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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암(果庵) 문간공(文簡公) 송덕상(宋德相) (1710/숙종 36~1783/정조 7)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정조 즉위 후 권신 홍국영의 비호로 3년 만에 동부승지에서 이조판서로 승진하였다. 홍국영이 실각한 후에 그의 일파로 몰려 죽었다.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신리 세칭 만의(萬義) 증조부동지공(同知公) 기태(基泰)의 묘소 우측 간좌(艮坐)에 있다.
묘표는 종6세손 규헌(奎憲)이 짓고 참판 김용진(金容鎭)이 썼다.
신도비(神道碑)는 직각(直閣) 심주택(沈周澤)이짓고 참판 민병승(閔丙承)이 쓰고 승지 윤종승(尹從承)이 전(篆)했다.
그 때가 1783년(정조 7) 정월 7일이었다. 사후 관직이 회복되고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자는 숙함(叔咸)이고, 호는 과암(果菴)이다.
교관 무원(婺源)의 아들이다.
1753년(영조 29) 유일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 洗馬)14)·자의(諮議)·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년) 정조가 즉위함과 동시에 권력을 잡은 홍국영(洪國榮)의 비호로 그해 동부승지를 거쳐 예조참의에 올랐으며, 이듬해에는 경연관에 제수되었다.
경연관으로 있을 때 인재와 효자를 천거할 것, 청백리를 선발할 것, 학풍을 진작시킬 것 등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어 호조참판을 거쳐 1779년(정조 3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해 홍국영이 정조에 의해 축출되자 그의 부당함을 직언하였다.
1780년 홍국영이 왕비를 독살하려던 사건이 일어나자 그의 일파로 몰려 삼수부(三水府)에 안치된 지 1년여 만에 병으로 죽었다.
순종 1년 10월 22일 : 고(故) 이조 판서(吏曹判書) 송덕상(宋德相)과 고 관찰사(觀察使) 홍술해(洪述海)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도록 명하였다.
순종 3년 8월 26일 : 송덕상(宋德相)에게 「문간(文簡)」의 시호를 내려주었다.
문간(文簡)의 시호의 의미는 박학다문(博學多聞) 즉 널리 배우고 들은 것이 많은 것을 문(文)이라 하고, 정직무사(正直無邪) 바르고 곧으며 사악함이 없는 것을 간(簡)이라 한다.
[『순종실록』 순종 3(1910)년 8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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