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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회 정보 > 인물정보송국택(宋國澤)
사우당효정공파
사우당 효정공 국택 신도비 충북 보은군 수한면 발산병사 충북 보은군 수한면 사우당 효정공 국택 묘역 충북 보은군 수한면 사우당 효정공 사당 대전 동구 이사동 |
사우당(四友堂) 효정공(孝貞公) 송국택(宋國澤) 그는 15일에 회현방 우사에서 하세하였다. 연세가 63세이다. 부음을 듣고 위에서 놀라고 슬퍼하여 중사(中使)에게 호상을 명령하였다. 마지막 길을 측은히 여기는 예전이 대단히 융숭하였다. 처음에 공주 유성 남쪽 소홀리에 장례(1660.3.1)하였다가 계축년(1673.12. )에 유성현의 조교리 해향의 자리에 합폄하였다. 사제문(賜祭文) 1) 1660(현종 1)년 12월 6일에 상이 예관을 보내시어 고자(孤子)를 조문하시고 제를 지냈다. (예조정랑 윤형계가 와서 예를 시행하였다.) 상께서 1660년 2월에 「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사 홍문관 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관(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 의 증직(贈職)을 명하시었다. 2) 1696(숙종 22)년 : 임금이 외손 김석연을 보내 묘소에 치제하고, 사제문(賜祭文)을 내리다. 제문은 지제교 이정명이 초하여 올리다. 3) 1756(영조 32)년 11월 6일 : 예조정랑 윤면동(尹冕東)을 보내 치제(致祭) 하였다. 사제문(賜祭文)은 이의철(李宜哲)이 지었다. …… 상략 …… 진실한 우리 경(卿)은 바로 성모(聖母)의 외조이심으로 왕후의 수레가 빛나고 황홀한 것을 경이 직접 보시었도다. 가문이 성하고 빛나매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서 전야(田野)의 낮은 관직으로 돌면서 산림(山林)의 덕을 닦는 선비들과 교의(交誼)를 맺고, 영예와 치욕을 도무지 잊고 지내어, 한 세상이 다 칭송하여 부러워하니 오직 경의 존양(存養)한 나를 여기에서 가히 증험하겠도다. 내가 자성(慈聖)을 받들어 뜻을 겉으로는 정성을 다하기를 생각하여 이미 이 마음 미루어 황비(皇妃) 외가에 미치었도다. 하물며 올해는 먼 옛날의 느낌이 더욱 간절하여 비풍하천(匪風下泉)의 생각이 높은 절개와 의리를 더욱 우러러 사모하도다. 이에 명하여 자손을 녹용(錄用)하고 달려가 존령(尊靈)에 강신하며 유식(侑食)을 하게 하나니 영혼이 있거든 이 술과 안주를 흠향할지어다. 4) 1756(영조 32)년 12월 21일 …… 상략 …… 먼 저번에 상(上)이 선생의 유문(遺文)과 묘지를 취해 보시고 그의 충절을 깊이 탄식하시었는데 마침 강화유수 이이명(李頤命)이 소(疏)를 올리어 충렬사(忠烈祠)에 사제(賜祭)하시기를 청하여, 상(上)이 허락하시고 인해 선생에게 아울러 치제 하라고 명하시어 이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리시어 말씀하시기를 「지난번 강화유수 이이명의 소청사(疏請事)를 보니 실로 나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지라 그런고로 정축년 성이 함몰되었던 날로써 충렬사에 사제하기를 특별히 허락한다. 이 일로 인하여 별달리 감동한 바가 있으니 대개 우리 성모(聖母)의 외할아버님 증좌찬성 송모(宋某)가 이 해에 수립한 충절은 역시 숭보지전(崇報之典)이 가히 없어서는 아니 되겠다. 내가 일찍이 송봉조하(宋奉朝賀 : 송시열)의 찬술한 찬성의 묘문 및 그의 스스로 저술한 모든 학문을 보니 그의 절개와 의리가 남송의 주변(朱弁)과 방불하게 서로 같으면서도 혹은 더 하였다. …… 상략 …… 사제문에 이르기를 「오직 옛날 위공과 주변(朱弁)이 혹은 죽었고, 혹은 살았으나 본래 정한 마음이 같은 것은 내가 자양(紫陽 : 주희)에 들었노라. 하물며 경의 충절은 우연히 전벽(全壁)한 것이 비할 것이 아니요. 양후(楊后)가 죽기를 참은 것은 조씨의 일점혈육을 위한 것과 같았도다. 처음에는 통사(通使)로 간 것을 수치로 여기었고, 느지막이는 위호(僞號)를 배척하여 쓰지 아니하였는데, 화약을 취하여 죽기를 맹세하였으니 그의 잡은바 절개와 의리를 가히 보겠도다. 저 충렬사를 돌아보니 마침내 같은 절개와 의리를 돌아가네. 한 체제로 제(祭)를 지내어 숨은 의리를 천명하는 뜻을 붙이노라. 용문산(龍門山)의 기도한 글을 외우니 유지가 얽히어 있음을 알겠도다. 존령(尊靈)이 어둡지 아니하거든 흠향하소서!」 5) 1816(순조 16)년 : 임금이 예관 임천군수 이헌성을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제문은 지제교 김학순이 초안해 올렸다. 6) 1876(고종 13)년 : 임금이 예관 공주판관 신석유(申錫游)를 보내 묘소에 치제하고 사손을 녹용토록 지시하다. 지제교 홍대중이 초안해 올렸다. |
1860(철종 11)년 10월 : 시장(諡狀)이 이루어졌다. 좨주 금곡 송래희가 찬술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