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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송씨족보 간행과정(恩津宋氏族譜 刊行過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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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 2021-08-03 |
1. 족보(族譜)의 의의와 목적
족보(族譜)란 인간관계를 기록한 것으로, 씨족 간에 만들어진 가족의 계통을 밝혀 기록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족보(族譜) 가보(家譜) 세보(世譜)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보(譜)라 함은 수목(水木)의 근원을 명백히 하는 것으로 천류만엽(天流萬葉)이 다 하나로 귀일(歸一)하는 것이다.
족보를 만드는 목적은 우리의 근본 뿌리는 어디서부터 시작했으며 어떻게 이어져 오늘에 이르렀는가? 그 핏줄을 이어오는 동안 가문을 빛낸 인물은 누구이며 동족 간에 어떤 관계가 성립하는가? 등을 밝히는데 있다. 또한 소목세차(昭穆世次)를 명백히 밝혀 가족질서를 유지하고, 종족간의 단결과 내부의 질서를 유지하여 서로 상부상조하여 숭조목족(崇祖睦族)사상을 유지하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2. 족보의 유래
족보의 유래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뚜렷한 기록은 없으나 중국에서는 한나라 때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고, 위진남북조시대에 문벌이 높은 가문을 중요시함으로써 전성기를 이루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오래된 족보로 세종5년(1423)에 발간된 문화유씨 영락보(永樂譜)인바, 서문만 전하고 실물은 없다.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는 성종5년(1474)에 박원창이 정리한 갑오년 『성화보(成化譜)』로 알려진 충주박씨 족보가 현존하는 최초의 족보로 알려져 있다.
그 후 2년 뒤 성종7년(1476) 병신년(丙申)에 발간된 안동권씨 『성화보(成化譜)』를 펴낸 바 있다. 명종 14년(1562) 壬戌年에 발간한 문화유씨 『가정보(嘉靖譜)』에는 처손 외손을 포함 4대조까지 자세히 수록된 족보가 현존해 있다.
3. 은진송씨족보 간행과정(恩津宋氏族譜 刊行過程)
『이권보(二卷譜)』 이전에 은진송씨는 몇 가지 족보가 있었다고 한다. 그중 하나는 규암 문충공(인수)께서 만들었고, 또 하나는 송담공(남수)께서 만들었다. 규암께서 만든 세보(世譜)는 규암께서 1547년 삭탈관직 후 문의 화당리에 내려와서 계실 때, 『世譜(은진송씨족보)』를 만들었는데, 범례가 간결하여 살펴보기가 편리했다고 전해진다. 그 책을 손자 지례공(승조)께서 보관하고 계시다가 송담(남수)께서 족보를 만들 테니 『세보(世譜)』를 빌려 달라고 해서 그것을 근거로 『기해보』를 편찬하셨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족보라 전해지는 것은 1474년에 박원창이 정리한 충주박씨 갑오년 『성화보』와 2년 뒤 병신년(1476)에 발간된 안동권씨 『성화보』가 있다.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에는 1562년에 만든 문화유씨 족보가 가장 오래 되었다고 전한다. 만약 규암께서 만든 족보가 전해졌다면 문화유씨 족보보다 훨씬 앞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규암께서는 연산군 5년(1499)에 태어나 명종2년(1549)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족보가 전해지지 않아 애석한 일이다.
가. 『기해보(己亥譜)』 지금부터 407년 전인 선조 32년(기해 : 1599)에 송담 송남수께서 1책(冊)으로 만들었다. 기해보는 송담께서 전후 여러 대가의 세보(世譜) 60여권을 두루 살펴본 후, 무려 14년에 걸쳐 수사본(手寫本) 1책을 만들었다. 그러나 불행이도 임진왜란 때 민몰(泯沒)되었다. 송담께서는 이를 애석히 여기다가 다시 수보(修譜)를 시작하였으나 기력이 쇠진한 뒤라 종형 규암 송인수(1487-1547)선생이 소록(所錄)한 세계(世系)를 근거로 하여 재편한 것이다. 현재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서문만 『이권보(二卷譜)』에 수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살펴보면 규암께서 만드셨던 족보는 문화유씨 『가정보(嘉靖譜)』보다는 훨씬 앞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 『이권보(二卷譜)』 규암 송담께서 만든 팔촌보라는 가승으로 된 『기해보(己亥譜)』가 불에 타 없어져 버려 이를 애석히 여긴 우암선생이 여러 일가들과 의논하여 체계를 갖춰 만든 족보가 『이권보(二卷譜)』이다. 현종 7년(병오 : 1666) 『기해보(己亥譜)』이후 68년 되는 해에 간행된 『이권보(二卷譜)』의 표제는 『恩津宋氏族譜』이다. 1664년에 시작하여 1666년에 완성하였다. 우암께서 서문을 썼다. 한권은 자손록이고 또 한권은 선조들의 묘비문과 유씨할머니 정려 받을 때에 관련된 여러 문헌과 문과방목 등, 이 책을 만들 때까지 산재해 있던 문자들을 집대성하여 만든 은진송씨 최초의 『문헌록』이라 할 수 있다. 첫째 권은 『恩津宋氏族譜』라 불렀고, 둘째 권은 『부록(附錄)』이라 하였다. 책머리에 송담께서 쓰신 서문이 있고, 이어서 우암께서 서문을 실었다. 자손록과 범례가 있고, 선대를 여자 항렬(汝字 行列)까지로 하여 앞에 넣었다.
다. 『사권보(四券譜)』 표제는 『恩津宋氏族譜』이다. 모두 4권(4책)으로 되었으므로『사권보(四卷譜)』라 부른다. ‘신증범례(新增凡例)’라 하여 『사권보(四卷譜)』의 범례를 넣었다. 1·2권에는 목사공(遙年)각하 자손록을 3·4권에는 정랑공(順年) 및 사직공(繼中)후손들을 수록하였다. 『사권보(四卷譜)』는 쌍청당 12대손까지 수록하였는데 9대손이하는 행적을 생략하였고, 서문이나 발문(跋文)이 없고 범례마저 간략하여 언제 어떤 시기에 어떤 동기로 누가 만들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이 중요한 자료가 왜 빠지게 되었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입록(入錄)된 내용으로 보아 『이권보(二卷譜)』보다 약 80여년 후에 만든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그러나 『정해대보(丁亥大譜)』범례를 보면 『정해대보(丁亥大譜)』는 『사권보(四卷譜)』를 기준으로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별도로 만든 「별보(別譜)」가 처음 나타나는데 14세까지 수록된 영천파(榮川派)와 예천파(醴泉派)의 세계(世系)가 있다. 예천파는 『사권보(四卷譜)』『정해대보(丁亥大譜)』가 자손록이 똑같은데 자손록 다음에 2世 되는 군사 득주(得珠)의 만사 「만송득주(挽宋得珠)」가 붙어있는데, 만사를 지은 사람이 『사권보(四券譜)』의 「정구흥(鄭九興)」에서 『정해대보(丁亥大譜)』에는 「정대흥(鄭大興)」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라. 『정해대보(丁亥大譜)』 『정해대보(丁亥大譜)』는 고종 24년(丁亥 : 1887), 『이권보(二卷譜)』이후 222년(지금부터 130년 전)만에 입재 송근수 참판 송정희 편(編)이다. 『정해대보(丁亥大譜)』는 고종 16(1879)년에 당시 은진송씨 대종중 공사원 이던 참판 송정희씨가 수보(修譜)를 발의하자 여러 종친들이 이에 따르기로 합의하였다. 그리하여 영중추부사인 입재 송근수씨를 보사(譜事)의 도유사로 선임하고 관동재사에 활자국을 설치하여 집규(集逵)와 인보(仁甫)씨가 이 일의 실무를 맡아 전후 9년에 걸쳐 「본손록」18책과 「별보」1책 등 19권(冊)에 이르는 방대한 것이므로 『정해대보(丁亥大譜)』『정해보(丁亥譜)』라 부른다.
마.『병오대동보(丙午大同譜)』 표제는 『은진송씨대동보(恩津宋氏大同譜)』이다.『정해대보(丁亥大譜)』이후 79년이 지난 1966년(丙午)에 건·곤 2권으로 발행하였다. 1964년 봄 당시 대종중 공사원인 송정순씨가 오송(吾宋)의 대동수보사(大同修譜事)를 발의하고 모든 종친들이 동의하여 이루어졌다. 송병덕씨를 보사도유사롤 선출하고 판교재사에서 일을 시작하여 3년 만에 간행하였다. 방대한 수의 자손록을 건·곤(乾·坤) 2권에 수록하기 위하여 종보식(從譜式)으로 축소하여 분량을 줄이도록 노력하였다. 『병오대동보(丙午大同譜)』는 그 범례에서 『정해보(丁亥譜)』때 「별보」로 들어온 파를 이번 「원보(原譜)」에 수록했다. 영흥파 및 이북에 살고 있는 일가는 남북이 차단되어 함께 족보를 만들지 못하므로 다음을 기약한다고 하였다. 이렇듯 범례에서 밝혔듯이 내용도 「원보(原譜)」와 「별보」를 구분 없이 편집하여 간행하였으나, 『사권보(四卷譜)』와『정해대보(丁亥大譜)』에서 실려 있던 예천파는 연락이 끊겨 『병오대동보(丙午大同譜)』에서 삭제하였다. 『대동보(大同譜)』에 파계도가 나오므로 해서 ‘은진송씨대동친목회’에서 1979년에 간행한 『은진송씨세적록』과 1986년의 『은진송씨세계편람』등이 모두 『대동보(大同譜)』의 파계도(派系圖)를 그대로 답습하였고, 1980년 이후에 간행된 파보(派譜)들도 아무런 고증 없이 이 파계도를 따르고 있다.
이상과 같이 우리 「은진송씨족보」는 현존하는 것으로 『이권보』이후, 『사권보』와『정해대보』『병오대동보』등 4번에 걸쳐 족보가 간행되었다. 우리 은송인들은 상기 족보를 통하여 상대(上代)로 소급하여 살펴보면 판원사 대원 할아버지에 귀일하게 되고, 우리가 한 자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서로 효제(孝悌)의 마음이 생김은 물론, 종통을 존경하고 일가와 화목 하는 도리를 깨닫게 되고, 화합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정해대보(丁亥大譜)』서문,「계간은진송씨종보」제4호 p21-23 성씨와 족보(송진도), 제7호 p12-16 풀어쓴 은진송씨 족보(송용재), 제22호 p10-15 은진송씨 별보(송용재)) (以堂 成彬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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