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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 집단공유허비
유래 > 토정 집단공유허비1) 집단공 유허
우리가 물을 마실 때 그 근원을 떠올리듯,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가끔은 그 근원을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면 도대체 은송의 뿌리는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이어져 왔는가? 우리 은진송씨 가문이 대전에 뿌리내리게 된 시원은 어디일까?
단지 은진송씨가 회덕에 자리 잡은 것은 고려 말 사헌부 집단 벼슬을 한 집단공(執端公) 명의(明誼)가 고려가 망하자 이 곳 처가가 있는 회덕(현 대전광역시 동구 신촌동) 토물(土井)로 내려와 은거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 사실을 토정 집단공 유허를 통해 확인해 본다.
추원사(追遠祠)에서 정면으로 바라다 보이는 유허는 물이 차면 나타나지 않지만 가뭄이 들면 선명하게 하나의 섬으로 드러나 있다. 집단공 유허는 450여 년 동안 구전으로만 전해오다가 헌종 1년(1835)에 유허비를 세움으로써 지금까지 유허가 실전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이 대청댐 수몰지구로 확정되자 1978년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유허비가 있으면 이곳에 살은 것이 아닌가? 해서 유허를 발굴하여 확실한 유허로 확인되었다. 가옥의 형태는 5칸 집이었고, 백자파편, 조그만 절구통 등이 나온 것을 기억한다.(심농 송진도 구술, 『恩津宋氏先蹟史』 「발굴조사보고서」 61-66쪽)
그러나 지금은 이 유허의 땅을 밟아보기란 아주 어려운 실정이다. 가뭄이 계속되면 섬처럼 유허가 선명하게 드러나지만, 비가 와서 만수가 되면 유허의 위치마저 알아보기 어렵게 된다. 집단공 유허에 자연석의 표석을 세워 자손들에게 얘기할 수 있는 산 자료를 제공했으면 하는 바람은 지나친 욕심일까?
2) 집단공 유허비
현재 유허비는 대전광역시 마산동 은골 류조비 재실 뒤편에 있다.
고려 말 사헌부 집단을 지낸 집단공(송명의)이 살았던 유허를 기념하기 위해 회덕 동면 토정리(대전광역시 동구 신촌동 토물)에 세웠었다. 1835(헌종 1)년에 14대손 목사 기정(基鼎 : 제월당 현손)이 짓고 아울러 썼다. 1871(고종 8)년에 주위에 담을 쌓고 작은 문을 내어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처음에 비를 세운지 39년 후 1873(고종 10)에 다른 돌에다 처음의 비문과 나주공 정희(正熙 : 동춘당 6대손)께서 추기한 비를 세웠는데, 비문에 하자가 있다고 하여 3년 뒤 1876(고종 13)년에 또 다른 돌에다 전면대자와 음기를 새겼다. 추기는 나주공 정희께서 짓고, 면로(勉老 : 1838~1887, 동춘당 7대손 대흥군수 역임)께서 쓰셨다. 이 비석이 지금 관동 재실 뒤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에 세웠던 두 개의 비석은 유허에 묻혀있다.
지금 마산 유조비 재실 뒤에 있는 유허비와 비각은 유허가 수몰될 때, 정부에서 경비를 대주어 이곳에 옮겨 세웠다.(1980) 이전 사실기는 20대손 정헌이 썼는데, “유허에 비를 세워 추모의 마음을 되새겼는데, 지금 수몰로 인하여 관동병사(지금은 추원사로 바뀜)우편 남쪽 구지(舊地) 다섯 발자국 쯤 되는 거리에 옮기었다. 그 섬돌과 주춧돌이 수중에 잠겨있으니 혹 후일에 세상이 다시 바뀌면 옛적 모양을 다시 발견할 것인가? …… 중략 …… 이 공사에 진력하여 일을 끝낸 사람은 후손 공사원 희영(熹泳), 총무 중용(仲用)이다. 때는 庚申(1980)년 6월이다.”(『恩津宋氏先蹟史』 54쪽)
3) 토물·은골
집단공 명의가 사시던 토물 은골은 우리 은진송씨가 이곳 한밭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게 된 시거지(始居地)이다. 집단공 유허비가 옮겨 세워져 있고, 유조비의 산소가 있는 마산(馬山 : 말뫼), 은골, 관동(寬洞)의 세 가지 이름으로 불러져 왔다. 원래 이 곳 마을은 말처럼 생긴 산 밑에 있다고 하여 말뫼(말 : 馬, 뫼 : 山)에서 변하여 [말미]라고 불러져 오다가, 집단공이 이 곳 아랫마을 토물에 옮겨 살았기 때문에 숨어산 골짜기, 곧 은골(隱谷)이라는 말이 추가되었다. 또한 그 뒤에 다시 유조비 관을 모신 곳이 되기 때문에 관동(棺洞)이라 하던 것이 관동(寬洞)으로 바뀌어 마을 이름이 또 하나 보태어진 것이다. 이렇듯 집단공 명의가 벼슬을 버리고 숨어산 이 마을은 뜻 깊은 내력을 지닌 채 대청호의 맑은 물속으로 숨어버린 것이다. 은둔불사(隱遁不仕)집단공의 정신은 대청호의 맑은 물과 추원사 뒤의 푸른 솔과 함께 어우러지면서 우리 은송의 자손들에게 어려운 시기일수록 청빈하고 열심히 생활하라는 숭고한 무언의 게시를 주고 있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