공 현손 추파 송기수가 10,000여 석을 했다는 이야기와 청풍공이 10,000여 석을 해서 노적가리가 마주보고 쌓여 있었다고 전해오는 이야기, 그리고 마산동의 동파공 여익의 묘소 주변의 산과 10,000여 석을 들고 있다[송성빈, 거주공간의 확보와 경제적 토대의 구축(송계사와 배위 순천김씨 부인)] 참조.

합설단(合設壇)

대전광역시 동구 주산동

그러면서 부인은 자만하지 않고 늘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마음가짐과 행동을 하였다.
더구나 친정의 큰아버지 김종서 장군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매 상심이 남보다 크겠지만, 조금도 근심하는 빛을 밖으로 보이지 않았다. 1501년(연산군 7)에 95세로 하세하니 부군의 묘소 좌측 유좌(酉坐)로 된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인 순천김씨 묘표는 강판서(姜判書) 혼(渾)이 짓고 어모장군(禦侮將軍)163) 박경(朴耕)이 썼다. 뒤에 세월이 오래되어 글씨가 떨어지고 없어져 거의 판독(判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에 당시 대종중 공사원(大宗中 公司員) 정순(廷淳)이 종원(宗員)들과 상의하고 1969년(己酉) 10월에 추기(追記)하여 비를 고쳐 세웠다.

지평공 세일사는 1645년(인조 23 : 乙酉)부터 매년 10월 상순에 지내기 시작하였다.

그 이전에는 1년에 4~5차례나 묘제(墓祭)를 지냈다고 한다164) 합설단(合設壇)은 1681년(숙종 7) 우암 문정공이 두 분의 묘소 사이에 두 개의 상석단(床石壇)을 한 곳에 설치하여 합향(合享)하도록 하였고, 취옹당 희명(醉翁堂 希命)이 동춘이 대작한 주산일가들에게 보낸 통문에서 매년 10월 초10일 예(禮)에 따라 제향을 올림에 제물은 풍비(豊備)함을 삼가고 정간(精簡)하게 하라고 일렀던 바, 당시 고문(告文)은 우암 시열이 지었다165). 세월이 오래되어 글씨가 떨어지고 없어져 거의 읽을 수가 없게 되어 다시 바꾸어 세웠다.

이때부터 대전광역시 동구 주산동 124번지에 묘소 아래 재사(齋舍)인〈주산병사(注山丙舍)〉를 두어 숙정(肅靜)히 제사를 받들어 왔는데 대청호 건설로 수몰되기에 이르러 1983년 4월부터 10개월간의 공사 끝에 주산동 산 9번지로 이건하였다166). 슬하에 상주목사(尙州牧使) 요년(遙年)과 예조정랑(禮曺正郞) 순년(順年)의 두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부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후손이 크게 번창하여 은진송씨의 대종을 이루었다.

지평공(持平公) 계사(繼祀) 묘비

대전광역시 동구 주산동

선조고지평부군묘표

우리 송씨가 판원사(判院事) 대원(大原)에서부터 저명하게 되었다. 아들 득주(得珠)와 손자 춘경(春卿)이 다 군수다. 영남에 또 한 파가 있는데 그 기록은‘原’은‘源’으로 하였고 자(字)는 천지(川至)고 벼슬은 은진군(恩津君)이라고 하였다. 또‘珠’는 ‘周’로 하였고 벼슬은 사인(舍人)이라고 하였다. 그 옳고 그른 것은 분명하지 않다. 증손 명의(明誼)는 벼슬이 집단(執端)이고 현손 극기(克己)는 진사다. 그 배위 절부(節婦)인 류씨가 쌍청공을 낳았으니 이름은 유(愉)다.

쌍청공이 조세(早世)하였으므로 그의 두 자제가 류씨를 받들어서 끝끝내 봉양하였다. 맏 자제가 곧 부군이니 이름은 계사(繼祀)고 벼슬은 판관(判官)에 머물렀다. 지평(持平)을 추증 받았다. 배위 김씨의 묘소는 왼쪽 언덕에 붙여 있다. 표지는 자못 상세히 되어 있다. 오직 부군의 묘표만은 전면의 대자인 면액(面額)만이 있으니 사적은 상고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개략은 알 수 있으니 즉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이 쌍청당 기문을 쓰고 인하여 부군에까지 언급하였으니 “청렴하고 유능하여 쓸모가 있으니 안팎으로 날려서 의젓이 공명을 스스로 기약한다.”고 하였고, 박선생(朴先生) 팽년(彭年)이 기문을 써서 또 스스로를“부군의 말류(末流)”라고 하였다.

장남 요년(遙年)이 상주 목사가 되었을 때 홍허백(洪虛白) 귀달(貴達)이 송별하면서 말하였다. “선군(先君)167)이 상주 통판(通判)168)으로 백성에게 끼친 사랑이 있어서 부임하는 것이 늦은 것을 걱정하고 있다.”고 하였다. 성용재(成慵齋) 현(俔)이 그 묘비 측면에 부군이 상주에서 치적이 있었다는 것을 덧붙였으니 징빙할 수 있는 바로서 믿을수 있다.

그러나 이에 그칠 따름이고 더 이상은 상세히 알 수 없으니 한탄할 일이다. 오직 자손이 번성하여 다 헬 수가 없고 쌍청공 묘갈에 대강 적었으니 여기에는 다시 적지 않겠다. 전의 묘표가 간략하고 또 닳아서 지금 다시 바꾸어 개략 이와 같이 적는다. 지금으로부터 부군이 출생한 영락(永樂)169) 정해(丁亥 : 1407)까지 262년이 되는 숭정(崇禎) 무신(戊申1668) 4월 초하루 기사에 7세손 시열은 적는다. 7대손 시열 지음

先祖考 持平府君 墓表

我宋著自判院事諱大原子得珠孫春卿皆知 郡事嶺南有一派其所記原作源而字川至官 恩津君珠作周而官舍人其是否未詳也曾孫 執端明誼玄孫進士克己其配節婦柳氏寔生雙淸公諱愉雙淸公早世其二子奉柳氏以終養長卽府君諱繼祀仕止判官贈持平配金氏墓 在左岡其表記頗詳惟府君表只有面額而已則其事行無由考焉然少可槪見者有焉金乖崖守溫記雙淸堂而因及府君曰廉能致用揚歷中外岸然以功名自許朴先生彭年之記亦自云府君末屬而長男遙年牧尙州時洪虛白貴達送之曰其先君通判尙州有遺愛尙之人沐浴先君之澤者莫不歡呼引領惟恐不疾其驅成慵齋俔銘其墓則亦推言府 君於尙有聲績所可稽徵者可謂信矣然亦止 此而已餘不可詳是可歡也惟子姓之繁殆不 可勝數略著於雙淸公墓碣此不復見舊表 就剝今易而新之而略記之如此今去府君 生年 永樂丁亥二百六十二歲爲 崇禎之著 雍涒灘也其四月朔日己巳七世孫時烈述
七代孫 時烈 撰

지평공(持平公) 계사(繼祀) 장명등

대전광역시 동구 주산동

지평공(持平公) 계사(繼祀)
배위(配位) 공인(恭人) 순천김씨(順天金氏) 장명등

대전광역시 동구 주산동

공인김씨 묘표

홍치(弘治) 신유 정월 기미에 사헌부지평(司憲府 持平) 송공(宋公) 계사(繼祀)의 부인 김씨가 병환으로 충청도 회덕현의 사제(私第)에서 서거하였다. 수가 95세다. 그의 장자 군자감정(軍資監正)170) 요년(遙年)의 서랑(壻郞)인 진원군(晉原君) 강공(姜公) 귀손(龜孫)이 부인의 여러 손자들로 더불어 장일(葬日)을 점쳐서 이해 3월 신유일(辛酉日)을 얻었고 장지를 점쳐서 회덕의 주산(注山)의 자리를 얻어서 예를 갖추어 장례를 지냈다.

묘소는 지평(持平)의 바로 좌측에 있다. 생각건대 부인이 계통은 순천(順天府)에서 나왔다. 증조 태영(台泳)은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추증 받았다. 조부 수(陲)는 벼슬이 총제(摠制)171)다. 부친 종흥(宗興)은 벼슬이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172)다. 모친 유씨는 부윤(府尹) 호(滸)의 따님이다. 다 벼슬을 높이 한 이름 있는 씨족으로서 현철한 따님을 낳아서 명문의 배필이 되었다.

부인이 어려서부터 현숙하고 덕행이 있었으며 출가하여서는 한결같이「여칙(女則)」에 따랐으며 시부모 받드는 데 조심성 있게 하였다. 지평이 타계하자 집상하는 데 그 슬픔을 다하였다. 혼인할 때는 다만 그 문벌만 가리고 부귀는 논하지 않았다. 천성이 엄숙하면서도 인자하며 집을 다스리는데 법도를 지켜 악착스럽게 하지 않아도 수만금의 재산을 쌓았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또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혹 누가 불교를 권하면 반드시 이렇게 말했다. “부인은 다른 일이 없다. 일가들 중에서 외롭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아주면 된다.”그렇게 하여 항상 미치지 못하는 것같이 하였다. 아들 형제가 있었으니 감정(監正)과 그의 계씨 순년(順年)이 다 문과(文科)173)에 급제하였다.

지평공(持平公) 계사(繼祀)
배위(配位) 공인(恭人) 순천김씨(順天金氏) 묘비

대전광역시 동구 주산동

계씨는 벼슬이 예조정랑(禮曹正郞)에 이르렀다. 다 먼저 하세하였다. 감정이 2남 1녀를 두었다.
장자 여림(汝霖)은 진사에 합격하여 고산현감(高山縣監)이 되었다. 곧 장사(葬事)의 주인공이다. 차자는 여집(汝楫)이다. 사위는 곧 진원공(晉原公)이니 현재 굉장한 재질과 돈후한 덕행으로 나라 일을 잘 경륜하고 도와서 육경(六卿)174) 중의 장(長)175)이다. 정랑(正郞) (지평공배위공인순천김씨 묘비 사진게재) 이 3남 2녀를 두었으니 장자 여해(汝諧)는 문과에 급제하여 중추부 도사(中樞府都事)176)가 되었고, 차자 여익(汝翼)은 진사고 셋째 여려(汝礪)는 생원이다.

장녀는 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 박계간(朴季幹)에게, 차녀는 사예(司禮)177) 정광필(鄭光弼)에게 출가하였다. 현감178)은 8남이 있으니 세훈(世勛), 세적(世勣), 세감(世勘)이다. 나머지는 다 어리다. 도사(都事)가 형제를 두었으니 세충(世忠)과 세량(世良)이다. 둘 다 진사이다.

그 밖에 안팎으로 증손과 현손이 총 40여 명이다. 다 자란 사람들은 다 과거하여 이름을날리고 나이 어린 사람들은 다 책읽기를 좋아하여 세업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이미 수도 하였고 또 부와 귀를 아울러 향유하여 어진 자손까지도 많으니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는 것을 여기에서 징험할 수 있구나. 장례가 끝나고 진원공(晉原公)인 내가 낭속(郞屬)179)으로 여기 있기 때문에 묘갈을 쓰라고 명령하니 사양할 수가 없어서 이와 같이 적어서 징험의 재료가 되도록 한다.
이조 정랑 강혼 지음

恭人金氏 墓表

維弘治辛酉正月己未司憲持平宋公諱繼祀之夫人金氏以疾卒于忠淸道懷德縣之私第享年九十五其長子軍資監正遙年之女壻晋原君姜公龜孫與夫人之諸孫卜葬日得是年三月辛酉卜地得懷之注山原以禮窆之兆在持平塋左謹按夫人系出順天府曾祖諱台泳贈兵曹判書祖諱陲摠制考曰宗興判典農寺事妣曰柳氏府君滸之女俱以簪纓顯族克生賢女以配名家夫人幼有淑德旣嬪循循然秉女則奉舅姑唯謹持平之歿執喪盡其哀議婚媾但擇門地不較富貴天性嚴恕居家 有法度雖不 産業而 財累鉅萬然不喜紛華又不喜浮屠法人有勸之者必曰婦人無外事惟 賑業宗族之孤窮者恒若不及有二子監正與其季順年俱捷文科季官至禮曺正郞皆先逝監正生二男一女長汝霖中進士爲高山縣監是主喪位次汝楫女壻卽晋原公方以宏材厚德彌綸輔弼爲六卿長正郞生三男二女長汝諧中文科爲中樞府都事次汝翼進士次汝礪生員女長適弘文校理朴季幹次適司藝鄭光弼縣監有八男曰世勛世勣世勘餘幼都事有男曰世忠世良皆進士其餘內外曾玄孫摠四十餘人其長者咸決科揚名幼者亦皆好讀書不怠以世其業旣壽而富且貴又多賢子孫天道福善信於是而可徵也旣襄事晋原公以渾爲郞屬也命誌其碣辭不獲而復之云
吏曺正郞 姜渾 撰

지평공(持平公) 계사(繼祀) 재실

대전광역시 동구 주산동

공인김씨 묘표추기

우는 우리 선조비 묘표인데 연산군 신유년에 세운 것으로 목계(木溪) 판중추(判中樞) 강공(姜公) 혼(渾)의 글이며 어모장군(禦侮將軍) 박공(朴公) 경(耕)의 글씨이다. 세월이 오래 되어 떨어지고 없어져 거의 읽을 수가 없다. 불초가 공사원 임무를 맡고 있으므로 여러 종원들과 상의하여 지금 바꾸어 새롭게 하였다.

아! 강공이 숨은 덕을 선양하였으니 족히 백세까지 가더라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어찌 감히 다시 너저분한 말을 하겠는가?
후 469년180)기유 10월 일에 고쳐 세우다.
16대손 정순 지음

恭人金氏 墓表追記

右我先祖 墓表燕山辛酉所竪而木溪判中樞姜公渾之文也禦侮將軍朴公耕之書也歲久剝 殆不可讀不肖忝叨公員之任與闔宗商議今將易新之噫姜公之揄揚潛德足以垂百世而不朽矣何敢復贅 後四百六十九年己酉十月 日 改竪 十六代孫 廷淳 撰

사직공(司直公) 계중(繼中) 묘역 안내석

대전광역시 동구 사성동

2) 사직공(司直公) 계중(繼中)

쌍청당의 작은 자제가 사직공(司直公) 계중(繼中)인데 무관(武官) 벼슬을 하여 정5품인 중군위 사직(中軍衛 司直) 벼슬을 하였는데 뛰어난 무(武)의 재능을 갖추어 임금을 모시는 시신(侍臣)이 될 사람의 모범이 되었다고 적혀 있다. 김수온은 쌍청당 기문에서 “사직공이 훌륭한 무예로써 왕실을 호위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음”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또한『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실려 있어 세상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입재(立齋) 송근수(宋近洙)가 그의 문집에서“사직공의 세대까지는 4백년의 간극이 있었는데 문헌이 전해지지 않아 생졸(生卒 즉 낳고 죽음)연대를 알 수 없다.”고 적고 있는 것처럼 자세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묘소는 처음 청주 주안면 사현 독산(淸州 周岸面 沙峴 獨山 : 현재 대전광역시 동구 사성동 독산)의 묘좌(卯坐)로 된 언덕에 모셔 있으며 배위 공인 안동권씨의 묘소는 그 뒤에 있다.

묘표는 방 후예(傍 後裔) 문헌공 근수(近洙)가 짓고, 방 후예 이조참의 종오(鍾五)가 써서 1897년(광무 1)에 세웠는데 비가 헐어 1949년에 다시 새기고 세워 16대손 병덕(秉德)이 추기(追記)하고 방 후예 내빈(乃彬)이 글씨를 썼다. 그 뒤 대청댐 건설로 인하여 묘역이 수몰되게 되어 묘소 뒤편으로 이장하고 1982년 그 사실을 기록한 작은 비석을 세웠는바, 음기(陰記)는 방 후예(傍 後裔) 정헌(廷憲)이 짓고 방 후예 진도(鎭道)가 썼다.

2013년 그의 15대손 동수(東洙)가 종원(宗員)들의 뜻을 좇아 이미 세워진 비문에 대한 오류를 정정하고 묘역 정화사업(淨化事業)에 대한 내용을 추가(追加)로 담은‘사직공부군묘표추기(司直公府君墓表追記)’를 새긴 비(碑)를 새로이 세웠다.

배위는 공인(恭人)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조선 초의 대유학자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아우 부제학(副提學) 매헌(梅軒) 우(遇)의 따님이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첫째는 사재감 주부(司宰監 主簿) 미년(眉年)이고 배위는 의인(宜人) 안동권씨(安東權氏))며 둘째는 장사랑(將仕郞) 호년(胡年)이고, 배위는 정읍이씨(井邑李氏)이다. 따님은 생원 홍상(洪湘)과 생원 정변(鄭忭)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이로써 우리 송씨에 이런 분이 계셨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이만하면 족할 것이다. 반드시 중첩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다만 비 전면에 액(額)을 써서 뒤에 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언덕이 공의 넉자 봉분이니 혹시나 밟아 뭉개지 않도록 함이 옳을 것이다.
주부공의 손자 세흠(世欽)은 학행으로 참봉을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세흠(世欽) 현손 시단(時端)은 우암 문정공에게 수학하였고, 증직이 참판이다. 장사랑공의 증손 의수(義壽)는 내금장(內禁將)183)으로서 임진왜란에 순절하였고, 예수(禮壽)는 사과(司果)로서 병자호란 때 전사하여 증직이 부정(副正)184)이다. 이분들이 가장 나타났으며 지금까지 15, 6대가 되는데 관례(冠禮)한 분이 거의 100여 인이다. 다 족보에 실려 있어 다시 여기에 기록하지 않는다.

사직공(司直公) 계중(繼中) 묘역

대전광역시 동구 사성동

지금 이 비를 세우는 공사가 사실은 여러 대를 걸쳐서 하지 못한 일인데 모두 분주하여 효력을 거두어 성사하기에 이르렀으니 아주 성대한 일이다. 시종 이 일을 주관한 사람은 14대손 흠태(欽台)이고 대강 전말(顚末)을 적어서 나에게 글을 청한 사람은 14대손 흠각(欽珏)과 15대손 광수(光洙)이다.
방 후예 입재 근수 지음

司直公繼中墓表

我宋之貫恩津者 皆出高麗判院事諱大原而五傳至雙淸堂諱愉始著顯爲東方氏族之望雙淸 堂第二子繼中以武筮仕爲司直墓在淸州周岸面沙峴卯坐原配恭人權氏墓在其後而尙無刻 今年丁酉諸雲仍始鳩功表其阡屬近洙識之今距公之四百餘年文獻無傳竝與生卒年月不能記況其他事行乎然尙有槪見者乖崖金公作雙淸堂記而曰公有二子次某英英武幹補于黑衣爲王侍臣以特百夫所可稽徵者如此揭之堂璧載之輿覽爲世所誦皆知吾宋之有公此已足矣何必疊架只題面額 後來人知斯邱之爲公四尺之封而毋或踐壤可也權氏籍安東副提學遇女有二子二女眉年官司宰監主簿胡年階將仕郞女適生員洪湘生員鄭 主簿公之孫世欽以學行除參奉不就其玄孫時端受業于尤庵文正公贈參判將仕郞公之曾孫義壽以內禁將殉于壬辰禮壽以司果戰歾于丙子贈副正其最著而至今十五六世勝冠者殆百餘人俱在譜乘竝不詳錄今此樹經之役實累世未遑之擧而莫不奔走效力克底于成事甚盛矣其終始尸之者十四代孫欽台也略其顚末來謁余文者十四代孫欽珏十五代孫光洙也
傍後裔 立齋 近洙 撰


사직공(司直公) 계중(繼中) 묘비

대전광역시 동구 사성동

묘표추기(1)

비를 세운 해가 고종 정유년(광무 1, 1897)으로 지금까지 겨우 반백년이 지났는데 석품(石品)이 좋지 못하여 세로와 가로가 떨어지고 갈라져 오래 전하지 못할 것 같다. 마음으로 항상 송구하여 다른 돌로 갈고자 하였으나 일은 크고 힘은 미약하여 우물쭈물 미루어 오다가 금년 봄에 와서 다행히도 제족들이 성의를 다하고 힘을 모아 드디어 새로운 돌로 바꾸어 원문과 전면 대자는 조금도 변동이 없이 옮기어 새겼다. 대개 이 일이 성사된 것은 실로 우리 숙부 도수(圖洙)씨가 시종 주선한 성의와 노력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 곧 부군의 15대손이 된다. 연수(衍洙), 관수(觀洙), 문수(文洙) 및 16대손 병성(秉成)이 각각 그 소임을 다하여 힘쓴 공이 또한 많았다. 16대손 병덕이 삼가 추기하고 방 후예 내빈(乃彬)이 쓰다. 정유년 후 53년 되는 기축년(1949) 5월에 다시 세우다.

墓表追記(1)

竪碑之歲 往在 高宗丁酉 距今 逾半百年矣 而石品不好 縱橫折裂 無以壽其傳 心常悚懼欲改以他石 事巨力綿 因循未就 至于今春 何幸諸族 彈誠竭力 遂易以新石 原文及前面大字 少無變動而移刻焉 蓋斯役也 克底于成事者 實由我叔父圖洙氏 終始周旋之誠力 卽府君十五代孫也 而衍洙觀洙文洙 十六代孫秉成 各盡其任 勤勞亦多矣

十六代孫 秉德謹追記 傍後裔 乃彬謹書
丁酉後 五十三年 己丑 五月 日 改立

묘표추기(2)

공의 휘는 계중이요 벼슬은 사직이니 영특한 무예로 일컬었다. 묘소는 원래 청주의 사현 독산(獨山) 묘좌로 된 언덕에 있었다. 배위는 공인 권씨니 조역 뒤에 부장(祔葬)하여 500여 년이 되었는데 하늘이 어찌 재해를 내리사 대청호에 담겨 물이 언덕을 넘고 골짜기를 덮어 영역이 물에 잠기니 그 후손들의 아프고 한이 되는 정이 어떠하겠는가?

임술년(壬戌, 1982) 봄에 옛 조역 뒤에 면례하고 아울러 옮겨 합장하였다. 옛적에 표석이 있었는데 송문헌공 근수(近洙)가 찬술하였다. 지금 작은 돌을 갖추고 나에게 천장(遷葬) 사실을 추급하여 기록하라 하였다. 공의 장남 주부공(主簿公) 미년(眉年)과 배위 의인(宜人)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조역도 또한 옛 조역 뒤 위쪽 묘좌(卯坐)로 된 자리에 면례하였다.
임술 2월 일 방 후손 송정헌 삼가 짓고, 방 후손 송진도는 삼가 쓰다

墓表追記(2)

公 諱 繼中 官司直 以英傑武稱 墓元在淸州 沙峴獨山卯坐原 配恭人安東權氏 兆祔後 五百餘 天何降割 以大淸湛水 陵谷懷襄 塋域浸水 其後孫 痛恨之情 當如何哉 壬戌春 緬奉于舊兆後 竝遷 焉 舊有表焉 宋文獻公近洙撰 今具小石 命余追識其遷葬事實云 公之長男 主簿眉年 及配宜人安東權氏 兆亦緬奉于舊兆後上 卯坐原 壬戌 二月 日 傍後孫 宋廷憲謹撰 傍後孫 宋鎭道謹書

사직공(司直公) 계중(繼中) 재실

대전광역시 동구 사성동

사직공부군묘표추기(司直公府君墓表追記)

府君께서는 雙淸堂府君의 二子 中 次子이시며 諱는 繼中이시고 벼슬은 朝鮮朝 中軍衛 司直이시다. 領中樞府事 乖崖 金守溫께서는 雙淸堂 記文에서 府君을 讚揚하기를“훌륭한 武藝로 大衆에 뛰어나 王室을 護衛하는 王의 侍臣185)이 되었다.”라고 記錄하고 있으며“輿地勝覽”186)에도 실려 있어 世上 사람들이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또한 左議政을 歷任하신 立齋 宋近洙 先祖께서는“우리 宋氏門中에 이런 분이 계셨다는 것을 다 알고 있으니 이만하면 足할 것이다. 반드시 重疊할 必要가 무엇이 있겠는가?”라고 府君의 碑文에 기록하고 있다. 餘文은 碑文에 記錄되어 있어 不盡錄187)한다.

府君의 山所位置는 碑文과 現位置가 相違하므로 後日의 證票로 여기에 略述하고자 한다.

府君께서 考終于侵188)하시어 묘소를 옛 地名‘淸州周岸面沙店里卯坐原에 配恭人安東權氏後坐’에 安葬하여 달라고 碑文에 表記되어 있으나 大淸湖 建設로 因하여 1978년 司直公 宗山인 大田廣域市東區沙城洞91번지 配 左 卯坐原에 緬禮하여 모셨다. 그 후 2003년도 子孫들이 合心하여 그 精誠으로 1,000m 距離의 山을 切土하는 大工事를 施工하여 墓道를 車輛이 往來할 수 있도록 新設하고 山所에 府君의 品階에 어울리는 石燈을 奠石하였다. 또한 墓域을 擴張하고 山所前景을‘府君의 靈魂께서 大淸湖의 푸른 물결을 내려보실 수 있도록’治山事業을 施行하고 그 來歷과 獻金한 子孫을 石刻하여 墓所 옆에 세웠다. 그리고 府君의 옛 子孫들께서 손에 못이 박히도록 直接 負役하여 齋室 10間이 府君의 山所 附近에 建築되어 있었으나 水沒危機에 處하게 되어 急히 본체만을 大田廣域市 東區 沙城洞105~3番地 司直公宗中土地에 移築하였으며 齋室 入口에서 右側에 管理人 居所를 新築하고 옛 懸板을 原文과 같이 考證에 의하여 復元製作하여 大門 위에 걸었다. 短文이나宗中의 勸告를 辭讓치 못하고 敢히 銘을 여기에 남긴다.

癸巳 西紀 2013年 月
府君의 15대손 東洙 謹記

지금까지의 세계를 도표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주석

  • 157) 원종공신(原從功臣)은 조선시대에 공신의 시상에 있어 각 등급의 주장이 되는 공신 이외에 작은 공이 있는 사람 즉 아들, 사위, 동생 등에게 주는 칭호이다. 여기서 계유정란공신이란 1453년(단종 1)에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기 위해 스스로 일으킨 난으로 이전부터 내려오던 원로신하들을 없애고 왕위에 오를 기반을 만들었다. 계유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계유정란이라 한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1년(병자 : 1456) 12월 29일조에 보면“…主簿 朴恭順, 宋繼祀…金儉松 등을 錄한다.”하고 敎書를 내리기를“功을 기록하고 賞을 주는 것은 나라의 아름다운 법이다. 내가 부족한 덕으로 외람되게 大位에 앉았는데, 潛邸에서의 어려운 때를 회고하니, 덕이 같은 신하들이 전후좌우에서 과인을 보호하였기 때문이다.…혹은 靖亂에 참여하여 방위에 힘쓰고 아래로 僕隷에 이르기까지 힘을 다하였으니, 모두 原從"의 공이 있어서 오늘의 아름다움에 이르렀으니…”라 기록되었다.
  • 158) 송정희(宋正熙) 편, 송창준(宋昌準) 역,「상주판관공 상참세조조 정란원종공신(尙州判官公 嘗參世祖朝 靖亂原從功臣)」, 『덕은가승(德恩家乘 1)』수권(首卷), 상습유(上拾遺)P. 154.
  • 159) 동중추(同中樞) :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준말.
  • 160) 송정희(宋正熙) 저 : 공인사실(恭人事實), 덕은가승 상(德恩家乘 上), 송씨가승 권지이(宋氏家乘 卷之二), 향지문화사 1998, P.686
  • 161) 여칙(女則) : 당나라 문덕장손황후(文德長孫皇后)가 지은 것으로 부인의 선행을 모아 기록한 10편.
  • 162) 악착하지 않아도 수만금을 쌓았다는 대목에 대하여 해석이 분분하다. 하지만, 남녀가 평등원칙에 따라 균등하게 재산을 분배 받은 지평공 대의 재산과 순천김씨 생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합쳐져 수만금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 163) 어모장군(禦侮將軍) : 조선조 무관계급의 하나. 정3품관으로 어모장군 이하는 당하관(堂下官)임.
  • 164) 1644년(인조 22)에 동춘당 준길이 대작한 취옹당 희명(醉翁堂 希命)이「주산 여러 일가들에게 보낸 통문」, 『은진송씨선적사(恩津宋氏先蹟史)』, 은진송씨대종중, 1990. 5. PP. 271-273.
  • 165) 같은 책.
  • 166) 주산병사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주산병사이건기」, 『은진송씨선적사』, 은진송씨대종중, 1990. 5. PP. 272-273을 참조할 것.
  • 167) 선군(先君) : 죽은 아버지를 가리킴.
  • 168) 통판(通判) : 대도호부(大都護府)의 판관(判官).
  • 169) 영락(永樂) : 명나라 성종(成宗)의 연호.
  • 170) 군자감정(軍資監正) : 군자감의 정3품 벼슬.
  • 171) 총제(摠制) : 삼군도총부(三軍都摠府)의 버금 벼슬.
  • 172)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 전농시의 종5품 벼슬.
  • 173) 문과(文科) : 지금의 고등고시.
  • 174) 육경(六卿) : 육조(六曹)의 판서(判書).
  • 175) 육조 중의 장 : 이조판서를 가리킴.
  • 176) 중추부 도사(中樞府 都事) : 종5품 벼슬.
  • 177) 사예(司禮) : 성균관의 정4품 벼슬.
  • 178) 현감 : 양근공(楊根公)을 말함.
  • 179) 낭속(郞屬) : 당하관(堂下官).
  • 180)‘후 469년 기유’는 순천김씨가 타계한 1501년(연산군 7)후 469년이 되는 1969년(己酉)을 말한다.
  • 181) 사재감(司宰監) : 궁중에서 쓰이는 생선, 고기, 소금, 연료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 182) 장사랑(將仕郞) : 종9품의 문관 품계.
  • 183) 내금장(內禁將) : 내금위(內禁衛)의 으뜸 벼슬로 종 2품.
  • 184) 부정(副正) : 종친부, 돈령부, 봉상시, 사복시, 군기시 및 그 밖의 여러 관아에 두었던 종3품벼슬.
  • 185) 시신(侍臣) :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
  • 186) 여지승람(輿地勝覽) : 옛 역사나 지리를 기록한 책 이름.
  • 187) 부진록(不盡錄) : 다 기록하지 않음.
  • 188) 고종우침(考終于寢) : 수명을 다하고 편안히 운명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