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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송씨의 역사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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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올해는 3·1독립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년째가 되는 뜻 깊은 해이다.
우리 문중에서는 3·1독립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의 바탕이 된 독립정신과 의미를 되살리기 위하여 각종 어려운 여건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을 한 선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백암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일제의 악랄한 행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의병이 잡히면 학살한 다음에 장바닥에 효시하였으며 학살한 시체를 여러 사람이 보는 가운데 가마솥에 끓여 그 뼈와 살점 덩어리를 보여주며 구경하도록 강요하였다. 또한 잡아온 자를 나무에 묶어 놓고 배를 가르고 살갗을 베껴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는 장면을 보고 손뼉을 치게 하고 웃도록 강요했다. 또 어떤 사람은 강제로 물을 먹게 하고 8삭 산모보다 배가 더 커지면 그 위에 널빤지를 놓고 일본군 여러 명이 올라가 물을 뿜어대는 모양을 구경시켰다. 어떨 때는 의병을 잡지 못하자 무고한 주민들을 잡아 땅에 묻어 몸의 반만 나오게 해놓고 마치 풀을 베듯 목을 쳤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왜적에 잡히면 목숨을 보존하기 힘들뿐 설령 산다하여도 그들의 잔인한 고문을 피할 길이 없었다.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고 은진송씨 문중의 여러 선조들이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독립운동을 한 선조들은 많이 있지만 후손들이 사적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여 그 실상이 파악되지 않은 분들이 많이 있고, 사적은 파악하였으나 아직까지 국가의 포상을 받지 못한 분들이 많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문중에서는 뜻 깊은 3·1독립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의 어원과 독립운동에 참가한 열 분의 선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 종원 들은 이를 바탕으로 선조들의 고귀한 나라사랑과 희생정신을 본받아 충렬의 가문으로서의 전통을 계승 전파하고 위상을 드높이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1. 「대한민국」 국호의 어원
우리나라의 국명은 「대한민국」이다. 이때 ‘한(韓)’은 어디에서 나온 말인가? 가장 처음 ‘한’이라는 글자를 국호에 쓴 건 ‘대한제국’이다.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는 『고종실록』에 보인다. ‘삼한(三韓 : 마한, 진한, 변한)’을 잇는다.’는 뜻으로 고 택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는 모순된 면이 많이 있다. “고종 : 우리나라는 삼한의 땅이다. 국호에 천명을 받아 이를 통합하여 하나가 되었으니 이제 천하를 가진 호를 정함에 있어 ‘대한’이라 해도 불가하지 않을 것이다. 또 각국의 문자를 볼 때마다 ‘조선’이라 하지 않고 ‘한’이라 했으니 옛날 사실과 부험처럼 맞고 오늘을 기다린 것이다. 천하에 성명하지 않더라도 천하는 모두 ‘대한(大韓)’이란 이름을 알 것이다.
여기에 민국(民國)을 더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1919년 4월 10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기위하여 상하이에서 소집된 임시의정원에서 결의한 것으로서 신석우가 먼저 ‘대한’을 제시하자 여운형은 “대한은 조선말기에 잠깐 쓰다 망한 이름이니 부활할 필요가 없다.”고 반대했다. 다시 신석우가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며 ‘중화민국’에서 공화국을 뜻하는 ‘민국’을 따와 「대한민국」을 국호로 제안했고, 다수결에 따라 이것이 독립국가의 국호로 정해졌다. 광복 후 1948년 제헌국회에서 이 국호를 계승하여 헌법에 명시했다.
참고로 삼한(三韓)의 명칭은 숙종 13년(1687)에 판암동 쌍청당 묘소의 좌편 손방(巽方)에 있는 쌍청당 애각에도 있는바 「雙淸堂睡翁二墓在乾方二百五十步 百代淸風三韓正氣(쌍청당 수옹의 두 묘가 서북방 250보 지점에 있으니 백세의 맑은 바람이요. 삼한의 바른 기운이다.)」라고 삼한은 즉 ‘우리나라’ 라는 뜻을 알 수 있다.
2. 독립운동가
1] 을미의병의 효시 유성의병에서 활약한 입재 송근수 · 풍남 송도순
조선말 의병에 의한 대일 무력항전은 독립운동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의병은 을미사변 직후 본격화 되었으며, 문석봉(1851~1896)은 이 때 봉기한 최초의 의병장으로 알려져 있다. 문석봉이 의병을 일으킨 주요한 이유는 일본군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자는데 있었다. 1895년 토왜죄(討倭罪)로 체포되었다가 1895년 6월 공주감옥에서 석방된 문석봉은 명성황후 시해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이 사건을 “천고에 없는 강상의 대변”이라고 통분하였으며 국모의 복수를 위하여 흉적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그의 창의에 참여한 세력은 유생 층이었는데 특히 대전지역의 유림의 대표자인 송근수 신응조 송도순이 참여하였다.
입재 송근수(1818~1902)는 우암선생의 8대손으로 헌종 14년(1848)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과 공조 · 병조 · 이조의 판서, 좌찬성 우의정을 거쳐 고종 19년(1882) 좌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다. 1884년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여 사직하고 회덕에 낙향하여 ‘재상산림(宰相山林)’이란 칭호를 얻었으며 단발령이 공포됨에 ‘각식(却食)’을 한 척사계열의 유학자기도 하였다. 을미년과 경술년에 순절한 연재 송병선과 심석재 송병순 형제가 그의 친조카임을 볼 때 척사사상에 기반을 둔 반일 우국정신을 볼 수 있다.
문석봉이 9월 18일 창의한 후 대장이 되어 선봉에 김문주, 중군에 오형덕 군향(軍餉)에 송도순을 임명하였다. 특히 회덕의 사족 풍남 송도순(1858~1918)은 동춘당의 10대손으로 고종 11년(1874)에 증광문과에 급제한 후 1893년 이조참판을 역임하였으며, 1894년 봄에 사헌부 대사헌과 도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이를 받지 않고 낙향하였다. 송도순의 참여는 전좌의정인 송근수와 함께 회덕 은진송씨들의 문석봉 의병에 대한 재정적 지원과 군사 활동에 대한 묵인 또는 협조의 사실을 확인케 한다.(『은진송씨세적사』 p783~786, 『한말의 의병연구』 을미의병의 효시 유성의병 충남대 김상기 p157~181 참조)
풍남 송도순은 1995년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었고(건국훈장 애국장), 2010년 후손에게 국가유공자 증서가 발급되었다.
미텔 주교 일기에 의하면 풍남 송도순은 일제강점기에 호적을 만들지 않아서 후손을 찾는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송도순이 독립운동 할 당시 조선·동아일보에 동춘당 종가 송도순 집안에 도둑이 들어 많은 재산 피해가 있었다고 게재되었다.
그러나 문중이나 집안 대소가에서는 종손이 아편밀수, 도박 등 파락호로 활동하여 가산이 탕진되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실은 일경의 정보망을 피하고, 비밀리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위한 술책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종가에서 전해지는 얘기에 의하면 송도순은 많은 재산을 처분해서, 독립운동 자금을 비밀이 조달한 것으로 알고 있다. 따님이 한분 계셨는데, 재적등본에는 송혜옥으로 나와 있다. 그 뒤 행적은 알 수 없고 집안에서는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 뒷바라지하러 만주로 떠난 것으로 알고 있다.(송도순의 현손 송영진 증언)
또한 진산일가(참판공 광천의 주손가)에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큰집(송촌 종가)에 대호(大虎)가 담을 넘어갔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대호는 백야 김좌진 장군으로 풍남장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다녀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풍남장과 김좌진 장군과의 교유(交遊)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동춘당 12대손 송용규 송용헌 증언)
2] 을사늑약과 경술국치에 자결한 송병선 · 송병순 형제
연재 송병선과 심석재 송병순은 우암 송시열 선생의 학통을 잇는 대표적인 위정척사계열의 유학자이다.
송병선은 1881년 이후 여러 차례 상소를 통하여 국정운영에 대한 건의와 함께 척사론을 펼쳤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황제를 찾아가 을사오적의 처단과 조약의 철회를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결한 순국지사이다.
그의 영향을 받은 동생 송병순도 1912년 총독부의 은사금 지급에 항의하여 자결 순국하였다. 또한 송병선 문인들 다수가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을 전개하여 스승의 유지를 받들었다.
1) 연재 송병선
송병선(1836~1905)의 호는 연재로 헌종 2년(1836) 8월에 증참판공 면수의 장남으로 회덕현 석남리(성남동)에서 태어났다. 우암 송시열 선생의 9대손으로, 우암 선생이후 권상하 한원진으로 내려오는 기호학맥의 정맥을 계승하였다. 그는 9살 때부터 백부인 수종재 송달수에게 수학하였다. 23살부터는 숙부인 입재 송근수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가학으로 내려온 춘추대의정신을 전수받았다.
1877년 경연관과 서연관, 1880년에는 지평, 이조참의, 성균관 좨주 등에 제수되었으나, 관직을 사양하면서 10여 차례의 상소로 내수외양책을 펼쳤다.
1894년 갑신변복령이 내려지자, 이는 조선 고유의 의복제도를 변개하는 것이라 하여, 이에 반대하는 척사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정에서 아무런 비답이 없자 가족과 함께 영동에 먼저 정착한 동생 송병순의 집으로 이주하였다. 동생인 송병순과 함께 문인 양성에 치중하면서 강학이외는 서천과 성주 등지에서 향음례를 실시하여 위정척사론의 확산에 노력하였다. 이후 1905년까지 충청도는 물론 전라와 경상지역 등 각지에서 강학을 함으로써 위정척사론의 보급에 힘썼다. 『계산연원록』에 의하면 문인이 1,100여명에 달한다. 이들은 주로 충청·전라지역에 분포되어있으며, 경상도 인물도 다수 포함되어있다.
1905년 11월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이 일은 전에 없던 변고이니 과거처럼 본분만을 지켜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상소문을 올려 속히 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폐기하라고 주청하였다. 그러나 송병선의 상소도 통할 수 없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송병선은 1906년(음 1905.12.12.) 가묘에 배례하고 서울로 올라가 고종과의 독대를 청했다. 그러나 고종은 독대를 거절하고 강제로 교자를 태워 남대문 밖 어느 집으로 끌고 갔다. 잠시 후 일본 순사가 칙령이라 하면서 송병선이 차고 있던 칼과 약물을 빼앗고 강제로 오후 3시 30분발 기차에 태워져 대전 석촌동 집에 돌아왔다.
송병선은 1906년 1월 24일(음 1905.12.30.) 자결하였다. 자결하기 전날 임금께 유소(遺疏)를 작성하고 북향재배하였다.
2) 심석재 송병순
송병순(1839~1912)은 구한말 학자이자 순국지사로서 헌종 5년(1839) 회덕현 석남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동옥 호는 심석(心石)이다. 을사늑약에 항일 순절한 연재 송병선의 아우이며 우암선생의 9대손이다. 어릴 때에 백부인 수종재 송달수를 따라 우암선생의 사당과 영정을 배알하여 그 뜻을 키웠으며 형 송병선과 더불어 학문에 힘썼다. 스승 송달수로부터 사서오경에서부터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송병기로부터 심석(心石)이란 두 글자를 받아놓고 성찰하였다. 심석의 뜻은 몸은 비록 대나무에 기착(寄着)하였으니 마음은 마땅히 돌(石)에 있어야 된다는 것으로써 굳은 절개를 중시한 듯하다. 그는 뜻있는 선비들과 주류하면서 계룡산 안남산 여산을 돌면서 강경 팔괘정에 올라 서원을 참배하고, 겨울에는 비래암에서 독서에 열중하며 성리학의 원전격인 근사록과 관련하여 토론을 벌이는 등 학문에 전념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통분에 눈물을 흘리고 ‘우리는 불공대천의 왜적과는 더불어 같은 하늘을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마침내 성토문을 지어 8도에 돌렸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함에 그 소식을 듣고 절망한 나머지 ‘나라를 위해서는 충성과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순국하는 길 밖에 없다.’고 하여 음독하려하였으나 집안에서 눈치 채고, 투신자살하려하였으나 문인 김용호가 뒤따라와 껴안아 미수에 그쳤다.
1912년 영동 양산의 일본헌병대가 회유할 목적으로 은사금(恩賜金)을 크게 질책하며 거절하였다. 일제가 회유책으로 경학원 강사를 임명하자 이를 거절하고 대의를 지켜 순국하는 길밖에 없다고 다시 결심하였다. 마침 부인상을 당하여 장례를 치른 뒤, 자녀와 조카들이 성묘간 사이 영동 활산에서 음독 자결하였다. 이때 송병순의 나이 73세였다.
송병순의 저술은 예학과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주요저술로는 「학문삼요(學問三要」 「사례축식(射禮祝式)」 「용학보의(庸學補疑)」 「주서선류(朱書選類)」와 「유집(遺集)」 14권이 전한다.
1905년 연재가 순절하자 고종께서 「사당을 짓고 배향하라」는 명령에 따라 1914년 영동에 연재사당인 문충사(文忠祠 : 연재 심석재선생을 배향한 사우, 그 후 1965년 보문산에 사당을 세웠다가 1970년 현 위치인 대전광역시 동구 용운동으로 이전하였다)에 배향되고,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追敍)되었다.
이와 같이 연재와 심석재 형제의 학문탐구정신과 우리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가짐, 자신보다 나라와 겨레를 생각하는 애국심은 오늘을 사는 우리 후손들이 가슴깊이 간직해야 될 것이다. (『한밭의 맥과 슬기』 순국지사 송병순 대전광역시 교육청 p176~177 )
3] 유림의 파리장서로 옥고를 치른 충순위공 후손 5인의 독립지사
파리장서사건이란 제1차 세계대전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 위하여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작성한 사건을 말한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유림 측에서도 프랑스의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을 작성하였다. 이 사건은 호서지방의 유종 지산 김복한과 영남유림을 대표하는 면우 곽종석을 중심으로 각 지역의 명망 있는 인물 137인이 서명하였다. 이 장서를 심산 김창숙이 노끈으로 꼬아 짚신을 만들어 1919년 3월 28일 상해임시정부로 가지고 갔다. 임시정부에서는 이를 다시 영어, 불어, 독일어로 번역하여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 편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전달하는 한편, 외국의 공관과 언론기관을 비롯해 국내의 각 향교 등 주요기관에 우송하였다.
이 서한은 ‘일제의 부당한 주권강탈이 결코 한국이 원하는 것이 아니며 만국공의에도 위배되는 일이다. 우리는 결코 일본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결의를 밝히고, 우리의 독립을 도와달라는 내용이다. 이 운동은 국내외의 각 신문에 크게 보도되어 한민족의 민족독립에 대한 염원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이 드러난 후 일제는 서명자를 비롯하여 유림인사 500여 명을 체포하였으며, 서명자들은 고문을 당하고 수개월에서 수년간 옥살이를 하는 등 갖은 고초를 겪었다.
파리장서에 서명자 137명 중 은진송씨 충순위공파 후손들이다. 판원사 부군 21세손 계산 송재락, 22세손인 상헌 송철수, 23세손인 정와 송호기, 의재 송호완 항재 송호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어려서는 난곡 송희일에게서 배우고, 장성해서는 곽종석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유가의 덕목을 함양하고 실천했다. 파리장서운동으로 모두 일제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송호완은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후 곧 사망하였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2005년과 2006년에 모두 독립유공자로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같은 문중에서 5명이상이 파리장서에 서명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일족이 의병으로 싸웠던 이 집안의 호국정신이 한말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1930년부터 이곳 후손들은 망루계(望樓契)를 조식하여 선대의 아름다운 충절을 잊지 않고, 오랜 세월 숭모의 정신을 기려오고 있다. 파리장서 의거 후 100여년의 세월이 흐른 2018년, 겨레의 혼이 살아있는 고장 합천군 대병면의 은진송씨 충순위공파 문중에서는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 병목비를 새로 건립하여, 송문의 애국지사를 비롯한 서명자 제위의 높고 큰 뜻을 현창하며 기리고 있다.(『은진송씨세적사』 p777~783, 2018년 경북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정우락 짓고 후학 송학부가 쓴 「독립유공자 파리장서 유적비」에서 발췌)
4]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다 옥고를 치룬 송종빈
송종빈은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9대손으로 조부 송진희는 철종 때 첨중추 통정대부로써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겸 위장으로 나라에 공로가 현저하여 진산 옥녀봉을 중심으로 사패지를 받은 공신이며, 부 송구노의 장남으로 고종 을축(1865) 3월 2일 충남 논산군 두마면 향한리(계룡시)에서 태어났다.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이전 송종빈은 영가무용단을 설립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영가무용단을 재정비하고 단원 이내수, 윤상옥, 김한복, 임종민 등과 함께 전북과 충남 일대에서 독립운동단체를 지원하기위해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11월 25일 동지 선영기와 함께 전북 익산군 망성면 어량리에 거주하고 있는 김용보로부터 군자금 108원을 모금한 것을 비롯하여 각처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다가 1921년 12월 30일 일경에게 체포당했으며, 1922년 3월 27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 강도협박 및 장물수수로 징역3년형을 언도받고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옥고를 치룬 후 만주 길림성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8년 3월 12일 만주에서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12월 13일 대통령 표창에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진산종중에서는 충남 금산군 복수면 곡남3리 조헌선생 사당 앞 부근에 1980년 9월에 건립하고, 2002년 11월에 보수한 「의사송공휘종빈기적비(義士宋公諱鍾斌紀蹟碑)」를 세워 선생의 큰 뜻을 후손들에게 선양하고 있다.
진산종중(송진희 후손집안)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송종빈은 동춘당 송준길의 셋째 아들 참판공 광천의 8대 주손으로, 조부 송진희는 철종때 무과 당상관으로 공훈이 있어 국가의 명에 의하여 부 송계권 산소(진산면 교촌리 숯고개)로부터 진산 · 완주 · 금산군수로부터 수백만평의 사패지(賜牌地)를 받아 송촌의 유산을 포기하고 진산으로 옮겼다.
종중에서는 송종빈이 독립운동을 한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는 일화만 전해오고 있었다. 1977년 국가에서 대통령 표창이 내려오면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이후 진산종중에서는 주손 종빈이 행방불명되자, 둘쨋집 주손 송종선이 실제적인 종가역할을 했다. 송종선은 종형이 독립운동을 지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비밀을 철저히 지켰다. 이후 독립운동 자금지원으로 가세가 점점 기울다보니 큰집 재산을 다 팔아먹었다. 는 등, 집안에서의 모든 비난은 동생 송종선 에게 쏟아졌지만 그런 과정에서 온갖 비난을 다 감수하면서도 비밀을 지켰다.
소문에는 1912년 토지조사사업이 실시되면서 군자금 마련을 위하여 영가무용단 운영자금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재산을 비밀리 매각하고, 집안에서 일하던 가솔들, 즉 마름 하인들에게 나눠준 것으로 파악했다. 또한 만주로 떠나기 전 진산 · 완주 · 금산군수로부터 받은 사패지를 원래 소유주에게 돌려준 줄 알았다. 후에 알고 보니 지방의 유력 아전 ○○○가가 소유한 것으로 보아 그 아전에게 헐값으로 팔아 독립운동 군자금으로 충당된 것을 알게 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종산은 선대 산소를 수호하기 위한 산소 소재지 산만 약 13만평 남아있다. 집안에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집안 고서적이 남아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고서적이 우마차로 바리바리 실려 나갔다고 하는데, 매각대금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충당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송종빈의 방후손 송용규 송용헌 증언)
또한 송종빈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사실은 1919년 3·1운동 당시 안동 예안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여 거사에 참여했던 퇴계 이황선생의 후손 이열호 지사의 행적에서도 나타난다. 이열호는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활동하던 중 영주경찰서에 일시 붙잡혔고, 1922년에는 충남 논산군 연산의 송종빈의 집에서 군자금 모금을 숙의한 뒤 경북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 해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고, 다시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1942년에서 44년경에는 대덕군 탄동면에서 수운교 간부로 활약했다고 한다.(『안동의 독립운동가』)
5] 일제 식민통치에 불복하다 3・1운동 때 체포되어 옥고를 치룬 송은헌(宋銀憲)
강와(剛窩) 송은헌(宋銀憲)은 세한재 시도의 10대손으로 1876년 11월 4일 충북 보은군 강신리 외가에서 부친 병택과 모 어순이(魚順伊)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젊어서 극재(克齋) 어윤적과 금계(錦溪) 이은원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학문이 정밀하고 깊으며 항상 홀로 있을 때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이 삼가고, 항상 조심하고 신중을 기해 행동했다고 한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비보를 전해 듣고 비분강개하여 ‘復讐保形(복수보형)’의 4자를 머리맡에 걸어두고 기회오기만을 기다렸다. 을미개혁으로 단발령까지 강제로 시행되자 ‘討逆復讐(토역복수)를 부르짖고 의암 유인석 의병진에 300냥의 군자금을 제공하고 이후에도 수십 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제공하였다.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 5적의 처단을 위해 유림의 궐기를 호소하고 경술국치 후, 두문불출하면서 학문에 정진하며 저술로 분을 삭이며 일제통치에 불복하였다.
유인석 의병장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려 하였으나 스승 어윤적이 때가 좋지 않다고 극구 만류함에 기회를 엿보고 기다렸다. 스승 금계 이은원의 소상(小喪)때 고한 제문에 ‘亡國爲至痛(망국위지통)’ 문구를 사용하여 일제경찰에 잡혀 고문을 당하면서도 굴복치 않았다.
1919년 3・1운동 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나 너무도 의연하게 일제와 맞섰다. 옥중에서도 망국의 한과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시(詩)로 노래한 “오늘날 옥중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홀로 작은 충성을 바치며 웁니다,”라는 옥중시(獄中詩)가 있다.
옥중에서 석방되었으나 인사하지 않았다는 죄로 다시 구금 끝까지 항거하고 애국지사의 몸으로 학자의 양심으로 나라 잃은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고뇌에 찬 삶을 마지못해 연명하다가, 광복되던 다음 해(1946) 충복 보은군 미산면 갈평리의 ‘屛南書齋(병남서재)’에서 하세하였다. 저서에 『剛窩集(강와집)』과 『秉義錄(병의록)』이 있다. 묘소는 충북 보은군 수한면 교암리 선조 장성공 세한재 시도 산소 근처에 계셨는데 2009년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4묘역 60번으로 모셨다.
조선말기의 국운이 위태롭던 시기에 태어나 갑오경장 을미사변 을사늑약을 몸소 겪으면서 살아온 강와공 은헌은 경술국치(1910)후 일제와 맞서 싸우다 감옥에 갇히는 등, 조국광복을 위해 몸 바친 공로가 인정되어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건국포장((제1637호)」이 수여되었다.
6] 강경의 3·1운동과 송재기(宋在紀)
송재기는 우암 문정공의 11대손으로 대사성공 병학의 손자이다. 공의 큰 어머니 안동권씨가 논산군 채운면에 살고 있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대전에서 그 곳으로 이사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날 무렵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사태가 심각해지자 고향인 논산으로 내려와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그로인하여 1년의 옥고를 치렀다.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 읍에서는 1919년 3차례의 만세시위가 있었다. 첫 번째 만세시위는 3월 10일이었고, 두 번째 만세시위는 3월 20일 오전 10시경에 벌어졌다. 아침부터 송재기 이근석 이봉세 이근오 이근태 유치만 등은 옥녀봉에서 출발하여 읍내로 내려와 1천여 명의 군중들을 4대로 나누어 동서남북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다. 이때 시위도중 김경락 씨는 적군의 총탄에 맞아 숨지고 기독교 선교사 등 미국인 2명은 일본 헌병에게 맞아 앞니가 부러지기도 했다.
송공에 대한 판결문을 보면 「송재기 이근석 이봉세 이근오 는 3월 20일 강경시장의 장날을 기하여 만세 부를 것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송재기 이근석은 태극기 약 350매(실제는 500매였음)를 만들어 이를 가지고 이봉세 이근오와 함께 오후 5시경에 강경시장 부근인 옥녀봉에 모여 만세를 부른 뒤, 산을 내려오면서 만세를 계속 부르고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옷시장(上市場) 방면으로 행진하였다.
일본군에게 체포된 송재기는 당시 나이 20세로 공주지방법원에서 1년6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1919년 4월9일) 이에 불복한 송공은 항소를 신청하여 1년 2월로 감형되었으나 동년 5월 2일 다시 상고하였다. 그러나 기각당하고 복역 중 영친왕의 혼인 관계로 감형되어 1년 만에 풀려났다. 그 후 1950년 5월 30일 대전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울에 올라가 있던 중 6·25 동란을 만났고 채 피신하기도 전에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북으로 끌려갔다. 1989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다음해에 재심하여 1990년 12월 26일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다시 추서되었다. 1985년 옥녀봉 정상에 논산 군수가 세운 「강경 항일독립만세운동 기념비」가 서있는데 송공의 기록은 비석 왼쪽에 새겨져 있다.(『계간은진송씨종보』제12호 1991.2.28)
7] 임시정부 제6대 행정수반 신암 송병조(新岩 宋秉祚)
신암 송병조 주석은 1877년 12월 23일 평안도 용천도호부 양하면 신창동(현 평안북도 용천군 신암리)에서 송재홍(宋再弘)의 3남 3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청년 시절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서 평북 용천군을 중심으로 기독교를 포교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육영사업에 노력하였다.
-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이에 호응하여 각지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주동적인 역할을 하는 한편 군자금을 모금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 1921년 신변이 위험해지자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상해로 망명하였다.
신암 주석은 그곳에서 상해의 대한적십자사 감사, 국민대표회의, 신한청년단 대표 등을 역임하다가
-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서 개조파와 창조파의 다수가 떠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자금난에 시달릴 때에도 김구와 함께 임시정부에 계속 남아서 활동하였다.
- 1926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과 의장에 선임되었으며 또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약하였다.
- 1933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재무장 및 주석을 지냈고,
- 1934년에는 임시의정원 미주 대표의원 및 의장직을 수행하였다.
-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한국국민당의 간부로서 조선혁명당, 그리고 만주 등지에 산재한 여러 단체들의 간부들과 협의하여 한국광복전선을 조직하여 활약하였다.
- 1940년 광복회를 설립하고 중국 당국과의 조약체결 등에 활약하다가 중경으로 임시정부를 따라가서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임시정부 국무위원, 고문, 임시정부 회계감사원장으로 활약 중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42년 2월 25일 65세로 병사하였다.
-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에 추서되었다.
8] 3・1의숙(三一義塾)과 송필영 선생
선생의 휘는 필영이고 자는 은설(殷說)이며, 호는 상암(嘗庵)이다. 충순위공 세적의 14대손이며 부친은 호석과 모친 인천이씨 사이에서 1892년 10월 11일 합천군 대병면 유전리에서 출생하였다. 5세에 종숙 송호언 밑에서 수학하고, 16세에 7서(七書)를 통달하였다.
1908년 17세에 큰 뜻을 품고 상경하여 서울의 보성전문(고려대학 전신) 3년을 수료하고, 1911년 20세의 나이로 일본 유학길에 올라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였다.
재학중 학우로 김성수 부통령, 안재홍 국민당 당수, 장덕수 선생, 신익희 국회의장과 더불어 와세다대학 내에 한국민족 5인 학우회 및 평의회를 조직하여 월간지인 『學之光(학지광)』을 발간하였다. 일본 내 유학생들과 더불어 학생운동을 하면서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는 비참한 현실을 보고, 1915년 노령(露領) 해산위로 달려가서 항일독립단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중에, 고국에서 조부님이 손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허위로 조부별세부고(祖父別世訃告)를 띄워 귀국케 하였다.
귀향 후 1919년 기미년 3월 구국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고향 대병면에서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민중들을 동원하여 3월 19일 대병면 고현(古顯)장날을 기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장터를 돌며 독립만세를 부르며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다.
시위군중들이 대병주재소로 향하자 일본경찰들이 총을 난사하여 군중을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선생은 주모자로 체포된 5명의 동지들을 위해 변론을 하여 형을 모면하게 하고, 전원 석방시켰다.
그 후 일제강점기 치하에서 가족과 친지들이 관계진출을 수차례 종용하였으나 끝내 거절하고, 교육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구국정신으로 친지 동지들의 뜻을 모아 사재(私財)를 털어 1921년 3월 1일 「삼일의숙(三一義塾)」이라는 학교를 설립하였다.
3・1독립정신을 담아 의숙의 이름을 「삼일의숙(三一義塾)」이라 현판을 걸고 선생께서 직접 의숙장에 취임하였다. 학교가 날로 번창하자 일제는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탄압과 방해를 하여 1927년 강제 폐교 당하였다.
선생께서는 희망을 잃고 좌절과 실의에 빠져 고향 대병을 떠나 진주로 이사했다. 그 후 대구로 다시 이사하여 전전하다가, 5년 후 1931년 「삼일의숙」건물과 학교의 모든 재정을 이건하여 현재 유전초등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모든 것을 유전초등학교에 기증하고 대구에 게시면서 신병치료하다 병이 위중해져 고향 대병으로 귀향하셨다. 병석에서도 선생은 항상 나라 걱정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조국해방의 기쁨을 맞이하였으나 광복의 기쁨을 맞보지 못하고, 이듬해 1946년 5월 9일 숙환으로 하세하니 향년 55세였다.
9] 「오류학원 무궁화사건」으로 옥고를 치룬 애국지사 송두용
송두용(宋斗用)은 감역공 규락의 8대손으로 1904년 7월 31일 충남 대덕군 신대리에서 부친 송헌옥과 모친 진주유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청운의 뜻을 품고 동경으로 유학을 갔다. 1926년 동경유학시절 한국인 학생들을 찾아내어 「성서연구회」란 모임을 발족시키고, 동지 함석헌 김교신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협의하고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했다. 1927년 7월 「聖書朝鮮(성서조선)」을 창간하여 지상(地上)에 「성서로 본 조선역사」라는 글을 기고했다. 그러나 일제는 기고한 글의 내용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이유로 1942년 6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했다. 그 사건으로 송두용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한편 농촌의 젊은이들을 깨우치기 위해 경기도 오류동에서 손수 농사를 지으며 낙후된 재래식 농사공법을 개선하고 야학을 열어 한글을 가르쳐 오다가 1930년 12월 사립오류학원(私立梧柳學園)을 설립했다. 학교 교정에 무궁화나무를 심은 것이 발단이 되어 소위 「오류학원 무궁화사건」으로 오류학원생 8명도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그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2010년 8월 15일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 받았다.
10] 광복군 송석형
송석형은 삼가공파 통덕랑 휘 규장의 9대손으로 자(字)는 자하 호는 남춘(南春)이다. 1919년 대전시 중구 옥계동에서 부친 송빈용(宋斌用)과 모친 안동권씨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체격이 건장하고, 말이 없고 침착할 뿐 아니라 선세의 맑은 유풍과 가정의 엄한 교육을 이어받아 행동이 의젓하고 기품이 있었다.
당시 시국이 일제강점기인지라 항상 조국광복을 위하여 헌신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있었으나 그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 몰래 가출하여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다. 그러던 찰나 이삼년 후 모르는 사람이 소식을 전해오기를 중국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집을 나간 송석형은 만주로 갔다. 만주에서 왜경을 만나 심문을 받기도 하였으나 상인으로 가장하여 위기를 모면하면서 중국 상해에 도착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임시정부에서 철기 이범석 장군의 도움으로 광복군에 입대하여 광복군총사령부 제2지대(支隊) 3구대(區隊) 3분대장 부위(副尉)로 배속되어 맡은바 소임을 다하였다.
한편 대전 본가에서는 가출한지 약 1년 후부터 8・15광복 직전까지 정사복 경찰관이 수시로 찾아와 행방을 심문하여 가족들이 겪는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어 귀국해서는 대한민국 독립동지회 충청남도 지회장에 피선되었고,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과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2005년 7월 22일 수가 87세를 일기로 대전시 서구 도마동 자택에서 영면했다. 묘소는 대전국립묘지 현충원 국가유공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하였다.
11] 괴산 장터 3·1만세운동의 주역 은송의 외손 벽초 홍명희
― 송은노(한정당 문흠의 현손)의 외손 ―
벽초 홍명희(1888~1968)는 한정당 현손인 금산군수 송은노의 외손이다. 송은노의 둘째 사위가 홍범식(1871~1910)이고, 홍범식의 아들이 홍명희다. 사위와 장인이 금산군수를 한 희귀한 사례다.
당시 조선의 3대천재로 상민출신의 춘원 이광수, 중인출신의 육당 최남선, 양반출신의 벽초 홍명희가 있었다. 이중 이광수와 최남선은 변절해 친일파의 길을 걷는다. 홍명희는 변절할 수 없었다. 아버지와의 약속 때문이다.
홍명희의 아버지 홍범식은 대한제국의 관리로써 금산군수로 부임했다. 경술국치일(1910.8.29.) 저녁 무렵 홍범식은 재판소 서기 김지섭을 불러 상자를 하나 주면서 집으로 보냈다. 그 상자에는 가족에게 보낼 유서가 들어있었다.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어떻게 하든지 조선 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찾아야 한다. 하늘보기 너무 부끄럽다. 어떻게 하늘을 보겠느냐? 조국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아버지의 목숨을 걸고 맹세해라.” 그리고 그날 객사 뒷산 소나무 밑에서 자결했다.
아들 홍명희가 아버지의 유언을 실행에 옮긴 것은 9년 뒤였다. 홍명희는 괴산의 자택 사랑채에서 동향의 청년들과 머리를 맞댔다. 괴산 3·1운동의 시작이었다.
홍범식의 장남 홍명희가 만세운동과 인연을 맺게 된 데는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이 계기가 되었다. 고종의 국장에 참석하기위해 상경했던 그는 청주출신 의병장 한봉수를 만나고 함께 손병희를 방문한다. 이 자리에서 홍명희는 의암 손병희로부터 3·1운동에 대한 설명을 듣고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다. 당시 홍명희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겸 학예부장이자 역사소설 ‘임꺽정’의 작가로 활약하던 유명인사였다.
홍명희는 고향으로 돌아온 직후 1919년 3월 18일 자택에서 숙부 홍용식과 함께 만세운동을 도모했다. 그는 괴산군내 이재성 등 의혈 청년을 비롯한 홍씨 문중의 지식인들과 함께 논의하고, 인근 괴산공립보통학교와 청주농업고등학교 학생들에게도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그는 자택에서 작성한 선언서에서 “최후의 1인까지 조선의 독립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괴산 만세시위는 모두 15차례에 걸쳐 전개되었으며 이중 주재소 등 관공서를 공격한 사례는 모두 7차례나 됐다.”며 이 과정에서 경찰관의 발포로 7명이 순국했고, 8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2명은 재판과정에서 악형과 고문을 받아 후유증으로 사망했을 정도로 만세운동이 치열하고 격렬하게 전개됐다고 한다. 특히 통문을 통해 시위가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전개된 것은 전국 만세운동 중 드문 사례라고 한다. 그 중심에 은송의 사위 홍범식과 외손 벽초 홍명희가 있었다.(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3·1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