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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정보
대종회 정보 > 인물정보송병선(宋秉璿)
우암문정공파
문충사(文忠祠)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호 대전광역시 동구 용운동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묘역 전북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묘비 전북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 |
연재(淵齋) 문충공(文忠公) 송병선(宋秉璿) 1836년(헌종 2)에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 면수(勉洙)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니 경연관(經筵官),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낸 수종재(守宗齋) 달수(達洙)와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입재공(立齋公) 근수(近洙)는 각각 큰아버지와 막내아버지가 되시며 한일합방을 반대하여 순절한 심석재(心石齋) 병순(秉珣)은 아우가 되신다. 큰아버지인 수종재에게 심석재와 함께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하였다. [독서하는 여가에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이이(李珥), 송시열(宋時烈) 등 큰 선비들의 문집에서 좋은 글귀를 뽑아서『근사록(近思錄)』과 같은 범례를 좇아 책을 지어『근사속집(近思續集)』이라 하였다. 1878년(고종 15) 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 경연관, 서연관, 시강원 자의 등에 차례로 선임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880년(고종 17)철인왕후(哲仁王后)가 승하하자, 왕대비와 대왕대비는 소공시마복(小功緦痲服)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고 상소를 올렸다. 그 뒤 고종이 은사(恩賜)를 베풀고자 하여 높은 관작으로 불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1886년(고종 23)과 이듬해에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다만 그 때에 의제변개(衣制變改)가 단행되자 극력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임금의 답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두문불출하였으며, 이듬해 전북 무주군 설천면 두길리의 산속 물가에 서벽정(棲碧亭)을 짓고 도학을 강론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조정에서 다시 가의(嘉義)로 품계를 올려주었으나 역시 응하지 않고 다만 사교(邪敎)6)를 엄금할 것을 상소하였다. 1905년(광무 9)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 기강을 바로 세울 것, 국가비용을 원활히 할 것 병력을 길러 외환을 대비할 것 등의 십조봉사(十條奉事)를 올렸다. 이어서 을사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계속 전개하려고 하였으나 경무사 윤철규(尹喆奎)에게 속아서 납치되어 강제로 고향인 회덕7)으로 호송되었다. 그 해 음력 12월 30일 국권상실에 통분하여 황제와 국민, 유생들에게 유서를 남겨 놓고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1905(고종 42) 2월 2일 : 경연관(經筵官) 송병선(宋秉璿)이 약을 먹고 죽었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이 유현(儒賢)이 학문에 정교하고 심원한 것은 선정(先正)의 연원을 계승한 것이니, 노숙하고 높은 덕망으로 세교(世敎)를 유지하였다. 한 번 조정에 사표가 될 만한 인물을 만나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는데 어렵고 위태로운 때를 만나 울분이 치밀어 시골로 돌아가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어두운 거리에 등불이 꺼졌으니 어찌 애통한 마음을 이길 수 있겠는가? 죽은 경연관 송병선의 상사는 특별히 2등의 예장(禮葬)을 하사하고, 예식원(禮式院)으로 하여금 마을에 정려문을 세우고 시호를 내려주는 은전을 시행하되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의시(議諡)하도록 하며, 특별히 대광 의정(大匡議政)에 추증하고 아경(亞卿)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라. 제문은 직접 지어서 내릴 것이다." 1905(고종 42)년 2월 14일 : 의정대신(議政大臣)으로 추증(追贈)된 송병선(宋秉璿)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문충의 시호의 의미는 문(文)은 도덕이 있고 널리 들은 것의 도덕박문(道德博聞)이고, 충(忠)은 나랏일을 걱정하느라 집안일을 잊은 것의 여국망가(慮國忘家)의 시법(諡法)이다. [『고종실록』 고종 43(1906)년 2월 14일] 유서에는 을사오적의 처형, 을사늑약의 파기 및의로써 궐기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였다. 연재가 자결하자 몸종으로 있던 공임(恭任)이 따라서 자결하여 세간에 의로운 비(婢)라 칭송하였다. 연재가 순절하자 고종은 2등 예장(禮葬)으로 치장(治葬)토록 하고 친히 제문(祭文)을지어 예관(禮官)을 보냈다. 또 충신의 정려를 내리고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의정대신(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議政大臣)을 증직하였으며 문충(文忠)의 시호와 정려(旌閭)를 내렸다. 1966년 영동에 문충사(文忠祠)를 지어 배향하였는데 이는 1970년대에 대전광역시 동구 용운동으로 이전되면서 서원형태로 갖추어 용동서원이라 하였고 전국 6개 서원에 배향되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무계만집(武溪 輯)』이 있으며 문집으로『연재집(淵齋集)』이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무계만집(武溪謾輯), 벽사설(闢邪設), 근사속록(近思續錄), 동유연원록(東儒演原錄), 동감강목(東鑑綱目)이 있다. 묘소는 전북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全北 沃溝郡 臨陂面 邑內里) 남성산(南成山) 경좌(庚坐)에 초배(初配) 증정경부인 완산이씨와 합폄이다. 행장은 아우 병순(秉珣)이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