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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보(己丑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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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 2021-08-03 |
『기축보(己丑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족보이며, 문중에서 인정하지 않는 족보다.
[우리 송씨의 족보가 수백 년이 된다. 옛날 이본(二本) 있었으니 하나는 2권으로 된 것이고, 하나는 4권으로 된 것이다. 2권으로 된 것은 할아버지에 관한 것이고 4권으로 된 것은 그 자손들에 관한 것이다. 지난 순조 무자년(1828) 장차 중간하려하여 이미 착공하였는데, 의론이 엇갈려서 결국은 파보만 편찬하고 말았는데 왕왕 곽숭도를 시조로 삼은이가 있으니 통탄할 일이다. 故 참판 정희 씨가 종친회를 맡고 있어 족조를 닦자는 의론을 발의하였다. 하략 ………]
위 글은 입재상공 송근수가 쓴 『정해대보(丁亥大譜)』 발문이다.
발문 가운데 ‘무자년(1828)에 족보를 발간하려다 의론이 엇갈려 파보만 편찬하고 곽숭도를 시조로 삼은 일이 있으니 통탄할 일이다’라 한 내용으로 보아 당시 족보 만드는 일이 수월치 않았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필자는 옛 문중 어르신들이 말씀하시기를 ‘구전에 우리 족보가운데 무자보가 있었는데 탁한 족보라 인정치 않는다.’ 라는 말씀을 수없이 들어와서 무자보(戊子譜) 실체에 대하여 항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의문이 지난 년 말 우연치 않게 실체를 알게 되어 밝히고자 한다.
1. 발견하게 된 계기
종중에 들리다보면 종종 자기 조상의 뿌리에 대해 알고자 하는 분들이 찾아오곤 한다. 지난 2019년 12월 23일(화) 오후 서울에서 왔다는 여자 종인 송○○여사가 “동파공파 후손인데 뿌리를 찾기 위해 서울에서 왔다” 라고 하며, “동파공파 파보 『계해보(1983)』에 우리 조상들이 나와 있다. 그 이전 족보에도 입록(入錄)이 되어있는지 대종중에서 확인하고 싶다”는 것이다. 종중에 소장하고 있는 『이권보』와 『사권보』 『정해대보』를 확인해보니 그 선조를 찾을 수 없었고, 『병오대보』(1966)에는 나와 있다고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 여자 종인은 그 이전의 여러 족보, 즉 파보(波譜)도 있을 것 같다. 언제 어느 시기에 우리 선조가 족보에 올랐는가? 꼭 확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불원간에 대종중에 다시 찾아오겠다는 것이었다. 이 사안도 민원이기에 확인할 필요가 있어 동파공파 종원 중에 보학에 대해 상식이 있고, 과거 족보를 소장하고 있다는 송수호(동파공 17대손, 故 석운 송정헌 손자)씨와 처음 통화를 하게 되었다.
수호씨 말에 의하면 “동파공파에서는 파보를 두 번 발행했다. 『계유보』(1933)와 『정유보』(1957)가 있는데, 그 분 조상이 파보에 입보되지 않았다. 『병오대보』(1966)에 처음 나온다.”고 알려주었다. 2020년 1월 13일(월) 종중사무실에 찾아온 여자 종인 송○○여사에게 『병오대동보』이전의 『동파공파보』를 확인했지만 입보된 바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그동안 고마웠다”고 인사하면서, 종보 연회비를 납부하고 떠났다.
송수호씨와 여자 종원 계보를 확인 통화하는 과정에서 “우리 집에 1829년대에 간행된 『은진송씨족보』가 있다. 완질은 아니고 9권중에 3권을 소장하고 있다. 1권에 있는 범례를 보니 갑신년(1824)에 시작하여 기축년(1829)에 한 질로 묶었다. 라는 내용이 있다.”라 알려주고는, 이 족보의 실체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다.
바로 카톡으로 「족보 표지」와 「신증범례」를 보내주어 그 자료를 가지고 수호씨와 토론을 하게 되었다. 이 『기축보』가 바로 『정해대보』발문에 있는 의문의 『무자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돌아오는 설날 고향에 올 때 그 족보를 가지고 오도록 부탁했다. 1월 24일(금) 수호 씨 본가에서 『기축보』(1829) 3권을 처음 보게 되었고, 서울 고서점에 『정해대보』가 완질은 아니지만 2권이 낙질된 족보가 있다. 라는 사실을 알고 수호 씨의 중개로 은진송씨의 보물인 『정해대보』가 내게 오게 된 계기도 되었다.
2. 『기축보』 해제
1권에는 「신증범례」와 목사공 각하 안악공(세훈) 자손이 입보되어있다.
「신증범례」 一. 옛 족보 외파인 즉 4대에 한해 실었으나 이번 족보엔 아들 성(姓)이 번창하여 싵기 어려우므로, 단지 죽은 자손만 쓰나, 이름난 이가 있은 즉 단권(單券) 족보에 따라 대수에 관계없이 기록한다.
一. 기해간 판각 때에 송담공께서 지(識)를 찬하셨고, 병오년 중간 때에 우암선생께서 서문을 쓰셨으므로 이번에는 짐짓 신찬(新撰)이 없이 옛 서문과 함께 하며 그 아래 책(冊)으로 한다.
一. 지금 이 개정한 족보는 갑신년(1823)에 시작하여 기축년(1829)에 마쳤다. 그 사이에 안동공(여해)의 둘째집 참봉공(세량)의 파보만 들어오지 않았다. 6년동안 기다렸지만 끝내는 하나로 귀결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파보를 가지고 편질을 완성하여 우선 나중에 의견이 일치되어 회통하기를 기다린다.(동춘당 문정공 12대손 송용민, 충남대 한문학과 이향배 교수 번역)
『정해대보』서문에 “…… 순조 무자년에 중간하려 했지만 의론이 엇갈려서 결국 파보만 편찬하고 왕왕 곽숭도를 시조로 삼은이가 있으니 통탄할 일이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곽숭도 고사내용으로 보아 족보를 편찬할 때, 참봉공파가 6년 동안 단자(單子)를 내놓지 않아 참봉공파가 빠지고 9권으로 족보를 간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의문의 곽숭도(郭崇韜) 고사는 다음과 같다.
[당나라의 명장 곽자의는 현종과 숙종 때 사람으로 안사의 난을 평정하고 분양왕(汾陽王)에 봉했으며, 수(壽)와 복을 누리고 자손이 번성하였다.(『신당서 권137』 「곽자의열전」)
곽숭도는 후당 안문(雁門)출신으로 장종 때 병부상서 추밀사 등을 지낸 뒤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훈되고 시중에 오른 사람이다. 촉(蜀)을 정벌하러 가던 도중에 곽자의 묘소를 지나게 되자, 자기의 선조라고 판단하고는 말에서 내려 통곡하고 떠나 비웃음을 샀던 고사가 전해진다.(『신오대사 권24』 「곽숭도열전」)]
이 고사로 볼 때 곽숭도는 후한 때 재상인데, 근본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곽자의가 그의 조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신하들이 같은 곽씨라고 부추겨서 곽자의 무덤에 통곡을 하고 절을 해서 자기 조상을 만들었으니 세상 일이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인륜이 없어진 것이다. 즉 남의 조상을 자기 조상으로 만들어서 세상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이 내용으로 볼 때 『기축보』 간행당시 참봉공파가 단자를 내놓지 않아 완전한 족보가 되지 못하여 우리 문중에서는 『기축보』를 인정치 않는다.
7권에는 목사공 각하 선무랑공 자손중 판관공파(세웅)와 정랑공 각하 안동공 여해 자손중 가평공(세충)후예인 추파공파 자손들이 8권 중간까지 입보되어 있다.
9권에는 잠부공파와 사직파(계충) 자손들이 입보되어있고, 영천파(榮川派) · 사동파(寺洞派) · 장동파(長洞派) 등 다른 파의 별보가 부기되어 있다. 영천파 세계(世系) 중간에는 송자대전에 있는 「송씨보보서(宋氏補譜序)」가 잘못 끼어들어가 있다. 9권 말미(末尾)에 발문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발문이 없어 『기축보』를 주관했던 분이 밝혀지지 않아 아쉬움이 많았다.
이제까지 의문을 품고 구전으로 전해오던 속칭 『무자보』라고 하는 족보가 『기축보』로 9권이 있었다. 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중 1권 7권 8권을 동파공 17대손 송수호 씨가 소장하고 있다. 종원 중에 『기축보』를 소장하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대종중에 연락 바란다. 이 족보는 참봉공파가 빠져있어 우리 종중에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오욕의 역사도 역사이기 때문에 후손으로서 알고는 있어야 한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의론이 엇갈렸던 것만은 사실이다. 이 오류를 시정하기 위하여 59년 후 청보라 일컬어지는 『정해대보』가 탄생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미 은진송씨 족보 간행과정을 종보에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2017. 1. 1) 이해를 돕기 위하여 간략히 보완하여 재정리해보자 한다.
* 『이권보(二卷譜)』 이전에 은진송씨는 몇 가지 족보가 있었다고 한다. 그중 하나는 규암 문충공(인수)께서 만들었고, 또 하나는 송담공(남수)께서 만들었다. 규암께서 만든 세보(世譜)는 규암께서 1547년 삭탈관직 후 문의 화당리에 내려와서 계실 때, 『世譜(은진송씨족보)』를 만들었는데, 범례가 간결하여 살펴보기가 편리했다고 전해진다. 그 책을 손자 지례공(승조)께서 보관하고 계시다가 송담(남수)께서 족보를 만들 테니 『세보(世譜)』를 빌려 달라고 해서 그것을 근거로 『기해보』를 편찬하셨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족보라 전해지는 것은 1474년에 박원창이 정리한 충주박씨 갑오년 『성화보』와 2년 뒤 병신년(1476)에 발간된 안동권씨 『성화보』가 있다.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에는 1562년에 만든 문화유씨 족보가 가장 오래 되었다고 전한다. 만약 규암께서 만든 족보가 전해졌다면 문화유씨 족보보다 훨씬 앞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규암께서는 연산군 5년(1499)에 태어나 명종2년(1549)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족보가 전해지지 않아 애석한 일이다.
가. 기해보(己亥譜) 선조 32년(1599), 지금부터 421년 전에 송담께서 14년에 걸쳐 가승(家乘) 1책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은진송씨 족보의 시초이다. 규암선생이 소록(所錄)한 세계(世系)를 근거로 재편한 것이다. 현재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서문만 『이권보(二卷譜)』에 수록되어있다.
나. 『이권보(二卷譜)』 현종 7년(丙午 : 1666)에 우암께서 주동이 되어 족보를 다시 만들었다. 1책(冊)은 자손록이고, 1책(冊)은 선대로 부터의 각종 문헌을 수록하여 2책(冊)으로 만들었다. 2책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권보(二卷譜)』, 또는 병오년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병오보(丙午譜)』라고도 한다. 지금부터 354년 전에 이룩된 것이다.
다. 『4권보(四卷譜)』 표제는 『은진송씨족보(恩津宋氏族譜)』이다. 모두 4권으로 되었으므로 『4권보(四卷譜)』라고 한다. 「신증범례」라 하여 『4권보(四卷譜)』의 범례를 넣었다. 1·2권에는 목사공 각하 후손록을, 3·4권에는 정랑공과 사직공 각하 후손록을 넣었다. 발문이 없어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다. 옥오재의 아들 황주공 필환과 동춘당의 현손되는 태현까지 입보된 것으로 보아 『이권보(二卷譜)』보다 80여년 후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 『기축보(己丑譜)』]
순조 29년(1829)에 『기축보(己丑譜)』가 있었으나 참봉공 종중에서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참여를 안 하고 「신증범례」에 의하면 후일을 기약하기로 했다. 문중에서 인정치 않는 족보이다. 표제는 『은진송씨족보(恩津宋氏族譜)』이다. 갑신년(1824)에 시작하여 기축년(1829)에 마쳤다. 「신증범례」에 보면 안동공의 둘째집 참봉공파의 단자(單子)를 6년 기다렸지만 들어오지 않아 참봉공 각하 자손이 빠진 족보라 할 수 있다. 발문이 없어 누가 주도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이권보(二卷譜)』가 만들어진 후 263년 후에 시도했다. 족보를 간행할 때,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현재 『기축보(己丑譜)』는 9권중에 3권(1·7·8)권을 동파공 17대손 송수호(故 석운 정헌 씨 손자)씨가 소장하고 있는 것을, 필자는 지난 1월 24일 처음 보았다. 그러나 3월 5일 규암 문충공파 회장 송성호씨로 부터 『기축보(己丑譜)』가 대종중에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 『기축보(己丑譜)』는 2009년 4월 14일 송성호씨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복사해서 대종중에 기증한 족보로, 1권에서 9권까지 완질로 남아있다. 문중에서 인정치 않는 족보이다. 있었다는 것만 알면 된다.
규장각 학예사 심재우씨가 쓴 『기축보(己丑譜)』 해제를 소개한다.(述而不作) 참고하기 바란다.
원서명 : 『은진송씨족보(恩津宋氏族譜)』 소장 : 규장각(奎章閣) 판본사항 : 목활자(木活字) 책 권수 : 9券 9冊 책 크기 : 35.5×12.8㎝ 소장본 : 서문의 일부 부식(腐蝕)
1829년(순조 29) 恩津宋氏 가문에서 만든 족보이다. 족보의 序文이 없으며, 凡例만 있다. 그렇지만 舊譜의 서문 2개, 凡例 2개가 함께 실려 있어 이전에 만들어진 족보와 본 족보의 간행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序文과 凡例에 따르면 은진송씨족보는 처음 1599년(선조32) 宋柟壽(11세)에 의해 八寸譜가 만들어진 후, 1666년(현종 7) 宋時烈(14世)에 의해 重刊되었다. 그 후 甲申(1824)에서 己丑(1829)까지 6년간에 걸친 작업 끝에 다시 중수, 간행된 것이 본 족보이다. 이와같이 본 족보의 간행연대는 干支만 확인되지만, 족보에 기재된 인물의 하한이 正祖代 출생한 인물이라는 점, 正祖를 ‘正宗’이라고 표기하고 있는 점 등을 통해, 본 족보의 甲申-己丑은 1824-1829년이 분명하다. 따라서 본 족보는 작업이 끝난 해인 1829년에 간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본 족보의 편찬의 주도인물과 배경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舊譜의 序文 2개가 실려 있는데, 1599년과 1666년 족보 편찬을 주도한 宋柟壽 宋時烈이 작성하였다. 다음으로 單券凡例(3조, 1599년 족보의 범례로 추정됨), 四券譜凡例(2조, 1666년 족보의 범례로 추정됨), 新增凡例(3조, 본 족보의 범례) 3개가 실려 있다. 이 가운데 新增凡例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舊譜에 外波는 4대까지 수록하고 있으나, 본 족보에는 外孫까지만 기재하고 현달한 사람이 있는 경우에만 代數를 제한하지 않고 기록한다.(1조) 본 족보에는 新撰한 序文이 없으므로 己亥(1599년) 刊板 때의 松潭公(宋柟壽) 서문과 丙午(1666년) 重刊 때의 尤齊先生(宋時烈)의 序文 등 舊譜 서문을 권두에 싣는다.(2조) 금번 改譜 작업은 甲申年에 시작하여 己丑年에 마쳤는데, 安東公(宋汝該, 9世)의 둘째 아들 參奉公(宋世良, 宋時烈의 高祖)派는 들어오지 않아 본 족보에는 일단 누락시키고 후일을 기약하기로 하였다(3조). 이상 凡例를 통해, 본 족보는 조선전기의 족보와 달리 父系 중심으로 기재방식이 바뀌었다는 사실(1조), 宋時烈系는 족보에서 빠진 사실(3조) 등을 알 수 있다. 족보에는 始祖 宋大原(恩津君)부터 회덕 入鄕祖 宋愉(雙淸堂, 6世)까지는 單系이며, 7世 宋繼祀(持平公)·宋繼中(司直公)부터 갈라져 대략 20世 전후의 인물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9권에는 榮川派 · 寺洞派 · 長洞派 등 다른 파의 別譜가 부기되어 있다. 榮川派 世系 중간에는 宋子大全에 있는 「송씨보보서(宋氏補譜序)」가 잘못 끼어들어가 있다. 한편 9권 말미(末尾)에는 ‘光緖甲午八月十五日 恩津宋氏世系’라는 제목아래 宋浚吉(13世)이 지은 <先祖妣柳氏旌門表石陰記>, 그리고 본 족보에 누락된 宋柏年(8世)아래 世系가 필사되어 첨부되어있다. <先祖妣柳氏旌門表石陰記>에 나오는 柳氏는 5世 宋克己(進士公)의 아내이다. 고려 말의 烈婦로 1653년(효종 4) 旌閭가 명해져 1665년(현종 6)에 表石을 세웠는데, 表石의 글을 宋浚吉이 짓고, 宋時烈이 썼다. 아마도 ‘光緖甲午八月十五日 恩津宋氏世系’ 는 宋柏年의 후손 누군가가 1894년에 족보의 내용을 보충하기 위해 끼워 넣은 것으로 보인다. 본 족보는 중간 중간 腐蝕된 곳이 많은 점, 凡例에서 밝힌 것처럼 宋時烈系 가계가 누락되어있는 점 등이 단점이지만 庶子女까지 기록하고 있는 등 조선시대 恩津宋氏 인물들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심재우)
라. 『정해대보(丁亥大譜)』 고종 24년(丁亥 : 1887),『이권보(二卷譜)』 간행 후 221년 만에 나주공(정희)과 입재상공(근수) 두 분이 주축이 되어 9년동안 관동 재실에서 인쇄시설을 갖추고 족보 19책(冊)을 만들었다. 지금부터 133년 전의 일이다. 두 분께서 청보를 만들기 위해 갖은 협박과 외압을 물리치면서 청보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우리는 이 자랑스러운 족보를 『정해대보(丁亥大譜)』라 부른다.
마. 『병오대동보(丙午大同譜)』 『정해대보(丁亥大譜)』후 79년만이고 『이권보(李卷譜 : 1666)』후 300년 만에 당시 공사원이던 송정순 씨가 주동이 되고, 그 후 종의에 따라 송병덕 씨를 보사(譜事)를 위한 도유사로 선정, 3년동안 건(乾)·곤(坤) 2책의 족보를 만들었다. 이를 『병오대동보』라고 한다. 지금부터 54년 전의 일이다.
* 필자후기
필자는 우연히 서울에 거주하는 동파공파 여자 종원 송○○씨의 뿌리 찾기 과정을 통하여 우리 은진송씨 족보를 다시 한 번 면밀히 살펴보고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동파공파에서 보학에 관심이 많은 송수호 씨를 알게 되었다. 그를 통하여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기축보』의 실체를 실제로 보게 되었다. 또한 서울 고서점에 정해대보가 나와 있다는 사실을 전해주어, 소장하고 있는 분과 연결이 되어 꿈에 그리던 은송의 보물 『정해대보』가 내게 오게 되었다. 이 글을 쓰기위하여 은진송씨 족보에 대하여 많은 토론을 한 송수호 씨와, 초벌 번역을 정성껏 해준 동춘당 문정공 12대손 송용민씨, 『기축보』 「신증범례」와 「곽숭도 고사」를 정성껏 번역해주고, 조언을 해주신 충남대학교 한문학과 이향배 교수님께 지면을 통하여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2020년 2월 12일 以堂 成彬記)
『기축보』 연재가 나가자 3월 5일 규암 문충공파 송성호 씨의 연락이 왔다. 『기축보』는 대종중에 소장되어있다. 본인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所藏)되어있는 『기축보』를 복사하여 2009년 4월 14일 대종중에 기증했다. 1권에서 9권까지 총 9권으로 되어있다. 3월 6일 대종중 사무실에서 송태영 대종회장님과 송총무유사 송성호 정랑공 회장님과 『기축보』 복사본을 확인하였다. 그동안 의문스러웠던 『기축보』 갈증을 풀게 되었다. 송성호씨에게 감사의 마음 전한다. (2020년 3월 14일 以堂 成彬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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