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강려애각

6. 형제의 우애가 남달랐던 목사공과 정랑공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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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의 우애가 남달랐던 목사공과 정랑공 형제

1) 목사공 요년(牧使公 遙年)

8세 요년(遙年)은 자가 기수(期叟)인데 1429년(세종 11)에 지평 계사(持平 繼祀)의 맏자제로 회덕 백달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마음이 넓고 뜻이 굳으며 독서를 좋아하면서 큰 뜻을 품었다.
1453년(단종 1)에 생원시(生員試)에 아우 순년(順年)과 나란히 합격하였지만 벼슬길에는 담박(澹泊)하여 오히려 학문만을 열심히 힘썼다.
하지만 어머니 순천김씨의 간곡한 명에 의해 비로소 통적(通籍)189)하여 1455년(세조 1)에 별좌(別坐)190)로서 정란원종공신(靖亂原從功臣) 3등으로 수록되었으나 녹권은 병화로 분실되었다191).

이후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을 거쳐 변정원 사의(辯定院 司議)로 승진하였을 때 부결(剖決)192)이 지극히 공정하고 빨랐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성심껏 복종하여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어 청주판관(淸州判官)에 부임 하여서는 피폐(疲弊)한 고을을 윤기 있게 다스렸는데 곧 상의 판관(尙衣 判官)을 제수 받았으나 부모가 연로하므로 군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여 면천군수(沔川郡守)가 되었고 다시 종친부 전첨(宗親府 典籤)으로 전임되었다.

1479년(성종 10) 51세 때에는 한산군수(韓山郡守)로서 문과 별시(文科別試)에 급제하여 특별히 사옹 정(司饔 正)을 제수 받았다. 그때 그의 사위[壻郞] 강귀손(姜龜孫)도 함께 합격하였다.
장인과 사위가 함께 합격한 것은 드문 일이므로 사람들은 모두 영화(榮華)롭게 생각하였다.
그 뒤 상주목사(尙州牧使)로 나갔는데 그의 선고(先考) 역시 일찍이 상주판관으로 치적이 좋아 칭찬이 자자했다.
그가 어렸을 때 부친을 따라간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 목사로 부임하여 고을에서 어머니를 봉양하니 고을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이어 제용감 정(濟用監 正)이 되었을 무렵 조선 8도에 흉년이 들었는데 특히 남쪽 지방이 더욱 심했다.


목사공(牧使公) 요년(遙年) 묘역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44호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조정에서 진휼사(賑恤使)를 파견하게 되자 청렴하고 근신하며 수완이 있는 사람을 보좌관으로 선발했는데 바로 그[遙年]가 제1착으로 뽑혔다.
현장에 이르러 진휼(賑恤)193)을 극진히 하여 그 혜택을 입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이어 홍주목사(洪州牧使)로 재직할 때는「인서(仁恕)」와「평이(平易)」를 신조(信條)로 삼고 교조(敎條)194)를 간략하게 하고 번잡하고 가혹한 것을 제거하매 고을 사람들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또 군청사가 너무 낮아 목사의 위엄이 깎임은 물론 관아가 좁고 퇴락하였으므로 크게 개축하여 면목을 일신하였다.
이 내용은 매계(梅溪) 조위(曺偉)의 기문(記文)에 실려 있는 사실로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실려 있다.
이어 예빈 정(禮賓 正)을 제수 받았는데 어머니의 연세가 80이 넘었기 때문에 고향에 돌아가서 봉양하고 싶은 뜻이 더욱 간절하였다.
그런데 선산부사(善山府使)를 제수 받았다가 변경하여 군자감 정 겸 교서관 판교(軍資監正 兼 校書館 判校)를 제수 받았다.
1498년(연산군 4)에 원자(元子)가 탄생(誕生)하였으므로 특사문을 휴대(携帶)하고 충청도로 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으니 임금께서 의약(醫藥)을 내려 위로하였다.
그가 퇴직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고향에 인접한 고을을 제수하려 했는데 그 다음해인 1499년(연산군 5) 9월 23일에 수가 71세로 타계하였다.

그는 조수(操守)195)가 굳고 확실하고 처사(處事)가 정민(精敏)하며 벼슬길에 이르러서는 맑고 근면하고 집안을 다스림에는 법도(法度)가 있었다.
모두 공보(公輔)196)의 그릇으로 기대하였는데 어머니의 봉양을 위한 효심으로 중앙관서(中央官署)를 사양하고 지방관(地方官)을 자원(自願)하여 봉공전전(奉公轉輾) 30여 성상(星霜)으로 일생을 마쳤으니 통석(痛惜)할 일이다.

묘소는 지금의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인 당시 공주 유성현 사한리(公州 儒城縣 沙寒里)건좌(乾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중앙에 있는 묘표는 대제학(大提學) 용재(慵齋) 성현(成俔)이 1499(연산군 5)년 11월 묘표(墓表)를 지어 비를 세웠으나 서자(書字)는 알 수 없다.
세월이 오래 되어 글자가 떨어지고 없어져 다른 돌에 옮겨 새겼다. 1732(영조 8)년 10월 8대손 집의(執義) 필항(必恒)이 추기(追記)를 짓고 9대손 증대사헌(贈大司憲) 문흠(文欽)이 팔분(八分)197)으로 썼다.

배위는 숙인 나주김씨 판관 양(壤)의 따님으로 1505년(연산 11) 7월 1일에 타계하였다. 묘소는 부군과 자리는 같고 광중(壙中)은 다르다.
슬하에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여림(汝霖)은 진사에 합격하여 고산현감을 거쳐 양근군수(楊根郡守)를 지냈고, 작은 자제 여집(汝楫)은 선무랑(宣務郞)이며 따님은 판서(判書) 진원군(晉原君) 강귀손(姜龜孫)에게 출가하였다.
여림(汝霖)은 좌의정 김국광(金國光)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9남을 두었는데 군수로 승지에 증직된 세훈(世勛), 세적(世勣), 생원 세감(世勘), 통정대부 세근(世勤), 집의에 증직된 세면(世勉), 첨사 세욱(世勖), 군수 세경(世勁), 주부공파 미년(眉年)의 둘째아들 여화(汝和)에게로 양자를 간 승중(承重), 군수 세협(世協)이다. 여집(汝楫)이 종실(宗室) 아림군(娥林君) 정(禎)의 따님과 혼인하여 2남을 두었는데 승사랑으로 승지에 증직된 세영(世英)과 판관 세웅(世雄)이다.


희건(希建)의 재실(齋室)인 월송재(月松齋)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3호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목사공(牧使公) 요년(遙年)의 묘소가 이곳에 자리하면서 상하 사라니(이사동) 지역은 그의 자손들이 죽어서 묻히는 역사가 반복되면서 은진송씨의 특별한 성역(聖域)이 되었음은 몰론 510년간 유교사회(儒敎社會)가 이루어온 은진송씨의 집성촌(集姓村), 집장촌(集葬村)이 되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윗사라니에 자리한 그의 묘소 일대와 아래사라니 지역에는 1,077기(基)의 분묘가 계장(繼葬)되어 있으며 제반(諸般) 석물(石物)로 치장(治粧)되고 있다.

비석(碑石)에는 당시 유교문화(儒敎文化)를 선도(先導)하였던 유명인사(有名人士)들이 비문(碑文)을 지었고, 당대 명필(名筆)들이 비문을 썼기 때문에 금석학연구(金石學硏究)와 장묘문화연구(葬墓文化硏究)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것을 방증(傍證)하듯 1992년 7월 22일에는 그의 현손인 삼가공파 안동공 희건(希建) 재실인 월송재(月松齋)가 대전시문화재자료 제31호로 지정되었고, 같은 해(1992년) 10월 28일에는 삼가공파 승지공 국보(國輔)와 좌윤공 규망의 재실(齋室)인 추원재(追遠齋)가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3호로 지정된 바 있다.
이후 다시 2012년 4월 27일에는 그 자신이 묻혀 있는 목사공 묘역(墓域)과 위 사라니에 자리한 그의 증손들인 임천공(林川公) 응서(應瑞)의 묘역(墓域), 그리고 아래 사라니에 자리한 송담공(松潭公) 남수(枏壽)의 묘역이 각각 대전광역시기념물 제44, 45, 46호로 지정되었다.

공의 효성과 적덕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공은 어려서부터 어질고 효성스러운 품성을 지니고 있어 하늘마저 감동하여서인지 어머니 공인 김씨가 일구어 놓은 재산이 나이가 들면서 순조롭게 불어나 학의 둥우리처럼 자꾸 쌓였다.
그러나 천성이 어질고 인색하지 않아 그 재산을 쌓았다가 남들에게 흩어 주었다. 멀리 호남지방과 내포(內浦)로부터 가까이는 이웃 고을까지 쌀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날로 길을 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점필제 김종직이 회덕에서 지낼 적에 길에서 곡식 짐 백여 바리를 만났다고 한다. 점필재가 그들에게 물었더니 “송 아무개 댁에서 얻어오는 것입니다.”고 하였다.

그래서 김 선생은 ‘이는 필시 송 아무개가 백성을 상대로 장리[이자를 받기 위해 놓는 것]하는 것이 분명하구나!’ 하고 의심을 하였는데 겨우 고개를 하나 넘어가서 또 백여 바리를 만났다.
그래서 그들에게 묻기를 “호남은 어찌 곡식이 없어 먼 이곳까지 와서 쌀을 팔아 가는가?” 하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쌀을 팔아가는 것이 아니라 얻어가는 것입니다.
비록 갚지 않더라도 달라 하지 않고 다시 청구하면 이유를 묻지 않고 줍니다. 호남에 어찌 송상주(宋尙州 : 상주목사를 지냈기 때문에 그렇게 부름) 같은 인심이 있겠습니까?” 하니 그 어질음에 깊이 감탄했다.


목사공(牧使公) 요년(遙年) 장명등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목사공(牧使公) 요년(遙年) 묘비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뒷날 5대손 계담(桂潭)198)이 지사(地師) 김두천(金斗千)에게 목사공이 재산을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일을 말했더니 김두천이 “우리 증조 이상이 서천 땅에서 살았는데 당신 선조의 곡식을 수백 석이나 먹었습니다.

덕을 쌓으신 것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살아서는 영화와 부귀를 누리시고 돌아가셔서는 좋은 곳에 모셔져 자손이 번창하게 되었습니다.”고 하였다고 한다.
—『계담가승(桂潭家乘)』에서

통훈대부 군자감정 겸 교서관판교 송공묘표

공의 휘는 요년(遙年)이고 자는 기수(期叟)이며 은진현(恩津縣) 사람이다.
고조 명의(明誼)는 글을 잘하여 정포은(鄭圃隱)199)과 더불어 이름을 같이 하였다.
벼슬은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증조 극기(克己)는 진사에 올랐고, 조부 유(愉)는 문달(聞達)200)을 구하지 않고 회덕 고을에 살며 호를 쌍청당(雙淸堂)이라 하고 거문고와 서적을 가지고 스스로 즐겼다.

부친 계사(繼祀)는 벼슬이 지평(持平)에 이르렀으며 판사 김종흥(金宗興)의 따님에게 장가를 들어 공을 낳았다. 공이 도량[器量]이 크고 굳세었으며 글 읽기를 좋아하여 큰 뜻을 품었다.
경태(景泰) 계유(癸酉)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학업에 전념하여 여러 번 문과에 응시했으나 실패하였다.
모부인이 그대로 벼슬을 하도록 타일렀기 때문에 의금부 도사(義禁府 都事)201)를 제수 받았고, 이어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202)을 제수 받고 변정원 사의로 승진하였다.
판결[判決]을 귀신 같이 밝게 하니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다.

청주판관(淸州判官)이 되었을 때 고을이 대단히 피폐[疲弊]하여 있었다.
공이 이 직책에 뽑혔는데 가장 이름이 났다.
상의(尙衣) 판관을 제수 받았으나 부모가 연로하므로 군으로 나가기를 원하여 면천군수(沔川郡守)가 되었고, 종친부 전첨(宗親府 典籤)으로 전임되었다.

성화 기해(己亥)년 문과별시에 합격하여 특별하게 사옹 정(司饔 正)을 제수 받았다.
그때 서랑(壻郞) 강군[姜龜孫]도 또한 같이 합격하였다.
장인과 사위가 함께 급제한 것은 옛날에도 드문 일이므로 사람들이 모두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하였다.
상주목사(尙州牧使)로 나갔는데 공의 부친도 일찍이 상주판관(尙州判官)이 되어 치적(治績)이 좋아 이름이 있었다.

공이 어렸을 때 따라간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 목사로 부임하여 고을에서 모부인을 봉양하니 고을 사람들이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제용 정(濟用 正)이 되었을 때 팔도에 흉년이 들었는데 남방이 더욱 심했다. 조정에서 진휼사(賑恤使)를 파견하게 되자, 청렴하고 근신하며 수완이 있는 자를 보좌관으로 선발하였는데 공이 제일 먼저 선발되었다.
성심껏 진휼하여 살린 사람이 매우 많았다. 홍주목사로 나가서도 두루 인화(仁化)를 이루었다. 예빈 정(禮賓 正)을 제수 받았는데 모부인이 연세가 80세가 넘었기 때문에 공이 돌아가서 봉양하고 싶은 뜻이 더욱 간절하였다.

그런데 선산부사(善山府使)를 제수 받았다가 변경하여 군자감 정 겸 교서관 판교(軍資監 正 兼 校書館 判校)를 제수 받았다.
홍치(弘治) 무오에 원자(元子)가 탄생하여 공이 특사문(特赦文)을 가지고 충청도로가다가 말에서 떨어져 상하여 병이 나니 상감께서 의약을 내려 보내 치료하도록 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더욱 간절히 원했으나 상감께서 인근 읍의 수령을 제수하도록 명령하였는데 직첩을 받기 전인 다음 해 9월 23일에 병으로 하세하니 수(壽)는 71세였다.

공의 마음가짐이 굳고 확실하며 일 처리가 정밀하고 민첩하였으며, 벼슬에 있을 때에도 청렴하고 근신하였다.
집을 다스리는 데에는 법도가 있었으며, 친척과 동료를 대할때는 항상 신의로써 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재상의 재목으로 기대하였다.
부모 관계로 외직에 있기를 무려 30여 년을 하였다. 비록 이르는 곳마다 칭찬이 높았으나 끌고 어정거리다가 포부를 크게 펴지 못하였고 직위가 덕에 부합하지 못하였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판관 김양(金壤)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여림(汝霖)은 진사에 합격하여 고산현감을 지냈고, 차남 여집(汝楫)은 선무랑(宣務郞)이다.


목사공(牧使公) 요년(遙年) 재실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따님은 판서(判書) 진원군(晉原君) 강귀손(姜龜孫)에게 출가하였다. 여림은 좌의정(左議政) 김국광(金國光)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7남을 두었는데, 세훈(世勛), 세적(世勣), 세감(世勘)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여집(汝楫)이 종실(宗室) 아림군(娥林君) 정(禎)의 따님과 혼인하여 2남을 두었는데 세영(世英)이며 하나는 어리다. 내가 판서로 함께 경악(經幄 : 經筵)에 있었고, 또 통가(通家)203)의 의도 있어서 공의 사람됨을 자상히 알고 있기 때문에 대강 그 사적(事蹟)을 서술하여 쓴다.
정헌대부지중추부사겸동지 경연사예문관제학홍문관제학 성현 지음

通訓大夫 軍資監正 兼 校書館判校 宋公墓表

公 諱遙年字期 恩津縣人高祖明誼能文輿鄭圃隱齊名官至持平曾祖克己登進士祖愉不求 聞達居懷德鄕號雙淸堂以琴書自娛考繼祀官至持平娶判事金宗興之女生公器度弘毅好讀書有大志景泰癸酉中生員試專心於學累擧不中母夫人篤令筮仕受義禁府都事拜司憲府監察陞辨定院司議剖決如神人無怨尤除淸州判官時州甚彫弊選任是職意以最聞拜尙衣判官以老親乞郡守沔川拜宗親府典籤成化己亥中文科別試特拜司饔正時贅郞姜君亦與選翁壻同榜前昔所罕人皆榮之出牧尙州公之皇考曾爲州倅有聲績公少時從而往至是爲牧伯以州奉養母夫人州人無不感歎拜濟用正時八道凶歉南方尤甚朝廷遣賑恤使其僚佐皆擇廉謹有幹局者首庸是選誠心賙救所活甚衆出牧洪州仁和周洽拜禮賓正母夫人年踰八十公歸養之志益切除善山府使遞拜軍資監正兼校書館判校弘治戊午 元子誕生公賚赦文往忠淸道墮馬傷病上賜醫藥救之乞退彌懇 上命授旁邑守令未受職翌年九月二十三日以疾卒享年七十一公執心堅確 處事精敏居官淸謹治家有法待親戚僚友以信人皆以公輔期之以親之故補外凡三十有餘年 雖所至聲譽藉甚而遷延蹭不能大厥所施位不副德哀哉公娶判官金壤女生二男一女男長汝霖中進士爲高山縣監次汝楫宣務郞女適判書晋原君姜龜孫汝霖娶左議政金國光女生七男曰世勛世勣世勘餘幼汝楫娶宗室娥林君禎女生二男曰世英餘幼余與判書同在經幄亦有通家之舊備知公之爲人略敍其蹟而書之
正憲大夫知中樞府事兼同知筵事藝文館提學弘文館提學 成俔 撰

묘표추기

우(右)는 용재(慵齋) 성공(成公)이 찬술한 구표(舊表)인데 세월이 오래되어 글씨가 떨어지고 없어져 자못 다시 읽어보지 못하게 되었다.
모든 자손들이 오래 전하지 못할까 염려하므로 다른 돌에 옮겨 새기고 자손 중 미처 실리지 못한 자를 추급하여 기록한다. 현감 여림(汝霖)은 군수에 그쳤고, 증직은 통례(通禮)이다.

남(男) 세훈(世勛)은 군수로 증직이 승지이다.
세감(世勘)은 생원이다.
어린아이(위 비문에서 이름을 쓰지 않고 어리다고만 하였으므로 이렇게 표현한 것임)였던 세근(世勤)은 통정이다.
세면(世勉)은 증직이 집의(執義)이다.
세욱(世勖)은 첨사(僉使)이다.
세경(世勁)은 군수이다.
또 2남을 두었는데, 승중(承重)과 세협(世協)으로, 세협(世協)은 군수이다.

선무(宣務) 여집(汝楫)의 남(男) 세영(世英)은 승사랑(承仕郞)으로 증직이 승지(承旨)이다.
그 어린 아이였던 세웅(世雄)은 판관(判官)이다.
사위(목사공)의 진원(晋原)204)은 후에 우의정이 되었으며, 아들 강태수(姜台壽)는 부사(府使)이다.
세훈(世勛)의 남(男) 남수(枏壽)는 군수로 품계가 가의(嘉義)이다.
계수(桂壽)는 현감(縣監)이다.
백수(柏壽)는 장사랑(將仕郞)이다.
화수(樺壽)는 증 참판(贈 參判)이다.
세적(世勣)의 남(男)은 형(珩), 감(瑊), 인(璘), 관(瓘), 기(琦)인데 기(琦)는 주부(主簿)
로 증직(贈職)이 참의(參議)다.
세감(世勘)의 남(男)은 완(琬)과 종(琮)이다.
세근(世勤)의 남은 침(琛)과 선(璿)인데 선(璿)은 군수(郡守)이다.
세면(世勉)의 남은 호(瑚), 연(璉), 숙(琡), 영(玲)인데 영(玲)은 증직(贈職)이 승지(承旨)다.
세욱(世勖)의 남, 정(珽)은 부사직(副司直)이고 수(璲)는 인의(引義)205)로 증직(贈職)이 참의(參議)다.
승중(承重)의 남은 구(球)와 박(珀)인데, 박(珀)은 선교랑(宣敎郞)이다.
세협(世協)은 박(珀)으로 후사(後嗣)를 삼았다.
세영(世英)의 남, 응상(應祥)은 별제(別提)206)이고 응서(應瑞)는 군수(郡守)로 증직(贈職)이 참판(參判)이다.
세웅(世雄)의 남 응생(應生)은 첨지(僉知)이며 응수(應秀)는 군수(郡守)이다.
세경(世勁)은 서자(庶子)만 있다.
남수(枏壽)의 남 희원(希遠)은 학유(學諭)207)로 증직(贈職)이 참판(參判)이며 희건(希建)은 판관(判官)이다.
희진(希進)은 장령(掌令)으로 증직(贈職)이 도승지(都承旨)다.
계수(桂壽)는 희건(希建)을 후사(後嗣)로 삼았다.
백수(柏壽)의 남은 희록(希祿)이다.
화수(樺壽)의 남 희득(希得)은 진사(進士)이며 희명(希命)은 동지(同知)이다.
인(璘)의 남은 희창(希昌), 희상(希祥)이며 가운데 남 희소(希紹)는 형(珩)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관(瓘)의 남은 희복(希福), 희길(希吉)이다.
기(琦)의 남은 희순(希醇), 희철(希哲), 희달(希達)이다.
연(璉)의 남은 흥문(興門)이다.
영(玲)의 남은 몽인(夢寅)인데 증직(贈職)이 참판(參判)이다.
정(珽)의 남은 인창(仁昌), 의창(義昌)이다.
수(璲)의 남 석창(錫昌)은 선교랑이고 철창(哲昌), 영창(永昌), 사창(祠昌)인데 사창(祠昌)은 선(璿)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구(球)의 남은 국남(國男)이다.
박(珀)의 남 희경(希慶)은 주부(主簿)이다.
응상(應祥)의 남 문창(文昌)과 계창(啓昌)은 다 진사(進士)이다.
응서(應瑞)의 남 이창(爾昌)은 군수(郡守)로 증직(贈職)이 판서(判書)이다.
응생(應生)의 남 하창(賀昌)은 참봉(參奉)이다.
응수(應秀)의 남은 경창(慶昌)이다.
감(瑊), 완(琬), 숙(琡)은 손(孫)이 없다.
종(琮), 침(琛), 호(瑚)는 서자(庶子)만 있다.
내외 자손이 거의 만(萬)을 헤아릴 수 있어 다 싣지 못한다. 그 중 가장 저명한 자는 이창(爾昌)의 남 준길(浚吉)인데 유일(遺逸)208)로 부름을 받아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증직은 영의정이다.
몽인(夢寅)의 남 국택(國澤)은 부윤(府尹)으로 증직(贈職)이 찬성(贊成)이다.

희원(希遠)의 손자 규렴(奎濂)은 좌참찬(左參贊)으로 증직(贈職)이 찬성(贊成)이다.
규렴(奎濂)의 남 상기(相琦)는 이조판서(吏曹判書) 대제학(大提學)이다.
아! 부군은 훌륭한 재능과 높은 명망이 있으면서도 포부를 크게 펴지 못하고 그 숨은 덕과 공(功)이 족히 후세에 발육(發育)함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손이 번성하고 벼슬이 서로 이어지는 것이거늘, 하물며 오직 우리 명성왕후(明聖王后)209)와 인현왕후(仁顯王后)210)께서 다 부군 외손의 계통인즉 영지(靈芝)와 예천(醴泉)이 그 근본과 근원이 내려옴이 있다는 것을 징험(徵驗)할 수 있다.
부군 고조의 관직이 보첩에는 다 집단으로 되어 있는데 구표(舊表)에는 벼슬이 지평에 이르렀다고 하니 누가 옳은 것인지 자상치 못하므로 오직 기문에 부쳐 의문을 제기하노라.
8대손 통훈대부 행 사헌부 집의 지제교 필항(必恒)은 기(記)하노라.

墓表追記

右 齋成公所撰舊表歲久漫 殆不可復讀諸子孫大懼無以壽其傳移刻他石追記子孫之未及 載者縣監後止郡守贈通禮男世勛郡守贈承旨世勘生員其幼者世勤通政世勉贈執義世 僉使 世勁郡守又生二男曰承重世協郡守宣務男世英承仕郞贈承旨其幼者世雄判官晋原後爲右議政男姜台壽府使世勛男 壽郡守階嘉義桂壽縣監柏壽將仕郞樺壽贈參判世勣男珩 璘瓘 琦主簿贈參議世勘男琬琮世勤男琛璿郡守世勉男瑚璉琡玲贈承旨世勖男珽副司直璲引儀 贈參議承重男球珀宣務郞世協以珀爲后世英男應祥別提應瑞郡守贈參判世雄男應生僉知 應秀郡守世勁有庶子枏壽男希遠學諭贈參判希建判官希進掌令贈都承旨桂壽以希建爲后 柏壽男希祿樺壽男希得進士希命同知璘男希昌希祥中男希紹爲珩后瓘男希福希吉琦男希醇希哲希達璉男興門玲男夢寅贈參判珽男仁昌義昌璲男錫昌宣務郞哲昌永昌嗣昌爲璿后球男國男珀男希慶主簿應祥男文昌啓昌皆進士應瑞男爾昌郡守贈判書應生男賀昌參奉應秀男慶昌瑊琬琡無后琮琛瑚有庶子內外雲仍殆以數萬不能盡載其最著者爾昌男浚吉以遺逸徵吏曹判書贈領議政夢寅男國澤府尹贈贊成希遠孫奎濂左參贊贈贊成奎濂男相琦吏曹判書大提學嗚呼府君宏材碩望旣不能大厥所施其隱德陰功有足以發育于後故子姪蕃衍簪纓相繼況惟我 明聖王妃 仁顯王妃皆系府君外裔則靈芝醴泉可驗其本源之有自矣府君高祖官職譜牒 皆云執端而舊表曰官至持平未詳孰是姑附記以傳疑云
八代孫 通訓大夫 行司憲府執義 知製敎 必恒 記

2)정랑공 순년(正郞公 順年)

지평공 계사의 작은 자제는 정랑공(正郞公) 순년(順年)인데 자(字)는 전해지지 않고 호는 소요당(逍遙堂)이다. 은진송씨 선세의 분묘에는 모두 묘표(墓表)와 묘갈(墓碣)이 전하는데 오직 정랑공의 묘소에만 없다.
또한 비의 뒷면에 몇 줄의 음기(陰記)와 생졸년(生卒年)조차 없으므로 확실한 내용을 알 길이 없다.
다만 가승과 국조방목(國朝榜目)211)에 의하면 1453년(단종 1)에 형님 요년(遙年)과 함께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고 1469년(예종 1) 10월 21일 신숙주(申淑舟), 노사신(盧思愼), 강희맹(姜希孟)을 독권관(讀卷官)으로 하고 승지 이극증(李克增), 정효상(鄭孝常)을 대독관(對讀官)으로 하여 경회루 아래에서 치른 겨울 문과에 도사(都事)로서 병과(丙科)에 급제하고 예조정랑(禮曹 正郞)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그의 인품에 대하여 한두 가지 사실을 엿볼 수 있는 것이 전한다. 먼저 점필재( 畢齋) 김종직(金宗直)은 정랑공의 둘째자제 여익(汝翼)에게 그 어른은 나의 금석지계(金石之契)와 같은 벗이었는데 이제 다행이도 그와 같은〈아들〉이 있구나! (乃翁吾石友러니 今幸典型存이라.)

라는 시를 전하고 있다. 점필재와 같은 대현(大賢)이 이러한 시를 지었다면 당시 그를 추대함이 어떠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것이다.
또『회덕읍지(懷德邑誌)』에 보면“공의 형제들이 청렴하고 삼가며 사양하여 벼슬은 비록 심히 나타나지 않았으나, 덕행을 순수하게 갖추고 곁으로 수학(數學)에도 정통하고, 천문(天文), 지리(地理)에도 묘경(妙境)을 뚫어지게 보았다는 것이 또한 향중(鄕中)에 전해오는 평으로써 숨길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전하기를 공이 역학(易學)에 깊어서 그의 수(壽)와 장지(葬地)와 후세(後世)의 발복(發福) 등을 스스로 점쳤는데 뒤에 그 점과 같이 모두 풀렸다.”고 했다. 이는 우암 문정공(尤庵 文正公)의 시(詩)에 주안212) 땅 묘소에는 풍수(風水 : 靑鳥)가 전해준 말이 두 마리의 잉어로써 징험되었네. (朱岸靑鳥徵二鯉.) 라고 한 구절이 또한 이를 지적한 것이다.
뒤에 증손 기수(麒壽)가 귀하게 됨으로써 홍문관 부제학지제교 겸 경영참찬과 춘추관수찬관)(弘文館 副提學知製敎兼 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에 증직되었다.

졸년이 확실치 않은 3월 21일에 타계하여 현재 대전광역시 동구 사성동인 청주 주안면 사점(淸州 周岸面 沙岾)의 꾀꼬리 봉[鶯峰] 밑 진좌술향(辰坐戌向)의 언덕에 장례 지냈는데, 대청댐으로 이 지역이 모두 수몰되었지만 묘소 바로 밑까지만 물이 차 대청호의 아름다운 경관을 내려다 보이는, 은진송씨의 분묘 중 가장 좋은 명당자리라고 일컫고 있다. 배위 증 숙부인(贈淑夫人)213)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직제학(直提學)214) 맹헌(孟獻)의 따님으로 정랑공의 묘소 바로 뒤에 있다.

정랑공(正郞公) 순년(順年) 묘역

대전광역시 동구 사성동

정랑공 순년의 묘소에는 4개의 비가 있다. 묘소 중앙에 있는 옛 표석은 글자가 떨어져 없어져 새 돌로 갈아세우고, 전면대자는 11대손 문경공 환기(文敬公 煥箕)가 썼다.

구비(舊碑) 좌측에 1979년에 석운 송정헌이 짓고 쓴 비가 세워졌으며 바로 옆에 전면대자만 있는 비(碑)는, 1848(헌종 4)년에 입재 송근수가 써서 세웠으며 묘소 우측 비는 전면에 두전과 음기가 있는데 전면에는 입재 송근수가 찬한 음기가 세워졌으며, 뒷면에는 창산 성구용이 찬하고 송경준(宋景埈)이 서(書)하였으며, 송재욱이 두전(頭篆)한 묘비가 1970년 3월에 세워져 있다.

슬하에는 3남 2녀가 있는데 장남 여해(汝諧)는 문과급제하여 안동부사(安東府使)에 이르고 둘째 여익(汝翼)은 진사(進士)이며 셋째 여려(汝礪)는 생원(生員)이다. 첫째 따 님은 교리(校理) 박계간(朴季幹)에게 둘째 따님은 영의정(領議政) 정광필(鄭光弼)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정랑공(正郞公) 순년(順年) 묘역 안내석

대전광역시 동구 사성동

그의 자손은 수만을 헤아리는데 명현(名賢)과 대작(大爵)이 대대로 끊이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의 숨은 공이 주는 복록(福祿)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역학(易學)에 깊어서 묘자리를 스스로 점친 이야기가 두어 편 전하는데〈자죽바위〉전설이 그 대표적인 이야기다.

정랑공은『주역』에 대한 조예가 깊어서 자신의 수명과 자손들의 음덕 발음을 점치기도 하였다고 한다.
나이가 들자 사산(沙山 :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과 사성(沙城 : 대전광역시 동구 사성동) 두 곳에 명당을 찾아 묘 자리를 마련하고 어느 날 형님 목사공(牧使公) 요년(遙年)에게 상의했다.

“형님! 이 아우가 요즈음 두 곳의 묘 자리를 보아 두었는데 한 곳은 사산 터요, 다른한 곳은 주안 땅 사성 터입니다. 이 중에 형님의 신위지지(身位之地)215)는 어느 곳이 좋은지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형님 목사공은 “이에 대하여 나는 잘 모르니 그 효음(效陰)216)을 말해 보아라. 내가 선택하겠다.” 하였다.

이에 순년(順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상은 일천 개의 가지에 일만 개의 잎새와 같아서 자손이 극히 번성하여 종파(宗派)가 끊이지 않고, 오래 가며 귀천에 관하여는 반반인데 유구히 계속되겠습니다.
한편 주안 땅 사성은 자리가 기이하게 솟아 판국이 보통이 아니어서 얼마 안 가서 이름 있는 현인과 고관이 나올 것입니다. 또한 여러 대가 지나면 명현으로서 혈식군자(血食君子)217)가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자손이 중간 중간에 끊겨서 오래 가는 것은 사산만 못합니다. 그러니 형님께서 알아서 선택하십시오.”

그러자 요년(遙年)은 “효음으로 말하면 주안이 훨씬 나으나, 나는 종파(宗派)이니 사산을 택하겠다.” 라고 말했다.
그 뒤 요년(遙年)이 타계하자 아우 순년(順年)은 아무래도 형님을 사성으로 모심이 도리일 것 같아 상여를 사성 쪽으로 운구하려 하였다.

자죽바위

대전광역시 동구 판암동

마침 너더리[板橋]218)의 사성과 사산으로 갈라지는 세거리 바위 아래에 이르니 상여가 그 자리에서 자족자족 하며 움직이지 않고 갑자기 일진광풍이 일더니 앞에 늘어 선 만사(輓詞) 중 하나를 휘몰아 걷어갔다.
사람을 시켜 그 만사를 따라가게 하였더니 그 만사는 사한리의 사산 묘자리에 꽂히는 것이었다.

이에 정랑공은 이것이 형님의 생각이구나! 생각하고 상여머리를 사산 쪽으로 돌려 그곳에 장례를 지냈다. 그 뒤 순년은 형님의 뜻대로 사성 땅에 묻히게 되었다.

그 결과 형님 목사공의 자손은 아우 정랑공의 자손들보다 몇 배나 번창하였고, 정랑공 자손들은 큰댁보다 수가 적지만, 예언대로 가까이는 추파공(秋坡公) 같은 현인이, 멀리는 우암 문정공 같은 혈식군자가 많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상여가 자족자족 움직인 곳이라 하여 붙여진〈자죽바위〉가 현재 판암동 지하철역 북쪽 동사무소가 있는 언저리에 있다.
일제강점기에‘널빤지 다리가 있다.’하여 붙여진 판교의‘판’과〈자죽바위〉의 바위 [岩]자를 붙여 이곳의 동을 판암동(板岩洞)이라 이름 붙였던 것이다. 그의 묘 자리에 얽힌 잉어 이야기도 전한다.

순년이 세상을 떠나자 자손들은 그가 생전에 이미 정해 놓은 주안 땅 사성 묘 자리에 시신[體魄]을 안장하려 하였다.
이 때 한 유명한 풍수가 와서 “혈(穴)을 파서 몇 자 내려가면 반들반들한 돌이 있을 터이니 밑을 잘 받쳐서 절대로 들지 말도록 하라!” 라고 당부를 하였다.

그런데 그의 큰사위인 교리 박계간(朴季幹)의 하인 하나가 이 풍수의 말이 궁금하여 몰래 살짝 그 바위를 들어 보았다.
그랬더니 그 바위 밑에는 맑은 물이 가득했는데 잉어 두 마리가 그 물속에서 활발하게 놀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하인은 깜짝 놀라 엉겁결에 바위를 탁 놓아버렸다.
그 서슬에 물속에서 놀던 잉어 중 한 마리가 크게 상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자손 가운데 고종명(考終命)219)을 하지 못하고 사약 등을 받은 사람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이럴 때면 그 잉어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자주 말하여 왔다. 우암 문정공의 시에 주안에서 풍수가 두 마리의 잉어를 징험하였다(朱岸靑鳥徵二鯉).고 한 글귀는 곧 이 일을 지적한 것이다.

예조 정랑 소요당 송공묘기

여기 청주의 주안면 사성(朱岸面 沙城) 앵봉(鶯峰) 밑 진좌의 자리는 곧 우리 선조 정랑공(正郞公)의 묘소다.
숙부인(淑夫人)을 추증(追贈)받은 김씨가 합폄되어 있다. 묘소 몇 걸음 앞에 조그만 돌이 하나 서 있으니 11대손 환기(煥箕)가 전면에 몇 자 기록하여 표시하였다.
가만히 생각하니 우리 선세의 분묘에는 다 표(表)와 갈(碣)이 있는데 오직 부군(府君)의 묘소에만 없다. 10여 세를 지나서 비로소 세웠으나 비 후면에 몇 줄의 음기의 글과 생졸(生卒)의 월일이 없어서 전하여지지 않는다.

그러니 더구나 행한 일과 이력에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다. 가승에 의하여 살펴보면 경태(景泰) 계유(1453)에 백씨 판교공(判校公)과 더불어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였고 성화 계해(1475)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 정랑(禮曹 正郞)220)에 이르렀다. 일찍이 옥서(玉署)221)에 보관되어 있는『국조과방록(國朝科榜錄)』222)을 보았더니 예종 기축 10월에 부군이 도사로서 추계 문과에 급제하였다고 되어 있어 가승에 기재되어 있는 것과 달라 음직(蔭職)223)으로 한 벼슬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문헌이 부족하여 주나라의 후예인 기나라와 송나라조차도 징빙할 수 없다고 공자가 탄식하였는데 이 문제도 그와 같은 것이로구나! 다만 한두 가지 점필재( 畢齋) 김 선생(金先生)이 부군의 둘째 자제 여익(汝翼)에게 지어 보낸 시 가운데에“내옹오석우 금행전형존(乃翁吾石友 今幸典型存 : 이 친구는 돌과 같이 단단하게 변하지 않는 나의 벗인데, 사람은 이미 가버렸지만 지금 다행히 그대로의 전형만은 남겨 놓았네!)”라고 한 것을 보면 점필재의 어짊을 가지고도 석우(石友)라고 한 것은 곧 부군이 당시에 얼마나 추중을 받았나 하는 것을 증명한다.

부군이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어서 스스로 당신의 수명과 자손의 발음(發蔭)224)을 점쳐서 다 부군이 추점(推占)한 거와 같이 되었다는 말이『회덕읍지(懷德邑誌)』에 실려 있다.

문정공(文正公:尤庵 先生)의 시에 이른바“朱岸靑鳥225)徵二鯉(주안 땅 묘소에서 풍수가 전해 준 말이 징험되었네!)”라고 한 것도 이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증손 기수(麒壽)가 귀히 됨으로써 부제학(副提學)을 추증 받았다.

우리 송씨로서 관이 은진인 사람은 다 쌍청당 유(雙淸堂愉)의 자손이 된다.
쌍청 부군의 장남 계사(繼祀)는 벼슬이 상주 판관(尙州 判官)이고 증직이 지평(持平)이다.


정랑공(正郞公) 순년(順年) 재실

대전광역시 동구 사성동

지평공이 2남을 두었으니 장자는 요년(遙年)인데 벼슬이 판교(判校)226)이고 차자가 곧 부군이다. 배위 김씨는 안동의 대성(大姓)이다. 직제학(直提學)227) 맹헌(孟獻)의 따님이다. 3남2녀를 두었다.

장남 여해(汝諧)는 문과하여 안동 부사(安東 府使)를 지냈고 차남 여익(汝翼)은 진사고 3남 여려(汝礪)는 생원이다.
여서(女壻) 박계간(朴季幹)은 교리(校理)고, 정광필(鄭光弼)은 영의정이다.
부군 각하(脚下)228)로 지금 15, 6세가 되는데 자손이 거의 1,000명은 된다.
명현(名賢)과 큰 벼슬이 대대로 끊어지지 않으니 대개 부군의 숨은 공이 주는 복록이며 또한 이 산이 우리 송씨의 모든 분묘 중에서 가장 좋다고 일컫는 것이다.
14대손 근수(近洙) 지음

禮曹正郞 逍遙堂 宋公墓記

惟玆淸州之朱岸面沙城鶯峰下負辰之原卽我先祖正郞公之墓而 贈淑夫人金氏葬在 稍後 幾步墓前竪小石十一代孫煥箕書面以識之 惟我先世墳墓皆有表碣獨於府君墓闕焉歷十餘世始有而亦無數行記陰之文幷與生卒年月而不能傳 其事行履歷乎按家乘景泰癸酉生員試與伯氏判校公聯榜 成化己未登文科官至禮曺正郞而嘗見玉署所藏 國朝科榜錄則 睿宗己丑十月府君以都事擢秋陽文科家乘所載年條註誤而其始補蔭仕初無所傳文獻之不足徵杞宋者有乃如是耶第一二槪見 畢齋金先生贈府君第二胤汝翼詩有曰乃翁吾石友今幸典型存 以 畢之賢而謂之石友則府君之見推於當時斯可知矣府君邃於易學自占壽藏後世發蔭一 如府君推占之說載懷德邑誌文正公詩所謂朱岸靑鳥徵二鯉者蓋亦指此也以曾孫麒壽追恩贈副提學吾宋之貫恩津者皆祖雙淸堂愉而雙淸府君之長男繼祀官尙州判官 贈持平有二子長曰遙年官判校次卽府君金氏安東大姓直提學孟獻女生三男二女汝諧文科安東府使次汝翼進士汝礪生員女壻朴季幹校理鄭光弼領議政府君閣下至今十五六 世子孫殆千數而名賢大爵代不絶書蓋府君之陰功厚祿而亦稱此山爲吾宋諸墓中最吉云
十四代孫 近洙

주석

  • 189) 통적(通籍) : 벼슬을 함.
  • 190) 별좌(別坐) : 별도의 자리라는 뜻. 조선시대 각 관아에 딸린 정 5품 또는 종 5품의 벼슬자리.
  • 191) 이 녹권은 뒤에 병화로 말미암아 소실되었다.
  • 192) 부결(剖決) : 일의 시비나 선악 따위를 판단하여 결정함. 판결.
  • 193) 진휼(賑恤) : 흉년에 가난하고 궁색한 사람을 돌봐 주는 것.
  • 194) 교조(敎條) :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진리인 듯이 믿고 따르도록 하는 것.
  • 195) 조수(操守) : 지조를 지키는 것.
  • 196) 공보(公輔) : 삼공(三公)과 사보(四輔). 모두가 임금을 보필하는 대관(大官).
  • 197) 팔분(八分) : 예서(隷書) 이분(二分)과 전서(篆書) 팔분(八分)을 섞어서 만든 한자의 글씨체.
  • 198) 계담(桂潭) : 송국사(宋國士)의 호.
  • 199) 정포은(鄭圃隱) : 고려말의 학자이자 충신인 정몽주(鄭夢周).
  • 200) 문달(聞達) : 이름이 세상에 드러남. 출세. 제갈 량(諸葛 亮)의「출사표(出師表)」중 다음 구절에서 인용된 말이다. “諸葛亮 出不求聞達於諸侯: 제후에게 문달을 구하지 않는다.”
  • 201) 의금부 도사(義禁府 都事) : 의금부는 조선조 때 죄인을 추국(推鞫)하는 일과 조정의 대옥(大獄)을 맡아보던 관아. 1414년(태종 3)에 의용순금사(義勇巡禁司)를 고친 이름인데, 1505년(연산군 11)에는 밀위청(密威廳)으로 고쳤다가 중종반정 이후 본 이름으로 다시 고쳤다. 별칭으로 왕부(王府), 금오(金吾), 순금(巡禁), 의용(義勇)이라 하고, 금부(禁府)로 줄여 쓰기도한다. 직원은 판사, 지사, 동지사(이상은 겸직) 및 경력(經歷 : 종4품), 도사(都事 : 종5품)인데 경력과 도사의 인원은 각 10명이었다.
  • 202)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 사헌부는 조선조 때 삼사(三司)의 하나로 당시의 정치에 관하여 의론하고, 모든 관리의 비행을 조사하여 그 책임을 규탄하며, 풍기·풍속을 바로잡고 백성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일이 없는가를 살펴 그것을 들어주는 등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 1392년(태조 1)에 설치하였다가 1894년(고종 31)에 없앴다. 직원은 대사헌(1. 종2품), 집의(1. 종3품), 장령(2. 정4품), 지평(2. 정5품), 감찰(24. 정6품) 등이었다. 백부(柏府), 상대(霜臺), 오대(烏臺), 어사대(御史臺), 감찰사(監察司) 등의 별명이 있다.
  • 203) 통가(通家) : 선조 때부터 서로 사귀어 오는 집, 인척.
  • 204) 진원(晋原) : 강귀손(姜龜孫)의 봉호.
  • 205) 인의(引義) : 조선조 때 통례원의 종6품 문관 벼슬.
  • 206) 별제(別提) : 조선조 때 교서관(校書館), 상의원(尙衣院), 군기시, 예빈시, 도화서, 활인서 및 그 밖의 여러 관청에 속한 정·종6품의 한 벼슬. 예빈시(禮賓寺)는 빈객의 연향(宴享)과 종재(宗宰)에게 공급하는 식사를 맡아보던 관청임.
  • 207) 학유(學諭) : 조선조 때 성균관의 종9품 벼슬. 정원은 3명이었음.
  • 208) 유일(遺逸) :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음. 유일(遺佚).
  • 209) 명성왕후((明聖王后) : 현종(顯宗)의 왕비.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딸이다. 김우명은 사우당 (四友堂 : 國澤)의 사위이므로 명성왕후는 사우당의 외손녀가 된다.
  • 210) 인현왕후(仁顯王后) : 여양부원군 민유중(閔維重)의 딸이다. 민유중은 동춘당(同春堂 : 浚吉)의 사위이다. 장희빈(張禧嬪)의 무고로 페위 되었다가 복위되었다.
  • 211) 국조방목(國朝榜目) : 10권 10책으로 편찬한 문과급제자의 명단을 실은 책.
  • 212) 주안(朱岸) : 주안은 주안향(周岸鄕)을 가리키는데 지금은 대전광역시 동구 사성동, 신하동, 신상동 일대이다.
  • 213) 숙부인(淑夫人) : 당상관(堂上官)인 정3품 문무관 부인의 품계.
  • 214) 직제학(直提學) : 조선조 집현전의 종3품과 예문관, 홍문관의 정3품 벼슬. 의례 예문관의 직제학을 겸임하였다. 말기에 이 관직이 없어지자 그 대신 홍문관이 직제학을 겸임하였다.
  • 215) 신위지지(身位之地) : 죽은 뒤에 묻힐 묘 자리.
  • 216) 효음(效陰) : 묘소가 자손에게 끼치는 복.
  • 217) 혈식군자(血食君子) : 대현(大賢)들은 제수(祭需)를 익히지 않고 생으로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혈식군자라고 함.
  • 218) 너더리 : 대전광역시 동구 판암동을 가리키는 옛 지명. 순년이 세상을 떠나자 자손들은 그가 생전에 이미 정해 놓은 주안 땅 사성 묘 자리에 시신[體魄]을 안장하려 하였다. 이 때 한 유명한 풍수가 와서 “혈(穴)을 파서 몇 자 내려가면 반들반들한 돌이 있을 터이니 밑을 잘 받쳐서 절대로 들지 말도록 하라!” 라고 당부를 하였다. 그런데 그의 큰사위인 교리 박계간(朴季幹)의 하인 하나가 이 풍수의 말이 궁금하여 몰래 살짝 그 바위를 들어 보았다. 그랬더니 그 바위 밑에는 맑은 물이 가득했는데 잉어 두 마리가 그 물속에서 활발하게 놀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하인은 깜짝 놀라 엉겁결에 바위를 탁 놓아버렸다. 그 서슬에 물속에서 놀던 잉어 중 한 마리가 크게 상하였다.
  • 219) 고종명(考終命) : 천명(天命) 대로 살다가 죽음.
  • 220) 정랑(正郞) : 정5품의 벼슬.
  • 221) 옥서(玉署) : 옥당(玉堂)이라고도 함. 홍문관(弘文館)의 딴 이름.
  • 222) 『국조과방록(國朝科榜錄)』: 조선조 때 소·대과에 합격한 사람들의 명단.
  • 223) 음직(蔭職) : 과거를 하지 않고 벼슬을 하는 것. 부군이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어서 스스 로 당신의 수명과 자손의 발음(發蔭)224)을 (160p 옆에 정랑공 순년 묘비 게재) 점쳐서 다 부군이 추점(推占)한 거와 같 이 되었다는 말이『회덕읍지(懷德邑誌)』 에 실려 있다.
  • 224) 발음(發蔭) : 자손이 음덕을 받음.
  • 225) 청조(靑鳥) : 당나라의 유명한 풍수.
  • 227) 직제학(直提學) : 홍문관과 예문관의 정3품 벼슬.
  • 228) 각하(脚下) : 자손을 의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