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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송씨 상대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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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덕을 숨기고 벼슬을 단념한 처사 쌍청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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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을 숨기고 벼슬을 단념한 처사 쌍청당
6세는 은덕불사(隱德不仕)의 처사(處士) 쌍청당 유(雙淸堂 愉)이다.
어머니 류씨부인은 나이가 80세에 가까워도 건강하여 병환이 없었다. 쌍청당은 어머니의 뜻을 어기지 않고 충실하게 봉양하였으며 절사(節祀)46)나 기제사(忌祭祀)를 당하면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목욕재계하여 공경과 정성을 다하였다.
일설에는 8대손 시열(時烈)이 비록 쌍청당이 신도비를 세울 품격은 못되지만, 59세에 세운 선군(先君) 수옹(睡翁) 신도비 규모의 돌을 동춘당과 함께 구하여 세웠다고 한다.
이 비는 1687년(숙종 13) 8월에 길 오른 쪽 언덕 밑으로 옮겨 세웠다. 〈은진송씨대종중〉에서는 18대손 시영(始永)에게 부탁하여 지은 묘표추기(墓表追記)의 내용을 다른
돌에 새겨 세웠다고 하는데 현재 그 비는 보이지 않는다.
묘소 좌측에는 1959년에 공사원 송시영이 세운 「處士 雙淸堂 宋公之墓/愼獨齋 金先生 遺筆」이라 쓰여진 큰 묘표비가 있다. 큰 묘표비 좌측에 청음 김상헌이 지은 쌍청부군 묘갈을 한글로 번역하여 세운 비가 있다. 이 비는 쌍청부군의 고매한 정신을 담은 묘갈이 한문으로 되어 판독이 어려워 대종중 공사원 일경 범섭의 뜻에 따라 동춘당 12대손 용대가 경비를 자담하여 한글 번역비를 쌍청회관 준공과 더불어 세웠다. 1998년 8월 23일 19대손 창준이 번역하고 18대손 준영이 썼다. 景淸齋 建築事實記
자료 해제
쌍청당기(1)천지 사이에 바람과 달이 가장 맑은데 사람 마음이 신묘함도 또한 이와 다름이 없다.다만 형체와 기질에 얽매이고 물욕에 더렵혀져 능히 그 본체를 온전히 보전하는 자가 드물다. 대개 연기와 구름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천지가 침침하게 가려졌다가도 맑은 바람이 이를 쓸어내고 밝은 달이 공중에 떠오르면 위와 아래가 통투(通透)하게 밝아져서 털끝만한 점철(點綴)47)도 없게 된다. 기상은 진실로 용이하게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니 오직 사람으로서 그 마음을 온전히 지켜 더럽힘이 없는 자라야 족히 이에 해당되어 스스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황노직(黃魯直)이 일찍이 이로써 용릉(舂陵)48)에 견주었으며 소강절(邵康節)49)도 또한 청야음(淸夜吟)50)이란 시를 지어 그 맛을 아는 자가 적다고 탄식하였다.
만년에 선학(禪學)을 좋아하여 그 마음을 담박(淡泊)하고 고요하게 지녀 사물에 얽매이지 않으니 그 천성이 높고 또 밝아 명리(名利 : 51))를 벗어난 사람이었다. 중추부사(中樞府事) 박공(朴公) 연(堧)이 그 별당에 쌍청(雙淸)이라 편액을 걸어주고 또 시를 읊었으며 안평대군(安平大君)이 또 좇아서 이에 화답하였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옷깃을 여미고 말하기를 참으로 쌍청이란 뜻이 이러하구나. 백이(伯夷)는 성인(聖人) 중에서도 청백한 분이었는데 공은 그 백이의 풍(風)을 듣고 일어난 자인가! 대개 바람이란 귀로 듣고 달은 눈에 보이는 것인데 모두 사람들이 두 가지 물건의 맑은 것은 알면서도 내 한 마음속에 저것을 부러워하지 않을 만한 것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런즉 그것을 아는 자가 알지 못하는 자와 견줄 수 없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제 공이 선조를 받드는 공경심과 손과 즐기는 흥취를 보건대 그 스스로 즐거워하는 자취를 가히 알 수 있다. 그러나 호량(濠梁)위에서 물고기가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濠上觀魚之樂]52) 장자(莊子)는 물고기가 무엇을 즐거워하는지를 알지 못하였으며, 혜자(惠子) 또한 장자가 무엇을 즐거워하는지 알지 못했다. 내 어찌 감히 조금인들 엿볼 수 있으리오. 공의 아들 주부 계사(繼祀)가 내가 그 말속(末屬)에 있다 하여 졸렬한 글을 비루하게 여기지 않고 시문을 쓰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대강을 쓰노라. 정통 10년(세종 27: 1445) 가을 9월 보름에 봉훈랑53) 집현전54) 부교리55) 지제교56) 세자 우사경57)(奉訓郞 集賢殿 副敎理 知製敎 世子 右司經) 평양(平陽) 박팽년(朴彭年)은 기하다. 雙淸堂記(1)天地間風月最淸人心之妙亦與之無異焉拘於形氣累於物慾於是焉能全其體者鮮矣盖烟雲四合天地陰 而淸風掃之明月當空上下洞澈無纖毫點綴其氣象固未易形容惟人之能全其心而無累者足以當之而自樂之故黃魯直嘗以此擬諸舂陵而邵康節亦有淸夜之吟歎知味者之少也盖今世亦有知其此樂者乎市津宋公本簪履之舊而不喜功名退居村野今三十餘年矣其縣曰忠淸之懷德里曰白達構祠堂於居第之東以奉先世置田數頃以供祭祀之需乃於祠東別立堂凡七間突其中以宜冬而右闢之者三豁其軒以宜夏而左闢之者三庖廚庖浴藏祭器各有所丹碧垣 華而不侈每時祀與忌日公必衣深衣入其堂以齋克敬克誠凡所致享皆遵禮經且値佳節必置酒邀賓或詩或歌以洽鄕黨之歡晩好禪學淡泊其心不以事物攖之盖其性高明而外乎聲利者也 中樞朴公堧扁其堂曰雙淸而詩之仍請於安平大君受其和余聞而斂曰有是哉雙淸之說也伯夷 聖之淸者也公其聞伯夷之風而興起者乎蓋風而耳得之月而目寓之人皆知二物之淸也而不知於吾一心有不羨乎彼者存焉然則安知其知之者之不與不知者比也今觀公奉先之敬娛賓之興其自樂之趣可知已然濠上觀魚之樂莊子不知莊子不知之樂惠子亦不知余何敢窺其涯浚哉公之令胤主簿繼祀以余在末屬不鄙辭拙傳記之聞其說而書其槪云正統十年秋九月望奉訓郞集賢殿副校理知製敎世子右司經 平陽 朴彭年記 쌍청당기(2)시진(市津 : 恩津) 송씨는 사족(士族)58)이다. 공이 약관의 나이도 되지 않은 때 처음 벼슬하여 몇 년 동안 조정에 있었으나 관직이 별로 올라가지 못하였다. 조금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회천(懷川)59)전원의 집[別墅]60)으로 물러와서 가택을 크게 수리하고 산 지 30년이 넘는다. 회덕 땅은 산이 높고 물이 깊으며, 흙이 비옥하므로 오곡을 심기에 적당하다. 때맞추어 김을 매고 수확하니 관혼상제(冠婚喪祭)에 씌어짐이 넉넉할 것이다. 그 동쪽 언덕에 별도로 몇 칸의 집을 지었는데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에 각각 거처할 수 있게 하였다. 담과 벽[塗墍]61)을 선명하게 단장하니 웅장하고 화려하다. 앞에는 버들과 느티나무, 뒤에는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었다. 화초와 볼만한 식물을 섬돌과 돌 사이에 섞어 심어 놓으니, 녹음과 향무(香霧)62)가 공몽(空濛)63)하고 엄애(掩靄)64)하도다. 정통 8년 계해(세종 25: 1443) 가을에 추부상공(樞府相公) 박연(朴堧)이 유성에 목욕하고 바람 쏘인 뒤 돌아가는 길에 여기에 들려 당을〈쌍청〉이라 이름 짓고 사언율시(四言律詩)를 지었는데 안평대군(安平大君)이 또 좇아 화답하였다. 갑자년(甲子年) 봄에 내가 선군(先君)의 상을 당하여 풍천(楓川)에 왔는데 공이 편지를 보내어 “상공은 유림의 위간(偉幹)이며 조정의 모범으로 소맷자락을 걷어 올리고 집의 현판을 써 주시고 대군(大君)은 궁중의 왕족이며 왕가의 귀인으로 초택(草澤)의 이름으로 상달함을 얻었으니 어찌 옹용(雍容)하고 온자(蘊藉)하다 하리오? 갱영(賡詠) 두 편은 규장(圭璋)이 찬란하여 산곡에까지 빛이 나니 오직 우리 한 집안 자손만이 영세(永世)의 보배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 한 고을의 산천초목에까지 솟구쳐 볼만하다 하겠으니 그대는 의(誼)로 사양하지 마시고 글을 지어 주시면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풍월은 천지간에 하나의 장구한 물체이다. 이제 봉연(蓬然)65)이 일어나서 취연(驟然)66)히 흩어져 하늘[太虛]67)에 돌아다니[周旋]68)고 우주[六合]69)에 헤쳐 나부끼어[披拂]70) 불면 초목이 쓰러지고 부딪히면 금석을 울리는 것은 바람이다. 그 오는 것이 진실로 때가 없으나 그러나 바람의 좋은 것을 말할 적에 반드시 봄을 들 수 있으니 그것은 온화하기 때문이다. 빙륜(冰輪)71)이 허공에 깨끗하며 계수나무 그림자[桂影]72)가 흔들려[婆娑]73) 동산 위에 떠서 북두성과 견우성 사이에 배회하니 물과 육지가 휘황 명랑하며 물상(物像)이 산란[凌亂]74)한 것은 달이다. 그 비침은 사시가 같으나 그러나 달의 밝음을 말할 적에 반드시 가을을 들 수 있으니 그것은 맑기 때문이다. 귀로 그 소리를 듣고 눈으로 빛을 봄은 하나의 바람과 하나의 달이 같은 것이다.그러나 인심의 변함과 그 처지가 같지 아니함을 따름인즉 풍월을 하는 자 또한 다를 것이 다. 공이 이 당을 지을 적에 그 창을 성글게 하였으므로 바람이 와서 맑게 되기 쉽고 그 처마를 비게 하였으므로 달이 떠서 비치기가 쉬운 것이다. 혹 학창의(鶴氅衣)75)를 입고 혹 화양건(華陽巾)76)을 쓰고 오피궤(烏皮几)77)에 의지하고 흰 머리[素髮]78)를 풀고 있을 새 바람이 서늘[冷然]79)하게 좌우로 불어와서 나의 옷을 파고들어 나의 자리를 시원하게 하며 더운 기운[煩歊]80)을 잠깐 잊는 사이[暫遇]81)에 스쳐버리고 상쾌[爽塏]82)한 흥취[逸興]83)를 생각한 즉 비록 도연명(陶淵明)처럼 고상하게 은거[高臥]84)한 자라도 이보다 낫지 않을 것이다. 혹 귀한 손이 와서 머무르고 과객이 말[驂]을 멈추며 거문고와 바둑이 베풀어지고 술자리가 마련되어 잔을 들어 서로 권하니 운치가 더욱 맑아 나를 듯이 세상을 등지고 홀로 초월하여 허공에 올라[御氣]85) 산만[汗漫]86)하게 노는듯하여 만사는 부운(浮雲)과 같고 신세를 아득히 잊었으니 우주에 가득 찬바람이 나의 당에 불어 더욱 맑게 하고 우주를 밝게 하는 것은 달이 나의 마음을 비추어 더욱 맑게 하니 이것이 공이 스스로 안락한 곳[樂地]87)으로 한 것이고 상공(相公)88)이 당 이름을 지은 뜻이다. 천지가 생기면서부터 이러한 풍월이 있는데 풍월의 낙을 즐기는 자 또한 그 몇몇인지 알지 못하겠으나 혹 바람은 알되 달은 모르고, 달을 알되 바람을 모르는 자도 있다. 송옥(宋玉)89)이 풍부(風賦)를 지을 적에 바람이 큼을 극히 웅장하게 말하였으나 보름[三五]달이 밝은 빛을 말하는 데에는 미치지 못하였은즉 바람에만 전적으로 하고 달에는 빠졌으며 위무(魏武)90)의 영가(詠歌)에는 남으로 나는[南飛]91) 슬픔을 형용하였으나 바람[巽二]92)의 만물을 울리는 성대한 것을 알지 못함인즉 달에만 편중하고 바람에는 간략한 것이다. 소공(蘇公)93)의 적벽강(赤壁江) 놀음은 거의 [바람과 달] 두 가지의 취미를 겸하였다고 할 수 있으나 뱃놀이의 위험함[舟楫之危]94)이 당의 안전한 것만 못하고 학을 꿈꾸는 괴이함[夢鶴之怪]95)이 벗과 술자리의 즐거움이 있는 것만 하겠는가? 공이 낙으로 삼는 것은 오직 당세(當世)에 구하더라도 짝이 드물 뿐만 아니라 옛 사람에게도 또한 비교가 적을 것이다. 어찌 공이 젊었을 적에 벼슬[簪笏]96)을 버리고 산림[泉石]에서 수양[膏肓]97)하여 처신하기를 주고받는 것에 도의가 아니면 털끝만치라도 구차하지 않고 이 마을이 만물 위에 뛰어나서 티끌만큼이라도 더럽히지 아니함인즉 이것은 마음속의「쌍청」인 것이다. 노모가 당에 계시어 연세가 팔순에 가까워도 창안백발에 건강하시고 무량하시니 공이 아침저녁으로 뜻을 순종하여 봉양하되 노래자[萊衣]98)의 아롱진 옷과 순임금의 사모지정[舜慕]99)은 날이 부족하다고 여김인 즉 이것은 모자지간의‘쌍청’인 것이다. 공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 계사(繼祀)는 청렴하므로 등용되어 중외(中外)에 빛내[揚歷]100)어 의젓하게 공명으로 자허하고 다음 계중(繼中)은 훌륭한 무예[武幹]101)로 왕실을 호위[黑衣]102)하여 왕의 시신(侍臣)이 되어 대중에 뛰어났으니 이것은 형제간의 ‘쌍청’인 것이다. 대개 공의 한 집 맑은 덕이 두루 흘러 통철(通徹)103)하여 사이가 없은[無間] 즉 그 강상(綱常)과 윤리(倫理)의 아름다움에 어찌 더 중하지 아니하겠는가? 그 몸을 깨끗이 하고 세속을 초월하여 산곡에 은거하여 아침저녁으로 세상을 조롱하여 남은 광풍을 좇아 끝 빛을 우러러보고 스스로 풍월의 낙을 얻었다고 하는 자로 더불어 가히 해를 같이 하여 말을 하지 못할[不可同年而語]104) 것이다. 내가 학식이 거칠어 진실로 족히 성대히 아름다움을 발양(發揚)하지 못하니 지금에 지은 자 구름으로 옷을 짓고 추수(秋水)를 갈기는 것과 같음이 바로 이런 것이다. 공이 다른 데 빌리지 않고 나에게 구하니 어찌 인척의 연고와 서로 잘 아는 사이가 깊은 것인가? 문득 내 글을 바탕으로 하여 당대의 성작(盛作)을 구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므로 사양하지 않는다. 창룡(蒼龍)105) 병인(세종 28. 1446) 봄 3월 영산 김수온(永山 金守溫)은 기하노라. 雙淸堂記(2)市津宋氏 士族也 至公年未冠 始筮仕遊朝 行數年 官不甚達 旣而退歸于懷川之別墅 大治第宅 餘三十年 懷之地 山高水深 土肥衍宜五穀 鋤耨以時 歲常稔穫 冠婚喪祭之用 裕如也 卽其東皐 別爲構屋爲楹凡若干 夏炎冬冷 各有攸處 塗墍丹雘 有輪有奐前柳楡後松竹 凡花卉植物之可玩者 亦且雜藝於階除庭戺之間 綠陰香霧空 掩靄 正統九年癸亥秋 樞府相公朴堧浴沂儒城 道經于此 遂以雙淸 名其堂 仍賦四言 安平大君 又從而和 甲子春 余丁先君憂來于楓川則公 致書曰相公 儒林之偉幹 朝著之儀形 而乃屈 賜之堂額 大君 紫雲英胄 朱邸天人 豈以草澤之名 得以上達而雍容穩藉 詠兩篇 圭璋燦爛 輝暎山谷 不惟吾一家子孫 永世之寶 盖將闔吾一邑山川草木之聳覩也 玆幸矣 子其文之而義無辭 余惟風月 天地間一長物也 今夫蓬然而起 驟然而散 周旋乎太虛 披拂乎六合 吹之而草木 偃 觸之而金石 鳴者 風也 其來也 固無時 然言風之好 必曰春者 以其和也 氷輪皎潔 桂影婆娑 出於東山之上 徘徊斗牛之間 川陸 爲之輝朗 物像 爲之凌亂者 月也 其照也 同乎四時 然言月之明 必曰秋者 以其淸也 是其耳得而爲聲 目寓而爲色 同一風而一月也 然隨人心之變 與其處之不同 則所以爲風月者 亦異 蓋公之制此堂也 疎其 故 風來而易爲淸 虛其 故 月出而易爲明 或被鶴或戴華陽 隱烏皮 散素髮 有風冷然 左右而至 侵我衣裳 凉我枕席 滌煩 於暫遇 懷爽塏之逸興 則雖淵明高臥者 亦無以過此矣 其或佳賓萃止 過客停 琴碁旣張 酒亦爵有 擧杯相屬 襟韻益淸 飄飄如遺世而獨立 御氣而遊汗漫 等萬事於浮雲 忘身世於渺然 則盈宇宙者 此風也而吹吾堂者益淸 明宇宙者 此月也而照黨堂者益淸 此公之所以自樂地者 而相公命名之意也 自有天地便有此風月而娛風月之樂者 亦不知其幾何 然或得於此而遺於彼 宋玉 作賦 極雄風之大 然不及三五揚明之說則專於風而失於月也 魏武詠歌 狀南飛之袞 然不知巽二鼓物之盛則偏於月而略於風也 蘇公赤壁之遊 庶幾兼二者之趣 然舟楫之危 不若堂陛之安夢鶴之怪 何有冊樽之樂則公之爲樂 不惟求之當世而罕儷 槪之古人 亦鮮其比矣 不寧惟是公 少謝簪笏 膏肓泉石 居常辭受取與之間 苟非道義 雖一毫而不苟 此心 超乎萬物之上 而不累一塵則是心迹之雙淸也 老母在堂 年俯八旬 蒼顔白髮 康强無恙 公 晨昏色養 萊衣舜慕惟日不足則是母子之雙淸也 公有二子 長曰繼祀 廉能致用 揚歷中外 岸然而功名自許 弟曰 繼中 英英武幹 補于黑衣 爲王侍坐 以特百夫則是昆季之雙淸也 盖公一家淸德 周流通徹 無間則其於綱常倫理之懿 豈不增重矣乎而 其與潔身高踏 枯槁山谷 嘲弄晨夕 追餘 仰末光自以爲得風月之樂者 不可同年而語矣 顧余學識荒落 固不足發揚盛美 當今作者如雲補荷裾而剪秋水皆是也 公 不寅於彼而求於余 豈以姻戚之故 相知之深歟 抑階吾文 以求當代之盛作也 是不讓云 蒼龍丙春三月永山金守溫記처사 쌍청당 송공묘표우리 공정 대왕(恭定大王)106)께서 다스리던 시대에 호서(湖西) 회덕에 숨은 군자가 있었으니 송유(宋愉)가 바로 그 분이다. 공(公)이 소년 때에 무(武)를 좋아하여 서울에 나그네 노릇을 하였으나 품계만 있고 실직이 없는 벼슬을 가졌었다. 뜻에 맞지 않아 드디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서 아름다운 덕[含章]107)을 가지고 스스로 곧은 지조를 지켜 일생을 마쳤다.고을 사람들이 그 품위[風誼]108)를 높여 이름을 부르지 않고 항상 쌍청당(雙淸堂)이라고 호를 불렀다. 58세가 되던 정통(正統) 병인년(丙寅 : 세종 28, 1446))에 본집에서 하세하였다. 장지는 현의 남쪽 판교리 임좌(壬坐)의 자리에 있다. 그 뒤 200여 년이 되어 그의 7세손인 지평(持平) 준길(浚吉)이 일가 노인들의 청으로 유행(遺行)109)을 기록하여 나에게 편지로 부탁하여 말하기를「선조 쌍청공 산소에 전에 표각(表刻)이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 되어 다 마멸되어서 다시 해 세우려 하니 명을 써 주시오. 선생도 또 송씨의 미생(彌甥)110)이 되니 삼가 부탁합니다.」라고 하였다. 상헌(尙憲)이 감히 사양할 수 없어서 가장에 의하여 서술한다.
處士雙淸堂宋公墓表蓋當我 恭定大王之世湖西之懷德縣有隱君子宋公諱愉始公少年喜武事游京都有官階已而 意不樂遂棄歸其鄕含章自貞以終其身鄕人高其風誼不稱其名而稱其號曰雙淸堂年五十八正統丙寅卒于家葬縣南板橋里負壬之原後二百餘祠七代孫持平浚吉以宗人耆老之請狀其遺行抵書屬尙憲曰先祖雙淸公墓舊有表刻歲久磨漶今將改竪宜有銘也子亦宋氏之彌甥謹以爲託尙憲不敢辭按狀曰公之先出恩津有諱大原高麗時爲判事三傳至明誼爲司憲執端淸裁直操爲圃隱諸賢所推重生諱克己進士是爲公之考母曰安人柳氏高興伯濬之女公生四歲而進士公見背安人父母憐其早寡欲奪志安人知其意身抱兒行數百里往依舅姑終以女節彤史公旣長器度豪爽名出等輩上內行純備柳夫人大秩强康公怡愉承奉備志物之養祭祀必致齋潔儀文悉用古制性愼取予一毫不苟嘗構一堂爲燕處之所卽所謂雙淸者也深衣幅巾焚香靜坐不以俗事經心惟松靑竹翠環之而已朴公彭年作記以美之一時名勝多酬唱之詠每遇良辰美景治酌命賓筆硯棋槊各隨所好以極眞率之趣鄕人莫不艶稱公配安人孫氏甚有婦德生二子曰繼祀判官 贈持平曰繼中司果傳至十代世益蕃衍內外子孫殆萬餘人賢臣正士譜牒相望何其盛歟公之隱德陰功蓄於躬而發於後者可見於此也諸宗姓合議置墓田十月上旬歲一祭之鳴呼以公之志之行嚮用於世比一時立功名享爵祿者未必居後也顧乃好遯丘園寬樂令終享有淸福傳誦至今其視嚮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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