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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송씨 상대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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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회덕에 터를 잡은 집단공과 그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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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덕에 터를 잡은 집단공(執端公)과 그 형제1)평산공 사민(平山公 斯敏)
4세는 사민(斯敏)과 명의(明誼)의 형제가 있다. 그런데 오랫동안 별보로 있던 영천공파가 최근에 입파하여 그동안 파계도에만 있던 호(昈)가 4세이니까 3형제가 되는 셈이다.
사민은 춘경의 맏아들로 고려 공민왕 때 벼슬길에 올라 통정대부(通政大夫)7) 평산도호부사(平山都護府使)8)를 지냈다. 묘표(墓表)에 따르면 그는“고려 공민왕 때 자라고 벼슬길에 올라 조선이 건국한 뒤에도 태종 13년까지 왕을 섬겼으니 역임한 벼슬에 있어서는 그 본말의 사실이 말할 것이 많으리라 생각되나 상세히 알 수 없으니 통탄할 노릇이다.”라고 하였다.
어찌 족보의 어긋나고 그릇된 것이 있어 그러함일까?(執端府君 實平山府君之 弟以正郞府君卽執端府君之玄孫也譜 云 平山府君 以正郞某 其昭穆之相m違 時序之相違 如此 而譜之所錄 如此 殊不可曉 豈譜有舛誤而然也)
1664년(현종 5) 3월에 우암 시열이 글을 짓고 동춘당 준길이 글을 쓴 묘표를 세웠으나 230여 년이 지남에 훼손이 심하고 상석등도 마멸되어 1984년(甲子) 6월 28일〈재경은진송씨종친회〉에서 그의〈묘소위선사업추진위원회〉를 설립하고 성금으로 옛 비문을 그대로 탁본 확대하여 석물을 다시 세웠다. 1954년 10월 준공되어 종친회 후손들이 고유문(告由文)을 지어 부군에게 고했다.1955년 10월 묘소를 사초(莎草)할 때 발견된 옛 비석은 은진송씨 문중에서 가장 오래된 비로 추정되며, 부군의 배위가 영인 안씨(令人 安氏)라는 사실도 이 비에 따라 확인되었다.
평산부군 휘 사민 묘표송씨가 은진송씨로서 족보를 가진 것은 판원사(判院事) 대원(大原)으로부터 시작된다. 득주(得珠), 춘경(春卿)의 두 군사를 거쳐서 부군에 이르렀다. 부군의 이름은 사민(斯敏)이니 벼슬은 통정대부(通政大夫) 평산 도호부사(平山 都護府使)다. 계씨는 이름이 명의(明誼)고 벼슬이 사헌부 집단(司憲府 執端)12)이다. 고려 말에 이름이 있었다. 부군이 집단공의 현손(玄孫)인 정랑(正郞) 순년(順年)을 후사(後嗣)로 삼았다. 부사(府使) 여해(汝諧), 진사(進士) 여익(汝翼), 생원(生員) 여려(汝礪)는 그 어른의 자제들이고, 의정(議政) 정광필(鄭光弼), 교리(校理) 박계간(朴季幹)은 그 어른의 사위들이다. 교리(校理) 세충(世忠), 참봉(參奉) 세량(世良), 진사(進士) 세일(世一), 현감(縣監) 세평(世平)은손자들이고, 참찬(參贊) 기수(麒壽), 봉사(奉事) 귀수(龜壽), 문충공(文忠公) 인수(麟壽),사의(司議) 봉수(鳳壽), 억달(億達) 등은 증손들이다.대사간(大司諫) 응개(應漑), 목사(牧使) 응형(應泂), 부제학(副提學) 응순(應洵), 도사(都事) 응기(應期), 현감(縣監) 응광(應光), 응경(應慶), 응학(應鶴), 응란(應鸞), 응종(應宗)에 이르러서는 세대가 한 대 더 멀어져서 현손이 된다. 부군의 신주를 조천하여 묘소에 매안하였으니 묘소는 양주 외서산 마산(楊洲 外西山 馬山)에 있다. 만력(萬曆)13) 을사(乙巳, 1605년)에 제학공(提學公)이 그의 자부를 그 아래 장례하고 고유문을 지어서 부군에게 고하였다. 외손 한씨(韓氏)도 따라서 그 자리를 썼다. 숭정(崇禎)14)임인(壬寅, 1662년)에 종손(宗孫) 도흥(道興)이 일가 시도(時燾) 시걸(時杰)등을 이끌고 묘소 지역을 수리하고 또 비를 세울 것을 상의하였다. 대개 부군이 위로는 집단공의 백씨가 되고, 아래로는 정랑공(正郞公)을 사손으로 삼았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자라서 우리 태종[朝鮮朝의 太宗] 13년까지 섬겼으니 역임한 벼슬에 있어서는 그 본말의 사실이 말할 것이 많으리라고 생각되나 상세히 알 수 없으니 통탄할 노릇이다. 전하는 말로써 징빙할 수 있는 것은 우리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매 부군이 송도에서 집을 헐어다가 서울 반송방(盤松坊) 유점리(鍮店里)에 이건(移建)하였다. 가정(嘉靖)15)경자(庚子, 1540년)에 참찬공이 그 집을 중건(重建)하였는데 들보 하나만 전의 것이었다고 한다. 공의 손자 판결사 석조(判決事 碩祚)가 젊어서, 채색한 흔적을 고치지 않은 것을 보았는데 임진란에 불타버렸다. 그 옛 집터[舊址]를 도흥(道興)과 도사공의 증손 기륭(基隆)이 나누어 가지고 있다. 도사공이 증직이 찬성(贊成)인 갑조(甲祚)를 낳았다. 지금 묘표를 짓는 사람은 그의 아들 시열(時烈)이고 쓰는 사람은 집단공(執端公)의 9세손 준길(浚吉)이다. 때는 숭정 갑진(崇禎 甲辰 1664) 3월이다. 10대손 좌찬성(左贊成) 시열(時烈) 지음 平山府君 諱 斯敏 墓表宋氏譜恩津者起自判院事大原歷得珠春卿二郡事以至府君府君諱斯敏官至通政平山都護府使弟曰執端明誼有名高麗季府君以執端公玄孫正郞順年爲嗣府使汝諧進士汝翼生員汝礪議政鄭光弼校理朴季幹是其子壻郡守世忠參奉世良進士世一縣監世平是其孫參贊麒壽奉事龜壽文忠麟壽司議鳳壽億達是其曾孫至大司諫應漑牧使應泂副提學應洵都事應期縣監應光應慶應鶴應鸞應宗則世益遠也府君神主遷 墓所墓在楊州外西山馬山原 萬曆乙巳提學公葬其子婦于其下爲文以告府君外裔韓氏亦從葬焉 崇禎壬寅宗孫道興率宗人時燾時杰等修治兆域復議建石焉盖府君上位執端公兄下以正郞公爲嗣長乎恭愍王朝爲我 太宗十三年所置官則其原委事實必多有可言者而皆不能詳可歎也已其傳言而可徵者我 太祖定都漢陽府君自松京撤屋移構于盤松坊鍮店里 嘉靖庚子參贊公重建其屋而其一長樑仍舊焉公之孫判決事碩祚少日猶見其采痕不改至壬辰兵火時 焉今分主鍮店舊址者道興及都事公曾孫基隆也都事生贈贊成甲祚今記此者其男時烈也書之者執端公九世孫浚吉也其時崇禎甲辰三月日也 十代孫 左贊成 時烈 撰
2) 집단공(執端公) 명의(明誼)4세 명의(明誼)의 자는 의지(宜之)이고 호는 건재(乾齋)이다. 고려 공민왕 때 과거에 올라 벼슬이 사헌부 집단(司憲府 執端)의 벼슬까지 올라 집단공이라 부른다.1362년(공민왕 11)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으로 안동으로 몽진을 했다가 개성으로 환도하는 길에 청주 공북루(拱北樓)에서 1362년(공민왕 11)에 시행한 정시(庭試)의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이때의 문과방목이『은진송씨족보 2권보』에 실려 있는데 그와 함께 합격하였던 동년(同年)은 모두 33명으로 박실(朴實), 이숭인(李崇仁), 김도(金濤), 강호문(姜好文), 김문현(金文鉉), 정도전(鄭道傳), 설장수(薛長壽), 한리(韓理) 등 여말 선초의 유명한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과거에서 동년은 형제와 같았다. 따라서 그도 자신의 동년들과 친밀히 교류하였음은 물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 반남(潘南) 박상충(朴尙衷) 등 당시에 여러 어진 선비들과도 더불어 벗하며 지냈다. 이는 공께서 진작부터 맑은 품재(品才)와 곧은 지조를 지녔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공께서 사귄 인물들은 여말 성리학을 사상적 이념으로 받아들인 신진사류들인 것이다. 뒤에 덕망이 더욱 높아지면서 1369년(공민왕 18) 형조(刑曹)에 딸린 관청으로 노비의 부적과 소송에 대한 일을 맡아보는 도관 정랑(都官 正郞)에 이르렀고, 이어 지방 장관인 경상도 안렴사(慶尙道(嶠南) 按廉使)를 거친 뒤 사헌부 집단(司憲府 執端)을 역임하였다. 집단공이 부임지로 떠날 때는 정몽주,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등 여러 명사들이 시를 지어 송별하였고 목은 이색은 조정에서 항상 인사를 중히 하는 것은 그러한 사람이 아니면 적임자가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큰 물고기를 놓아주면 큰 바다에서 받아들일 것이며, 옷 솜씨가 좋지 못하면 비단이 아까울 것이다. 그런즉 이 사람에게 이 경상도가 서로 합당하다 일컫지 아니하겠는가? 라고 그의 인물됨을 평하는 서문을 지어 송별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어지러운 고려 말기이었기 때문에 많은 선비들이 관직의 명성을 떨쳐버리고 스스로 은거하려는 때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도 사헌부 집단의 벼슬자리를 버리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다16)고 전하지만 확실치 않고 회덕으로 은거한 것은 사실이다. 집단공께서 회덕에 은거하게 된 것은 회덕이 바로 처향(妻鄕)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배위는 당대의 명문세족(名門世族) 회덕황씨(懷德黃氏) 수(粹)의 딸이었다. 회덕황씨는 고려조에 지문성부사(知文成府使)를 지내고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회천군(懷川君)에 봉군(封君)된 황윤보(黃允寶)가 처음으로 회덕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 했다. 2세 황연기(黃衍記)는 고려조에 하선대부 병부전서(賀善大夫 兵部典書)17)를 지고 조선조에 이르러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집단공 명의의 장인은 황연기의 넷째아들로 고려조에 수안군사(遂安郡事)를 지내고 조선조에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보문각대제학(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寶文閣 大提學)에 증직된 수(粹)이다. 고려가 패망하고 조선이 건국될 때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고려의 충신으로 절의를 지키며 항거하다가 고향에 은거하며 산수를 즐기고 벗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러면서 수만금의 재산을 가지고 선친이 운영하던 미륵원을 호조참의를 지낸 큰형 황정(黃精), 둘째 형 황립(黃粒), 셋째형 황종(黃粽)의 세 형과 함께 대를 이어 운영하면서 사회봉사에 힘썼다. 하지만 둘째와 셋째 형은 일찍이 타계하였기 때문에 결국 그 미륵원은 자신이 운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수(粹)의 아들 4세 혜의공(惠懿公) 자후(子厚)는 고려 때부터 음보(蔭補)18)로 벼슬길에 올라 조선 태조, 정종, 태조, 태종의 4대에 걸쳐 형조, 호조, 중추원, 개성유수(開城留守)등 내 외직에 고루 등용되어 정2품의 고위관직에 오름으로써 진충보국(盡忠報國)하였다. 또한 태종의 11번째 따님인 숙안옹주(淑安翁主)를 며느리로 맞아 아들 유(裕)가 태종의 부마가 되었다.
집단공이 이러한 가문의 사위로 회덕 땅에 정착한 곳은 토물[土井]인데 지금은 대청댐 건설로 수몰된 대전시 동구 신촌리에 속한 마을이었다.
대체로 한 가문이 특정 지역에 입향(入鄕)하게 되는 동기는 특별한 경우도 있지만 처변(妻邊)이나 외변(外邊)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왜냐하면 조선 중기 이전에는 남녀구별이 없이 동일하게 재산을 나누었기[分財] 때문에 대부분의 가문에서는 넉넉한 처가의 재산을 분재 받아 그 고을로 입향을 하였던 것이다. 집단 명의도 이와 같은 인연으로 이곳에 입향한 것은 사실이지만, 공은 단순히 처가의 재산 때문에 내려온 것만이 아니라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節義)를 지키기 위함도 있었을 것이다.
은진송씨가 대전의 일원에 뿌리를 내리고 살게 된 것은 바로 집단 명의가 이곳에 살면서부터이다. 뒷날 그 내외의 묘소를 잃어버려, 살던 땅 신촌동의 토물 고개에다 1835년(헌종 1)에 14대손 목사공파 기정(基鼎)이 비문을 짓고 써서 작은 유허비를 세웠다(회덕황씨 가문에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유허비를 세우기 전에 그 자리에는 황씨부인의 행적이 새겨진 낡은 비가 있었는데 유허비를 세울 때 땅에 묻었다고 한다.). 비를 세운 뒤 처음의 비문과 나주공 정희가 추기한 비문을 면로께서 써서 세웠다.(1873) 그러나 이 유허비는 글자 획이 분명치 못하고 비문에 하자가 있다고 하여, 3년 뒤 1876(고종 13)년에 17대손 팽로 흠태가 감독하여 다른 돌에다 새겼다. 그 유허비는 대청댐 축조로 인한 수몰에 따라 1980년 관동묘려(寬洞墓廬)와 추원사(追遠祠) 동쪽 옆으로 옮겨, 비각 옆에 정헌(廷憲)이 「이건사실기(移建事實記)」를 다시 써서 세웠다. 유허비와 추원사 사이에는 1985년(단기 4318) 3월에 시멘트로 된 아담한 다리를 놓고 성행교(省行橋)라 이름을 붙였다. 진작부터 류조비의 묘소가 있고 집단공의 유허비가 옮겨 세워진 곳은 마산(말미), 은골, 관동(寬洞)의 세 가지 이름으로 불려왔는데, 원래 이곳 마을은 말처럼 생긴 산 밑에 있다고 하여 말뫼(말=馬, 뫼=山)에서 변하여 <말미>로 불러오다가 집단공이 이곳의 바로 아래 마을 토물에 숨어 살았기 때문에 숨어 산 골짜기 즉, 은골(隱谷) 혹은 은동(隱洞)이라는 이름이 추가되었고, 그 뒤 유조비의 관을 모신 곳이기 때문에 관동(棺洞)이라 하던 것이 관동(寬洞)으로 바뀌어 마을 이름이 또 하나 보태어진 것이다. 이렇듯 집단공이 숨어서 산 이 마을은 뜻 깊은 내력을 지닌 채 오늘도 대청호의 맑은물과 산소 유허비 언저리의 푸른 솔이 조화를 이루면서 은진송씨의 자손들에게 맑고 곧은 그 뜻을 이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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