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재기는 우암 문정공의 11대손으로 대사성공 병학의 손자이다. >공의 큰 어머니 안동권씨가 논산군 채운면에 살고 있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대전에서 그 곳으로 이사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날 무렵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사태가 심각해지자 고향인 논산으로 내려와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그로인하여 1년의 옥고를 치렀다.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 읍에서는 1919년 3차례의 만세시위가 있었다. 첫 번째 만세시위는 3월 10일이었고, 두 번째 만세시위는 3월 20일 오전 10시경에 벌어졌다. 아침부터 송재기 이근석 이봉세 이근오 이근태 유치만 등은 옥녀봉에서 출발하여 읍내로 내려와 1천여 명의 군중들을 4대로 나누어 동서남북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다. 이때 시위도중 김경락 씨는 적군의 총탄에 맞아 숨지고 기독교 선교사 등 미국인 2명은 일본 헌병에게 맞아 앞니가 부러지기도 했다.
송공에 대한 판결문을 보면 「송재기 이근석 이봉세 이근오 는 3월 20일 강경시장의 장날을 기하여 만세 부를 것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송재기 이근석은 태극기 약 350매(실제는 500매였음)를 만들어 이를 가지고 이봉세 이근오와 함께 오후 5시경에 강경시장 부근인 옥녀봉에 모여 만세를 부른 뒤, 산을 내려오면서 만세를 계속 부르고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옷시장(上市場) 방면으로 행진하였다.
일본군에게 체포된 송재기는 당시 나이 20세로 공주지방법원에서 1년6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1919년 4월9일) 이에 불복한 송공은 항소를 신청하여 1년 2월로 감형되었으나 동년 5월 2일 다시 상고하였다. 그러나 기각당하고 복역 중 영친왕의 혼인 관계로 감형되어 1년 만에 풀려났다. 그 후 1950년 5월 30일 대전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울에 올라가 있던 중 6·25 동란을 만났고 채 피신하기도 전에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북으로 끌려갔다.
1989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다음해에 재심하여 1990년 12월 26일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다시 추서되었다.
1985년 옥녀봉 정상에 논산 군수가 세운 「강경 항일독립만세운동 기념비」가 서있는데 송공의 기록은 비석 왼쪽에 새겨져 있다.(『계간은진송씨종보』제12호 199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