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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정보
대종회 정보 > 인물정보송준길(宋浚吉)
동춘당문정공파
대전 동춘당 종택 -국가 중요민속문화재 제289호 대전 대덕구 송촌동 |
동춘당(同春堂)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
1673(현종 14)년 : 1월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세자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禮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에 추증하라고 명하였다. |
회덕동춘당(보물 제209호) |
상신 김수항이 아뢰기를, “전에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는, 이황(李滉)의 행적은 사람들의 이목에 밝게 남아있으니 시장(諡狀)이 있다하여 그의 행적이 더 올라갈 것도 없고 없다하여 더 내려갈 것도 없다 하여 드디어 시장을 기다리지 않고 사시(賜諡)하기를 청하였으니, 지금 송준길에게도 이 예를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하니 상이 사시하라고 특명하였다. |
만물과 더불어 봄과 함께 한다. 라는 뜻으로 봄의 훈훈함과 만물이 소생하는 생기로 삼고 봄기운을 얻어 그 따스함과 생기로 다시 소생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봄은 천지생물의 기운으로 봄이라 함은 곧 생의 뜻이다. 송준길 선생이 동춘당이라고 한 뜻은 인을 구하는데 있다. 인은 천지의 공됨이요 모든 착함의 근본인 것이다. 결국 동춘당이란 선생이 그 따스함과 생기를 세상에 널리 주고 싶어 하는 마음, 인을 널리 세상에 전하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포저 조익의 동춘당기에 “송군이 그 당의 이름을 「동춘」으로 한 것은 仁을 구하는데 있음을 알겠다. 무릇 仁은 천지의 공변됨이요. 모든 착함의 근본인 것이다.”
사제문(賜祭文)
1) 1672(현종 13)년 12월 : 예조의 낭관을 보내어 치조(致弔)하고 치제(致祭 : 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죽은 신하를 제사지내다.)하였다.
세자도 궁관을 보내어 치조하고 치제하였다. 세자가 영(令)하기를, “찬선의 서거를 들으니 내 마음 놀라고 슬퍼 참으로 스스로 진정하기 어렵다.
이어 지난날 나를 간절히 가르쳐 주던 일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목이 메고 더욱 슬프니 특별히 궁관을 보내어 치조하고 치제하라.”고 하였다.
2) 1716(숙종 42)년 11월 : 흥암서원에 어필(御筆 : 임금의 글씨)을 걸고,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상의 전교의 대략에 “편액을 건지 세월이 이미 오래되었다.
병중이라 필획(筆劃)이 더욱 졸렬하지만 반드시 친히 써서 판자에 새겨 내리는 것은 나의 존경하는 마음을 붙이기 위함이다.
아! 임금이 현자를 지성으로 존경하면 이 또한 선비들의 취향을 정하고 사설(邪說 : 그릇되고 간사한 말, 올바르지 않은 논설)을 종식시킬 수 있으니, 내 뜻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하였다.
해조(該曹 : 예조)가 이 비망기를 가지고 가서 함께 판자에 새겨 서원의 편액과 함께 걸기를 청하였다. 승지가 명을 받들고 가서 치제(致祭)하였다.
이때 모인 호남과 영남의 유생이 수 백인이었다. 청주 화양에 있는 우암의 서원에도 동시에 은명(恩命)을 내렸다.
3) 1717(숙종 43)년 : 3월에 상이 온천에 거동하여 승지를 보내어 선생의 무덤에 치제(致祭)하였다.
4) 1750(영조 26)년 : 상이 온천에 거동하여 승지를 보내어 선생의 무덤에 치제(致祭)하였다. 승지 서명신이 와서 왕명을 시행하였다.
5) 1680(숙종 6)년 : 예랑(禮郞)을 보내어 선생의 무덤에 사제(賜祭)하였다.
상신 민정중이 선생이 일찍이 적신(賊臣 : 윤휴)에 대해 논한 말이 증명되었다하여 장곡강(張曲江)의 고사에 따라 선생의 무덤에 사제하기를 청하였다.
이때 모인 원근의 사자(士子)가 1천여 인이었다. 우암도 제문을 지어가지고 와서 제사지냈다.
6) 1756(영조 32)년 : 2월에 문묘에 종사하고 사당에 치제(致祭)하였다.
1681(숙종 15)년부터 중외의 장보(章甫 : 유생)가 종사를 청하는 논의를 누차 일으켰는데, 이해 봄에 관학(館學)이 연달아 다섯 차례 상소해 청하니, 상이 유생 안종철 등을 인견하여 면대해 유시하고 특별히 윤허하였다.
이달 15일에 성묘(聖廟 : 문묘)에 올려 배향하고, 예관을 보내어 선생의 사당에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특별히 부조(不祧 : 5대가 지나도 신주를 체천(遞遷)하지 않고 영구히 사당에 봉사하게 하는 것)를 명하였다.
7) 1758(영조 34)년 : 상이 양정재(養正齋)에 거동하여 관원을 보내 선생의 사당에 치제하였다.
양정재는 경도(京都 : 서울) 백악산 아래에 있는데, 선생의 소기(小記)와 제액(題額)이 있었다.
상이 이것을 보고서 특별히 사당에 치제하라고 명하고 친히 제문을 지어 내렸다.
8) 1795(정조 19)년 : 우암선생과 함께 어제(御製) 화성문묘(華城文廟) 고유문(告由文)을 내리다.
아름다운 문정이여 문채 사방에 미쳤네.
좌석엔 표방하는 말 멀리하였고 마음엔 남과 나의 한계 없었네.
나와서도 물러갈 듯이 하였고 조정을 산야처럼 여기었다네.
한 시대에 목표를 같이 하였던 두 송 선생을 좌우에 모셨다오.
9) 1839(헌종 5)년 : 금담서원에 사제(賜祭)하고 사제문(賜祭文)을 내리다.(지제교 심승택 지음)
금담의 물 맑고도 잔잔한데 수없이 굽이쳐 흐른 강한과 아홉 번 굽이쳐 흐른 무이의 한 근원의 물이 천리를 흘러 멀리멀리 동으로 달려왔네.
강가의 이슬 맺힌 갈대와 중류에 모래톱은 완연한데 그분은 보이지 않으니 아 어이 만날 수 있으리.
옛날에 우리 영묘 큰 정치하시려고 뜻한 사업은 선광이셨고 전수한 심법은 요희셨지요.
동덕을 구하시어 널리 시행하려하시니 하늘이 보필을 주어서 경이 시기에 맞추어 초야에서 나아오니 빈사로 대우하셨지요.
만언의 봉사에는 『대학』, 『중용』의 말로 대의를 부식하고 대계를 경륜했으며 자신이 부담한 것은 이윤이나 여상처럼 에로 세속을 다스려서 민이를 바로잡는 것이었다네. …… 중략 …… 경이 조정에 있을 때는 행실이 조정의 표준이었는데 경이 죽자 교화가 쇠하여 풍속이 시대 따라 박해졌고, 사교가 서양에서 들어와 우리 백성들을 빠뜨려서 예의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사교를 엿처럼 좋아하니 이천의 근심처럼 오랑캐가 되었네.
경이 구원에서 살아온다면 지금을 어떤 시대라 하겠소. 나는 광세의 감화 일어 개연히 탄식하면서 한 묶음의 심향(心香 : 정성스런 마음으로 사르는 향)을 호당의 사당에 오르시오.
10) 1854(철종 5)년 : 가묘에 사제(賜祭)하고 사제문(賜祭文)을 내리다.(지제교 윤병정 지음)
11) 1864(고종 1)년 : 가묘에 사제(賜祭)하고 사제문(賜祭文)을 내리다.(지제교 서경순 지음)
12) 1875(고종 12)년 : 가묘에 사제(賜祭)하고 사제문(賜祭文)을 내리다.(지제교 미상 未詳)
13) 1910(순종 4)년 : 순종이 남순(南巡)할 때, 사제(賜祭)하고 사제문(賜祭文)을 내리다.(지제교 미상 : 未詳)
흥암서원 경북 상주시 연원1길) |
동춘당필적(보물 제167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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