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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송씨의 역사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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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山林)은 산림지사 산림숙덕지사 등 다양하게 일컬어진 용어로서 향촌에 은거한 채 학문과 학덕 높은 선비를 뜻하는 말이다. 산림의 역할은 경연(經筵 : 임금 앞에서 경서를 강론하던 일)과 서연(書筵 : 왕세자 앞에서 경서를 강론하던 일) 국가의 중대한 일에 자문역할을 하던 학덕 높은 선비를 가리킨다.
산림의 위상은 학문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정점(頂點)에 있었기 때문에 그 위상(位相)이 대단히 높았다. 서울 고로(古老)들의 말에 의하면 “열 정승이 한 왕비를 당하지 못하고, 열 왕비가 한 산림을 당하지 못한다.” 고 하는 사실은 산림의 위상을 짐작해주는 말이라 하겠다.
은진송씨 문중에서는 산림 92명중 12분의 산림을 배출한 굴지(屈指)의 가문으로 그 위상(位相)을 자랑한다.
세상에서 충청도 양반이라는 말과 공자 맹자가 살던 훌륭한 성현(聖賢)의 고향과 같다하여 회덕을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고도 한다.
즉 공자 맹자와 같은 성현에 버금가는 훌륭한 유현(儒賢), 동춘당 송준길 선생과 우암 송시열 선생과 같은 명현이 사신 곳이라는 말이다.
이런 말은 왜 생겼나?
17세기이후 정치의 주역으로 등장한 학덕 높은 산림학자들이 이 지역에서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산림(山林)의 60%가 충청도 출신이고 충청산림의 대부분이 회덕 산림이기 때문이다. 산림은 학덕이 높은 재야의 숨은 선비로서 과거를 거치지 않고도 높은 관직으로 부름을 받아 특대를 누리던 산림학자를 칭하는 말이다. 산림과 구분을 위해서 사림의 정의를 살펴보자.
사림은 계유정란 후 훈구파와 사림파로 사대부 층이 분리되면서, 숲속에서 글만 읽는 절의파 계열을 일컬어 사림(士林)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우여곡절 끝에 조선사회에 정치 사상적 주역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6세기로 자신들의 향리에서 경제적 기반을 잡아가는 동시에 여론 주도 층으로 사회적 입지를 굳혔다.
사림이 16세기의 주역이라면 산림은 17세기의 정치의 주역이다.
산림은 높은 학덕으로 경연관 서연관 등의 직책으로 왕과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산림 인사들의 6가지 기준은
첫째 학덕을 겸비할 것
둘째 산곡임하에 은거해 있을 것
셋째 과거(대과)를 거치지 않을 것
넷째 국가로부터 징소(徵召)를 받았을 것
다섯째 산림 직에 피임되었을 것
여섯째 현실정치에 관련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후기에 산림의 진출이 활발한 이유는 과거제의 문란과 잇따른 전란, 그리고 당쟁으로 인한 혼탁한 정치상황으로 인하여 관도를 기피하고 은둔하는 선비들이 많아져 조정에서는 향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산림을 등용함으로써 민심 수습을 도모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산림의 정치 참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1623년 인조반정이후이다. 인조반정의 주역들은 반정의 명분을 두 가지로 삼고 있었다.
하나는 대내적으로 광해군의 패륜행위를 바로잡아 예치주의의 정치이념을 이룩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광해군의 명・금(明・金)에 대한 중립외교가 대의를 상실한 것이므로 이를 바로 잡겠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반정(反正)정권은 초야에 은거해 있던 산림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고자 하였다.
이는 김장생・장현광・박지계 등의 새로운 산림세력이 대거 중앙정계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계기는 후일 송준길・송시열 등 이곳 회덕의 사림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정치적 배경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산림들은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청에 대해 굴욕적 굴복을 하여 신칭(臣稱)을 하는 등 대의명분을 잃게 되자 ‘선비가 가히 출사(出仕)할 의가 없게 되었다.’라 하여 낙향하여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그러던 중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였다. 이때 효종은 산림을 등용하여 북벌의 뜻을 펴려 하였으므로 초야에 은거하고 있던 선비들이 출사할 명분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효종은 즉위 초부터 저명한 산림들을 중앙에 불러 모았다. 이 때 김상헌과 김집을 필두로 하여 송준길・송시열・이유태・권시 등의 산림계가 대거 중앙에 진출하게 되었다. 김상헌을 제외한 나머지 5현을 밀지오현(密旨五賢)이라고 부르며 특히 이들 중 김집을 제외한 4현은 모두 우리 회덕 출신의 유현들이었다.
이후 은진 송씨 가문에서 산림이 12명이 배출되는 등 회덕은 기호철학의 본향으로 안동의 영남철학과 서로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
은진송씨 12산림은 다음과 같다.
송준길(宋浚吉) : 동춘당(同春堂) 문정공(文正公), 인조조(仁祖朝)
송시열(宋時烈) : 우암(尤菴) 문정공(文正公), 인조조(仁祖朝)
송기후(宋基厚) : 문도재(聞道齋), 숙종조(肅宗朝)
송명흠(宋明欽) : 늑천(櫟泉) 문원공(文元公), 영조조(英祖朝)
송능상(宋能相) : 운평(雲坪), 영조조(英祖朝)
송덕상(宋德相) : 과암(果庵) 문간공(文簡公), 정조조(正祖朝)
송환기(宋煥箕) : 성담(性潭) 문경공(文敬公), 정조조(正祖朝)
송치규(宋穉圭) : 강재(剛齋) 문간공(文簡公), 정조조(正祖朝)
송계간(宋啓榦) : 추양(秋陽) 문경공(文敬公), 순조조(純祖朝)
송래희(宋來熙) : 금곡(錦谷), 헌종조(憲宗朝)
송달수(宋達洙) : 수종재(守宗齋), 헌종조(憲宗朝)
송병선(宋秉璿) : 연재(淵齋) 문충공(文忠公), 고종조(高宗朝)
宣祖 | 仁祖 | 孝宗 | 顯宗 | 肅宗 | 景宗 | 英祖 | 正租 | 純祖 | 憲宗 | 哲宗 | 高宗 | 計 | |
恩津宋 | 宋浚吉 宋時烈 |
宋基厚 | 宋明欽 宋能相 |
宋德相 宋煥箕 宋穉圭 |
宋啓幹 | 宋達洙 宋來熙 |
宋秉璿 | 12 | |||||
安東金 | 金昌翕 | 金元行 金亮行 |
金履安 | 金直涥 | 金仁根 | 金炳駿 | 7 | ||||||
坡平尹 | 尹宣擧 | 尹元擧 尹舜擧 |
尹 拯 | 尹鳳九 尹東洙 尹東源 |
7 | ||||||||
全州李 | 李萁洪 李同揆 |
李鳳祥 李泰壽 |
李象秀 | 5 | |||||||||
光山金 | 金長生 | 金 集 | 金正黙 | 金洛鉉 | 4 | ||||||||
潘南朴 | 朴世采 | 朴弼周 朴弼傅 |
朴性陽 | 4 | |||||||||
安東權 | 權 諰 | 權尙夏 | 權震應 | 2 | |||||||||
驪興閔 | 閔翼洙 閔遇洙 |
閔彛顯 | 3 | ||||||||||
慶州李 | 李惟泰 | 李世弼 | 李養源 | 3 | |||||||||
淸風金 | 金 幹 | 金鍾厚 | 2 | ||||||||||
昌寧成 | 成 渾 | 成近黙 | 2 | ||||||||||
平山申 | 申碩蕃 | 申 暻 | 2 | ||||||||||
延安李 | 李喜朝 | 李直輔 | 2 | ||||||||||
南陽洪 | 洪啓能 | 洪直弼 | 2 | ||||||||||
牛峯李 | 李有兼 | 李 翔 | 2 | ||||||||||
德水李 | 李友信 | 李敏德 | 2 | ||||||||||
延日鄭 | 鄭 瀁 | 鄭齊斗 | 2 | ||||||||||
其他 | 鄭仁弘 (西山) |
趙 涑 (豊壤) 張顯光 (仁同) 安邦俊 (竹山) 鮮于浹 (太原) 柳 楫 (晋州) |
徐元履 (達成) 許 穆 (陽川) 尹 鎬 (南原) 鄭 維 (?) |
鄭道應 (晋州) |
丁時幹 (載寧) 朴光一 (順天) 柳後章 (豐山) 李 束 (禮安) |
蔡之洪 (仁川) |
韓元震 (淸州) 沈 錥 (淸松) 兪彦鏶 (杞溪) 魚有鳳 (咸從) |
金日柱 (慶州) 吳熙常 (海州) |
趙秉悳 (楊州) 任憲晦 (豊川) |
28 | |||
計 | 2 | 9 | 8 | 6 | 16 | 2 | 21 | 10 | 5 | 4 | 5 | 4 | 9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