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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회 정보 > 인물정보송희갑(宋希甲)
첨사공파
송희갑(宋希甲) 시인 묘비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
가. 송희갑의 유작(遺作)은 한 수(一首)가 아니라 두 수(二首)다 |
남운경(남용익)이 우리나라 역대 제가의 시를 모은 시선집〈箕雅 기아〉의 완성을 앞두고 출판을 준비하고 있을 때, 남용익이 송희갑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시선집에 그의 시를 한 수 넣고 싶어서 그와 한 집안 식구인 우암 선생에게 그가 남긴 시가 있는지 문의했던 것 같다. 그래서 〈箕雅 기아〉권 4에 희갑이 병들어 강화도에서 죽음을 앞두고 지었다고 하는 春日待人(봄날 사람을 기다리며)이 수록될 수 있었다.
春日待人(봄날 사람을 기다리며) 岸有垂楊山有花 산에는 꽃이 피고 언덕엔 수양버들 離懷悄悄獨長嗟 이별의 정 안타까워 홀로 한숨 내쉰다. 强扶藜杖出門望 병든 몸 억지로 지팡이 짚고 문 나서 바라봐도 之子不來春日斜 그대는 오지 않고 봄날 해만 저문다. 송희갑은 쌍청공의 후예로 서출이다. 송희갑(1584~1605)은 첨사 송세욱의 손자로 태어나서 22세에 요절하였다. 어려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고, 마치 신선 같은 풍채와 도인 같은 골격을 지녔다고 하여 선풍도골(仙風道骨)이라는 말을 들었다. 용력 또한 뛰어나 나이 일곱 살 때 쌍청당의 주옹(主翁) 송담공이 설죽(雪竹)을 가리키면서 운자(韻字)를 부르면서 “네가 능히 시를 지을 수 있느냐?” 고 하자 즉석에서 응하기를 설죽(雪竹) 竹也今朝喪父翁 대나무가 오늘아침 부친상을 당하니 子孫千百素衣同 자손들이 천이고 백이고 모두 소복을 입었구나. 晩來鳥雀來相弔 늦게사 새와 까치가 찾아와 조문하니 淸淚欄干日下風 맑은 눈물은 난간에 떨어지고 해아랜 바람이 이네 라 하였다. 참으로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린 나이에 이런 시가 어찌 나오겠는가! 하늘이 내린 천재시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뒤에 송강 정철의 제자로서 당대에 유명한 시인이었던 석주 권필(1569~1612)은 송희갑의 문필이 뛰어남을 보고 크게 칭찬한 나머지 그를 강화도로 데려다가 문하생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강화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재가 뛰어남을 아는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은 그의 죽음을 참으로 애석하게 여겼다. 송희갑의 시는 태학사 호곡 남용익(1628~1692)이 우리나라 명시를 골라서 편찬한 『기아(箕雅)』에 수록될 만큼 문명을 떨쳤다. 오늘날 그의 시집이 전하지 않는 점이 유감스럽다.3) 石洲(석주 : 권필)가 와서 송담이 그 시를 보이자 크게 칭찬하면서 “나의 의발(衣鉢)을 전할 만 하다.”하고는 그를 데려다 가르쳤다. 이상과 같이 희갑의 생전 작품은 한수가 아니라 『송자대전』과 『기아』에 두 수가 전해진다. 앞으로 여러 문집을 파악하여 더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나. 송희갑의 생애(生涯) 희갑의 생애는 『송자대전』에 우암 선생이 「남운경에게」보낸 편지와 송주석이 짓고 송병익이 쓴 「송희갑묘비」 와 『국조인물고』와 『현주집』에 조찬한이 지은 「송생전」 『석주집』에 권필의 시「病中聞也雨有懷草堂因敍平生二十四首」, 『송담집』에 석주가 송담에게 보낸 편지 「知舊書牘」에 희갑의 삶의 흔적이 보이고 있다. 『송자대전』과 『현주집』에 실려 있는 희갑의 삶의 궤적은 다른 점이 적지 않게 나타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스승 석주를 만나는 과정이나 일찍 죽게 되는 병명이나 병을 앓게 되어 죽음에 이르는 경위에 대해서는 한 집안으로서 그 경과를 익히 알고 있었을 우암선생의 기록이, 강화도에 들어가서의 생활과 시작(詩作)과 학문탐구과정은 조찬한의 기록이 신빙성이 있을 것으로 보여 그런 방향으로 삶의 과정을 재구성해보려 한다. 희갑(1584∼1605)은 첨사공 조부 세욱, 부친 인의(引儀)수(璲)의 서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었고, 특히 시를 잘하여 송강의 제자 석주 권필의 문하에서 배웠으나 혼인도 하지 않고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천재시인이다. 어려서부터 신동 선풍도골로 일컬어졌고 용력 또한 뛰어나 이미 일곱 살 때 설죽(雪竹)이란 시를 지었다. 후일 석주가 쌍청당에 송담공을 찾아오자, 송담은 희갑의 시를 보이자 탄복하고는 “나의 수제자가 될 만하다.”하고는 데려다 가르치고 싶다고 요청했다. 희갑이 열대여섯 살이 지나자 송담공은 자금을 대주어 석주문하에서 수업하도록 도와주었다.4) 이때 석주는 어지러운 현실에 등을 돌려 세상과 인연을 끊자고 강화에 은거하고 있었다. 희갑은 석주의 시명(詩名)을 사모하여 배움을 얻고자 천릿길을 멀다않고 책 상자를 지고 찾아가 공손하게 제자 되기를 간청했다. 무상(無常)한 감회에 겨웠던 석주는 이때 일을 시를 적어 남기고 있다. …………………중략…………………… 부족하다 부족한 몸 헛된 이름 얻어서 천리 길 멀다않고 송생이 찾아 왔네. 물 긷고 나무하며 부지런히 일을 하니 묻노라 힘들여서 무얼 이루자는 건가 …………………중략……………………… 권필의 “주룩주룩 내리는 비에 자신의 평생을 되돌아보며 지은 24수 연작”에서 희갑은 석주의 제자가 된 뒤 직접 나무를 해서 밥을 지어먹으며 나이어린 학생들 보다 더욱 열심히 학문과 시를 연마하며 공부했다. 석주는 “천한 일을 하는데 게으른 빛이 없고 지성스럽다. 바야흐로 초당을 지키며 사는데 10년을 계획했다.”고 적어놓았다. 다른 제자들이 모두 염병에 걸린 스승에게 등을 돌리지만 희갑은 위험을 무릅쓰고 서재에서 석주 댁까지 몇 십리 길을 하루 세 번 왔다 갔다 하며 스승 병구완에 힘을 쏟았다. 그 과정에서 자신도 염병에 걸려 사경을 헤맸다. 그만큼 스승을 진정으로 존경하였고 석주 역시 스승으로서 서출 제자인 송희갑을 한 치도 소홀함 없이 정성을 다해 이끌어 주었다. 이때 정황을 석주는 「송담에게 보낸 편지」5) “송생은 마음을 세움이 보통이 아니고 학문에 심히 힘쓰니 후배 중에서 얻기 쉽지 않은 사람입니다. 다만 나 필이 남의 스승 노릇하기가 부족한 것이 부끄럽습니다. 여타는 일일이 다 쓰지 못하니 ……………” 희갑이 열심히 학문과 시를 부지런히 탁마하여 스승이 더 가르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음을 송담에게 알려주고 있다. 석주는 희갑에게 대성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에서는 한도가 있고 불법 월경을 해서라도 천하 중국 땅을 밟아보아야만 시가 좋아질 것이라 하면서 보다 넓은 세상에서 견문을 쌓으며 공부할 것을 권면했다. 그 말을 들은 희갑은 뛸 듯이 기뻐하며 중국어를 배우는 한편 압록강을 헤엄쳐 건너기 위해 날마다 강화 앞바다에 들어가 떠서 헤엄치기를 오리처럼 훈련하였다. 그러나 바닷물이 짜서 기혈(氣血)이 삭아 마침내 창백하게 되어 고향에 돌아와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 또한 희갑은 용력(勇力)이 뛰어나 아름다운 경치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찾아가 샅샅이 훑어보는 호방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장가들지 않아서 후사가 없으므로 우리 집안에서 지금 그의 묘 앞에 조그만 빗돌을 세우기로 계획하고 있다고 우암 선생은 「송자대전」에서 언급하고 있다. 다. 송희갑 묘비 송희갑 묘비를 세우기 위해 三宋(동춘당, 우암, 제월당)이 주축이 되어 추진되었다. 묘비가 세워지는 과정을 살펴보면 “동춘 선생 또한 그의 높은 재주와 색다른 거동을 칭찬하였고, 그의 처지가 서자로 태어났고 일찍 요절하여 묻혀서 일컬어지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누차 말씀에도 나타내었고 슬퍼하여 탄식하고 그 묘소에 표를 하려고 여러 일가들과 상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후일 제월당께서 여러 일가들과 더불어 양선정의 유지를 받들어 나 주석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일은 동춘 선생과 우암 선생께서 일찍이 간절하게 생각하여 사모하며 이루려하던 일이니 어찌 한마디 말을 써서 선세의 뜻을 받들지 않겠는가?’하였다. 누차 사양했으나 들어지지 않았다.6) 묘비는 양선정의 유지에 따라 우연히 양선정의 손자가 찬서(撰書)했다. 우암선생의 손자 송주석이 짓고, 동춘 선생의 손자 송병익이 써서 1691년에 대전광역시 용전동 고속터미널 부근 허수암 도덕동 묘소 앞에 세웠다. 그런데 후손이 없이 돌보는 이마저 없이 지내오다가 이 지역이 1980년 주택지로 재개발될 때, 묘는 이장하지 못하여 실전하게 되었고, 이 묘비만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조부 첨사공 묘역으로 옮겨 세웠다. 4. 묘비 옮긴 사연 희갑은 서출로 미혼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자손이 없어 묘소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묘소관한 기록은 네 차례 나타난다. 1) “심후척(沈候惕 : 후는 군수 또는 방백의 칭호)은 공과 동문이다. 일찍이 이 고을에 현감으로 왔을 때, 제문을 지어 그 묘에 제사지냈다. 그 이후로는 다시는 한 사람도 술 한 잔 따라 놓는 사람이 없었다. 묘도 허물어져 다시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송주석이 짓고 송병익이 쓴 송희갑 묘비에서) 심척의 묘갈에 의하면 “심척은 사계의 문인으로 학행유생(學行儒生)으로 6품직에 발탁되어 흡곡(歙谷 : 강원도 통천군 흡곡면)현감에 임명되었으며 정랑에 이르렀다. 병자호란(1636) 당시 강화 마니산에서 순절하였으며, 1727년(영조3) 충신정려를 받았다.” 이상의 기록에서 볼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에 심척이 묘소에 다녀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 심척이 다녀간 약 60여년 후, 송규렴이 양선정의 유지를 받들어 송주석에게 비를 세우기를 명하였다. 1691년 우암선생 손자 봉곡 송주석이 짓고, 동춘선생 손자 송월당 송병익이 쓴 비석이 묘소 앞에 세워졌다. “우암파에서 사람을 시켜 벌초를 해주었다. 는 기록이 입재상공문집에 「고송희갑묘문」에 있다. ‘홀로 살다죽은 희갑의 묘가 관리되지 않고 허물어져 일가 되는 사람으로서 안타까워서 사초를 하고(분묘를 수리하고) 잔과 실과를 놓아 흠향하다.’ 7) 묘비가 세워진지 약 200여년 뒤 의정공 입재 송근수(1818∼1903 우암선생 8대손)가 허물어져가는 묘소를 관리했다는 기록이다. 필자가 1997년 이사동 묘역과 입향조를 조사할 때, 고 심농 송진도선생과의 대화내용을 일기에 기록했다. 심농께 더 여쭈어보지 않은 것이 한이 되고 문집을 발췌하지 못한 것 또한 안타깝다. 이 기록을 통하여 적손도 아니면서 자손 없는 무덤을 일가의 한 사람으로서 후회 없는 고인의 넋을 위로한다는 입재의 정신을 알 수 있고, 우리는 그 정신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3) 묘비 옮긴 사연은 다음과 같다. 묘소가 대전광역시 용전동 고속터미널 부근(당시 지명은 虛受庵 道德洞)에 있었는데 후손이 없어 돌보는 이마저 없이 지내오다가 이 지역이 주택지 고속터미널로 개발될 때, 천장(遷葬)하지 못하여 실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늘의 도움이 있었는지 체백(體魄)은 실전되었어도 묘비가 당시 대전고속터미널을 개발하고 관리하던 사장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1979년 방후손인 현재 첨사공 도유사 송서호(첨사공 세욱 16대손 : 당시 주식회사 근대화체인 대표이사)씨가 발견하게 되었다. 송서호씨는 방선조 희갑의 비석을 찾기 위하여 소장자와 몇 차례의 이전 절차를 협의했으나 소장했을 당시 그간의 경과 과정과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얽혀있어 결렬되었다. 사장의 말에 의하면 “자기가 소장한 것은 동네사람들이 빨래판으로 쓰던 것이다. 내가 이를 발견하고 살펴보니 묘비 전면대자에 『宋君希甲之墓』라 쓰여 있었다. 비석에 君(군)字라는 글씨가 새겨져있는 것은 처음 보았다. 君字의 표현은 아주 희귀한 것으로 생각하여 소장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어렵게 구입했다.” 며, 내가 소중히 생각하고 소장하려 했기 때문에 돌려줄 수 없다. 그래서 비석 양도가 여의치 않게 되었다. 이 문제를 고 송형빈(동춘당 11대손 : 당시 대전지방검찰청 수사계장)씨의 자문을 얻어 해결했다. 1980년 소장자 비서에게 30만원의 사례비를 주고 상사라니(동구 이사동 산17)소재 조부 첨사공 묘역으로 이전 수립(竪立)하였다. 이후 묘비는 종중의 결의로 인의공 수(璲)의 묘역 옆으로 이전하게 되었고, 생부의 상석은 묘비 앞으로 옮김으로써 묘역의 석물이 현재의 위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은송 4대시인(송담 송남수, 청좌와 송이창, 금암 송몽인, 수재 송희갑)의 한 분인 수재 희갑의 묘비가 보존될 수 있게 되었다.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