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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송씨 상대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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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은진송씨의 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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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송씨의 분파(分派)1)지평공(持平公) 계사(繼祀)
부군 계사가 타계하자 집상을 하는데 슬픔을 다하였다. 큰 집안을 다스리면서 혼인을 할 때 다만 문벌만 가리고 부귀는 논하지 않았다. 천성이 엄숙하면서도 인자하며 집을 다스리는 데에 법도를 지켜 악착스럽게[規規] 하지 않아도 수만금의 재산을 쌓았다162). 그러면서도 결코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또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느 날 불교를 믿는 사람이 찾아와 부인에게 믿음을 권한 일이 있었다. 이 때 부인은“나에게는 다른 할 일이 전혀 없다. 다만 조상을 정성껏 섬기면서 우리 일가 중에서 외롭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아 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거절하였다. 1981년 대청호 담수이전에 문중어른들이 파악하고 있던 재산으로는 1) 동구 주산동 지평공 묘소 주변 30-50 정보 2) 동구 판암동 주변의 수십 정보 3) 동구 이사동 목사공 묘소 주변의 200여 정보 4) 사직공 계중 묘소와 정랑공 순년 묘소가 있는 경수(鏡水)와 사산(沙山) 일대의 수십 정보, 5) 송촌과 중리동 일대의 수십 정보와 유성 등에 있는 많은 산판 6) 주산동에서 정랑공 현손 추파 송기수가 10,000여 석을 했다는 이야기와 청풍공이 10,000여 석을 해서 노적가리가 마주보고 쌓여 있었다고 전해오는 이야기, 그리고 마산동의 동파공 여익의 묘소 주변의 산과 10,000여 석을 들고 있다[송성빈, 거주공간의 확보와 경제적 토대의 구축(송계사와 배위 순천김씨 부인)] 참조.
이때부터 대전광역시 동구 주산동 124번지에 묘소 아래 재사(齋舍)인〈주산병사(注山丙舍)〉를 두어 숙정(肅靜)히 제사를 받들어 왔는데 대청호 건설로 수몰되기에 이르러 1983년 4월부터 10개월간의 공사 끝에 주산동 산 9번지로 이건하였다166). 슬하에 상주목사(尙州牧使) 요년(遙年)과 예조정랑(禮曺正郞) 순년(順年)의 두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부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후손이 크게 번창하여 은진송씨의 대종을 이루었다.
先祖考 持平府君 墓表我宋著自判院事諱大原子得珠孫春卿皆知 郡事嶺南有一派其所記原作源而字川至官 恩津君珠作周而官舍人其是否未詳也曾孫 執端明誼玄孫進士克己其配節婦柳氏寔生雙淸公諱愉雙淸公早世其二子奉柳氏以終養長卽府君諱繼祀仕止判官贈持平配金氏墓 在左岡其表記頗詳惟府君表只有面額而已則其事行無由考焉然少可槪見者有焉金乖崖守溫記雙淸堂而因及府君曰廉能致用揚歷中外岸然以功名自許朴先生彭年之記亦自云府君末屬而長男遙年牧尙州時洪虛白貴達送之曰其先君通判尙州有遺愛尙之人沐浴先君之澤者莫不歡呼引領惟恐不疾其驅成慵齋俔銘其墓則亦推言府 君於尙有聲績所可稽徵者可謂信矣然亦止 此而已餘不可詳是可歡也惟子姓之繁殆不 可勝數略著於雙淸公墓碣此不復見舊表 就剝今易而新之而略記之如此今去府君 生年 永樂丁亥二百六十二歲爲 崇禎之著 雍涒灘也其四月朔日己巳七世孫時烈述七代孫 時烈 撰
공인김씨 묘표홍치(弘治) 신유 정월 기미에 사헌부지평(司憲府 持平) 송공(宋公) 계사(繼祀)의 부인 김씨가 병환으로 충청도 회덕현의 사제(私第)에서 서거하였다. 수가 95세다. 그의 장자 군자감정(軍資監正)170) 요년(遙年)의 서랑(壻郞)인 진원군(晉原君) 강공(姜公) 귀손(龜孫)이 부인의 여러 손자들로 더불어 장일(葬日)을 점쳐서 이해 3월 신유일(辛酉日)을 얻었고 장지를 점쳐서 회덕의 주산(注山)의 자리를 얻어서 예를 갖추어 장례를 지냈다.묘소는 지평(持平)의 바로 좌측에 있다. 생각건대 부인이 계통은 순천(順天府)에서 나왔다. 증조 태영(台泳)은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추증 받았다. 조부 수(陲)는 벼슬이 총제(摠制)171)다. 부친 종흥(宗興)은 벼슬이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172)다. 모친 유씨는 부윤(府尹) 호(滸)의 따님이다. 다 벼슬을 높이 한 이름 있는 씨족으로서 현철한 따님을 낳아서 명문의 배필이 되었다. 부인이 어려서부터 현숙하고 덕행이 있었으며 출가하여서는 한결같이「여칙(女則)」에 따랐으며 시부모 받드는 데 조심성 있게 하였다. 지평이 타계하자 집상하는 데 그 슬픔을 다하였다. 혼인할 때는 다만 그 문벌만 가리고 부귀는 논하지 않았다. 천성이 엄숙하면서도 인자하며 집을 다스리는데 법도를 지켜 악착스럽게 하지 않아도 수만금의 재산을 쌓았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또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혹 누가 불교를 권하면 반드시 이렇게 말했다. “부인은 다른 일이 없다. 일가들 중에서 외롭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아주면 된다.”그렇게 하여 항상 미치지 못하는 것같이 하였다. 아들 형제가 있었으니 감정(監正)과 그의 계씨 순년(順年)이 다 문과(文科)173)에 급제하였다.
恭人金氏 墓表維弘治辛酉正月己未司憲持平宋公諱繼祀之夫人金氏以疾卒于忠淸道懷德縣之私第享年九十五其長子軍資監正遙年之女壻晋原君姜公龜孫與夫人之諸孫卜葬日得是年三月辛酉卜地得懷之注山原以禮窆之兆在持平塋左謹按夫人系出順天府曾祖諱台泳贈兵曹判書祖諱陲摠制考曰宗興判典農寺事妣曰柳氏府君滸之女俱以簪纓顯族克生賢女以配名家夫人幼有淑德旣嬪循循然秉女則奉舅姑唯謹持平之歿執喪盡其哀議婚媾但擇門地不較富貴天性嚴恕居家 有法度雖不 産業而 財累鉅萬然不喜紛華又不喜浮屠法人有勸之者必曰婦人無外事惟 賑業宗族之孤窮者恒若不及有二子監正與其季順年俱捷文科季官至禮曺正郞皆先逝監正生二男一女長汝霖中進士爲高山縣監是主喪位次汝楫女壻卽晋原公方以宏材厚德彌綸輔弼爲六卿長正郞生三男二女長汝諧中文科爲中樞府都事次汝翼進士次汝礪生員女長適弘文校理朴季幹次適司藝鄭光弼縣監有八男曰世勛世勣世勘餘幼都事有男曰世忠世良皆進士其餘內外曾玄孫摠四十餘人其長者咸決科揚名幼者亦皆好讀書不怠以世其業旣壽而富且貴又多賢子孫天道福善信於是而可徵也旣襄事晋原公以渾爲郞屬也命誌其碣辭不獲而復之云吏曺正郞 姜渾 撰
恭人金氏 墓表追記右我先祖 墓表燕山辛酉所竪而木溪判中樞姜公渾之文也禦侮將軍朴公耕之書也歲久剝 殆不可讀不肖忝叨公員之任與闔宗商議今將易新之噫姜公之揄揚潛德足以垂百世而不朽矣何敢復贅 後四百六十九年己酉十月 日 改竪 十六代孫 廷淳 撰
司直公繼中墓表我宋之貫恩津者 皆出高麗判院事諱大原而五傳至雙淸堂諱愉始著顯爲東方氏族之望雙淸 堂第二子繼中以武筮仕爲司直墓在淸州周岸面沙峴卯坐原配恭人權氏墓在其後而尙無刻 今年丁酉諸雲仍始鳩功表其阡屬近洙識之今距公之四百餘年文獻無傳竝與生卒年月不能記況其他事行乎然尙有槪見者乖崖金公作雙淸堂記而曰公有二子次某英英武幹補于黑衣爲王侍臣以特百夫所可稽徵者如此揭之堂璧載之輿覽爲世所誦皆知吾宋之有公此已足矣何必疊架只題面額 後來人知斯邱之爲公四尺之封而毋或踐壤可也權氏籍安東副提學遇女有二子二女眉年官司宰監主簿胡年階將仕郞女適生員洪湘生員鄭 主簿公之孫世欽以學行除參奉不就其玄孫時端受業于尤庵文正公贈參判將仕郞公之曾孫義壽以內禁將殉于壬辰禮壽以司果戰歾于丙子贈副正其最著而至今十五六世勝冠者殆百餘人俱在譜乘竝不詳錄今此樹經之役實累世未遑之擧而莫不奔走效力克底于成事甚盛矣其終始尸之者十四代孫欽台也略其顚末來謁余文者十四代孫欽珏十五代孫光洙也傍後裔 立齋 近洙 撰
墓表追記(2)公 諱 繼中 官司直 以英傑武稱 墓元在淸州 沙峴獨山卯坐原 配恭人安東權氏 兆祔後 五百餘 天何降割 以大淸湛水 陵谷懷襄 塋域浸水 其後孫 痛恨之情 當如何哉 壬戌春 緬奉于舊兆後 竝遷 焉 舊有表焉 宋文獻公近洙撰 今具小石 命余追識其遷葬事實云 公之長男 主簿眉年 及配宜人安東權氏 兆亦緬奉于舊兆後上 卯坐原 壬戌 二月 日 傍後孫 宋廷憲謹撰 傍後孫 宋鎭道謹書
府君께서 考終于侵188)하시어 묘소를 옛 地名‘淸州周岸面沙店里卯坐原에 配恭人安東權氏後坐’에 安葬하여 달라고 碑文에 表記되어 있으나 大淸湖 建設로 因하여 1978년 司直公 宗山인 大田廣域市東區沙城洞91번지 配 左 卯坐原에 緬禮하여 모셨다. 그 후 2003년도 子孫들이 合心하여 그 精誠으로 1,000m 距離의 山을 切土하는 大工事를 施工하여 墓道를 車輛이 往來할 수 있도록 新設하고 山所에 府君의 品階에 어울리는 石燈을 奠石하였다. 또한 墓域을 擴張하고 山所前景을‘府君의 靈魂께서 大淸湖의 푸른 물결을 내려보실 수 있도록’治山事業을 施行하고 그 來歷과 獻金한 子孫을 石刻하여 墓所 옆에 세웠다. 그리고 府君의 옛 子孫들께서 손에 못이 박히도록 直接 負役하여 齋室 10間이 府君의 山所 附近에 建築되어 있었으나 水沒危機에 處하게 되어 急히 본체만을 大田廣域市 東區 沙城洞105~3番地 司直公宗中土地에 移築하였으며 齋室 入口에서 右側에 管理人 居所를 新築하고 옛 懸板을 原文과 같이 考證에 의하여 復元製作하여 大門 위에 걸었다. 短文이나宗中의 勸告를 辭讓치 못하고 敢히 銘을 여기에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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