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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정보
대종회 정보 > 인물정보송인수(宋麟壽)
규암문충공파
규암 문충공 송인수 묘역-충청북도 지정문화재 제131호 충북 청원군 문의면 |
1. 규암(圭菴) 문충공(文忠公) 송인수(宋麟壽) 1521년(중종 16)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弘文館 正字)에 임명되었다. |
1523년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은전을 입었고, 1526년 수찬(修
撰)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으로 있을 때 김안로(金安老)가 권력을 쥐고 정권을 좌지우지
하자, 홍문관의 모든 관원들과 함께 인사행정의 공정한 실시를 내세워 그를 탄핵했다.
이어서 경연(經筵)의 전경(典經)을 겸임하고, 왕의 특지(特旨)로 충청도지방을 순찰한
뒤 공물, 잡역의 폐해를 보고하였다. 1525년 박사(博士)로 승진하고 이어서 부수찬(副修
撰), 수찬(修撰)을 거쳐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이 되어 검토관(檢討官)으로서 경연에
참여하였는데, 육조 낭관(六曹 郞官) 임면(任免)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 뒤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 부응교(副應敎) 등을 역임하면서 당시 유
행한 사치풍조를 배격하고 교육진흥책을 건의하였으며, 특히 김안로의 재집권을 막으
려다가 오히려 그 일파에게 미움을 받아 1534년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좌천되었다.
이때 열병에 걸려서 돌아왔는데 이를 빌미로 감안로 일파에게 탄핵을 받아 사천(泗川)으
로 유배되었는데 이때 구암(龜巖) 이정(李楨)이 규암의 제자가 되었으며 약관에 문과에
장원급제 하였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하자 풀려나 이듬해 예조참의(禮曹參議)가 되고 성균관 대사성(成均館 大司成)을 겸임하면서 후학에게 성리학(性理學)을 강론
(講論)하였다233). 이어서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 同副承旨)와 예조참판(禮曹參判)을 거
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이 되었는데 윤원형(尹元衡), 이기(李芑) 등의 미움을
받아 1543년 전라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관찰사로 부임하여 형옥사건(刑獄事件)을 제때에 처리하고 교화(敎化)에 힘써 풍속을 바로잡았으며, 각 고을에『소학(小學)』과 오경
(五經)을 인쇄 보급토록 하여 교육을 진흥시켜 많은 인재(人材)를 양성하였다. 이 때 기
대승(奇大升)이 규암으로부터『소학』을 배워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을 하였다.
특히 조정의 숭유정책(崇儒政策)을 받들어 영암(靈岩)에 기영정(耆英亭)을 세우고 학술을 장려
하였다. 이 때 남평현감(南平縣監) 류희춘(柳希春), 무장현감(茂長縣監) 백인걸(白仁傑)
등과 뜻이 맞아 학문을 토론하였다.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다시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윤원형을 탄핵하였는데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
禍)가 일어나자 한성부 좌윤(漢城府 左尹)에 있다가 탄핵을 받고 파직(罷職) 당하여 청
주에 은거하여 있다가 1547년(명종 2) 9월 20일에 사사(賜死)되었다. 향년이 49세였다.
금부도사(禁府都事)가 오던 날이 마침 그의 생일이었는데, 제자 송응상(宋應祥), 송응
서(宋應瑞), 조강(趙綱), 노수신(盧守愼) 등 일가친척과 제자들이 많이 모였다가, 온 집
안이 크게 울부짖었는데도 그는 얼굴빛도 변하지 않고 꿇어앉아 임금의 명을 받았으며,
목욕하고 의관을 정돈하고 동작이 평소와 같았다.
스스로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무엇때문에 내가 죽는지 모르겠다.”하고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 하더니, 큰 글씨로‘하늘과
땅이 이 마음을 알아주리라.’라고 쓰고는 그것을 처남 권덕여에게 주며 “나를 보고 징계
를 삼지 말고 부지런히 글을 읽고 주색을 조심하여 지하의 혼을 위로하여 다오. 장사는
검소하게 지내되 예법을 어기지 말라. 부끄러운 마음을 지니고 사는 것은 부끄러움 없
이 죽는 것만 못하니라.”하고 사촌 동생인 기수(麒壽)에게 전해주라는 편지에 “자식 하
나를 그대에게 부탁하니 내가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라고 썼는데 글씨가 힘이 있어 펄
펄 생기가 풍겼다. 그날 밤 흰 기운[白氣]이 집을 관통하여 하늘에 뻗쳐서 하루를 지나도
록 끊어지지 않았다.
그는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 壁書事件)을 계기로 부패한 나라 일을 비판하는 젊은
사류(士類)들의 기풍(氣風)을 길러 놓은 죄로 사사(賜死) 당했으니, 조광조(趙光祖)와 더
불어 의롭게 죽음을 당한 큰 선비였다.
사림(士林)의 추앙(推仰)을 받았으며 유성의 숭현서원(崇賢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문의(文義)의 노봉서원(魯峰書院), 전주
의 화산서원(華山書院),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선조 때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문충(文忠)의 시호가 내려졌다.
저서로는『규암집(圭菴集)』이 있다.
1660(현종 원)년 : 시장(諡狀)이 이루어졌다. 문정공 시열이 지었다.
1663(현종 4)년 : 이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오윤겸 정경세 송인수에게 시호를 내리다.
고 영의정 오윤겸에게는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판서 정경세에게 문숙(文肅)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참판 송인수에게는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특별히 이조판서 대제학(吏曹判書 大提學)을 증직하고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라 했다.
송문정공 준길의 건백(建白 : 특별히 아룀)으로 이 명령이 있으니 도덕박문(道德博聞)은 도덕이 있고 널리 들은 것을 문(文)은 이라하고, 위신봉상(危身奉上)은 자신이 위태로우면서도 임금을 받드는 것을 충(忠)이라 한다.
[『현종실록』, 현종 4(1663)년 1월 29일]
사제문(賜祭文)
1) 1662(현종 3)년 : 노봉서원에 사액할 때, 사제문(賜祭文)을 내리다. 대제학 김만기 짓다.
……유현은 학문에 돈독하여 윤강(倫綱 : 삼강오륜)을 부식하였네. 일민(逸民 : 초야에 은거하며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의 높은 발자국으로서 쏠리는 파도에 부디 치었네.
오히려 이와 같은 사람을 의뢰하여 세상일을 힘쓰고 풍속을 깨우쳤네.
나아가는 일은 비록 다르나 그 공로는 즉 한가지일세. …… 중략 …… 성조(聖朝 : 돌아가신 임금)께서 원통함을 씻어주었으니, 백세에도 반드시 법식이 되겠지.
오직 일민(逸民)이여! 하늘에서 태어난 기품 뛰어나게 탁월했네.
스승의 가르침 받지 않고서도 묵묵히 알아서 묘리를 연구했네.
깊숙한 학문은 가이없고, 하늘의 이치 관통하여 어디까지인지 헤아릴 수 없네. 집안일이 어려움도 많았으니 역경에 처함이로다.
눈물 흘리며 따라다니어 아들된 직분 게을리 하지 않았네. 뉘 쓰라린 마음 알아줄까? 그 사적이 잠겨 잠시 어두웠지.
청백리에 도 맞고 권도에도 맞았으니, 지난 철인(哲人 : 학식이 높은 사람)들과 잘 부합되는구나. 대방(大方)딛고 일어섰으니, 도(道)로 더불어 어긋되지 않는구나. …… 중략 …… 북창에 누워 편안히 쉬었으니 티끌세상에 뛰어났네.
탁월하고 높은 지조는 천년에도 짝할 만한 사람 드물 것이네.
내가 두 신하를 생각하여 감탄하기를 어제 일 같다 하였노라. 저 남쪽 시골 바라보니 남긴 발자국 서로가 방불도 하는구나. 유허 있는 마을은 고치지 않고, 부당(斧堂 : 묘소)의 봉축 이곳에 있으니 수립한 풍성(風聲 ; 들리는 명성)은 후학을 흥기하였네.
이곳에 사우(祠宇)를 건축하니 변두(籩豆)의 질서 정연도 하네. 솟장을 올리어 사액을 청하는데, 많은 선비가 대궐을 두들겼네.
선조(先朝)의 명이 계시어 나의 사복(嗣服 : 왕위에 오름)에 이르렀도다. 예관을 보내어 맑은 술잔 올리니, 영혼이 있거든 흠향할지어다.
2) 1665(현종 6)년 : 상왕께서 온천에 행차하셨다가 제관 예조정랑 박청(朴淸)을 보내어 묘소에 제사를 지냈다.(사제문 지어올린 사람 未詳임) 현손 기명(基明)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셨다.
3) 1717(숙종 43)년 : 상왕께서 온천에 행차하셨다가 제관을 보내어 묘소에 치제(致祭 : 임금이 제물과 제문/지어올린사람 알지 못함)을 보내어 죽은 신하를 제사함)했다.
4) 1750(영조 26)년 : 상왕께서 온천에 행차하셨다가 제관을 보내어 묘소에 제사를 올렸다. 사제문(賜祭文) 지어올린 사람 알지 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