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며
회덕의 은진송씨 가를 세상에서 산림지문1)이라고 한다.
은진송씨가 회덕에 입향하여 살기 시작한 것은 시조 판원사 대원의 증손인 집단공 명의(明誼)때 처가인 회덕황씨 터전인 토물(土井)에 내려와 은거하면서부터이다. 송명의 손자인 쌍청당 송유(宋惟)대에 회덕에 정착하면서 자손이 번성해 소위 ‘송촌(宋村)’을 중심으로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소위 ‘삼송(三宋)’이라 불리는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 제월당 송규렴 등 뛰어난 학자를 배출하고 명문가(名文家)와 통혼하면서 명문가로 성장하였다.2) 아울러 조선후기 학덕을 겸비해 유림의 추앙을 받고 나라로부터 부름을 받은 ‘산림(山林)’을 가장 많이 배출한 대표적인 유반가문(儒班家門)으로 성장하였다. 은진송씨는 조선시대 하나의 가문에서 300여명이 문집을 낸 국내 최대의 문집가문이며,3) 국가가 공인한 학덕을 겸비한 인물인 산림 12명, 문묘배향 2명을 배출한 가문이다.
특히 은진송씨 가운데 시를 남긴 선비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가운데 후세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세 시인이 있다. 송담 송남수, 금암 송몽인, 수재 송희갑을 일컬어 은진송씨 3대시인이라고 한다.4) 이분들이 활동한 시기가 16세기 후반 17세기 전반기이다. 이 시기는 양 선정5)을 중심으로 은진송씨의 르네상스라 할 만큼 은송의 문풍이 번성한 시기였다.
이들 3대시인 이외에 동춘당 송준길의 부 청좌와 송이창이 있는데, 그의 문집 『청좌와유고』에 100여 편의 주옥같은 시가 남아있다. 송남수 송몽인 송희갑 등 3대시인 이외에 송이창을 포함하여 은진송씨 4대시인이라 칭하려 한다.
이들 4분들의 공통점은 송촌이라고 하는 삶의 터전에서 서로 강학하고, 시작(詩作)활동을 하며, 교유하고, 죽어서도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속칭 사라니)에 있는 은진송씨 목사공파 집장지에 같이 체백이 묻혀있다.6) 즉 송담 송남수(1537-1626)와 청좌와 송이창(1561-1627)이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하며, 읍호정(挹灝亭) 12경7)을 지어주고, 숭현서원 중수8) 등 문중 일을 같이 하며 교유하고, 금암 송몽인(1582-1612)과 수재 송희갑(1584-1605)이 같은 시기에 태어나 같은 항렬로 송희갑을 아끼고, 면모를 알게 하는 자료인 <悼 宋希甲>9)이 있다. 이 두 시인은 같은 시기에 태어나 30대 이전에 단명한 공통점이 있다.
본고는 송촌이라고 하는 삶의 터전과 죽어서는 사라니(이사동)이라고 하는 체백이 묻힌 터전이 일치하는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는 송남수 송이창 송몽인 송희갑의 생애를 살펴보며 은진송씨 4대시인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10)
Ⅱ. 16C-17C 송촌에서 활동한 주요 인물
16-17C 송촌과 연계된 주요 인물 계보
은진송씨는 14세기 말에 송명의가 고려 망국을 한탄하며 토물(土丼)에 은거하면서 부터이다. 이후 은진송씨는 쌍청당 송유, 기묘명현의 한 분인 규암 송인수 등과, 문묘에 배향된 동춘당 송준길 및 우암 송시열 선생을 비롯한 12명현을 배출한 명문가로 성장하였다.
11) 특히 양선정이 활동한 17세기는 송촌의 르네상스라 할 만큼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송촌에서 활약하였다.
은진송씨의 회덕 입향조인 송명의는 1362년 청주 공북루에서 치러진 과거에 정도전 이숭인 설장수 유숙 등과 함께 이후 곧은 지조로 이색·정몽주 등 어진선비들과 벗했던 인물이다. 그는 고려가 망할 때 사헌부 집단(종3품)의 벼슬을 버리고 처가가 있는 회덕 토물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토물의 유래는 송명의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토담집을 짓고 살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2) 며느리인 류씨부인은 송명의의 아들인 진사 송극기의 처이다. 송극기는 젊은 나이에 진사로 선발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불행히도 젊은 나이로 죽었다.
공의 처 고흥류씨(1371~1452)는 공민왕 때 상서를 지낸 류준의 딸로 22세로 청상이 되어 4살된 아들 유(愉)와 함께 개경에 살았는데 남편의 복을 벗게 되자 친정에서 재혼을 권하였다. 그러자 류씨부인은 부모의 뜻을 뿌리치고 여종 하나를 데리고 회덕의 시가로 떠나고자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약속한 여종이 출발을 포기하였음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홀로 어린 아들 유(愉)를 등에 업고 개경에서 3주야를 걸어서 시댁인 회덕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뜻밖에 며느리가 먼길을 찾아왔지만 시부모는 처음 받아들이지 않고 친정으로 돌려보내려했다. 하지만 류씨부인은 삼종지도를 들어 간청하였고, 이에 시댁에서는 류씨부인을 맞아들였다. 집안에 들어선 류씨부인은 굶은 지가 여러 날이 되었고 또 노독에 시달려 먹을 것을 주어도 목에 넘어가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기운을 차린 류씨부인은 시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고, 가문을 일으켜 세운 회덕 은진송씨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13)
조선전기 은진송씨의 중심인물은 누가 뭐라해도 쌍청당 송유(1385~1446)이다.
쌍청당 송유는 어머니 류씨부인의 엄한 교육에 힘입어 젊은 나이에 벼슬길에 들어 호분위 부사정에 이르렀으나 정도전과 이복동생 방번과 방석을 살해하고 집권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면서 몇 개월 전에 승하한 신덕왕후 강씨를 폐위시키고 종묘에 모셔지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백달촌으로 내려왔다.
14)
이후 기묘명현인 규암 송인수(1499 : 연산군 35~1547 : 명종 2)가 배출되고 추파 송기수(1507 : 중종 2~1581 : 선조 14) 송응개(1536 : 중종 31~1588 : 선조 21)가 15세기에 이어 16세기에 조정 요직에 등용되면서 은진송씨가 세상에 두각을 나타나게 되면서 은진송씨의 성장을 견인하였다.
15)
고봉(高峰)은 수많은 준봉(峻峰)들이 떠받쳐주어야 형성되듯이 양선정이 활동한 17세기 전후한 송촌에는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어 은진송씨는 삼한갑족으로 칭해지는 명문이 되었다. 특히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에 이르는 송촌은 은진송씨의 르네상스라 할 만큼 많은 인물들이 활동한 도덕과 학문·시문의 메카였다.
16)
당시 송촌에서 활동한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16세기 |
17세기 |
송응서 |
1530 중종25 ~ 1608 선조41 |
송애당 김경여 |
1596 선조29 ~ 1653 효종4 |
백록 신응시 |
1532 중종27 ~ 1585 선조18 |
사우당 송국택 |
1597 선조30 ~ 1659 효종10 |
송담 송남수 |
1537 중종32 ~ 1626 인조4 |
동춘당 송준길 |
1606 선조39 ~ 1672 현종15 |
아호 신경진 |
1554 명종9 ~ 1619광해군11 |
우암 송시열 |
1607 선조40 ~ 1689 숙종15 |
청좌와 송이창 |
1561 명종16 ~ 1627 인조5 |
제월당 송규렴 |
1630 인조8 ~ 1709 숙종35 |
지봉 이수광 |
1563 명종18 ~ 1628 인조6 |
옥오재 송상기 |
1657 효종8 ~ 1723 경종3 |
죽창 이시직 |
1572 선조5 ~ 1637 인조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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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저 조익 |
1579 선조12 ~ 1655 효종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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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암 송몽인 |
1582 선조15 ~ 1612광해군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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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재 송희갑 |
1584 선조17 ~ 1605 선조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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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이 찬술한 청좌와 송이창 묘문에 보면
“숙조 청좌공은 사계 문원공이 그 행장을 짓고 청음 문정공이 그 묘갈을 짓고 우복 문숙공이 그 묘지를 짓고 신독 문경공이 묘액을 썼으니 아! 훌륭하도다. 아! 훌륭하도다. 족히 영구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공이 낳을 때에 보통사람보다 아주 뛰어났다. 점점 장성하여 스승과 벗을 삼은 분은 다 대아유현(大雅儒賢)들이었다. …… 공이 스스로 섬긴 바는 고청 서기·구봉 송익필· 매부 백록 신응시·부인의 백부 황강 김계휘·율곡 이이를 벗으로, 사귄 바는 아계(丫溪)신경진·연평군 이귀·죽계 심종직·습정 송방조·죽창 이시직·수옹 송갑조 등이다. 이를 분석해보면 청좌와 송이창은 성리학적 측면에서 정암 조광조·탄수 이연경-화담 서경덕-고청 서기·백록 신응시-청좌와 송이창-동춘당 송준길로 이어지는 직계 가학의 원류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동천 김식 이진 김덕수로 이어지면서 월정 윤근수의 뒤를 이어 월사 이정구 청음 김상헌 포저 조익으로 이어지는 청서의 맥과 율곡 이이·황강 김계휘·사계 김장생·청좌와 송이창·신독재 김집-동춘당 송준길로 이어지는 산서의 맥이 합쳐지면서 정치적으로 서인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17)
선조 수정실록에 보면 ……김계휘는 심의겸 박순 정철 이이 박응남 윤두수 윤근수 박점(朴漸) 이해수 신응시와 함께 서인으로 지목되었고, 황강 김계휘의 문인으로 사암 박순·고봉 기대승·율곡 이이가 있다. 이와 같은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송이창과 함께 교유하던 분들은 당시 이름이 높은 문인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18)
또한 연보 기록에 보면 15살 되던 해의 2월 송준길은 집에서 관례를 하였다. 관례는 오늘날의 성인식과 같은 것으로, 이날의 관례는 스승 김장생이 와서 손수 관을 씌워주었고, 그 아들인 김집이 와서 관례의 절차를 도왔으며, 같은 고을의 선비 이시직이 손님을 대표하였다.
19)
송준길의 별당인 동춘당의 동춘당기를 보면 포저 조익에게 부탁하여 당기를 받는데, 어떤 인연을 가졌을까? 항시 의문점을 가졌다. 조익과의 인연은 이시직과 매부사이다. 즉 이시직은 송준길의 증조부 송세영의 외 증손자이고, 포저 조익은 이시직의 부 이빈의 사위로 이시직과 조익은 처남·매부사이이다. 포저 조익은 동춘당의 증조부 송세영의 외 증손녀 사위이다. 이시직과 조익은 처남 매부사이고, 동춘당과는 대고모부의 증손자며 증손녀의 사위이기 때문에 내종 6촌간이 된다.
20) 그런 연유로 이시직은 송촌에 살았고, 송준길과 이시직, 송국택은 송촌에서 1년에 三科 급제하는 영광을 누린다. 포저 조익은 처가댁에 자주 드나들었을 것으로 생각되어 동춘당과 인연을 맺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백록 신응시와 신경진은 어떤 인연일까? 백록은 동춘당의 조부 임천공 송응서의 사위로 송이창의 누이가 신응시의 계배(繼配)가 된다. 신응시는 송이창의 매부지만 스승이 되며, 아호(丫湖) 신경진은 신응시의 전실 아들로 송응서의 외손자였다. 신경진은 한때 송촌 외가에서 살았기 때문에 송남수와 교류하고, 항렬은 아래지만 송이창과 벗으로 사귀었다.
21)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는 강릉으로 피난 갔다. 송이창의 누이의 전실자제인 신경진이 강릉대도호부사로 있었기 때문에 누이가 관사에 있었으므로 전 가족이 가서 당시 의지하였다.
22)
송애당 김경여는 송담 송남수의 외손자로 송촌에 살았다.
23)
지봉 이수광은 금암 송몽인의 처 민부인의 외삼촌으로 송촌에 왕래하였고, 금암 송몽인 사후 『금암집』의 서문을 쓴다.
24)
사우당 송국택은 송희명의 아들로 송몽인의 양아들로 입후된다. 송국택은 동춘 우암과 더불어 쌍청공의 후손이고, 또한 한마을에서 같이 거주하여 청좌와에게 같이 배웠으며, 또 사계선생을 같이 스승으로 섬기어 세상에서 溪門三宋稱之라 일컬었다.
25)이와 같이 17세기의 송촌은 당시 명현과 석학들이 살면서 국내의 많은 학자들이 모여와서 학문과 정치를 토론하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Ⅲ. 은진송씨 4대시인
은진송씨 가운데 시를 남긴 선비는 많다. 그 가운데 후세 사람들에게 까지 작품이 꾸준히 회자되는 선비가 네 분이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은진송씨 3대시인은 세상에서 송담 송남수, 금암 송몽인, 수재
26) 송희갑 등 세분이 알려져 있다. 그분들에 대한 프로필을 대충 살펴보고 필자는 같은 시기에 활동한 동춘당 송준길의 아버지 송이창, 한 분을 더 추가하여 은진송씨 4대시인으로 명명해도 좋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거론해본다. 이들은 우연히 같은 시대에 활동하고 이사동에 체백이 묻혀 있다.
Ⅳ. 나가며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은진송씨 3대시인이 송남수 송몽인 송희갑이 활동한 연대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까지이다.
그런데 우연히 송몽인과 송희갑이 활동한 시기(생졸연대 : 1582년~1612년)가 비슷하다. 송몽인의 문집 『금암집』에 보면 송희갑을 애도하는 悼希甲(p175)이라는 시에 “……공연히 구슬같은 해내(海內)로 하여금 문장만 외우게 하였지……중략…… 흰머리로 그대의 관하에 떠돌며 옛날 그대의 시부(詩賦)를 회상하니 대들보에 가득한 밝은 달은 홀로 눈물이 의상을 적시게 하네.”애도의 시가 있어 평소 송촌에서 교류가 잦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송남수와 송이창은 숙질 항렬로 송남수의 문집 『송담집』과 송이창의 문집 『청좌와유고』 양 문집에 공히 열 대번 송담공과 청좌와공을 생각하는 시가 나오고 있다.
이 두분 또한 같은 시기(생졸연대가 송담이 태어난 1531년에서 청좌와가 죽은 1628년 사이에 위 송촌 아래 송촌 이웃에서 교류하며 활동했다.)가 비슷하다.
네 분이 동시대에 같은 회덕 송촌이라는 공간에서 서로 교류하고 시작(詩作)활동을 하였으며, 죽어서는 산내 사라니(이사동)에 체백이 묻혀, 위 네 시인들을 조심스럽게 은송 4대시인이라 칭하고 싶다.
은진송씨의 4대시인 특히 청좌와 송이창의 시는 연구자들의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된다.
4대시인 묘표명 찬서자
1. 송담 송남수
수립년 : 1707년, 撰 : 상촌 신흠, 書 : 옥오재 송상기, 篆 : 선원 김상용, 追記 : 제월당 송규렴
2. 청좌와 송이창
수립년 : 1628년 , 撰 : 청음 김상헌, 前面大字 : 신독재 김집, 書 : 동춘당 송준길, 篆 : 선원 김상용
수립년 : 1667년 , 撰 : 우암 송시열, 書 : 동춘당 송준길
3. 금암 송몽인
수립년 : 1911년 , 撰 : 옥오재 송상기, 前面大字 : 석촌 윤용구, 書 : 송병길, 追記 : 난곡 송병화
4. 수재(秀才) 송희갑
수립년 : 1691년, 撰 : 봉곡 송주석, 書 : 송월당 송병익
강화도 석주 권필 송희갑 유적
1. 석주 권필 유허비
강화도 송해면 하도리 고려산 기슭에 은거하며 후학을 가르치던 석주 초당 터에는 강화부사로 있던 후손 권체가 세운 (석주 권필 유허비)만 외롭게 남아있다.
살림집은 10여리쯤 떨어진 바닷가에 있었다. 지금은 염소를 매어두는 말목으로 쓰일 뿐 사람이 없이 방치되어있다.
스승 송강 정철이 만년을 보낸 송정촌과도 그리 멀지않은 곳에 있다.
(『恩津宋氏 宗報 89號』)
2. 송희갑의 은사 석주 권필이 판 우물터
처음 초당에 찾아갔을 때 권필의 문집인 『석주집』에 기록된 대로 유허비에서 마을을 끼고 백보쯤 올라가자 초당생활 당시 석주가 파서 날마다 물을 길어와 차를 끓여마셨다고 하는 샘물이 나왔다.
우물 뒤편으로 예전에는 앵두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恩津宋氏 宗報 91號』)
(以堂 成彬 記)
주석
- 1)대전시립박물관, 2017,『2017 한국의 명가 은진송씨 특별전』 「山林之門」 徵召-학덕으로 나라의 징소를 받다. 2017 한국의 명가 은진송씨 특별전
- 2)송성빈, 1995, 『朝鮮朝宋山林의 硏究』 향지문화사
- 3)송각헌, 1979,「著名先代 : 文集彙錄」 『恩津宋氏 世蹟錄』 보전출판사 p349~356
- 4)한상수, 2006, 「이사동에 묻힌 3대시인」, 『은진송씨 집장촌 이사동』 대전광역시 동구문화원, p220
- 5)양선정(兩先正) : 동춘당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을 일컬음
- 6)송용재 편저, 2010, 「문헌과 묘역」 『이사동 문화유적』 은진송씨 목사공파 종중, p29-p153 유덕상, 2013,「이사동 은진송씨 묘역의 묘비와 금석문」 『이사동 민속마을 역사·민속 정밀조사 보고서』 대전광역시 p121-p140
- 7)송시열, 1994,「읍호정 중수기」 『宋子大全』 권 141, 『청좌와 유고』 향지문화사, … 정자에 二十景이 있는데 송담종장이 줄여서 十二景으로 하였다.(1666. 7)
- 8)송인협, 「숭현서원 연구」, 『대전문화 제6호』 대전광역시 p352-385
송현강, 「송담 송남수와 향촌사회」, 『대전문화 제22호』 대전광역시 p208-209
1607년 숭현서원 중수를 위해 송남수를 도왔던 인물로는 송이창이 있다. 송이창은 송남수의 조부 송여림의 동생인 여집의 증손 즉 재종질로 20년 이상 차이가 나지만 뜻을 함께하여 향촌과 문중 대소사를 논의해 나갔다. 그의 시에는 송이창을 아끼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중수 당시 송이창은 마침 부친 송응서의 상을 치르느라 회덕에 머물고 있었다. 또한 중수 후 8년 뒤 1617년 숭현서원의 강당인 입교당이 세워졌는데, 서원의 여러 유생들과 함께 입교당 설립을 주도한 이는 당시 원장이었던 송이창이었다. 건물이 완성되자 입교당(立敎堂)의 전액과 시를 써서 설주에 달게 했다.
- 9)송몽인, 1986, 『琴巖集』 은진송씨 효정공 사우당파 종중, p175 시에 … 가이 애석하구나 흙가운데 옥수(玉樹)같은 그대를 묻었네 공연히 해내(海內)로 하여금 구슬같은 문장만 외우게 하였네…
- 10)이 글은 2018년 12월 27일 충남대학교 기초교양교육원(국어국문학과)주최로 지역문화가치보존연구사업-전문가초청 콜로키움 참가(주제 : 은진송씨 4대시인)발표한 내용을 정리한 것임. 이후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2019년 1월 15일 이사동 은진송씨 4대시인 묘역답사 안내를 실시한 바 있음
- 11)송성빈, 1995, 『朝鮮朝宋山林의 硏究』 향지문화사
12산림은 다음과 같다.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 문도재 송기후, 늑천 송명흠, 운평 송능상, 과암 송덕상, 성담 송환기, 강재 송치규, 추양 송계간, 금곡 송래희, 수종재 송달수, 연재 송병선 선생이다.
- 12)송창영·송창준 편저, 1990, 「제2절 집단부군(명의)」 『恩津宋氏先蹟史』 은진송씨 대종중 P47-P78
- 13)송창영·송창준 편저, 1990 「제4장 제2절 안인유씨」 『恩津宋氏先蹟史』 은진송씨 대종중 P86-P143
- 14)앞의 책, 「제5장 제1절 쌍청당부군(유)」 은진송씨 대종중 P145-P259
- 15)성봉현, 2017, 「山林之門」 徵召-학덕으로 나라의 징소를 받다. 「회덕에 입향한 은진송씨가의 가계와 사람들」, 『2017 한국의 명가 은진송씨 특별전』 P186-P207
송현강, 2013, 「송담 송남수와 향촌사회」 『대전문화』 대전광역시, p202
- 16)앞의 책, 「은진송씨가의 과거와 혼반」P186-P206
- 17)송이창, 1994, 송시열 「淸坐窩公 墓表」 『淸坐窩 遺稿』 향지문화사, P222-P229
- 18)「宣祖修整實錄」, 『朝鮮王朝實錄』
- 19)송준길, 1981, 「庚申48년 先生十五歲」, 『同春堂年譜』 P6
- 20)송국택, 1986, 『國譯四友堂集』下 恩津宋氏四友堂孝貞公派宗中, P292, 선생(송국택)이 죽창과 동춘과 더불어 거주하는 마을을 같이하였고, 또 같은 해에 과거에 오르니,[갑자년에 선생이 명경제에 합격하였고, 죽창이 중광제에 합격되었고, 동춘이 사마시에 합격되었음] 사람들이 말하기를 ‘한 마을에 세분의 어진이가 한해에 삼과에 등제한 것은 예부터 오면서 드물게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21)송현강, 2013, 「송담 송남수와 향촌사회」 『대전문화』 대전광역시, p212
- 22)송이창, 1994, 「年譜」 『淸坐窩 遺稿』 향지문화사, P166
- 23)성봉현, 2017, 「山林之門」 徵召-학덕으로 나라의 징소를 받다. 「과거와 혼반」, 『2017 한국의 명가 은진송씨 특별전』 대전역사박물관P186-P206
- 24)송몽인, 1986, 「琴巖集序」, 『琴巖集』 , 恩津宋氏四友堂孝貞公宗中, P1-P6
- 25)『國譯四友堂集』下 342 선생 및 동춘 우암과 더불어 쌍청공은 같은 할아버지가 되고, 또한 한마을에 같이 거주하여 청좌와에게 같이 배웠으며 또 사계선생을 같이 스승으로 섬기어 세상에서 溪門三宋稱之이라 일컬었다. 최근 문중에서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 선생을 포함하여 은송 3송은 제월당 송규렴 선생을, 계문3송은 사우당 송국택 선생을 칭하기도 한다.
- 26)수재(秀才) : 예전에 미혼남자의 존칭으로 머리가 좋고 뛰어난 사람을 칭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