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살 때(1614) : 송담과 더불어 계룡산에서 놀다. 수옹공이 아들 시열을 가르쳐주기를 부탁하였다.
· 56살 때(1616) : 갑천에 읍호정 望辰居를 세웠다.(정자가 船巖川위에 있었고 초가집을 지어 망신거라 하였다.) 이 때 사계 또한 가화를 만나 연산에 있으면서 서로 왕래하며 즐겼고, 죽창 수옹과 더불어 詩酒로 서로 초청하며 즐겼다. 10월에 송담공이 쌍청당을 중창하고 모든 일가를 모이게 하고 제사를 올리고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숭현서원 원장을 하고 입교당을 세웠다. 사계선생과 더불어 강선대에서 놀다. 때로는 고양(羔羊)을 잡고 술을 장만하여 친한 벗들과 더불어 그 속에서 회포를 지워 보내고 세상을 마치려 한지가 10여년이 되었다.
· 58살 때(1618) : 2월에 아들 준길의 관례를 올리다.
· 62살 때(1622) : 사계선생과 더불어 냉천 강선대에서 놀다. 죽창 등 제공들이 같이 갔다.
· 63살 때(1623) : 아들 준길이 진주 정씨(우복 문장공 정경세)의 따님과 혼인하다.
· 64살 때(1624) : 이괄의 난이 일어나 임금께서 남으로 순수하시니 천안에서 공경히 맞아 모시고 호위하여 공주에 이르렀다.
· 66살 때(1626) : 정월에 영천군수에 제수되었다. 12월에 송담공 상에 곡하다.
· 67살 때(1627) : 정묘호란이 일어나다. 이 때 사계선생이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부군으로 소모 참모관을 삼았다. 이에 부군이 곧 향서당에 들어가서 모든 父老를 모여놓고 소모(召募)할 모든 일을 분부하매 대략 頭緖(일의 단서)가 있었다. 이 때 주상께서 강도(江都)로 향하시고 세자께서는 임시로 조정을 나누어 남하하시니 부군이 공주로 달려와 문안드리고 사계와 더불어 같이 임시로 있었는데 이 때 수옹이 오고 영상 이원익 우상 상촌 신흠을 방문하였다. 장차 강도에 가서 임금의 일을 도우려 했다. 종사 윤전 참모 유즙 등이 따라 이르렀다. 4월에 사계와 더불어 황산원에 모였다. 5월 23일 청사의 정침에서 마치었다. 임종에 미치어 모신 자를 명하여 자리를 바꾸어 동을 머리를 하게하고 부축하여 앉아서 의관을 바르게 하시고 편안하게 돌아가셨다. 원근이 다 슬프게 여기고 말하기를 착한 사람이 그만 가시었다. 하고 분주하게 와서 곡을 하였다.
· 1658년 4월에 아들 준길이 귀하게 됨으로써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1719년 推恩하여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송이창(1561~1627)은 임천군수 송응서의 아들로 태어났다. 연보를 보면 매부 백록 신응시에게 한시를 배우고 연보 곳곳에 친구들과 시주(詩酒)를 나눈다는 기사가 많이 산견되고 있다. 『청좌와유고』를 보면 시가 100여 편 이상 되는데 송담 송남수와 관련되는 시가 20여수에 이른다.1) 특히 재종숙 되는 송남수와 읍호정과 갑천 계룡산을 유람하며 서로 수창(酬唱)하며, 숭현서원 복설과 문중의 대소사 등 서로 상의하며 지냈다. 하세한지 350년 이후에 문집이 나와서 더 수집하여 완벽한 문집을 만들어 분석해보면 좋은 연구가 되지 않나? 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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